2004년 12월호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 앞둔 위기의 보험업계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일정 연기, 대상 축소 총력전 돌입

  • 글: 박태준 서울경제신문 금융부 기자 june@sed.co.kr

    입력2004-11-24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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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동차보험의 은행 판매 허용을 골자로 하는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을 앞두고 보험업계와 은행권이 극한 대립하고 있다. 실직 위기에 처한 보험설계사들이 거리로 나선 가운데 보험업계는 ‘연기’를, 은행권은 ‘강행’을 고집한다. 전문가들은 1단계 시행 과정에서 나타난 부작용의 보완책 마련이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 앞둔 위기의 보험업계

    보험업계는 내년 4월로 예정된 방카슈랑스 2단계 확대시행 일정이 강행될 경우 20만명에 이르는 생명보험 설계사 중 절반이 실직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말 국회의사당 앞. 전국손해보험노조 소속 노조원이 ‘소비자가 봉이냐’ ‘은행만 살판났다’ 등의 원색적 구호가 담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 5일간 계속된 1인 시위는 방카슈랑스 확대 시행에 반대하는 보험업계의 첫 번째 실력 행사였다.

    이어 9월14일 같은 장소. 이번에는 손해보험 대리점 대표와 설계사 6000여명이 모여 “자동차보험 및 보장성보험의 방카슈랑스 영업 계획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정경제부에 대한 국정감사가 열린 과천 정부청사 앞에는 무려 2만명의 생명보험 설계사와 노조원들이 집결했다. 이들은 “2단계 방카슈랑스가 확대 시행될 경우 20만명에 달하는 생명보험 설계사 중 절반이 실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카슈랑스는 은행 등 금융회사 창구에서 보험상품을 판매하게 함으로써 금융업종간 겸업화와 상호 영역 철폐를 유도하는 선진 금융제도. 보험업법 개정으로 방카슈랑스는 이미 지난해 9월부터 시행됐다. 다만 보험업법 시행령에 따라 아직까지는 저축·연금보험 등 1단계 상품만이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보험업계는 내년 4월부터 실시될 예정인 2단계 방카슈랑스, 즉 자동차보험과 보장성보험의 은행 판매만큼은 연기 또는 철회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반면 은행권은 1단계 방카슈랑스에서 나타난 일부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한 후 예정대로 확대 시행한다는 입장이다. 주무 부처인 재경부 역시 예정대로 시행한다는 당초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 보험사와 은행측의 줄다리기. 이렇게 양보와 타협 없이 반복되는 논쟁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보험업계는 불과 1년6개월 전 국무회의를 통과한 보험업법 시행령을 고쳐달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요구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정이 절박하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반면 은행권은 방카슈랑스 도입에 따른 원스톱 쇼핑이나 저렴한 보험료와 같은 소비자의 편익을 강조한다. 물론 ‘보험’이라는 새로운 수익원에 대한 기대감도 감추지 않고 있다.

    지난 10월12일 열린 재정경제부에 대한 국정감사 현장. 열린우리당 전병헌 의원은 “방카슈랑스 도입 초기에 은행들은 보험료가 15% 정도 낮아진다고 강조했으나 인하효과가 전혀 없었다”면서 “방카슈랑스를 시행한 은행들은 사업비를 보험사에 넘기거나 막대한 수수료를 강요하고, 기업고객 등에 대출상품과 끼워 파는 ‘신종 꺾기’ 등 부작용만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채수찬 의원 역시 “은행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서 불공정 행위를 하고 있다”며 “꺾기 등 불공정 관행을 방지하기 위해 실효성 있는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도 “방카슈랑스가 ‘은행에 의한, 은행을 위한 제도’로 전락해 개인 저축성 보험의 방카슈랑스 판매비중이 64.9%를 차지했고 과도한 수수료로 인해 보험료 인하효과도 미미하다”고 주장했다. 여·야 의원들이 방카슈랑스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모처럼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방카슈랑스는 도입된 지 1년여에 불과하지만 그 부작용이 다양하고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폐해는 바로 ‘보험 꺾기’. 과거 은행에서 대출을 이유로 예금을 강요하던 구습이 예금 가입 대신 보험 가입이라는 형태로 부활한 것이다.

    주택담보대출을 받기 위해 G은행을 찾은 H씨는 대출계 직원의 집요한 보험가입 권유를 받아 결국 청약서를 작성한 후 은행문을 나섰다. H씨는 마지못해 보험 가입 의사를 밝혔는데, 은행 직원의 “얼마짜리로 드실 건가요?”라는 말에 더욱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H씨는 “상품에 대한 설명도 없이 그렇게 대충 보험상품을 팔아도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은행연합회와 생·손보협회가 지난 7월21일부터 한 달간 전국 주요 도시 거주자 중 방카슈랑스 보험 가입자 9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방카슈랑스 소비자만족도’ 조사결과에 따르면 은행 대출과정에서 보험 가입을 권유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14.6%를 차지했다.

