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이역 땅에서 모래바람 맞으며 그려낸 건 내 민족의 뿌리였어요”

  • 글: 조희숙 자유기고가 gina05@hanmail.net

    입력2004-11-24 1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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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먹는 것과 그림 그리는 데만 열중할 수 있어 행복했다”는 둔황 동굴벽화 화가 서용씨. 7년간 둔황 사막 한가운데서 고대 벽화의 발자취를 추적해온 젊은 화백은 낡은 스쿠터 한 대와 붓 한 자루, 그리고 뜨거운 열정만으로 1500년 전 고대 화공의 뒤를 좇았다.
    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둔황 벽화 화가 서용(徐勇·42)씨가 중국으로 간 것은 꼭 12년 전이다. 지도교수인 이종상 전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의 영향으로 벽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그는 떠날 때만 해도 중국 유학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고 한다.

    “벽화를 보면 참 좋긴 한데, 뭐가 좋은지 구체적으로 모르겠더라고요. 그렇다면 제대로 공부해서 알아보자는 생각에 중국으로 간 거죠. 저는 뭘 해야겠다 싶으면 앞뒤 안 가리고 저지르는 성격이거든요. 작업실 보증금을 뺀 300만원만 달랑 들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떠난 유학길이 10년 넘게 이어질 줄은 정말 몰랐죠.”

    맨손으로 떠난 유학길이 수월하리란 기대는 애당초 없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믿음뿐이었다. 다행히 방학 때마다 한국의 지인들이 쥐어주는 용돈을 모으면 얼추 한 학기 학비가 충당됐다. 그렇게 해서 중국 최고 미술대학인 중앙미술학원 벽화과 석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전시회도 무사히 치러냈다. 특히 1996년에 연 두 번째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화랑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하겠다며 각별한 예우를 해주는 등 그의 앞길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귀국을 앞둔 어느 날, 그는 꾸린 짐을 들고 한국이 아닌 중국의 서쪽 둔황으로 향했다.

    “화랑에 걸린 제 그림을 보는데 갑자기 ‘이건 사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뿌리가 없는 그림을 그렸다는 느낌이었죠. 제 그림 속에서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자극에 고무되어 그것만을 좇는 제 자신을 발견한 거예요. 실체는 없고 껍데기뿐인 그림이 걸린 전시장에 부끄러워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둔황으로 달려가 석굴의 벽화를 보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어요. 1500년 전 화공의 손에서는 새 그림이었을 벽화는 세월에 탈색되고 훼손됐지만, 인위적이 느낌이 빠져나가 이미 벽화가 아닌, 자연의 일부였어요. 완벽함 자체였죠. 들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풀을 보면서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동안 헛공부했다는 걸 알았으니 둔황에 짐을 풀 수밖에 없었죠.”

    귀국 앞두고 무작정 둔황으로

    둔황은 간쑤성 북서부에 위치한 사막의 오아시스로 인구 12만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다. 걸어서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지만 한때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서역문화의 길목이었다. 고대 동서문화가 교류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던 문화의 거점지이기도 하다. 건축, 공예 등 다양한 둔황의 문화 중 백미는 막고굴의 벽화다.

    막고굴은 석벽을 파서 만든 굴이다. 서기 366년 승려 낙준이 처음 팠다고 알려져 있다. 승려를 비롯 석공, 도공, 목공들이 파기 시작하면서 1000여개에 이르렀지만 현재 남은 것은 492개뿐이다. 석굴 내부에 그려진 벽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보물 중의 보물이다.

    서용씨는 둔황의 벽화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그림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모래산으로 불리는 명사산 인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악명 높은 황사의 진원지답게 한번 바람이 일면 창문을 꼭 닫은 차안에서도 얼굴이 온통 하얀 모래로 덮일 정도로 모래바람의 위력이 대단했다. 그나마 이 정도는 약한 황사일 경우다. 폭풍우를 동반한 황사가 본격적으로 불어오면 속수무책이었다. 한낮에도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해져 황사가 잦을 때까지 어둠 속에서 보내야 했다.

