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처칠 생가 블렌하임 궁전

세기의 재상 잉태한 우드스톡 숲속 요람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4-11-25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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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년 전, 원정에서 대승을 거둔 말버러 공작(존 처칠)을 치하하기 위해 앤 여왕이 지어준 블렌하임 궁전. 그로부터 170여년이 흐른 어느 날 이곳에서 한 미숙아가 태어났다. 훗날 위대한 정치가이자 웅변가, 저술가, 화가로 성장한 윈스턴 처칠이 바로 그다. 블렌하임 궁전은 처칠에게 두 가지를 선물했다. 하나는 그의 삶이고 또 하나는 그의 사랑이다.
    처칠 생가 블렌하임 궁전

    황토색을 띤 블렌하임 궁전 본관 건물. 방문객은 1층 중앙의 전시동만 볼 수 있다.

    1981년 초여름, 영국을 처음 찾은 필자는 도버해협을 끼고 있는 도시 폭스톤에서 한동안 지냈던 적이 있다. 그곳의 한 보험회사가 실시하는 3주간의 연수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안내인 겸 친구이던 컴패니언이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이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이곳 켄트(Kent)주는 영국에서도 제일 부유한 곳이야. 윈스턴 처칠의 집도 이곳에 있다네. 그 집 정문에서 현관까지 이르는 데 무려 30분이나 걸린다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나.”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1970년대 국회의원을 지낸 모씨가 미국 유학 시절 동료 여학생에게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이게 너희 집이니” 하고 묻기에 아니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 묵묵부답으로 있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씨는 그 후 그 여학생이 여름방학에 자기 집에 놀러오라며 주소를 적어주어 시간을 내 한번 찾아간 적이 있는데, 농장이 하도 넓어 자동차로 1시간을 달려도 끝나지 않아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때서야 왜 그 여학생이 덕수궁 석조전 앞 사진을 보고 ‘너희 집이냐’고 묻던 게 이해가 됐다는 것이다.

    정문에서 현관까지 걸어서 30분! 도대체 얼마나 집이 넓으면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당시 필자로서는 그 모습을 이해하기는커녕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한번 둘러봐야겠다고 단단히 별렀지만 주중 닷새는 수업을 받느라, 주말에는 런던으로 나가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느라 끝내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영국을 찾았지만 켄트주에 있는 처칠의 집은 여전히 미답(未踏)의 대상이었다. 도무지 다녀올 만한 짬이 나지 않은 탓이다.

    그러다 얼마 전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태어난 옥스퍼드 근교의 블렌하임 궁전(Blenheim Palace)을 찾을 수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는 이유를 들어 아주 최근에야.



    궁전이라면 왕이 한때 살던 곳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블렌하임 궁전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궁전이라 불리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궁전의 첫 주인은 처칠의 8대조인 말버러 공작, 즉 존 처칠(1650~1722)이다. 당시 영국 앤 여왕은 즉위 3년째인 1704년 유럽대륙에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터지자 말버러 공작을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현지로 보냈다. 공작의 임무는 우방인 스페인군을 도와 프랑스군의 빈(Wien) 접근을 막는 것이었다(당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는 한 편이었다).

    공작은 그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여왕은 그 공로를 치하하고 우드스톡(Woodstock)에 있는 왕실 정원을 하사한 데 이어 240만파운드의 거금을 들여 블렌하임 궁전을 지어주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왕이 살지 않았지만 궁전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여왕이 말버러 공작에게 이처럼 특별한 애정을 보인 데는 전략가로서의 능력을 높이 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여왕이 공작의 부인 사라와 둘도 없는 친구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블렌하임이라는 이름은 다뉴브강 인근에 있는 오스트리아 소읍의 명칭에서 따왔다. 말버러 공작이 프랑스군을 대파한 지역으로, 1722년 궁전이 완공되자 여왕이 하사한 이름이다.

    이곳이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역사성보다는 330만평에 이르는 드넓은 영국식 정원과 처칠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필자가 이곳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다.

    필자가 블렌하임을 찾아가던 날, 날씨가 무척 맑았다. 비를 뿌리며 우중충하던 전날 날씨와는 완전 딴판으로,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청명하기까지 했다. 런던 빅토리아역 근처 호텔에 묵고 있던 필자는 패딩턴역까지 가서 그곳에서 북행 열차를 타고 옥스퍼드로 향했다.

