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 글: 김지현 / 일러스트: 이승애

    입력2004-11-25 1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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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아니, 몰라? 그 사람 있잖아요, 작가.” 재미원로기자 이경원(76) 선생이 어눌한 한국말투와 유창한 영어를 섞어가며 필자에게 문책하듯 강용흘이 누군지 모르냐고 물었다.

    이 선생은 한인 최초의 미 일간지 기자로, 미국사회의 소수인권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추적기사로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다. 특히 1970년대 소수민족 인권운동의 상징인 ‘이철수 사건’을 폭로해 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워싱턴 DC에 있는 언론박물관 ‘뉴지엄(Newseum)’의 ‘20세기를 빛낸 미 언론인 전당’에 동양계 언론인으로는 유일하게 등재돼 있다. 1949년 21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 미국사회에서 40여년간 기자생활을 해온 그는 미국에서는 ‘K.W. Lee’로 알려져 있다. 미국언론계는 그를 ‘아시아 언론인의 대부’로 부른다.

    필자는 평소 언론계 대선배로 존경해온 이 선생과 수년 전부터 가까이 지내왔다. 현재 이 선생은 미주이민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선구자들을 발굴해 ‘외로운 여정(Lonesome Journey)’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 위해 영문으로 집필중이다. 지난해 필자는 이 책의 처음 네 단원을 한글로 번역해 주기도 했다.

    필자는 작가 강용흘(Younghill Kang, 1903~72)의 이름을 2년 전인 2002년 여름, UCLA 캠퍼스 카페에서 이 선생을 만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처음 들었다. 당시 미주 한인사회에는 이민 100주년(2003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와 도서출판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필자도 틈틈이 초기 한인이민 역사를 공부하며 ‘잊혀진 선조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재미50년사(김원용)’를 비롯해 ‘동방으로부터의 이민자들(로널드 타카키)’ ‘미국은 내 마음속에(칼로스 불로산)’ 등 미국의 소수민족 역사와 관련된 책들을 읽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강용흘의 이름은 본 기억이 없다. 특히 한글로 쓰여진 ‘재미50년사’는 초기 이민사의 원전으로 평가받을 뿐 아니라 당시 한인이민사회를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 책에서조차 강용흘에 대해 별다른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튼 미국에서 한인 최초로 ‘초당(The Grass Roof, 1931)’이라는 자전적 영문 소설을 쓰고 그 소설로 창작부문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구겐하임 상(1933~34)을 받은 강용흘이라는 인물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한인 최초’라는 수식어보다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강용흘에 대해 알고 싶었다. 평소 필자는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보다 그의 삶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이경원과 ‘초당’의 첫 만남

    이 선생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두드렸다. 강용흘에 대한 자료가 생각보다는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그가 펴낸 책 3권 중 ‘초당’과 ‘동양 선비 서양에 가다(East goes West, 1937)’에 대한 문학비평이었다. 한국학 관련 도서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 USC 대학 동양도서관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도 참고될 만한 문헌은 없었다. 월요일에 이 선생을 다시 찾았다.

    당시 이 선생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자택이 있는 새크라멘토에서 LA로 내려와 UCLA 대학에서 언론학 특강을 했다. 3시간짜리 강의가 끝난 후 캠퍼스 내에 있는 카페에서 이 선생을 만났다. 강용흘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선생은 자신이 강용흘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 이 선생에게서 들은 강용흘의 삶은 비록 단편적이긴 했으나 내겐 큰 충격이었다. 미국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뒤 비참했던 말년의 삶까지, 이 선생은 10여년에 걸친 강용흘과의 관계를 시간을 초월해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경원 선생과 강용흘의 나이차는 25년이다. 그가 강용흘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일리노이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던 1954년쯤이었다. 그는 ‘인터내셔널 유학생의 밤’ 행사에서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마땅한 소재거리가 없어 고민하던 중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다 한국인이 쓴 작품 세 권을 발견하고는 당장 대출해 읽었다. 그것이 강용흘의 ‘초당’과 ‘동양 선비 서양에 가다’ 그리고 ‘행복한 숲(Happy Grove, 1933)’이었는데 며칠 밤을 꼬박 새며 읽었다.

    이 선생은 “강용흘의 정신세계는 시적이었다. 특히 ‘초당’에 나오는 문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며 “무르익은 황갈색의 벼가 물결치는 논의 풍경, 나는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듣고 있었다. 나의 어린시절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초당’의 전원적 배경이 베토벤의 음악으로 변하는 듯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 우리 동양인은 전원에서 온 사람들이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이 선생은 ‘초당’이 단순히 한국을 묘사한 소설은 아니라고 했다. 강용흘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미국인들에게 동양적인 면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전원사회의 모습을 일깨워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작가 토머스 울프도 강용흘의 ‘초당’을 읽고 자신이 자란 노스캐롤라이나 같다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전원사회의 모습을 묘사한 ‘초당’은 산업사회의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대학원생 이경원은 ‘초당’의 문장을 인용해 자신의 글로 다시 써내려갔다. ‘인터내셔널 유학생의 밤’ 행사에서 그의 연설은 대성공이었다. 학생들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전원의 세계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강용흘을 만나고 싶다.’