    크고 넓은 작업실을 빌리는 데 1년에 우리돈 100만원 남짓이면 충분할 만큼 물가가 저렴했다. 3만∼4만원만 들고 나가면 친구들에게 생색내며 푸짐하게 대접할 수 있었다. 야시장에서 독주와 함께 먹는 양고기 꼬치구이 맛이 일품이었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아삭아삭한 총각김치를 먹을 수 없다는 것.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그는 기어이 한국에서 배추와 무 종자를 공수해 손수 키워 먹는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동선이래야 막고굴과 숙소를 오가는 것이 전부였으니 별다른 운송수단도 필요없었다. 그의 발이 되어준 낡은 스쿠터 한 대만 있으면 못 갈 곳이 없었다. 둔황에 있는 동안 그는 철저하게 둔황의 문화를 따랐다. 둔황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언어로 얘기하며 어울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둔황 사람으로 변해갔다. 어쩌다 서울에 나오면 하루라도 빨리 둔황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척박한 곳이라 고생이 많았을 거라고들 하지만 제겐 서울보다 더 편한 곳이 둔황이에요. 겉치레나 모양새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가장 편했죠. 먹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말고는 신경 쓸 일이 없었고요. 게다가 사람들이 하나같이 순박하니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고요. 서울에 나온 지 몇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걱정이에요.”

    7년 공부한 유일한 외국인

    중국은 이미 1945년 둔황에 연구소를 설치하고 벽화를 모사하며 색 등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왔다. 연구소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관으로, 소속 연구원들은 모두 공무원 신분이다. 바꿔 말하면 둔황연구소에는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적어도 서용씨가 둔황연구소에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둔황에 머물면서 벽화를 연구할 방법을 모색했어요. 생각 끝에 중앙미술학원 학과장의 추천서 등 몇 군데 추천서류를 둔황연구소에 제출했죠. 그제야 ‘외국인 명예연구원’ 신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둔황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 공안에서 그를 찾아왔다. 허름한 숙소로 데리고 가더니 둔황에 온 경위와 목적 등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한마디로 취조를 당한 것이다. 공안에서는 외국인으로서 학생비자의 유효기간도 끝난 상태에서 둔황에 머무는 것은 위법이라고 통고하고 거액의 벌금(우리돈 150만원 정도)을 부과했다. 억울했지만 수업료 낸 셈쳤다. 그 후로는 공안 사람들과 친구가 됐다고 한다.

    “불법적인 체류였던 셈이죠. 계속 이런 상태로 있으면 운신의 폭이 좁아져 벽화를 연구하는 데 문제가 많아질 것 같아 마땅한 학교를 알아보았어요. 때마침 둔황연구소와 난주대학교가 연계해 둔황학 박사코스가 신설됐죠. 그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학생 신분을 얻은 후 둔황연구소에 합법적으로 남아 있게 됐습니다. 둔황에 자주 연수를 오는 일본인들도 대개 3개월정도 체류하고 돌아가요. 아마 7년이라는 긴 시간 이곳에서 공부한 외국인은 제가 유일할 겁니다.”

    둔황벽화 연구에는 또다른 어려움이 따랐다. 중국인은 동굴 전체가 벽화로 둘러싸인 막고굴 안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외국인은 굴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벽화 모사를 토대로 벽화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는 그로서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벽화를 찍은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작업을 하고,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직접 들어가서 일일이 스케치해 옮겨왔다.

    가장 힘든 것은 벽화 고유의 색상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사진 속 색상이 실제 색상과 다르기 때문에 비슷한 색을 찾아서 일일이 벽화의 색과 대조하는 작업을 반복했는데 손공이 엄청나게 많이드는 일이었다.