    1시간 반 정도를 달려 옥스퍼드에 도착하니 그곳 버스정류장에 빅토리아 코치스테이션(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코치(버스)가 서있었다. 숙소 바로 근처에서 출발하는 버스 교통편이 있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었을 텐데…. 여행에선 정보가 곧 돈이고 시간이란 점을 모르는 필자가 아닌데도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처칠 생가 블렌하임 궁전

    궁전의 첫 소유자이자 처칠의 8대조인 말버러 공작 1세 초상화. 그레이트 홀에 걸려 있다.

    옥스퍼드역에서 버스로 갈아탄 필자는 정원에 난 들길을 따라 30분 정도 더 달린 후 우드스톡 정원 입구에서 내렸다. 블렌하임 궁전은 그곳에 있었다.

    정문에서 궁전까지 평탄한 잔디밭 위로 난 길은 그 끝이 가물가물한 게 어림짐작으로도 1km는 되는 것 같았다. 길 양옆으로는 큰 키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파리 교외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보았던, 사람의 손길이 과도하게 가해져 인공미가 돋보이는 수목들과는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 눈도, 마음도 편했다. 산이 없어 탁 트인 시야에 모든 게 푸르고 깨끗하고 맑아 그 속을 걷는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이날따라 이곳을 찾은 관광객이 무척 많았다.

    궁전의 입구인 2층 구조의 동문(東門)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자 왼편으로 ‘그레이트 코트’라 불리는 본관 건물이 좌우 양쪽으로 날개를 활짝 편 채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그 형태는 말발굽을 닮았다. 건물 정면에 말버러 1세의 공적을 기리는 전승기념탑이 있고 멀리 호수가 보였다. 전망이 참으로 시원했다.

    3층 구조의 그레이트 코트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중앙은 공식행사와 그동안 수집해놓은 기념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동(展示棟)이고, 정면에서 보아 왼쪽(동쪽) 날개 부분은 성주(城主)의 생활공간, 오른쪽(서쪽) 날개 부분은 관리동으로 1층에 레스토랑이 있었다. 궁전은 둥근 기둥과 위아래로 길게 트인 창문이 조화롭고 아기자기한 인물상으로 장식된 벽면 등으로 섬세하면서도 우람해 보였다. 일반인은 전시동과 레스토랑만 출입할 수 있게 제한됐다.

    전시동 입구에는 수탉을 낚아챈 모양의 사자 조각상이 양쪽으로 서 있다. 수탉은 프랑스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조각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육중한 문을 힘껏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크고 높고 화려한 ‘그레이트 홀’이 나타났다. 위를 모두 터놓아 천장까지 높이가 무려 20m. 천장 한가운데에는 1716년 화가 제임스 톤힐이 그린 그림이 있는데, 말버러 1세가 블렌하임에서 대영제국을 향해 무릎 꿇은 모습은 기록화라기보다는 성화(聖畵)처럼 느껴졌다.

    정면의 문 위엔 말버러 공작의 흉상이 놓여 있고, 체크 무늬가 선명한 대리석 타일 바닥 위로는 대형 카펫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 식물문양의 주두(柱頭)를 가진 코린트식 기둥과 조각, 그림, 꽃 장식, 금빛 탁자 등이 어우러져 근엄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 이곳이 무도회장으로 쓰였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처칠의 알몸외교

    홀을 지나 화살표를 따라 걷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들어보니 처칠이 2차 대전 발발 직후인 1940년 5월13일 총리에 취임하면서 국민을 향해 행한 연설 같았다. 조국 영국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국민을 향해 “나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 이외에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다”며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다해달라고 호소한 그 유명한 연설이었다. 당시 처칠의 연설은 국민의 가슴을 움직였다. 영국 국민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그가 명한다면 무엇이든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독일 폭격기들이 연일 영국의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 때 처칠은 연설과 피폭지역 시찰, 그 특유의 ‘V’자 사인으로 실의에 빠진 영국 국민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소련의 스탈린 등과 힘을 합쳐 승리를 약속하는 대서양헌장을 채택했다. 그가 미국을 대(對)독일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벌인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당시 영국은 독일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간이라도 빼줘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처칠과 루스벨트’(존 미첨 지음)에는 이런 비화가 실려 있다.

    “1941년 백악관을 방문한 처칠을 만나기 위해 노크를 하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던 루스벨트는 그만 처칠의 알몸을 보게 됐다. 순간 당황해서 ‘실례했다’며 급히 방을 나가려던 루스벨트에게 처칠은 ‘보십시오, 대통령 각하. 저는 각하께 숨기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며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자신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루스벨트였는데도 처칠은 그의 비위를 맞춰가며 조국, 나아가 자유세계를 지키고자 자신의 온몸을 던졌던 것이다. 이는 지도자라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위신과 이해관계에 따라 처신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처칠은 남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인간적인 매력이야말로 리더십의 요체이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렛대라고 생각한다.