    강용흘을 알려면 그 시대배경과 동서양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이경원 선생은 필자에게 누차 강조했다. 당시 미국사회의 소수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이민자로서 ‘제2의 고향’에서 동화돼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외로운 삶의 여정은 동시대를 살았던 이민자가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강용흘의 외로움을 나는 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역경을 겪어야만 했으니까. 강용흘의 감수성은 복잡 미묘하다. ‘은둔의 세계’에서 살던 그가 산업사회에 노출되었으니 복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0년대는 미국사회에서 ‘황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던 때로 동양인들에 대해 말살정책을 폈을 정도다.

    대학원생 이경원은 강용흘의 정신세계에 감명을 받고 얼마 안 있어 그에게 편지를 썼다. 당시 대학 내에서 발간하던 ‘코리아메신저(1951년 창간)’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그는 강용흘에게 언론에 기고한 칼럼이나 저널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강용흘은 모 잡지에 영문으로 번역해 기고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내왔다. 이경원은 이 글을 사촌 김인환씨가 그려준 강용흘의 초상화와 함께 ‘코리아메신저’에 게재했다.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강용흘은 서서히 이경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갔다.

    1955년 대학원을 졸업한 이경원은 ‘얄루(Yalu) 리뷰’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취재차 뉴욕에 가는 길에 강용흘을 만나기로 했다. 학수고대하던 첫 만남이었다. 기대에 부풀었던 강용흘을 만난 순간 이경원의 머릿속은 놀라움과 연민의 정이 교차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난 느낌이었다’는 것. 그가 상상했던 작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은 평범했고 펄 벅의 ‘대지’에 나오는 중국인 노동자 같은 행색이었다. 한국의 기품 있는 ‘선비’를 만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강용흘의 막내아들 로버트가 함께 나와 있었다. 미국에서 처음 보는 한국계 혼혈아였다.

    이듬해인 1956년 이경원은 테네시주의 ‘킹스포트 타임스 앤드 뉴스’에 채용돼 정식 일간신문 기자생활에 들어갔다. 그해 그는 외딴 롱아일랜드에 사는 강용흘을 몇몇 친구와 함께 찾아가곤 했다. 이 선생은 당시 하루가 걸리던 자동차 여행에 함께했던 친구들을 김광한(인디애나대 정치학과), 변해수(컬럼비아대), 그리고 김동환(노스캐롤라이나대, 중학교 후배)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인, 셰익스피어를 외우다

    강용흘 집에 들어서니 쾨쾨한 책 냄새가 진동했다. 강용흘의 모습은 1년 전 뉴욕에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형편없었다.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중국인 노동자 옷을 입고 있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강용흘은 그때 롱아일랜드 인근의 중국인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다. 홍콩 출신인 중국인 농장주가 영어를 잘하는 강용흘을 고용했던 것이다. 그날 강용흘은 모국에서 유학 온 젊은이들을 위해 평소 자신이 아끼던 한용운의 시를 읊어주었다. 새벽녘까지 시에 심취해 암송해 대는 그를 학생들은 넋이 나간 듯이 쳐다보았다. 어느새 강용흘의 눈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뉴욕한인교회가 펴낸 ‘뉴욕한인교회 60년사(1981년 간행)’에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교우 명단이 실려 있다. 가나다 순으로 약 90명이 수록됐는데 맨앞에 강용흘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한국의 정치 교육 문화 또는 경제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많다.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을 비롯해 이승만과 대통령선거에서 격돌했던 조병옥, 국회의원 정일형, 이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장덕수, 문교부 장관을 지낸 오천석 등이다. 강용흘은 1920년대 말 교회 기숙사에서 오천석과 함께 지냈다. 당시 교우 수는 30명 정도였다. 오천석은 교회 60년사에 기고한 ‘향수 짙은 허드슨 강변’이라는 글에서 강용흘을 흥미롭게 그렸다.

    [ 당시 나의 룸메이트는 은행에 다니는 황창하씨였고, 김현철 윤성순 강용흘 이철원씨 등 여러 분이 같이 기숙하고 있었다. 뒤에 ‘초당’을 써서 장안의 종잇값을 올린, 당시는 뉴욕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고 있던 강용흘씨는 물론 재주가 비상한 사람이었지만 기인, 괴인으로도 남 뺨칠 인물이었다. 그는 가끔 밤중에 우리 방으로 뛰어들어와 자고 있는 황씨와 나를 깨워 앉혀놓고는 “셰익스피어보다도 훌륭하고, 밀턴도 뛰어넘을 만한 걸작을 지었으니 한번 들어보라”고 명령하고는 기고만장한 폼으로 자작시를 줄줄 외곤 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우리는 눈을 비비며 어서 끝나기만 기다렸지만 그의 시는 기숙사 옆을 흐르는 허드슨 강물처럼 계속 흘러나오는데 질색이었다. 우리는 그를 천하제일의 시인이라고 추켜세우며 달래서 겨우 자기 방으로 가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소년시절에 읽은 당시(唐詩)를 줄줄 외웠을 뿐 아니라, 서양 명작품도 거침없이 암송하였다. 그래서 그는 뉴욕대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 높은 교수로 환영받았다. ]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비밀문건에 따르면 주한 미 군정청에서 돌아온 강용흘에 대한 FBI의 비밀수사는 에드가 후버 국장이 직접 지휘했다. 그러나 5년에 걸친 추적 수사는 아무런 혐의를 발견하지 못한 채 종결됐다.

