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육상의 오페라’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

집중, 버림, 비상(飛上), 떨림, 그리고 아… 그 빛나는 추락

  • 글: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부장 mars@donga.com

    입력2004-11-24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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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상과 잡념을 버려라. 화두에만 집중하라. ‘날자, 제발 날자.’ 활처럼 휘었다가 허공으로 튕겨져 비상하는 인간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워 슬프다. 버림, 그리고 날다. 그 숨막히는 떨림. 그 뒤에 찾아오는 추락은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육상의 오페라’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
    누나야, 사는 게, 왜, 이러냐사는 게, 왜, 이리, 울며, 모래알씹듯이 퍽퍽하고사는 게, 왜, 진창이냐엄마야, 누나야이젠, 웃음마저도 시든 꽃처럼무심한 손길도 왜 가슴 데인 화열처럼왜, 쉬이 넘기지 못하고, 가벼이 사랑치 못하고 말이다…중략…사는 게 왜, 이리, 숨막힌 것인지 엄마야강변에 햇살이 표창처럼 반짝일 때누나야저 억장 무너지는 바다에물안개가 니, 부서지는 웃음처럼번져올 때나는 이 악물고 이 모든아름다움을 부정한다엄마야, 누나야네 얼굴에 박힌 웃음이언 강 물밑처럼 풀려나갈 때까지모든 꽃들은 사기다[함성호 ‘엄마야 누나야’ 부분]

    놀라워라. 지구의 꼭지점 에베레스트(8850m) 정상 위에도 새가 난다. 한줌도 안 되는 노랑부리까마귀(Pyrrhocorax graculus)가 상승기류를 타고 맴돈다. 작은 새. 그 새들은 설산(雪山)을 오르다가 죽은 산악인들의 주검을 쪼아먹는다.

    1924년 6월 영국 산악인 조지 맬러리(당시 38세)와 앤드루 어빈(당시 22세)은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사라졌다. 사람들이 그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정상을 불과 240m 남겨놓은 지점. 그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정상을 밟은 뒤 산을 내려오다가 사고를 당했을까. 아니면 정상 도전에 실패하고 하산하다가 추락했을까. 만약 그들이 정상을 밟은 게 확인된다면 1953년 5월29일 에드먼드 힐러리(뉴질랜드)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의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기록은 무효가 된다.

    75년이 지난 1999년 5월 맬러리의 주검이 에베레스트 북벽 제1스텝(능선에 계단처럼 돌출한 곳) 아래 해발 8170m 고지에서 발견됐다. 맬러리는 자갈이 깔린 비탈 오르막을 향하여 엎드려 있었다. 두 팔은 산비탈 아래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한 듯 위쪽을 향해 뻗고 있었다. 등산복은 손만 대도 부스러졌다. 오른쪽 종아리뼈와 정강이뼈 그리고 오른쪽 어깨뼈와 갈비뼈가 부러져 있었다. 가슴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추락으로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몸이 말짱하고 심한 상처도 없었다. 아주 높은 데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추락한 뒤에도 한동안 의식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엉덩이 부분은 노랑부리까마귀들이 군데군데 쪼아먹어 보는 이를 가슴 아프게 했다. 상의 앞쪽 호주머니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보낸 3통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맬러리는 왜 산에 올랐을까. 그는 2년 전인 1922년에도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지만 8320m지점에서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렸었다. 1923년 그는 미국의 워싱턴 시카고 필라델피아 보스턴 등을 돌며 ‘에베레스트 등정에 대한 강연 여행’을 다녔다. 가족 부양을 위해 어쩔 수없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이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느냐”고 맬러리에게 물었다. 맬러리는 피곤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던 것이다. 맬러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내뱉고는 총총히 강연장을 빠져나갔다.



    모든 생물은 날갯짓을 꿈꾼다

    새는 왜 나는가. 한번 날면 9만리 장천을 나는 붕새는 왜 나는가. 새는 그의 뼈를 비운다. 대나무처럼 뼛속을 텅 비운다. 그리고 몸 속 공기주머니에서 뼛속으로 끊임없이 바람을 불어넣는다. 새의 조상은 파충류다. 뱀은 하늘을 날려고 5000만년이 넘도록 ‘날갯짓’을 꿈꿨다. 저주받은 몸통에 깃털을 틔우기 위하여 수도 없이 허공에 뛰어오르다 나뒹굴었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었고 밤마다 피울음을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쥐라기시대, 익룡의 몸이 두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새의 날개는 앞발이다. 파충류의 앞발이 피눈물 나는 날갯짓 끝에 깃털로 변했다. 하지만 아직 새들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보다 높이, 보다 멀리 날기 위해 몸부림친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본다. 날갯짓을 많이 하는 새는 그만큼 높이, 멀리 날 수 있다.