    처칠 생가 블렌하임 궁전

    우람한 본관 입구.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그레이트 홀과 만나게 된다.

    아무튼 그는 미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그리하여 독일을 패망시켰으며, 영국은 그 덕분에 전후 국제질서를 형성하는 주역(UN상임이사국)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종전 직후인 1945년 7월의 총선거에서 자신이 이끄는 보수당이 패배하자 미련 없이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1953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의 대관식에 즈음하여 처칠에게 기사 작위와 훈장을 수여했다. 그해 말 처칠은, 총리직에서 물러난 다음부터 5년에 걸쳐 쓴 ‘제2차 세계대전’이란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 영광까지 안았다. 처칠은 1965년 1월24일 90세를 일기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족이 아니지만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윈스턴 처칠은 1874년 11월30일 새벽 1시30분경, 큰아버지 집인 이곳 블렌하임 궁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제니 제롬이 궁전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들렀다가 예정일보다 두어 달 앞서 그를 낳은 것이다. 처칠은 미숙아로 태어난 셈이다. 아버지 랜돌프 처칠(1849~95)은 말버러 공작 7세의 셋째아들로서, 당시 아일랜드 총독이던 말버러 공작 7세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한편, 어머니 제니 제롬은 미국인으로서 뉴욕의 은행가이며 한때 ‘뉴욕타임스’의 대주주였고, 아메리칸 재킷 클럽을 창립한 경마 애호가 레너드 윌터 제롬의 딸이었다.

    처칠은 어린 시절을 당시 아버지가 체류하고 있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보냈다. 그렇지만 학교만은 잉글랜드에서 다녔다. 처칠은 잉글랜드의 예비학교를 거쳐 명문 사립학교인 해로스쿨에 입학했다. 심술궂은 해로스쿨 교사와 사교에 바쁜 부모님의 무관심으로 그의 학교 성적은 형편없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특히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같은 문장을 몇 번씩이나 외우지 않으면 안 됐는데, 훗날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의 영어 실력이 크게 향상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세상엔 공짜도 없지만 버릴 것도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지능 발달이 늦다는 이유로 처칠에게는 군인 이외에는 맞는 직업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해로스쿨을 졸업하자마자 곧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시켰다. 졸업 후에는 제4 경비병 연대에 투입됐다. 처칠은 그해(1895년) 얻은 휴가를 이용해 쿠바로 가서 반란 진압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스페인 군에 합류했다. 그는 그때의 관찰 기록을 런던의 ‘데일리 그래픽’에 기고해 여행경비로 충당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처칠 생가 블렌하임 궁전

    처칠이 태어난 방.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당시 쿠바로 가는 도중 뉴욕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미국 변호사이자 정치가인 윌리엄 파크 코크란과 만나는 행운도 얻었는데, 훗날 ‘처칠식’ 연설로 불린 화려하면서도 간결한 연설 스타일은 코크란의 매력적인 화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처칠의 문장과 격조 높은 어법은 영국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이 지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영향을 받았다. 처칠은 1896년 9월부터 인도에서 근무하는 동안 기번의 역사서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고전을 섭렵하였을 뿐만 아니라 폴로 경기까지 즐기는 여유를 보였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총리 수락 연설과 같은 명연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처칠의 모험심은 대단했다. 초급장교 시절 휴가기간을 이용해 내전이 한창이던 쿠바로 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후 그는 보아전이 한창이던 1899년 남아프리카에도 다녀왔다. 정치인이 되고 나서는 당적을 여러 번 바꾸었을 정도로 그는 한곳에 조용히 머물기를 싫어했다.

    처칠은 부족한 것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부모가 너무 바빠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과 그의 머리 회전이 좀 느리다는 점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 흥청망청하거나 안이한 생활 태도를 갖기 쉬운데, 그는 평생 절제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또 주위 사람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위기가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말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외쳤다. 그가 총리가 된 것은 그저 출신이 좋아서가 아니다. 남다른 용맹함과 성실함,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에 관한 사진과 신문기사, 편지, 책, 테이프 등을 모아놓은 좁은 방을 지나자 이번에는 화가 처칠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은 갤러리가 나왔다. 그는 “나이 마흔이 넘도록 붓이나 연필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물감과 팔레트와 캔버스의 주인이 되어 그림이라는 새롭고 강렬한 취미의 세계로 흠뻑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랍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가슴 뿌듯해지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유화를 즐겨 그렸다.