    외국인에게 아량을 베풀지 않는 중국의 문화관리 정책이 야속했지만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도굴 방지를 위해 밤에도 환하게 불을 켜둔 막고굴의 야경을 바라보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불 켜진 벽화 아래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중국 친구들을 부러워할 때마다 그들은 오히려 저를 부러워하더라고요. 공무원 신분인 그들은 각자 해결해야 할 할당량이 있거든요. 좋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저와 달리 그들에겐 벽화 모사 작업이 ‘일’이라 스트레스가 심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40~50점의 동굴 벽화를 꼼꼼하게 모사했다. 그는 지난 8월 서울옥션센터에서 ‘영원한 사막의 꽃-돈황벽화’라는 테마로 국내 첫 개인전을 가졌다. 둔황 벽화를 흙판 위에 옮긴 그의 작품은 많은 이의 시선을 끌었다. 막고굴 벽화를 그대로 재현한 작품과 단순한 모사를 넘어 새로운 벽화로 재해석한 작품 40점이 전시됐다. 특히 그의 작품은 20년 이상 모사에만 얽매여온 중국 연구원들에게도 새로운 창작의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뚝심으로 밀어붙인 인생

    중국 유학 1세대인 그는 미술학도로서는 두 번째 중국 유학생이다. 첫 번째 유학생은 그의 부인으로 현재 중국 중앙미술학원에서 서양벽화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가 유학을 떠나던 1992년은 한·중수교가 이뤄진 해로 유학을 위한 절차가 꽤나 복잡했다고 한다. 중국이 적성국가로 분류된 탓에 외무부, 교육부는 물론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까지 찾아가 허가를 받아야 합법적인 유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건립시 벽화 작업에 보조로 참여했던 숨은 공적까지 총동원해 중앙미술학원 유학 허가서를 받아냈다.

    맨손으로 중국 유학을 떠난 일이나, 외국인으로 유일하게 둔황연구소에서 연구한 것만 봐도 뚝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보인다. 중국에서 가진 두 번째 전시회만 봐도 그렇다. 그는 단돈 10만원으로 전시회를 밀어붙인 용감한 화가였다.

    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2000년 실크로드 고도 답사길에 오른 그는 다양한 문화를 맛보았다. 현지의 전통 양 우리 앞에서.

    “무조건 화랑에 찾아가서 10만원을 계약금으로 주고 전시관이 비어 있는 날로 전시 날짜를 잡았어요. 액자나 팸플릿 비용은 모두 외상으로 처리했죠.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고스란히 빚더미에 올라앉아야 하는 상황인데도 불안하지 않더라고요. 그날부터 열심히 그림만 그렸는데 전시회가 열리자 정말 제 그림이 팔리는 거예요. 그 전시회 마지막 날 미래의 장모님을 만나는 행운도 얻었죠.”

    당시 그의 장모는 초대 중국참사관으로 부임한 장인을 따라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림을 좋아한 장모는 서용씨의 전시회 마지막 날 주재원 부인 몇몇과 화랑을 찾았다. 그의 그림을 사려는 장모에게 “왜 내 그림을 사려 하냐”고 묻자 “딸이 시집갈 때 주려고 한다”고 답했다. 훗날 처음으로 처가에 갔을 때 거실에 걸린 자신의 그림을 보고 그는 ‘저건 내 건데’라고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전시회를 계기로 그와 친분을 나누던 장모는 장인이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딸을 보살펴달라고 각별히 부탁했다. 처가 어른들이나 그 역시 당시엔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아내와 결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막상 아내와 결혼 얘기가 나오니 처가에서 대접이 달라졌어요. 나이차가 열 살이나 나고 미래가 불투명한 그림쟁이인 데다 키도 작고 못생겼으니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을 거예요. 그때 장인어른께서 마지막으로 내민 카드는 ‘나는 국가 공무원이기 때문에 나라가 허락하지 않은 결혼은 시킬 수 없다’는 거였어요. 저와 아내는 동성동본이거든요.”

    다행히 동성동본 혼인금지가 폐지되면서 그는 국가가 허락하는 결혼을 할 수 있게 됐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할밖에 없었다. 결국 처가에서도 결혼을 허락했다.

    실크로드의 꽃 경주 석굴암

    그는 올 여름 완전히 귀국, 동덕여대에 출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1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둔황학회가 있지만, 그곳은 문헌 위주로 연구하는 단체라 실제로 둔황의 벽화를 연구하는 사람은 서씨뿐이다.