    중소기업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A씨는 올해 초 급하게 사업자금이 필요해 평소 거래하던 B은행의 대출 담당자를 찾았다. 대출상담은 원만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막판에 돌발변수가 생겼다. 대출 담당자가 ‘보험판매 캠페인 기간’이라며 보험 가입을 부탁하고 나선 것이다.

    A씨는 회사운영이 어려워 거절하려 했지만, 대출이 무산될 것을 우려해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 명의로 월 보험료 100만원짜리 저축성보험에 가입했다. 그러나 당초 계획에 없던 상태에서 보험에 가입한 데다 회사 자금사정도 여의치 않아 A씨는 최근 보험료 납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보험금을 내지 않아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기존 불입금을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열린우리당 김영춘 의원이 지난 10월 200여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중소기업 금융애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방카슈랑스 제도와 관련,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보험가입을 권유 받은 경험이 있는 중소기업은 73.4%로 나타났다.

    보험업계가 ‘방카슈랑스 무용론’을 주장하는 또 한 가지 근거는 당초 방카슈랑스 도입 당시 기대했던 보험료 인하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도 내부 분석자료를 통해 “방카슈랑스 전용 연금보험은 3.7%, 저축성보험은 4.3%의 보험료 인하효과를 기대했으나 실제 인하율은 연금보험 2.8%, 저축성보험 2.5%에 그쳤다”고 평가했다. 그나마 이 정도의 보험료 인하 효과가 나타난 것도 인지도가 낮은 중소형 보험사들이 보험료를 대폭 인하했기 때문이다. 대형 보험사와 외국사는 거의 보험료를 내리지 않았다.

    보험료 인하효과 작아

    보험업계는 은행권의 무리한 수수료 요구 때문에 보험료를 떨어뜨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방카슈랑스 도입 이전 보험설계사들이 보험판매 대가로 받던 돈보다 은행측이 챙기는 수수료가 더 많다는 얘기다. 생명보험협회는 고객이 매달 20만원씩 20년 동안 총 4800만원의 보험료를 내는 연금보험 계약을 체결했을 때 설계사는 69만원 가량의 수수료를 받는 반면 은행은 87만~104만원을 가져간다는 자료를 공개하기도 했다.

    보험개발원 오영수 보험연구소장은 “보험상품의 판매에 실제로 소요되는 비용을 정확하게 산출해 기존 판매채널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든다면 은행 스스로 적정한 수준으로 수수료율을 낮춰 보험료를 인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소수의 보험사 상품 중 은행의 이익에만 부합하는 상품을 권유하기 보다는 고객의 입장에서 보다 다양한 상품을 비교해 권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보험 꺾기가 성행하고 보험료 인하효과가 미미하다는 이유만으로 보험업계가 방카슈랑스 확대 시행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가 방카슈랑스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부작용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보험업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정작 보험업계의 위기감은 방카슈랑스로 인해 보험영업의 핵심 축인 설계사와 대리점 조직이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된다.

    서강대 최정호 교수(경영학)는 “은행들이 전국 지점망을 활용해 보험상품 판매 공세를 편다면 상대적으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한 보험사의 경우 설계사의 대량실직 등 모집조직의 붕괴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방카슈랑스 2단계 상품에 포함된 보장성보험과 자동차보험은 생·손보 설계사와 대리점 수입의 70%를 차지하는 ‘밥줄’과 같은 상품이다. 이런 상품을 은행에 뺏길 경우 그 후에 벌어질 상황은 불 보듯 뻔하다. 생명보험업계는 방카슈랑스가 확대 시행되면 1년 안에 은행권이 보장성보험 시장의 50%를 잠식해 현재 20만여명에 달하는 설계사 중 3만여명이 이탈하고 7년 후인 2011년에는 설계사의 수가 현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만5000여명으로 급감할 것으로 내다봤다. 손해보험업계 역시 단시일에 자동차보험시장의 35%가 은행에 잠식돼 11만명에 달하는 설계사 중 3만명 안팎의 실직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설계사 조직의 붕괴는 가뜩이나 취약한 경제상황에서 ‘실업자 양산’이라는 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보험업계의 우려다. 하지만 보험업계가 더욱 걱정하는 것은 충성도 높은 영업조직을 잃게 된 보험사가 ‘은행에 종속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제조업체가 자체 영업조직 없이 대형 유통업체에만 판매를 의존할 경우 수수료 결정부터 상품개발, 제품 결함에 대한 보수까지 모든 과정에서 대형 유통업체의 통제를 받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 앞둔 위기의 보험업계