    가수 정광태는 노래한다. “도요새, 그 몸은 비록 작지만 가장 높이 꿈꾸는 새. 저 밑 없는 절벽을 건너서, 저 목타는 사막을 지나서, 저 길 없는 광야를 날아서…. 도요새, 그 몸은 비록 작지만 가장 멀리 나는 새. 저 검푸른 바다를 건너서, 춤추는 숲을 지나서, 저 성난 비구름을 뚫고서….”(도요새)

    ‘상상 속의 새’ 붕새는 한 번 날갯짓에 9만리를 난다.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날갯짓을 해도 몇십 미터도 못간다.

    새는 왜 높이 나는가. 왜 멀리 날려 하는가. 새는 도대체 어디로 날아가는가. 가수 송창식은 외친다. “새는 노래하는 의미도 모르면서 자꾸만 노래를 하고, 새는 날아가는 곳도 모르면서 자꾸만 날아간다.”(새는)

    지상의 모든 생물은 날갯짓을 꿈꾼다. 돌고래는 7m가 넘게 공중으로 껑충 뛰어오르고 날치는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허공을 가른다. 심지어 나무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까치발을 딛는다.

    인간도 타는 목마름으로 날갯짓을 꿈꾼다. 어깻죽지가 늘 가려워 피가 나게 긁는다. 하지만 깃털은 아무리 기다려도 움을 틔우지 않는다. 손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손이 새처럼 날개로 변하지는 않는다. 대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한다.

    한때 라인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대 켈트족은 막대를 짚고 개천을 뛰어넘으며 비상(飛翔)을 꿈꿨다. 소련 농민들은 쇠스랑을 장대삼아 2m가 넘는 건초더미를 뛰어오르는 놀이를 즐겼다. 영국에선 나무장대를 이용해 돌담을 뛰어넘고 아일랜드에선 장대를 짚고 개울을 뛰어넘었다.

    중국인은 한술 더 떴다. 손오공을 내세워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주름잡았다. 손오공은 여의봉을 사용해 산과 산을 훌쩍 뛰어넘고 과거와 현재를 가로질렀다. 그래서 원숭이는 중국인에게 ‘보다 높이, 보다 멀리’ 뛰는 영물로 통한다. 원숭이의 해가 되면 중국의 산부인과 병원마다 꽉꽉 차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인간 능력의 결집체

    장대높이뛰기엔 날갯짓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담겨있다. 수평운동에너지가 두둥실 한순간에 수직에너지로 바뀌며 한 마리 새가 된다. 인간은 그 순간 자유와 해방을 느낀다.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순간은 무아경이다. ‘중력의 법칙’에 반항하는, 저 가슴속 끓는 피의 간지러움.

    그래서 막 허공을 향해 뛰어오르려는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자세는 먹이를 잡아채려는 독수리의 모습과 같다. 오직 두둥실 떠오르려는 생각뿐, 잡념이 전혀 없다. 몸의 균형도 완벽하고 에너지의 낭비가 하나도 없다. 미학적으로도 너무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다. 이 세상에 수평에너지를 단박에, 거의 수직에너지로 바꾸는 생물은 오직 장대높이뛰기 선수뿐이다. 그 수많은 종류의 새 중에도 한순간에, 직각으로 공중에 떠오르는 새는 없다. 대부분 비행기처럼 사선을 그으며 비상한다. 오죽하면 제이콥 브로노스키가 그의 역저 ‘인간 등정의 발자취’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탄하고 또 감탄했겠는가.

    “도약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인간 능력의 집결체이다. 손의 움켜쥠, 발의 구부림, 그리고 어깨와 골반의 근육, 화살을 날리는 활시위처럼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방출하는 장대 등 그 복합적인 행동의 특징은 선견력(先見力)이다. 다시 말해 앞으로의 목표를 세워놓고 자기의 관심을 거기에다 집중시키는 능력이다. 장대의 한 끝에서 다른 끝에 이르는 그의 행동과 뛰는 순간의 정신 집중은 계속적인 계획의 수행이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낙인이 되는 것이다.”