    강용흘에 대한 FBI의 수사는 국내는 물론 뉴욕지부를 중심으로 LA, 하와이, 워싱턴DC 등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이들 문건 가운데 일부 기록은 까맣게 지워져 있다. 이는 FBI가 당시 특별수사관이나 정보원 또는 밀고자, 그리고 강용흘이 근무했던 기관이나 단체 관계자들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한국인이 있다는 문구도 보였다. 수사관들의 보고서에는 ‘믿을 만한 제보자’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했다고 기록돼 있으나 대부분 신빙성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예를 들면 강용흘을 ‘공산주의자’ ‘알코올 중독자’ ‘사기꾼’ 등으로 몰아붙인 내용들과 그의 문학성에 대한 잘못된 평가들이다.

    1951년 2월21일 FBI 하와이지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의 ‘사실개요’란에는 ‘믿을 만한 정보제공자’ ○○○가 제공했다는 강용흘의 신상기록이 적혀 있다. 가장 기초적인 정보인 이 기록에서조차 오류가 발견된다. 기록 중 일부다.

    [ 강용흘은 한국의 함경도 출신, 1920년대 학생으로 미국에 입국했다. 그는 먼저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녔고 후에 보스턴대에 입학했다. 셰익스피어 문학에 통달한 수재로서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에 유창하다. 강용흘은 이상주의자이며 몽상가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다. 또 그는 반이승만적이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그리고 비정치적인 문학가로 명망을 떨치고 있다. 1920년대에 펴낸 ‘초당’은 과대평가 됐다. ]

    앞에서 보았듯이 ‘초당’은 1931년에 출판된 책이다. 출판연도조차 틀린 것이다. 이같이 잘못된 정보들은 뉴욕이나 LA, 그리고 호놀룰루지부 보고서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미 공개적으로 알려진 내용도 다른 식으로 각색되거나 작문돼 있었다.

    FBI 호놀룰루 보고서에는 특별수사관이 정보원의 진술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강용흘의 신상과 특성이 눈에 띈다.

    [ 강용흘이 셰익스피어 문학의 최고 경지에 달했을 때 셰익스피어 37권의 내용과 중국 고전 여러 권을 모두 암송할 정도의 진기한 기록을 달성했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한국어처럼 잘하고 특히 중국 고전에 나오는 시 구절을 잘 쓴다. 강용흘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만약 남한정부가 그에게 영향력 있고 지도력 있는 자리를 주었다면 아마도 그는 진심으로 그 정부를 위해 일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

    미개한 나라에서 온 순박한 귀족

    수사관은 또 다른 정보원의 말을 인용해 “강용흘은 시를 쓸 때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보헤미안’ 타입의 사람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없이 말했다”고 묘사하고 “한국의 정치운동이나 정치활동 등은 전혀 관심 밖이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는 강용흘에 대한 소문도 기록돼 있는데 대충 정리해보면 이렇다. “최근 강용흘이 정부기관에 근무한 경력으로 미 시민권을 획득했다” “강용흘의 저술 작품 중 상당 부분은 부인이 썼다” “‘초당’도 원래 부인이 저술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며, 강용흘이 뉴욕대에서 가르칠 때 강의 노트도 모두 부인이 써주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에 대해 큰아들 크리스토퍼 강은 강하게 부정했다.

    “FBI 파일에는 아버지가 책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고 기록되어 있다. 20세에 미국에 와서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빨리 배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의 글을 보면 각자의 스타일이 나타난다. 나는 어머니의 글과 아버지의 글을 구별할 수 있다. 책은 아버지의 글이다. (중략) 아버지의 문체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미숙하다. 미국 언어로 보자면 아버지는 미개한 나라에서 온 순박한 귀족인 것이다.”

    강용흘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이경원 선생도 대필설에 대해 논평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강용흘은 독특한 작가이다. 이민자이기 때문에 영어문체가 부드럽지 못하다. 하지만 그게 강용흘의 매력이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미국인에게서는 그런 문체가 나올 수 없다. 특히 부인 프랜시스 킬리의 문장력은 내가 잘 안다. 아주 전통적인 영문학 타입이고 부드럽다. 강용흘의 문장은 감정이나 소재, 그리고 배경에서 한국 스타일이다.”

    미국 내 임시정부 추진 구상

    강용흘은 1945년 1월20일 LA에 도착해 그 다음날 저녁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문학강연회를 가졌다. 이 사실도 정보원에 의해 FBI LA지부에 보고됐다. 1951년 3월13일자 FBI LA지부 보고서는 당시 LA지역 한인사회에서 발행된 주간지 ‘코리아 인디펜던스(Korean Independence)’에 실린 강용흘의 강연 기사를 인용했다.