    은행권은 ‘방카슈랑스는 은행과 보험사, 고객이 모두 이익을 얻는 게임’이라며 2단계 확대시행은 예정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묵 삼성금융연구소 정책연구실장은 “은행을 통한 보험 판매가 늘어나면 기존의 판매 채널인 설계사 조직이 와해돼 결국은 보험사가 은행이라는 판매채널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은행이 직접 보험업에 나설 경우 상당수 보험사가 도태돼 보험업 자체가 은행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차라리 ‘은행 보험사업부’로”

    또 보험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금융시장의 불공정한 룰이 보험산업의 종속현상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 불가’라는 정부 정책에 따라 보험사의 은행업 진출이 사실상 봉쇄된 상태에서 보험사와 은행의 방카슈랑스 협상은 일방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실장은 “보험사가 은행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현상은 보험회사가 은행을 설립하거나 인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우리나라의 특수한 경쟁환경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은행에의 종속’을 넘어 아예 존립 자체를 우려하는 보험사들도 있다. 시중은행과 방카슈랑스 제휴조차 체결하지 못한 중소형 업체들이다. 중소형 손보사의 한 관계자는 “직원들끼리 차라리 은행의 ‘보험사업부’로 편입되는 게 낫다는 얘기를 주고받은 적도 있다”고 전했다. 중소형 보험사들의 경우 방카슈랑스 확대 시행 후 회사의 생존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손해보험업계의 경우 삼성·현대·동부·LG·동양화재 등 상위 5개사는 모두 10여개가 넘는 은행과 방카슈랑스 제휴를 맺은 반면 나머지 하위사들은 제휴은행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생명보험업계도 삼성·대한·교보생명 등 ‘빅3’는 모두 10개 이상의 은행과 제휴를 맺었지만 중소형사는 3~5개 은행과 계약을 맺는 데 그쳤다.

    세종대 이순재 교수(경영회계학)는 “방카슈랑스 확대 시행 후 중소형 보험사들이 부실화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제휴 계약을 맺지 못한 보험사들의 매출 감소와 지급여력비율 하락 등 부실화가 지속되면 결국은 은행이나 다른 보험사로 흡수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소형 보험사의 연쇄도산은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요구한다. 지난 2001년 정부는 주인이 바뀐 국제화재(현 그린화재)에 739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대한화재에도 509억원을 쏟아부었다. 또 손보업계 최하위사로, 파산한 후 2002년 계약이 상위 5개사로 이전된 리젠트화재에는 1800억원의 공적자금이 사용됐다.