    장대는 선승(禪僧)의 화두와 같다. 화두는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이다. 오직 화두에 매달리다 보면 저절로 망상과 잡념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화두조차 털어내지 않으면 깨달음의 길은 멀다. 화두도 하나의 집착이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배를 버려야 한다.

    장대도 하늘로 가는 ‘화두’다.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정점에 이르기까지는 장대에 의지하지만 그 후부터는 장대를 버려야 한다. 장대에 계속 매달리면 중력의 힘에 이끌려 다시 지상으로 떨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대에 집착하다 보면 장대가 창이 되어 자신을 찌른다. 어느 순간, 때가 되면 장대를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2000년 일본 미야지마현에서 열린 일본선수권대회 장대높이뛰기 남자부 경기에서 야스다 다토루(25)는 장대에 ‘똥침’을 맞았다. 5m40 세 번째 도전에서 무사히 바를 넘었지만 떨어지다가 장대에 항문과 직장을 찔린 것이다. 야스다의 유니폼은 물론 장대 끝과 안전용 매트까지 흥건하게 피가 고였다. 이 사고로 그는 결국 수술까지 받고 한달이 넘게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다행이라면 5m40을 넘은 기록이 인정돼 2위에 입상한 것.

    장대는 힘을 싣는 데에만 쓰이는 게 아니다. 몸의 균형을 잡는 데도 쓰인다. 망상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를 때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게 화두가 중심을 잡아주듯 장대는 몸이 체조선수처럼 균형 있게 떠오르도록 지지해준다.

    2001년 중국의 한 위그르족 청년은 후난성(湖南省) 헝산(衡山)에 위치한 해발 1200m와 1290m 높이의 두 봉우리 사이를 오직 장대 하나만을 의지해 건넜다. 두 봉우리를 연결한 1400m의 외줄 위를 장대(12kg)로 몸의 중심을 잡으며 52분 만에 건넌 것이다. 놀랍게도 그 청년은 단 하나의 보호장구나 안전벨트도 착용하지 않았으며 날씨마저 안개가 짙게 끼어 가시거리가 3m에 지나지 않았다.

    화두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 유명한 조주스님의 ‘무(無)’자 화두이든, ‘이 뭐꼬(是甚麻)’나 ‘차나 마셔라(喫茶去)’든, 아니면 ‘뜰 앞 잣나무(庭前栢樹子)’나 심지어 ‘마른 똥막대기(乾屎獗)’든 뭐든지 좋다. 그래서 선승의 화두는 무려 1700개나 된다.

    장대도 길이나 직경에 제한이 없다. 소재도 어느 것이든 좋으며 무게도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길이는 보통 남자 기준으로 5.7~6.15m를 쓰며 가벼운 것일수록, 탄력이 좋을수록 좋다. 선수 개인의 신체조건이나 체중 신장 스피드에 맞춰 장대를 고르면 된다. 선수가 장대를 잡는 위치는 장대 밑 끝에서 4.9~5.1m 사이. 오른손잡이는 오른 손을 위로 잡는다. 장대는 1개에 무려 100만원이 넘는다.

    장대높이뛰기는 고대올림픽에서도 있었으며 1896년 부활된 근대올림픽에서도 있었다(남자). 여자장대높이뛰기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부터 채택됐다. 장대높이뛰기 기록은 어느 장대를 썼느냐에 따라 다르다. 장대의 탄력이 높을수록 더 높이 뛸 수 있다.

    1911년까지는 장대감으로 골프채의 샤프트로 쓰였던 히코리나무(서양호두나무)나 옛날 서당에서 회초리로 주로 쓰던 물푸레나무가 쓰였다. 하지만 그런 장대들은 탄력이 거의 없어 에너지 낭비가 많았다. 당시 남자 세계최고기록은 3m55에 불과했다.

    더구나 장대가 거의 구부러지지 않아 선수들은 일단 점프를 해 몸을 떠올린 후 순간적으로 장대를 타듯 기어 올라가 바를 넘어야 했다. 소위 ‘봉 타고 올라가기’가 성행한 것이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대회에 일본산 대나무봉이 등장했다. 1912년엔 대나무봉으로 4m벽을 처음 넘었고 그 후 4m77까지 뛰어넘었다.