    “둔황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둔황 석굴에서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면서입니다. 이로써 삼국시대에 서역과 교역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저는 둔황과 한민족을 직접 연관시키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둔황 벽화에 고구려인의 모자인 조우관(鳥羽冠)을 쓴 사람이나 전통악기인 장고, 고구려인의 수렵도와 비슷한 형상이 나오지만, 이것이 한민족이라고 할 만한 구체적인 근거는 아직 없어요. ‘유마힐변상도’라는 벽화에는 머리에 깃털을 쓴 사람이 나오는데, 이는 각국 사신들을 표현한 벽화의 공식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하지만 서역에서 들어온 불교문화가 둔황에서 꽃을 피우고 동으로 전해져 경주 석굴암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요. 둔황의 와불과 석굴암의 본존불이 서로 닮아있지만 우리 문화가 훨씬 우수해요. 둔황의 와불이 흙을 빚어 만든 데 비해 석굴암은 그보다 훨씬 작업하기 어려운 화강암으로 만들었거든요.”

    그는 “문화란 흐르는 것”이라며 “둔황벽화와 같은 세계문화유산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둔황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므로 어느 한 나라만의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 불교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왔다면 둔황은 중국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와도 근본을 같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 문화를 보다 열린 자세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둔황 막고굴에는 외국인이 거주할 수도, 석굴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도 없었어요. 관광객도 석굴에 들어가려면 여러 기관에서 발급하는 추천서를 제출해야 했고요. 자국의 문화재 관리를 위한 정책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같은 문화권 사람들끼리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죠.”

    고구려 벽화 연구하고파

    그는 둔황벽화 연구의 출발을 ‘뿌리 찾기’에서 찾는다. 한국 문화의 뿌리가 불교문화에 있다면 불교문화의 뿌리는 둔황에 있기에 둔황에서 우리의 뿌리를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에는 없는 조상의 특징들이 둔황에는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연구할 수만 있다면 문화의 공백을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

    문화 연구에 관한 한 그가 가장 부러워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둔황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활발한 연구를 벌이고 있다.

    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둔황에서 벽화를 그리고 있는 서용씨.

    “매년 ‘아사히신문’에서 3~4명을 선발해 둔황에 연수를 보내요. 둔황을 찾는 관광객 중엔 일본인이 가장 많아요. 그들이 둔황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실크로드의 끝이 일본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자국 문화의 연원을 찾으려는 노력이에요. 실크로드의 정수가 경주라고 믿는 우리의 생각과 다를 게 없죠.”

    서씨에겐 남은 인생을 걸고 풀고 싶은 거대한 프로젝트가 있다. 남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고구려 벽화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여 벽화의 재료와 기법을 분석하는 연구는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고 한다.

    “벽화를 가진 민족은 역사가 있는 민족이에요. 벽화에는 당대 사람들의 생활을 반영하는 복식, 민속, 건축 등이 모두 들어 있거든요. ‘그림으로 푸는 역사’인 셈이죠. 벽화에 증거가 남아 있으니 역사가 있는 민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요.”

    둔황에 머물던 시절 그는 둔황을 찾는 한국 학술단체나 유명 인사들에게서 가이드를 부탁받곤 했다. 그때마다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막고굴의 입구였다. 그곳에는 돈황 막고굴의 보존을 위해 기여하거나 거액을 기부한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틀이 모두 7개인데 그 중 5개에 사진이 들어 있어요. 홍콩 사람 1명과 일본 사람 4명이죠. 중국의 문화유산에 왜 일본 사람들이 돈을 쏟아붓는지 그 의미를 새겨보자는 의미에서 그곳엘 제일 먼저 데리고 갑니다. 일본인들은 둔황뿐 아니라 자국으로 가져갈 수 없는 세계문화유산에 열심히 투자해요. 그것이 자신의 역사를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는 여섯 번째 사진틀 앞에서 늘 “여기는 내 자리”라고 말한다. 둔황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 이제는 돌려줘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낡은 스쿠터에 몸을 싣고 둔황 동굴로 달려가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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