    전주대 김종국 교수(경영학)는 “방카슈랑스 확대 시행으로 보험산업이 붕괴되면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할 것”이라며 “보험사의 연쇄도산과 거액의 공적자금 투입은 경제대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보험업계의 이러한 공세에 대해 은행권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은행권 주장의 요지는 “보험업계가 주장하는 방카슈랑스의 부작용이 시행한 지 1년밖에 안 된 법을 개정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카슈랑스 확대시행 철회를 촉구하는 보험업계의 목소리가 높던 지난 9월16일 은행 방카슈랑스 담당 임원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2단계 방카슈랑스는 예정대로 시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전국은행연합회 강봉희 상무는 “방카슈랑스는 은행과 보험사, 고객이 모두 이익을 얻는 ‘트리플 윈’ 게임”이라며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이 예정대로 진행돼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 은행권은 이날 보험업계가 한 방카슈랑스의 부작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보험 꺾기와 관련해 “제도 시행 초기 은행이 대출상품 판매를 위해 판촉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대출을 조건으로 보험상품을 판매한 사례가 일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그러나 은행의 우월적 지위 남용에 대해서는 금융당국이 감독을 강화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관계자는 “보험회사에 대한 우월적 지위 남용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체 교육 및 검사 등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15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설계사의 대량 실직에 대해서도 은행권은 강경한 입장이다. 강 상무는 “우리나라에 방카슈랑스가 도입된 것은 보험사업이 모집조직 중심으로 발달하다 보니 효율성이 떨어지고 소비자들이 비싼 보험료를 부담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15년 동안 이런 논의가 계속돼왔는데 이제 와서 설계사 조직 와해를 이유로 방카슈랑스를 연기하거나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또 보험료 인하효과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 은행권은 2단계 허용 상품에선 보험료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대응하고 있다. 모 대형 은행의 방카슈랑스 팀장은 “모집수수료 이외에 계약유지와 보험료 수금에 들어가는 경비 등을 줄이면 2단계 방카슈랑스 상품의 보험료는 충분히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자동차보험 역시 기존 상품과 온라인 상품의 중간 정도인 7~8%대의 가격 인하가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방카슈랑스 강행을 위한 은행권의 행보는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다. 은행연합회는 11월4일 ‘방카슈랑스에 대한 오해 관련 은행의 해명’이라는 자료를 내고 보험업계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나섰다. 은행연합회는 “방카슈랑스 시행 이후 생·손보업계 모두 모집인 수가 늘어났다”면서 “인터넷 보험이 등장했을 때도 대량 실업사태가 예상됐으나 모집인이 오히려 증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방카슈랑스 2단계를 실시해도 실직현상이 심각한 수준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중소형 보험사의 열악한 손익구조와 낮은 지급여력비율은 방카슈랑스 도입 이전부터 지속되어온 문제로 방카슈랑스로 인한 것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도 여전히 은행권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10월12일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일정을 확정해 발표한 것을 놓고 시행결과나 문제점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면서 “금융감독위원회를 통해 1단계 시행의 문제점을 조사·점검해 2단계 시행 때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방카슈랑스 시행이 1년 남짓이어서 아이로 치면 한 살밖에 안 됐는데, 지금 실패를 논하는 것은 무리다. 적어도 열 살은 돼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은행과 보험업계의 첨예한 대립 양상이 몇 달째 계속되면서 금융전문가들의 관심은 자연히 방카슈랑스가 태동한 유럽 금융시장과 1990년대 초반에 이를 도입한 미국, 그리고 몇 년 전 우리와 비슷한 진통을 겪은 일본에 쏠리고 있다. 해외 금융시장에서는 어떤 절차를 거쳐 방카슈랑스가 정착됐는지 짚어보면 우리 금융계도 갈등을 해소할 합리적인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프랑스 지방은행에서 탄생

    1970년대 초 프랑스 지방은행인 크레디 뮈티엘 은행은 금융분야의 사업다각화를 위해 자회사로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를 설립한다. 이를 시작으로 프랑스 은행들은 경쟁적으로 보험 자회사를 설립해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나섰다. 같은 시기 크레디 아그리콜 은행은 보험상품을 직접 창구에서 판매하기 시작했고 1986년 프레디카라는 생명보험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보험상품의 은행판매’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융서비스가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방카슈랑스(Bancassurance)가’ 프랑스어 ‘은행(Banque)’과 ‘보험(assurance)’의 합성어인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는 프랑스 지방은행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1980년대 후반 프랑스 은행의 매출을 높이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방카슈랑스 제도는 이후 유럽 각국은 물론 미국과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나라마다 금융산업의 구조가 다르고 은행 창구에서 보험상품을 판매해야 하는 필요성도 달랐기 때문에 도입 배경과 과정은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보험사의 은행업 진출에 규제가 없어 보험사 역시 은행과 대등한 입장에서 방카슈랑스를 하나의 유통 채널로 ‘선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 1996년 연방통화감독청이 ‘은행과 보험사 간 상호 자회사 보유 인정’ 등을 골자로 하는 은행의 보험업 진출 가이드 라인을 발표하고 나서 1999년 11월 금융서비스현대화법(The Gramm-Leach-Billey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후에야 방카슈랑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영국은 1985년 스탠더드라이프 보험사가 스코틀랜드 은행의 지분을 인수한 것이 방카슈랑스 도입의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보험사가 영업력을 높이기 위해 은행을 소유한 것이다. 또 캐나다는 1992년 은행법 개정으로 은행과 보험사의 상호 소유가 가능해진 뒤에 은행에서 신용생명, 해외여행상해보험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방카슈랑스 도입 이후 금융당국이 발생 가능한 부작용 예방에 주력했다는 것도 선진국의 방카슈랑스 도입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다. 미국은 방카슈랑스가 본격화되기 전인 1996년 설계사협회(NALU)와 대리점협회(IIAA)에서 ‘은행의 보험판매시 모델 법안’의 초안을 제안했다. 이에 따르면 은행은 예금이나 대출을 취급할 때 보험상품을 ‘끼워팔기’해서는 안 되며, 대출을 신청한 고객의 대출 계약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보험상품을 판매할 수 없다.