    하지만 일본(대만)산 대나무 시대는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끝이 난다. 승전국 미국의 알루미늄 장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57년에는 장대를 땅에 박을 때 지탱해주는 버팀쇠(박스)와 낙하하는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두꺼운 매트리스(그 전까진 모래바닥)가 등장했다. 알루미늄 장대는 1960년까지 사용됐으며 최고 기록은 4m88. 1961년부터는 유리섬유나 탄소섬유가 쓰였다. 그리고 마침내 1994년 우크라이나의 세르게이 붑카가 꿈의 기록인 6m14의 세계최고기록을 달성했다.

    팔·다리 길고 강한 사람이 유리

    유리섬유나 탄소섬유는 낚싯대처럼 끝부분만 휘어져 도약의 속도를 잘 전달하면서도 휘어짐이 커 몸을 더 튀어 오르게 한다. 또한 탄력이 좋아 봉의 위치를 더 높이 잡을 수 있고 크게 휘어지므로 많은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다. 바를 넘을 때 신체적 여유가 있어 동작을 탄력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요즘 장대는 탄소코팅 처리한 첨단 유리섬유로 만들어진다. 이 장대는 탄성과 내구력이 좋아 90도 이상 구부러진다.

    장대높이뛰기는 육상의 종합예술이다. 육상경기의 오페라나 같다. 단거리 선수의 스피드(도움닫기)가 필요한가 하면 높이뛰기 선수와 멀리뛰기 선수의 도약력(구르기)을 요구한다. 체조 선수와 같은 균형감(공중자세)이 필요하고 포환·해머·원반·창던지기와 같은 투척 선수의 마무리자세(낙하)가 요구된다.

    여기에 장대를 효과적이고 감각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종력이 있어야 한다. 상하체가 고르게 발달하고 다리가 길고 강하며 팔이 긴 사람이 유리하다. 어깨근육과 복부근육이 발달해야 높이 뛸 수 있다.

    체조선수 출신 러시아 ‘미녀 새’ 이신바예바의 배에 임금 왕(王)자가 새겨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올림픽 출전 남자선수의 평균키가 182cm, 몸무게가 79.8kg(여자선수 169cm, 59.8kg)에 이르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또한 근력, 순발력, 민첩성, 평형성이 발달해야 하며 리듬 타이밍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야 한다. 그래서 높이뛰기 선수에게 단거리, 체조, 철봉, 평행봉, 트램펄린, 로프타기 연습은 필수다.

    자 그럼 우리도 장대를 들고 한번 두둥실 떠올라보자. 1m를 날면 어떻고 2m를 날면 어떤가. 두 발 달린 짐승이 땅 위만 어슬렁거리다가 어느 날 두둥실 허공으로 상승하는 기분은 짜릿하지 않을까.

    [① 출발(도움닫기)]

    더 빨리 달릴수록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다. 도움닫기 스피드가 빠를수록 더 높은 데서 장대를 잡을 수 있고 장대를 높이 잡을수록 큰 상승에너지를 탈 수 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용맹 정진해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오직 화두만을 붙들고 똑바로 나아가야 된다. 항상 앉아 있을 뿐 눕지 않고(長坐不臥), 더러운 누더기로 만든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하루에 한 끼만을 먹으며, 문 없는 무문관(無門關)에서 화두와 피터지게 싸워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화두를 붙들고 매달려도 망상은 틈을 비집고 집요하게 피어오른다. 잠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쏟아지고, 세상에 대한 그리움은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온다. 장대높이뛰기도 그렇다.

    힘차게 달려온 수평운동에너지가 흩어짐없이 장대에 그대로 실리는 것은 아니다. 일부 운동에너지는 어쩔 수 없이 손실된다. 봉을 봉 박스에 꽂을 때의 충격에도, 구름발이 지면에 힘을 가할 때나 장대가 휘어질 때도 운동에너지의 일부는 사라진다. 체중과 장대를 잡는 손잡이높이, 스피드가 조화될 때 에너지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손잡이높이를 끌어올리는 것은 오직 스피드에 달려있다.