    친(親)공산주의 논조를 띤 이 신문은 당연히 FBI의 사찰대상이었다. 편집국 필진에는 현순 목사의 아들인 피터 현이 활동했는데 그는 저서에서 자신이 동포들로부터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강용흘은 ‘코리아 인디펜던트’나 이 신문을 중심으로 한 어떠한 정치적 그룹들과도 관련이 없었다.

    한편 FBI LA지부 보고서에는 정보원들의 말을 인용해 “강용흘이 지난 수년 동안 문학과 동양예술에 대한 강의를 위해 수차례 LA를 방문했다. 1945년에는 종전 후 한국이 미국과 소련 제도의 장점을 취하고 한국의 문명을 가미해 더 좋은 국가형태를 갖춰야 한다는 정치적 발언을 하기도 했다. 강용흘은 미 군정청에서 퇴역 후 미국의 대한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표명하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1951년 4월13일 FBI 워싱턴사무소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 적혀 있다. 강용흘이 한때 미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구상했다는 내용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강용흘과 시카고의 OOO(이름 삭제)가 1942년 3월13일 미국 내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후원을 얻기 위해 미국 각지를 여행했으며, 강용흘은 임시정부의 수상을 맡도록 돼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또 “강용흘이 1941년 3월29일 ‘외국태생을 보호하는 아메리칸위원회’에서 연설했으며 1948년 4월24일에는 ‘정의와 민주를 위한 아메리칸연맹’이 주최한 일본상품 배격운동에 서명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강용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강용흘이 1898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고, 일부 문헌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그러나 FBI는 연방이민국 중앙사무소 기록을 기초로 1903년 5월10일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용흘이 1922년 5월6일 미국에 입국할 때 자신의 출생연도를 1903년으로 썼기 때문이다. 강용흘의 영문표기는 ‘Younghill Kang’이지만 입국 당시 이민관은 강용흘의 발음을 듣고 입국카드에 ‘Yong Oru Kong’이라고 적었다.

    “강용흘 심문을 승인해달라”

    강용흘은 함경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1918년 함흥의 영생중학교를 졸업한 뒤 캐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1921년 캐나다로 가서 댈후지대학을 다녔다. 그 후 미국으로 와 보스턴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했다. 1931년 ‘초당’을 발표했을 당시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아 수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동아일보도 1931년 12월10일자에서 춘원 이광수의 글 ‘강용흘씨의 초당’을 게재해 한국문단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일제하에서 한인으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미 문단 등용에 성공해 출세 길이 보였다. 그러나 ‘한국인 최초의 미국작가’ 강용흘의 후반부 인생은 미스터리에 가까울 정도로 비참했다. 왜 그랬을까?

    FBI 뉴욕지부는 후버 국장에게 1951년 11월30일자로 종합보고서를 올렸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수사한 강용흘에 관한 자료를 분석한 것이다. 결론은 ‘강용흘 인터뷰’로 귀착됐다. 확증은 없지만 심문을 하면 무엇인가 캐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었다.

    [ 정보원들이 제공한 자료들을 분석할 때 강용흘이 확실히 공산당원인지 여부에 대해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이 케이스의 결론을 내리기 전에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적으로 실시해야 할 과제로 강용흘을 인터뷰함으로써 향후 보안상이나 또는 잠재적 위험요소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국장의 지시를 기다린다. ]

    이 종합보고서에는 강용흘이 구겐하임 펠로십을 다녀오게 된 이면을 포함해 뉴욕대에 재직하게 된 경위는 물론 이민국 기록, 경찰국의 범죄기록도 조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지역 선거사무소, 신용조사기관 등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롱아일랜드 헌팅턴시 경찰국은 FBI 특별수사관 요청에 의해 강용흘과 직계 가족들의 전과기록을 조사했으나 어떤 전과도 발견하지 못했다. 뉴욕 경찰국의 조사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강용흘에 대한 조사작업이 별다른 성과없이 마무리됐다고 여긴 FBI 뉴욕지부는 1951년 12월29일 워싱턴 본부의 후버 국장에게 강용흘을 직접 심문하겠다고 허가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후버 국장은 1952년 1월7일 뉴욕지부에 긴급전문을 보내 ‘강용흘 인터뷰’건을 중지시킨다. 강용흘은 언론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고 특히 광범위한 수사를 벌였음에도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기에 자칫하면 FBI가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음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뉴욕지부는 1952년 1월29일자로 후버 국장에게 다시 강용흘에 대한 인터뷰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한다.

    [ 그동안 수집한 정보에서 정보원들이 강용흘을 친공산주의자로 지적했음에도 우리는 강용흘이나 그의 부인에 대해 확증을 잡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강용흘에 대한 인터뷰는 뉴욕에서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에 연관된 정보를 수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강용흘을 직접 인터뷰하면 어떤 정보가 나올지 현재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강용흘이 한국인이고 한인들의 활동을 잘 알고 있음에 비추어 그에 대한 인터뷰가 필요할 것으로 보여 재차 승인을 요청한다. ]

    결국 FBI 후버 국장은 1952년 2월19일자 지시를 통해 뉴욕지부에서 끈질기게 요청한 ‘강용흘 인터뷰’ 건을 승인한다. “FBI를 난처한 입장에 처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당부와 함께.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FBI 뉴욕지부는 1952년 3월13일자로 에드가 후버 국장에게 “현 시점에서 강용흘에 대한 인터뷰는 FBI를 난처하게 만들 소지가 있다고 사료되어 중단한다”는 회신을 보낸다.