    유화는 수채화에 비해 훨씬 여유를 갖고 작업할 수 있는 데다 실수를 하더라도 쉽게 수정할 수 있다. 오일 물감으로 그가 주로 그린 것은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조지프 터너가 그랬듯이 풍경화였다. 물론 처칠에게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는데, 그 점에 대해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처칠 생가 블렌하임 궁전

    조각이 돋보이는 이탈리아식 정원에서 바라본 본관 서쪽 날개 부분.

    “우선 작전을 짜기 위해서는 전쟁을 치를 지역에 대한 철저한 사전 정찰이 필요하며, 자기 나름의 시각에서 들판과 산, 강과 교량, 나무, 꽃, 대기 등 모든 것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이 요구된다. 풍경화 그리기는 어떤 면에서 볼 때 훌륭한 전략을 수립하는 일과 너무나 닮았다.”

    처칠의 그림을 감상하다 세계적인 크리스마스카드 메이커인 홀마크(Hallmark)사의 역사가 바로 그의 풍경화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홀마크의 조이스 홀 사장은 1950년 차트웰에 있는 처칠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그때 그는 처칠의 그림이 아마추어의 것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곧 전시회를 주선하겠노라고 제안했다. 그 일은 1957년 미국과 캐나다 순회전시회로 성사됐다. 홀 사장은 그에 이어 처칠의 그림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게 바로 홀마크 크리스마스카드의 출발점이다.

    풍경화 갤러리로 처칠 기념코너는 끝난다. 하지만 내게는 뭔가 빠진 듯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가 영국 정부로부터 받은 각종 임명장과 훈장, 기사 작위증서 그리고 노벨 상장이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소장했던 귀중한 장서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지키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차트웰 하우스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었다. ‘차트웰 하우스?’ 그게 무엇이냐고 다시 물으니 처칠이 장년 이후에 살았던 켄트주의 ‘처칠 하우스’라고 말해주었다.

    갤러리를 지나 복도를 따라가자 이번에는 여리고 자그마한 꽃무늬가 벽면을 가득 채운 방이 나타났다. 이곳이 처칠이 태어난 방이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한가운데에는 철제 침대가 놓여 있고, 그걸 중심으로 목재 수납장과 탁자, 의자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깨끗하고 품위를 지녔다. 자세히 보니 배냇저고리와 신발, 거울, 조각, 가족사진, 그림 등도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영락없는 아이의 방이었다. 방문객들이 유독 이 방에 오래 머물면서 이것저것 꼼꼼하게 살폈다. 처칠의 어린시절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엄청난 장서와 파이프오르간

    독일 명문의 마이센 도자기들이 한껏 멋을 부리고 있어 ‘차이니즈 캐비닛’이란 이름이 붙은 좁은 복도를 지나자 그레이트 홀 뒤편이 나타났다. 드넓은 영국식 정원을 바라보며 벽쪽을 따라 몇 개의 방이 이어졌다. 그중 2개는 응접실이고 하나는 집필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살롱이다. 살롱 너머 세 개의 방에는 ‘국가룸’이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응접실은 전체적인 색조에 따라 녹색응접실과 적색응접실로 나뉘는데, 벽면은 말버러 가문 유명 인사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린 유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소파와 탁자가 길게 늘어진 샹들리에 아래에 포진돼 있어 방이 매우 넓어 보였다.

    집필실에선 대형 태피스트리가 눈에 띄고, 모든 것을 적색으로 꾸며놓은 살롱의 한가운데에는 긴 식탁이 놓여 있어 한눈에도 만찬장임을 알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 국가적 행사에만 쓰이나 사적으로도 일년에 단 한번 크리스마스 때에 한해 성주가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고 한다.

    벨기에산 대형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세 개의 국가룸은 국가와 관련된 기념품과 하사품들을 전시하고 있어 그런지 장식이나 가구가 화려하고 권위 있어 보였다. 양식상으로는 바로크 스타일이 주조를 이루며, 보물로는 보석함과 조각, 중국제 도자기, 금제 촛대 등이 눈에 띄었다.