    두려워하면 가슴을 찔린다

    세계 남자 톱클래스 선수들의 봉 잡는 높이는 4m80 정도. 선수들은 최대한 거리를 늘리면서 최대속도(32~34km/h)에 도달하도록 속도를 낸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초속 7m92~8m22의 스피드로 달린다. 세계적인 단거리선수의 속도(초속 10m97~11m27)에 비해 3m 정도 느리다. 5m40 이상을 뛰어 넘는 남자선수들은 통상 100m를 10초8 이내, 50m는 5.5~5.7초의 빠르기로 주파한다. 도움닫기 거리는 제한이 없지만 보통 40m는 넘어야 좋은 기록이 나온다. 선수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다르다. 주법은 무릎을 많이 올리면서 탄력 있게 달리고 마지막에는 발바닥 전체로 트랙을 밟고 보폭을 좁힌다.

    [② 장대 꽂기]

    화두는 바람이다.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사라진다. 망상은 바람꽃이다. 틈만 나면 화두를 지운다. 수레가 나아가지 않을 때 수레를 다그치면 안 된다. 소를 채찍질해야 한다. 망상에 의지해 깨달음으로 갈 수는 없다. 무늬 있는 비단은 본래 명주실로 짜여진다. 하지만 명주실에는 무늬가 없다. 짜는 사람의 뜻에 따라 무늬가 생겼을 뿐이다. 풀어버리면 다시 명주실로 돌아간다. 명주실은 본성이고 무늬는 망상이다. 명주실을 기억하라. 본성을 기억하라. 화두를 놓치지 말라. 수처작주(隨處作主). 가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장대는 폴 박스에 꽂아야 한다. 폴 박스에 장대를 꽂지 않으면 아무리 높이 뛰어넘어도 무효다. 화두를 놓치는 순간 깨달음의 길이 사라지듯, 장대를 폴 박스에 단단히 꽂지 않으면 한순간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미국의 ‘미녀 새’ 스테이시 드래길라는 “초심자들은 대부분 폴을 박스에 꽂는 순간 두려움에 질려서 자기 가슴을 찔러버린다”며 “두려움을 없애려면 수많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수평운동에너지는 폴 박스가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장대로 옮겨진다. 약간 끝이 치켜 올라간 장대는 점차 아래로 내려지면서 지상의 폴 박스를 향한다. 일단 장대가 수평이 되면 선수가 균형을 잃게 되고 속도는 초속 약 7.7m로 떨어진다. 폴 박스는 착지면 앞과 바걸이 사이에 있다. 장대지르기는 발 구름 2보 전에 시작하고 발 구름 1보 앞에서는 아래손이 완전히 처져 있어야 한다. 발 구름 지점은 지면과 바가 직각삼각형을 이루는 위치에 있다.

    [③ 발 구름 및 도약]

    화두만 잡고 있으면 모두 부처가 되는가. 기왓장을 천년만년 돌에 갈면 거울이 되는가. 깨달음은 단박에 이뤄진다. 깨달음의 길은 계단식이 아니다. 홀연히 도둑처럼 온다(頓悟). 밥 먹다가, 밭에서 일하다가, 똥 누다가 “아항,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친다.

    날갯짓은 아픔이요, 숨막히는 두려움이다. 아픔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면 결코 허공에 떠오를 수 없다. 온몸으로 발 구름 한 뒤 장대를 타고 단박에 두둥실 올라가야 한다.

    정상은 반환점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바닥에서 20도 각도로 오른다. 동시에 장대는 체중에 의해서 구부러지고 선수의 몸은 휘어진 장대의 복원력에 의해 뛰어오른다.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올리고 엉덩이도 따라 추켜올려 몸을 둥글게 만든다. 장대가 펴질 때 두 다리를 머리 위쪽으로 올린다. 폴이 펴질 때 몸도 재빠르게 펴 올린다. 그 동작은 폴의 탄력과 신체의 반동을 이용해 강하면서도 빠르게 해야 한다. 폴이 수직으로 되기 전에 양 다리를 머리로 올리되 합쳐서 폴 가까이 놓이도록 한다. 폴이 탄력성이 있을 때 이를 이용해 몸을 두둥실 떠올린다. 폴을 잡은 손의 높이가 높을수록, 신장이 크고 체중이 많이 나갈수록 폴의 속도는 느려진다.

    [④ 비행(飛行)과 바 넘기]

    산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만이 그 기분을 안다. 올라가보지 않고 산 밑에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시인 조정권은 산정(山頂)에 올라 포효한다.