    FBI 수사는 그야말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지난 5년 동안 뉴욕,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하와이 등 4개 지역 FBI가 국가공권력을 동원하고 수십 명의 정보원을 풀어 ‘강용흘=공산주의’의 단서를 찾으려 했으나 허사였음을 자인한 것이다. 하지만 강용흘은 이미 FBI의 끊임없는 미행과 도청, 감시로 미 주류사회로 진입하는 길이 철저히 봉쇄돼버린 뒤였다.

    강용흘은 FBI의 무리한 수사나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가족에게조차 불평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현실에 순응하고 살았다. 동양의 문인들이 합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고상하고 장엄하게’ 가난한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아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는 한번도 친구들에게 힘든 내색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빈곤했다”고 말했다.

    이경원은 강용흘을 ‘자존심이 충만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시인임이 느껴졌다고 말한다. 이경원은 “그만한 자존심이 있었기에 외로운 이민생활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내심으론 ‘너희가 나를 아느냐’ ‘너희가 공자를 아느냐’고 세상에 소리쳤을 것이란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허세나 허풍을 떨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강용흘은 없는 것을 있다고 주장하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때 이경원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창밖이 훤히 밝아오곤 했다. 그러면 강용흘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경원이, 우리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그는 외로웠다.

    강용흘과 이경원은 서로 영어로 대화를 나눴지만 때로는 고향 함경도 사투리와 개성 사투리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한때 이들은 영문잡지를 간행할 계획도 세우고 참여할 사람들의 명단을 짜기도 했다. 영문잡지 발간 이야기는 강용흘이 먼저 꺼냈다. 그리고 참여할 사람들은 이경원이 접촉하기로 했다. 그 명단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넥타린(복숭아의 일종) 품종을 개량해 성공한 ‘김 브라더스’상회의 김호, 국민회 회장을 역임한 한시대, 후에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시카고에서 큰 호텔을 경영한 한순교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민족문학에서 세계문학으로

    1941년 12월7일 ‘진주만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고립을 지향하는 나라였다.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자로 영웅대접을 받은 찰스 린드버그조차 미국의 참전을 반대할 정도로 미국은 세계와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진주만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세계를 향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니 동양에 대한 미국인의 무지는 탓할 게 못 됐다.

    그런 미국인에게 강용흘의 ‘초당’은 미지의 동양세계를 알리고 이해시키는 고리 역할을 했다. 여기서 강용흘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강용흘은 동양인 이민자로서 최초로 미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을 써 전세계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중국의 임어당은 영어로 미국에 중국문화를 소개한 사람이지만 이민자는 아니었다. 필리핀 태생의 이민노동자 칼로스 불로산은 그의 저서 ‘미국은 나의 마음속에(1946년)’에서 강용흘로부터 영감을 얻어 자서전을 쓸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강용흘의 작품은 동양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지하에서 바깥세상에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고 이경원은 말한다.

    강용흘의 작품을 두고 한때 한국에서 한국문학으로 볼 것인가 미국문학으로 볼 것인가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한국어로 쓰여지진 않았지만 소재가 한국이라는 이유로 ‘서자’ 취급을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논쟁에 강용흘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가 남긴 강의록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 위대한 문학은 문화나 민족이나 인종에 국한되지 않는다. 언어의 차이나 문화 또는 사상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위대한 문학 안에서의 인류는 공통점을 찾아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19세기 초 괴테는 에케르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민족문학은 의미가 없다. 이제는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 모든 사람은 그것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

    이승만 표적 삼은 ‘궁정의 살인’

    강용흘은 1967년 그의 유일한 희곡 작품인 ‘궁정의 살인’의 집필을 끝내면서 이승만 정권을 풍자한 것이라고 이경원에게 설명했다. 이 작품은 고려말기 왕실의 음모를 그리고 있다. 강용흘은 이경원에게 자신의 극본에 대해 조언을 바랐으나 이경원은 한국 극작가 이근삼을 소개시켜줬다. 그 후 강용흘이 이경원에게 보낸 편지다.

    [ 자네 편지 잘 받았네. 이근삼씨를 지난 토요일 뉴욕 브로드웨이와 32가에 있는 마티닉호텔에서 만났네. 그를 이번 토요일 저녁에 같은 장소에서 또 보기로 했다네. 자네가 지시한 대로 연극 극본 타자본을 그에게 건네줬네. 자네에게도 토머스 M. 패터슨 교수를 위해 한 부 보냈네. 그가 좋아했으면 하는데. 그리고 독일계 화가가 그린 내 초상화를 첨부하네. 자네가 갖게. 채플힐에 언제든 내려가 토머스 울프에 대한 강연을 하길 바라고 있네. 곧 다시 편지하지. ]

    당시 미국을 여행중이던 이근삼은 이런 인연으로 강용흘의 ‘궁정의 살인’ 타자본 원고를 받을 수가 있었다. 이 작품은 필라델피아에서 공연됐으며 나중에는 서울에서도 무대에 올랐다.