    국가룸 다음은 서재 겸 도서실이다. 한 쪽이 매우 길다. 무엇보다 대단한 양의 장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 말버러 9세 때 채워졌다는 게 그곳 안내원의 설명이다. 안내원은 처칠도 젊은 시절 많은 시간을 이 도서실에서 보냈다고 했다. 중앙의 탁자 위에는 현 성주인 말버러 11세가 이곳을 방문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공작이란 영국이 지난 800년 동안 지켜온 귀족제도의 소산으로 귀족 가운데에서도 제일 높은 작위다. 그 아래로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 있다. 이들 5개의 작위는 전통적인 것으로 장자에게만 세습된다. 공작의 직업은 공작(Duke) 그 자체다. 귀족은 아니지만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경(Sir)이나 OBE(Officer of British Empire), CBE(Commander of British Empire) 등이 주어지는데, 처칠에게 수여된 게 바로 경이고 전설적인 록그룹 비틀스에게는 OBE, 축구선수 베컴에게는 CBE가 수여됐다. 하지만 이 작위는 세습되지 않는다.

    이 도서실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한쪽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파이프오르간이었다. 말버러 7세부터 지금의 11세까지 모두 파이프오르간을 즐겨 연주했다고 설명하는 안내원은 음색이 일품이라고 자랑한다. 안타깝게도 그 빼어난 음색을 듣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작은 예배당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 가족을 위한 예배공간인데도 벽면을 장식한 조각은 참으로 대단했다.

    처칠 생가 블렌하임 궁전

    그레이트 홀 뒤에 붙어 있는 녹색응접실. 가문의 인사들을 그린 초상화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볼거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탈리아식 정원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정원이 나그네의 발길을 이끌었다. 그곳은 정원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숲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난 이탈리아식 정원이 기하학적인 구조로 정형적이고 인공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데 반해 영국식 정원은 비정형적이고 매우 자연스럽다. 서구의 정원은 모두 성서의 에덴동산과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 정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성장배경이 다르다 보니 그 같은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영국식 정원이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것은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18세기 이후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도시의 각박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와 세계지배를 위해 세계 각지의 동식물에 대한 학술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인위적이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영국의 풍경식 정원이 태어났다는 것.

    다이애나 신전의 프로포즈

    궁전 한쪽에 위치한 정원은 ‘이런 곳에서 날씨 좋은 날 가족과 함께 피크닉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고도 아름다웠다. 그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얼마쯤 들어가자 1908년 여름, 40대의 장년 처칠이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인 20년 연하의 클레멘타인 호지에(Clementine Hozier, 1885~1977) 양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프로포즈했다는 로마 스타일의 다이애나 신전이 시선을 끌었다. 다이애나는 사랑의 여신이다. 때문일까. 신전은 두 사람이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서로의 입술에 빨려들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서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전 앞으로는 온갖 장미가 만발해 있고 뒤로는 호수가 언뜻언뜻 드러났다. 이보다 멋진 사랑고백 장소는 없을 것 같았다.

    처칠 생가 블렌하임 궁전

    궁전 뒤로 펼쳐진 영국식 정원. 자연 그대로라는 느낌을 선사한다.

    한참을 더 들어가자 작은 폭포 형태인 캐스케이드가 나타났다. 영국인은 그 일대를 풍경식 정원의 극치라 할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우리네 농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라 고향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정원의 끝에 다다르자 드넓은 호수가 펼쳐졌다. 여기저기 보트가 떠다니고 그 한쪽에서 한 노인이 그물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물은 또 얼마나 깨끗한지. 자연의 모습을 최대한 살린 영국식 정원은 인공미가 뛰어난 이탈리아식이나 프랑스식과는 달리 눈을 자극하지 않아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다. 굳이 이 숲속을 택해 사랑하는 여인에게 프로포즈한 것을 보면 처칠도 아마 이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정원을 한바퀴 돈 나는 그가 회고록에 쓴 말을 떠올리며 블렌하임 궁전을 빠져나왔다.

    “내 생애에 두 가지 중대한 결정이 블렌하임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태어난 것이 그 하나이고, 나머지 하나는 클레멘타인과 결혼한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름이라 아직 해가 길게 남았으나 시계바늘은 이미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필자는 이곳에서 한때 그토록 가고 싶었던 처칠의 집이 ‘차트웰 하우스(Chartwell House)’라는 것과 그곳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게 됐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내친김에 처칠이 장년 이후를 보낸 차트웰 하우스를 방문하기 위해 열차로 세븐옥스까지 갔다. 그곳에서부터는 버스로 가야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마침 토요일이어서 차트웰 행 버스는 한 편도 없었다. 택시를 이용하여 다녀오기에는 너무나 부담이 컸다. 결국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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