    겨울 산을 오르며 나는 본다/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얼음처럼 빛나고,/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가장 높은 정신은/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산정묘지(山頂墓地) 1’ 부분]

    그러나 산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정상은 반환점에 불과하다. 올라온 만큼 다시 내려가야 한다. 에베레스트에 오른 산악인들은 한 목소리로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히말라야 최고봉에 오르고 싶어한다. 그러나 막상 정상에 서면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되는구나’하는 안도감부터 든다. 그러나 ‘드디어 해냈구나’하는 뿌듯함은 한순간 뿐이다. 곧 ‘자, 이제 어떻게 내려가지?’하는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단박에 깨우쳤다고 해서 그것으로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다.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백척이나 솟아있는 장대 끝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 과연 백척장대 끝에서 어떻게 하면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겠는가(百尺竿頭 如何進步). 오호라, 한 발 더 내디디면 천길 낭떠러지 허공뿐인데….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버려라. 허공에 자기를 던져버려라. 깨친 것조차 다 내던져버려라. 깨우쳤다고 생각한 순간, 그 순간은 비로소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터닝 포인트일 뿐이다.

    수평운동에너지를 흡수한 장대의 유연성은 선수를 물구나무서기 동작으로 밀어낸다. 선수는 자신의 엉덩이와 다리를 돌고래처럼 나선형으로 용틀임하며 뻗음으로써 거꾸로 선 동작을 강화한다. 한순간 두둥실 정상에 올라선다. 짜릿하다. 내친김에 등과 다리를 펴면 공중물구나무서기를 한 몸통은 거의 땅과 수직이 된다. 장대가 원상으로 돌아올 때 팔로 장대를 밀어낸다. 물구나무 선 동작에서 몸을 바깥쪽으로 틀면서 다리-허리-몸통 순으로 바를 넘는다. 바를 넘을 때는 롤 오버(모로 넘기)를 주로 한다.

    사고는 대부분 하산길에

    [⑤ 착지]

    한번 깨달으면 그 경지는 죽을 때까지 영원히 계속되는가. 아니다. 잠시라도 쉬면 거울에 먼지가 쌓인다. 거울은 쉬지 않고 닦아줘야 빛이 난다(漸修). 큰 스님들이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무소유의 삶을 사는 이유다. 더 낮은 곳으로, 저잣거리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갓난 송아지가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무심하게 그냥 물 흐르듯 산다. 깨달음은 결코 번쩍이는 계급장이 아니다. 대상이 오면 비춰주고, 또 대상이 가면 흔적을 지우는 여여(如如)한 거울 같은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창호지 같다. 먹물이 한 방울 떨어지면 지워지지 않고 번진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게 훨씬 더 힘들다. 사고는 대부분 하산길에 일어난다. 위대한 산악인들이 모두 하산길에 목숨을 잃었다. 장대로 바를 넘었다고 마음을 놓는 순간, 바가 몸에 걸려 떨어진다. 두둥실 떠올라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고 환호하는 순간 장대가 똥침을 놓는다. 1996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단독 등반한 뒤 정상에서부터 스키활강으로 내려온 한스 카멀란더는 말한다.

    “등산은 스포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심판도 없고 관중도 없다. 오로지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무상(無償)의 행위다. 등산은 물결이 만들어 내는 파장과도 같다. 오름과 내림, 높고 낮음이 끝없이 이어진다. 내리막의 힘을 받아야만 비로소 다시 오를 수 있다. 8000m가 넘는 산을 오르는 길에서 정상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전환점이고 전체 과정의 중간단계일 뿐이다.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취는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에야 비로소 이뤄진다.”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한번 공중에 두둥실 몸을 떠올린 뒤 다시 지상에 떨어졌을 때 그는 이미 뛰어오르기 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새로 태어난 자이다. ‘거듭난 자’이다. 설령 그가 실패했을지라도 그는 날갯짓의 그 숨막히는 떨림을 맛본 사람이다.

    빛나는 추락의 순간

    소설 ‘광화문 그 남자(?)’ 아니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은 고개를 끄덕인다.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추락의 순간’이라고.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은 지상의 한 점 위에 장대를 박고, 그 위에 거꾸로 선다. 그는 ‘높이’와 싸우는 자이다. 그가 지상의 한 점에 장대를 박을 때, 그는 수평으로 달려오던 속도의 힘을 수직의 상승으로 전환한다. 그는 수평의 힘으로 수직을 지향하는데, 이 전환은 그가 지상의 한 점 위에 존재의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육상의 오페라’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

    2004년 5월 제4회 한국 주니어 육상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장대높이뛰기 한국신기록(3m66)을 세운 최윤희 선수.