    강용흘은 죽기 1년 전부터 캘리포니아주에서 살고 싶어했다. 1971년 평소 친분이 있었던 최봉윤 교수를 만나러 캘리포니아주를 방문해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든 것 같다. 최봉윤 교수는 UC버클리대를 나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빨갱이’라는 모함을 받았었다. 강용흘은 당시 최 교수의 저서 ‘미국 속의 한국인’ 머리말을 써주었다. 강용흘은 부인 프랜시스가 사망한 1970년 11월16일 이후 더욱 외로움을 느꼈다. 아들처럼 생각했던 이경원도 그때는 동부를 떠나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강용흘이 최봉윤 교수에게 보낸 1971년 1월18일자 서신을 보면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할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 요즘은 내 생활에 변화를 주려고 하네. 이 집을 팔고 이사를 할까 생각해보았네. 캘리포니아가 어떨까 생각중이네. 만약 대학도서관(UC버클리) 근처에 작은 집이나 아파트 또는 호텔방이 나오면 알려주게. 나는 이 큰 집에 혼자 있네. 지난번 우리가 버클리에 있을 때 묵었던 호텔방은 한달에 얼마나 하겠는가? 다른 데도 괜찮으니 알려주게. 만약 자네와 가까운 곳이 아니라면 샌프란시스코나 그 남쪽 부근도 괜찮다네. ]

    강용흘은 미 공군에 복무하고 있는 큰아들 크리스토퍼가 캘리포니아주에서 근무할 때 최봉윤 교수에게 편지(1969년 2월16일)를 보내 “어쩌면 아들이 자네를 방문할지도 모르겠네. 그러면 아들에게 한국음식을 대접해주게. 돈은 내가 나중에 지불하겠네”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용흘은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하지 못했다. 이즈음 뇌졸중의 초기 증세가 나타나고, 또 롱아일랜드의 집이 의문의 화재로 불타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강용흘은 자신의 삶을 예견한 듯 1969년에 소장하고 있던 장서 1만5000권을 고려대에 기증했다. 그가 장서를 고려대에 기증하게 된 것은 아마도 1950년대 영문과 교수였던 이인수 교수와의 교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강용흘은 5000권을 보내는 데만 400달러가 지불됐다며, 최봉윤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 좀더 싸게 보내는 방법은 없는지 문의하기도 했다.

    한줌의 유해로

    1970년 말 부인 프랜시스가 사망하고 난 후 강용흘은 롱아일랜드 헌팅턴 다운타운을 자주 방황했다. 구세군에서 사 입은 1920~30년 스타일의 코트에 얼굴을 훔쳐 닦은 것처럼 아주 더러운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 영락없는 ‘다운타운의 캐릭터’였다고 강용흘의 큰아들은 전했다.

    1972년 12월11일 강용흘은 마침내 플로리다주 새틀라이트 비치의 카네기 가든 병원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병원에서조차 정확한 병명이 뇌졸중인지 심장마비인지 몰랐다. 그는 사망하기 4개월 전 당시 플로리다에 사는 큰아들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경원은 강용흘의 사망소식을 1972년 12월14일자 뉴욕타임스에 난 부고기사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 그는 “강용흘은 한국의 혼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했다.

    동양과 서양 문화의 퓨전화를 꿈꾸던 천재작가 강용흘. 그의 시신은 묘비도 없이 이국땅에 한줌의 재로 뿌려졌다. 강용흘의 죽음이 알려지자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롱아일랜드 헌팅턴시에서는 주민들이 추도식 준비에 나섰다. 생전에 강용흘이 사용했던 헌팅턴 다운타운의 빈 사무실을 시 직원들이 청소하러 들어갔을 때, 방에선 빈 ‘보드카’ 병만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강용흘에게 있어 토머스 울프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가다. 강용흘의 ‘초당’이 출판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토머스 울프를 만났고, 얼마나 친근하게 지냈는지에 대해 이경원에게 보낸 1957년 8월31일자 편지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당시 킹스포트 타임스 앤드 뉴스지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던 이경원은 종종 강용흘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토머스 울프에 대해서도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편지내용은 킹스포트 타임스 앤드 뉴스지 1957년 10월6일자에 실렸다.

    [ 토머스 울프에 대해 기사를 작성한다니 기쁘네. 그와의 교류 기간은 10년뿐이지만 미국에서 사귄 친한 친구 중 한 명일세. 뉴욕대의 영문학과 교수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지. 그의 책상은 내 자리에서 가까운 곳에 배치돼 있었지. 그때가 1929년 9월로 1학년생들에게 ‘영문학과 미국문학의 사고와 형태’에 대해 가르칠 때였네. 당시 영문학과의 학장인 호머 와트 교수가 울프를 내 자리로 데리고 와 소개해주었지.

    장신과 커다란 손, 그리고 친근한 눈빛이 감동을 주더군. 울프는 종종 대학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나를 초대했는데 우리는 셰익스피어, 밀턴, 그리고 현대작가 등 많은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지. 가끔씩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차이나타운에 나가 중국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눴는데 울프는 중국술을 아주 좋아하더군.