    방카슈랑스의 부작용을 사전에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일본 금융당국의 결정은 더욱 눈에 띈다. 일본에서는 1997년 대장성 자문기관인 보험심의회가 제한적으로 은행권에 보험상품 판매를 허용한 것이 방카슈랑스 도입의 단초가 됐다. 이어 1999년에는 보험의 은행 자회사 소유가 허용됐고 이듬해인 2000년 은행의 보험자회사 소유가 허용돼 상호 진입 장벽이 사라졌다.

    2000년 5월 보험업법 개정으로 방카슈랑스 허용 근거가 마련됨에 따라 2001년 4월 신용생명보험·주택대출관련 장기화재보험·해외여행상해보험 등이 은행에서 처음으로 판매됐고 대상은 점점 확대됐다. 그러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일본 금융청은 지난 3월 모든 보험상품의 방카슈랑스 판매를 2007년 4월로 연기하고 2005년 4월부터 2년간 방카슈랑스 폐해방지 조치를 시행한다고 결정했다.

    “상품별 역할 분담도 고려해볼 만”

    일본 방카슈랑스 시장에서도 ‘보험 꺾기’와 같은 부작용이 발생, 보험소비자의 권익이 침해당하고 있었던 게 그 배경이다. 생명보험협회 박한철 상무는 “일본 금융당국은 폐해방지조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아 보험 꺾기 등 부작용이 지속될 경우에는 추가개방 일정의 전면 재검토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고려대 신수식 교수(경영학) 역시 “자동차보험은 방카슈랑스 도입 취지 중 하나인 새로운 시장 창출을 위한 상품이 아닌 만큼 허용 대상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동차보험의 경우 신규 가입자 창출이 어려워 기존의 ‘파이’를 설계사와 은행이 나눠 갖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또 기존 영업조직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생명보험사의 보장성보험 중에서도 개인보장성 보험은 설계사가 맡고, 단체보험은 은행이 취급하는 식으로 대상을 분리·조정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물론 이런 제안에 대해 은행권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한 대형 은행 방카슈랑스 팀장은 “개인대상 보장성보험과 자동차보험을 제외하는 것은 방카슈랑스 영업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얘기”라며 이러한 제안을 일축했다.

    보험업계와 은행권은 이처럼 이견의 폭을 좁히지 못한 채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상대의 주장에 대한 반박과 자기 변명에만 급급한 모습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모적인 논쟁에 앞서 지금까지 나타난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앞으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문제점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월8일 한국보험학회가 개최한 ‘방카슈랑스의 진단과 정책과제’ 주제의 토론 내용은 귀기울일 만하다. 주제 발표자로 나선 상명대 김두철 교수(금융보험학)는 무엇보다 방카슈랑스에 대한 은행권의 접근 방식을 꼬집었다. 그는 “은행이 보험대리점으로서의 위탁판매에만 집착해 방카슈랑스 시행 일정을 고집하는 것은 작은 이익을 챙기는 것일 뿐”이라며 “현재와 같은 방카슈랑스 형태로는 은행과 보험사 모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퇴보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이 수수료 수입에만 집착한 나머지 보험 판매에 허점을 드러낼 경우 계약자들의 민원 폭증으로 이어져 보험사는 물론 은행에도 악영향을 주게 될 것임을 경고한 것이다.

    또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 이홍무 교수는 “한국의 시중은행들이 외국소재 은행들과 국제적인 경쟁을 하는 환경에 있지 않고, 은행과 보험사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현 상황에서 은행의 국제경쟁력과 금융소비자의 원스톱(one-stop) 쇼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방카슈랑스를 모든 보험상품에 확대 시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다.

    학계에서는 방카슈랑스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구체적 대책을 촉구한다.

    경희대 이봉주 교수(국제경영학)는 “정부는 지난 1년 동안 나타난 여러 문제점을 시정할 수 있도록 감독기반을 구축하고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일본이 2년간 폐해방지조치를 실행하고 관찰할 기간을 설정한 것처럼 유예 기간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장 개선할 수 있는 규정은 하루빨리 고쳐 효과를 점검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금융감독원이 특정 보험사 상품 판매 비중을 49% 이내로 제한한 이른바 ‘49%룰’을 33% 선으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중소형 보험사의 방카슈랑스 제휴 기회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장기적으로는 보험사들이 은행 상품을 판매하는 ‘어슈어뱅킹(assurbanking)’ 즉 보험사의 은행업 진출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외국어대 김성재 교수(경영학)는 “산업자본의 폐해를 막으면서 보험사도 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 은행과 보험산업이 방카슈랑스를 매개체로 상호 경쟁할 수 있는 공정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선진 금융제도인 방카슈랑스가 우리나라에 수입된 후 제대로 ‘첫걸음’을 내디뎠는지를 제대로 따져보고 개선책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은 5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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