    그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허공으로 솟구친 후 표적을 넘어 다시 땅 위로 추락하는 순간이다. 존재의 전환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땅과 물리적으로 연결된 장대에 의해서만 땅을 박차고 솟구칠 수 있고, 그렇게 솟구쳐 오른 허공에서 다시 땅 위로 떨어진다. 그는 날개가 없는 자의 운명을 돌파하지 못하지만, 그 운명 앞에서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는 땅의 속박을 딛고 솟아올라서 다시 땅의 속박 안으로 돌아온다. 그의 인간된 몸은 이 질곡의 운명 속에서 아름답다. 그것이 땅 위에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을 받은 인간의 몸이다. 거꾸로 치솟는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몸을 보면서 내 몸 속에 숨은 수많은 척도의 아우성을 듣는다. 인간의 자유는 스포츠엘리트가 아닌, 보통사람의 몸 안의 척도가 몸 밖의 척도를 무찔러가는 과정을 따라 전개될 것이다. 허공으로 치솟은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아직도 세상의 척도가 되지 못하는 인간의 몸으로서 외로워 보인다.”

    한국의 ‘꼬마 미녀 새’

    세계 최고의 ‘인간 새’는 누가 뭐라 해도 우크라이나의 세르게이 붑카(41)다. 그는 1994년 6m14를 뛰어넘어 세계최고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소련대표로 나와 5m90으로 금메달을 따냈고 세계기록을 수없이 경신했다. 또한 세계선수권대회도 6연패했다. 그는 6m나 되는 긴 슈퍼장대를 사용했다. 다른 선수들은 붑카와 같은 긴 장대를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그는 100m를 10초5에 달리는 빠른 스피드와 강한 어깨, 복부 근육을 활용해 장대를 최대한 높이 잡을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선수들보다 딱딱한 장대를 써서 힘을 거의 낭비하지 않고 온전히 장대에 실었다.

    여자 경기에선 ‘미녀 새 삼총사’가 세계를 주름잡는다. 러시아의 엘레나 이신바예바(22), 스베틀라나 페오파노바(24)와 미국의 스테이시 드래길라(32)가 그들이다. 여자 장대높이뛰기가 처음 채택된 시드니올림픽에선 드래길라가 금메달을 따냈지만 2004아테네올림픽에선 이신바예바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신바예바는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지 불과 10일 만인 9월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골든리그 육상대회에서 4m92로 또 한번 세계신기록을 경신했다. 이신바예바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선정한 ‘올해의 육상선수’로 뽑혔다.

    한국에도 ‘꼬마 미녀 새’가 있다. 최윤희(18·김제여고 3). 170cm, 59kg의 알맞은 체격. 지난 10월9일 충북서 열린 제8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3m82를 넘어 11번째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당시 3m90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최윤희는 “연습 때 넘은 적이 있어 시도했으나 안 됐다. 4년 남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까지는 올림픽 B기준기록 4m25를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신바예바의 세계기록에는 무려 1m10이나 뒤진다. 아직 멀었다. 그나마 나이가 어리니 기대해볼 만하지만 우선 4m 벽부터 넘어야 한다. 최윤희는 도움닫기가 25m밖에 안 된다. 또한 스피드도 부족하다. 세계적인 선수들처럼 100m를 11초대에 달리는 스피드를 가져야 한다. 근력도 더 키워야 한다. 그래야 장대를 지금보다 더 높이 잡을 수 있고 기록이 향상된다.



    최윤희는 초등학교 시절 포환던지기를 했기 때문에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는 동작이 좋다. 중1 때인 1999년 장대에 넋이 나가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됐다. 최윤희가 사는 전북엔 장대높이뛰기 시설이 없어 왕복 3시간이 걸리는 대전까지 다니며 훈련을 해왔다. 그래봐야 훈련시간은 고작 1시간에 불과했다.

    지도자는 이원(64)감독. 이 감독은 한때 복싱을 하다가 장대높이뛰기 선수로 전향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부상을 당해 꿈을 접었다. 당시 이 감독의 최고기록은 3m20.