    내가 1928년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편집직원으로 근무할 때 ‘초당’ 집필을 시작했는데 울프는 내 원고에 관심을 갖고 읽어보기를 원했지. 그래서 나는 ‘초당’의 처음 네 단원을 그에게 읽어보라고 넘겨주었고, 그가 나중에 그 원고를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Charles Scribner’s Sons) 출판사의 맥스웰 퍼킨스 편집장에게 갖다 준 걸세. 퍼킨스는 그 해 가을 울프의 ‘천사여, 고향을 돌아보라’의 편집을 맡았던 사람이네. 퍼킨스 편집장이 나에게 500달러의 선금을 주고 ‘초당’을 출판하기로 약속했을 때, 울프는 아주 기뻐했다네. 그가 행복해하는 것이 꼭 그의 거대한 체격과 비례했지.

    울프는 아이스박스를 책상 삼아 습작을 했다네. 그는 키만큼 먹고 마시고 썼지. 한번은 아내와 함께 브루클린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는데 그는 내 아내에게 차를 끓여달라고 부탁했지. 부엌의 싱크대에는 설거지를 하지 않은 접시가 쌓여 있었고 아내는 차를 따를 만한 깨끗한 컵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네. 방엔 세탁하지 않은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지. 그는 항상 글을 쓰고 있었고, 소잿감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은 다른 일이 들어올 새가 없었지. 내가 저녁식사 초대를 하면 보통 2시간 정도 늦게 오더군.

    울프가 책에다 쓴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우리들의 대화내용이었다네. 예를 들면, 그가 싱클레어 루이스를 런던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그 내용이 그의 책에서도 언급되지. 울프는 하버드대에 있을 때 중국학생의 영어를 도와준 적이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 중국인도 ‘미스터 왕’이란 이름으로 그의 책에 나온다네. 내가 구겐하임 펠로십으로 로마에 있을 때 울프는 파리에 있었는데 나더러 그리로 오라는 연락이 왔으나 나는 갈 수가 없었네. 나중에 내가 파리에 갔을 때는 울프는 이미 베를린으로 떠난 뒤였지. 그리고 미국에 돌아온 그는 1938년 미국의 볼티모어에서 37세의 나이로 죽었네. 형제를 잃은 기분이었다네. ]

    강용흘과 토머스 울프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강용흘이 함경도 시골마을 출신이듯이 울프 또한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애팔래치아 산맥의 작은 타운에서 자랐다(미국 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은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태백산맥쯤 된다. 유럽에서는 알프스 산맥으로 보면 된다). 둘 다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책과 이야기를 통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특히 울프가 강용흘을 만난 시기는 그가 ‘시간과 강물에 대해서(1935)’를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울프는 강용흘을 만나 동양의 시간관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1931년 2월 ‘초당’이 출판되자 울프는 ‘뉴욕포스트’에 ‘타고난 작가’라며 강용흘을 극찬하는 서평을 썼다. ‘초당’으로 유명해진 강용흘이 구겐하임 펠로십을 받아 ‘동양 선비 서양에 가다’를 집필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날 때도 울프의 추천사가 큰 역할을 했다.

    펄 벅과 퓰리처상 다퉈

    소설 ‘대지’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S. 벅의 고향은 웨스트 버지니아주 힐즈버러다. 이경원은 1958년 웨스트 버지니아주 찰스턴에 있는 ‘찰스턴 가제트 신문사’에 있을 때 결혼했다. 그는 신혼여행으로 펄 벅의 고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펄 벅에 대한 기사를 썼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곳 사람들이 펄 벅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3년 이경원은 실제로 펄 벅을 만났다.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찰스턴 가제트 신문사에서 ‘올해의 여성’으로 펄 벅을 초대했던 것이다. 이경원은 대지가 출간된 1931년 강용흘의 ‘초당’이 출간된 것을 기억해내고는 펄 벅에게 다가가 물었다.

    “내 친구 강용흘을 아세요.”

    “그럼요. 참 유감이었지요.”

    펄 벅은 그 해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용흘의 ‘초당’이 ‘대지’와 퓰리처상을 놓고 경쟁했다는 것을. 펄 벅은 1932년 퓰리처상을 받은 후 강용흘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녀는 또 강용흘을 친동생처럼 생각했다. ‘동양의 가장 총명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강용흘을 격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인연을 맺게 된 펄 벅은 당시 강용흘이 고정 직업 없이 강의를 하며 떠돌아다닐 때 추천서를 써주었고 강의 섭외를 대신해주기도 했다. 이경원도 펄 벅의 추천서를 게재한 전단을 만들어 대학이나 로터리클럽 등에 발송하는 등 강용흘의 무보수 에이전트 노릇을 했다.

    한국에서 온 대령의 황당한 요청

    한편 ‘펄 벅의 날’ 행사에 참석한 지역 명문대 웨스트 버지니아 테크(W. Virginia Institute of Technology) 경제학 박사 로버슨 교수는 이경원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전했다. 10년 전 임병직(이승만 정권 당시 외무장관)이라는 사람이 찰스턴에서 40마일 떨어진 몽고메리 타운을 찾았다. 임병직은 당시 강용흘을 위해 강연을 주관하고 있던 로버슨 교수에게 자신을 ‘벤시 림 대령’이라고 소개하고는 이렇게 속삭였다는 것이다.

