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토색을 띤 블렌하임 궁전 본관 건물. 방문객은 1층 중앙의 전시동만 볼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1970년대 국회의원을 지낸 모씨가 미국 유학 시절 동료 여학생에게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이게 너희 집이니” 하고 묻기에 아니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 묵묵부답으로 있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씨는 그 후 그 여학생이 여름방학에 자기 집에 놀러오라며 주소를 적어주어 시간을 내 한번 찾아간 적이 있는데, 농장이 하도 넓어 자동차로 1시간을 달려도 끝나지 않아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때서야 왜 그 여학생이 덕수궁 석조전 앞 사진을 보고 ‘너희 집이냐’고 묻던 게 이해가 됐다는 것이다.
정문에서 현관까지 걸어서 30분! 도대체 얼마나 집이 넓으면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당시 필자로서는 그 모습을 이해하기는커녕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한번 둘러봐야겠다고 단단히 별렀지만 주중 닷새는 수업을 받느라, 주말에는 런던으로 나가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느라 끝내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영국을 찾았지만 켄트주에 있는 처칠의 집은 여전히 미답(未踏)의 대상이었다. 도무지 다녀올 만한 짬이 나지 않은 탓이다.
그러다 얼마 전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태어난 옥스퍼드 근교의 블렌하임 궁전(Blenheim Palace)을 찾을 수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는 이유를 들어 아주 최근에야.
궁전이라면 왕이 한때 살던 곳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블렌하임 궁전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궁전이라 불리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궁전의 첫 주인은 처칠의 8대조인 말버러 공작, 즉 존 처칠(1650~1722)이다. 당시 영국 앤 여왕은 즉위 3년째인 1704년 유럽대륙에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터지자 말버러 공작을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현지로 보냈다. 공작의 임무는 우방인 스페인군을 도와 프랑스군의 빈(Wien) 접근을 막는 것이었다(당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는 한 편이었다).
공작은 그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여왕은 그 공로를 치하하고 우드스톡(Woodstock)에 있는 왕실 정원을 하사한 데 이어 240만파운드의 거금을 들여 블렌하임 궁전을 지어주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왕이 살지 않았지만 궁전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여왕이 말버러 공작에게 이처럼 특별한 애정을 보인 데는 전략가로서의 능력을 높이 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여왕이 공작의 부인 사라와 둘도 없는 친구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블렌하임이라는 이름은 다뉴브강 인근에 있는 오스트리아 소읍의 명칭에서 따왔다. 말버러 공작이 프랑스군을 대파한 지역으로, 1722년 궁전이 완공되자 여왕이 하사한 이름이다.
이곳이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역사성보다는 330만평에 이르는 드넓은 영국식 정원과 처칠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필자가 이곳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다.
필자가 블렌하임을 찾아가던 날, 날씨가 무척 맑았다. 비를 뿌리며 우중충하던 전날 날씨와는 완전 딴판으로,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청명하기까지 했다. 런던 빅토리아역 근처 호텔에 묵고 있던 필자는 패딩턴역까지 가서 그곳에서 북행 열차를 타고 옥스퍼드로 향했다.
1시간 반 정도를 달려 옥스퍼드에 도착하니 그곳 버스정류장에 빅토리아 코치스테이션(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코치(버스)가 서있었다. 숙소 바로 근처에서 출발하는 버스 교통편이 있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었을 텐데…. 여행에선 정보가 곧 돈이고 시간이란 점을 모르는 필자가 아닌데도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