    이 감독은 “최윤희는 유연성 담력 순간판단력 등 장대높이뛰기 선수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 이신바예바는 장대를 든 지 8년이 됐지만 윤희는 이제 4년째다. 윤희가 스피드와 상체 근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면 4년 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베이징올림픽까지 시간은 충분하다. 올해 4m를 넘고 내년 대학에 진학해 올림픽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최윤희는 내년 공주대에 진학한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98년부터 6년째 자신을 지도해온 이 감독도 함께 공주대로 옮긴다. 최근 모 방송사에서 최윤희 특집프로그램을 5편 내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12월 중국 상하이 돔 경기장에서 중국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한 뒤 러시아로 넘어가 이신바예바와 합동훈련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최윤희는 “땀이 나면서 몸이 풀리고 경쟁자가 많아야 기록이 나는 편인데 국내에서는 경쟁할 선수가 없어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는다. 국제대회에 자주 참가해 경험을 많이 쌓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는 안된다. 그러나 벌써부터 언론에 이벤트 식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최윤희는 아직 작은 재도 넘지 못하는 ‘작은 새’에 불과하다. 어깻죽지의 힘도 더 길러야 하고 바람을 가르는 날갯짓도 더 빨라져야 한다. 여자장대높이뛰기 기록은 이미 5m를 넘어 머지않아 남자 선수들과 경쟁할 것이란 전망이다.

    클리프 프럴리치 텍사스대 교수는 “장대높이뛰기는 선수들의 에너지가 장대의 유연성을 타고 점프에너지로 전환된다”며 “남자보다 유연성이 뛰어난 여자선수들이 현재 기록보다 훨씬 향상된 5m53까지 뛰어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대높이뛰기는 에너지 보존법칙이 적용된다. 선수의 수평운동에너지가 장대에 고스란히 옮아간 뒤 다시 그 에너지는 선수의 도약에너지로 바뀐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단박에 두둥실 떠오르려는 의지력이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상상력으로 두둥실 허공에 떠오른다. 상상력은 꿈이다. 꿈을 잃은 새는 날개가 사라진다. 키위 새는 이제 거의 날개가 없다. 펭귄의 날개는 지느러미로 변했다. 타조의 날개도 무늬만 남았다.

    이승철 시인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날자, 제발 날자”라고. “젊은 넋들이여, 사는 게 모래알 씹듯이 퍽퍽하고, 사는 게 진창일지라도 날갯짓을 하자”고 울먹인다.

    꿈은 혼자 꿀 수밖에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살아 탈출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꿈을 꾸면, 날갯짓을 하면 살아 탈출할 수 있다. 흔히 혼자 꾸면 꿈이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꿈은 혼자 꿀 수밖에 없다. 그래서 꿈이다. 깨달음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다. 부처가 되는 것은 각자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찾는 것이다.

    초승에 떼무리 지어 달무리 곁으로겨울새 끼룩끼룩 날갯짓 한다깃 치며 발버둥치며 솟구쳐 오른다진눈깨비 하이얗게 나부끼는 밤하늘너희 집 없는 형제들아이 한밤에 어디,어디로들 떠나는 것이냐악다구니 세상 속 헤쳐가는 앞길에진정 뼈마디 덥힐둥지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냐가자, 가자, 젊은 넋들아정녕 이 한밤을 저버리지 말고날자, 날자, 젊은 벗들아그대 새초롬한 부리로어둠을 쪼아 새벽길 열리니이 추운 한 시절, 이제 너희 몫이다[‘겨울새’ 전문]

    새는 왜 나는가. 산악인들은 왜 산에 오르는가.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왜 공중에 떠오르려 하는가. 왜 지상의 편안함을 버리고 자꾸 날갯짓을 하려 하는가. 구상 시인은 말한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라고.

    그런데 왜 그 꽃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는가.

    꽃이 피고 잎이 진다. 꽃과 잎은 둘이지만 그 뿌리는 원래 하나다. 뿌리는 꽃을 피워내 뿌듯하고 꽃은 씨앗을 맺어 뿌리를 만든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러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고 한번 의심하고 뒤집어봐야 비로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된다. 두둥실 떠오르다가 추락해봐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꽃자리’임을 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내려와봐야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가장 높은 곳임을 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에서 일어나라. 정말 우습구나.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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