    “강용흘을 초청하지 마시오. 그는 공산주의자요.”

    이 말을 들은 로버슨 교수는 “그러냐”며 “조심하겠다”고 대답했고, 이에 임병직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로버슨 박사는 누구보다도 강용흘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재직중인 웨스트 버지니아 테크는 바로 강용흘의 장인이 설립한 대학이었다. 장인 조시아 킬리는 초대 총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웨스트 버지니아주에서는 알아주는 부유층 인사였다. 뿐만 아니라 로버슨 박사는 자유주의자(당시는 사회주의와 가까웠음)였다. 이 미국 교수는 한국에서 왔다는 자칭 ‘대령’의 얼토당토않은 요청에 황당했었을 것이라고 이경원은 설명했다.

    이승만과 강용흘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워싱턴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할 당시 강용흘은 그를 위해 영문성명서 등을 대필해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강용흘이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사회적으로 자신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워싱턴에 있으면서 정치로비를 하고 있을 즈음 강용흘은 언론, 문화, 예술의 메카인 뉴욕에서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실제로 강용흘은 1928년부터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편집을 맡는 등 미국사회의 지식인이 됐다. 한국인, 동양인의 입장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지식인의 역할도 했다.

    이경원은 “특히 1920년부터 1950년까지 강용흘의 업적은 글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미국에 알리는 창구였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강용흘은 당시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뉴리퍼블릭’ ‘네이션’ 등 유수 언론기관에 한국의 독립문제, 일본의 제국주의 문제 등에 대해 기고했다. 어찌 보면 그는 안창호, 이승만보다도 영향력이 더 컸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한국을 알리면서 한편으론 미국 지식계급의 눈높이에 맞추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강용흘은 정신운동을 통해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이승만은 강용흘을 견제해야 할 위험인물로 낙인찍고, 나중에 그를 고립시키기 위해 임병직 등을 미국의 산골까지 보내 방해공작을 펴지 않았나 싶다. 이승만은 추종자들을 시켜 강용흘을 ‘빨갱이’라며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당시 유학생이던 이경원과 친구들은 강용흘을 만나러 롱아일랜드에 갈 때도 남모르게 가야 했다고 밝혔다.

    2004년 6월22일 필자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살고 있는 강용흘의 큰아들 크리스토퍼 강(68·한국명 강경구)과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그는 “아버지는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애국자였고 한국의 자유를 원했다”고 말했다. “정치적인 영향을 받아 결과적으로 강용흘의 말년이 궁핍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정부의 수사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아버지가 대학에서 정교수가 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아무데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것이 공산주의자라고 밀고한 이승만 때문이었는지, FBI 수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무능력해서였는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1950년부터 우리 가족은 아주 가난하게 살았고 FBI로부터 도청을 당하는 등 감시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FBI를 증오한다”고 토로했다.

    한국정치 비밀보고서

    정치와는 무관한 작가 강용흘이 정치보고서를 쓴 적이 있다. 그는 1946년 주한 미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초청을 받아 미 군정청(USAMGIK) 출판부장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그후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주한 미 지상군(USAFIK) 제24군단 민간정보부대의 정치분석관 겸 자문관으로 활동했다. 해마다 미국정부는 과거의 비밀문건들을 규정에 의거 ‘비밀해제’ 조치했다. 미 군정 시절과 한국전쟁 중의 비밀문건 중 상당수가 이미 해제됐다. 강용흘이 작성한 비밀보고서도 그 중 하나다. 현재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해 학술기관단체들이 이 같은 비밀해제 문건을 수집하고 있다.

    강용흘이 1947년 8월25일자로 작성한 문건은 미 국립기록보관소(NARA)에서 45년 동안 먼지 속에 파묻혀 있다가 지난 1992년 ‘비밀취급’에서 해제됐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실패할 경우 미국의 한국에 대한 외교정책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는 1947년 당시의 남한 정세가 상세하게 들어 있다. 정치분석보고서라기보다는 르포 작가의 논픽션이라 할 만하다.

    강용흘의 역사관이 번뜩이는 이 보고서에서 그는 미국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국제적 책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따졌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민주주의’와 ‘한국화(Koreanization)’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누구 때문에 한반도가 분단 상태로 가고 있는지를 강용흘은 이미 50여년 전에 짚고 있었다. 필자는 이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읽어내려 가면서 오늘의 한국을 보았다.

    [ 미군이 1945년 해방군으로 한국에 상륙했을 때, 그 나라는 ‘희망’과 ‘환희’의 땅이었다. 한국사람은 미군을 ‘해방자’로, 그리고 ‘친구’로 환영했다. 하지만 2년이 못 되어 남한은 좌익과 우익의 대결로 혼란상태에 빠졌다. 이제 미군은 한국인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대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미 군정청의 스타일이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제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나쁜 경찰국가의 하나이다. ]

    강용흘은 또 당시 혼탁한 남한의 안정을 위해 미 군정이 취할 정책으로 13개 항목을 제시했는데 하나같이 충격적인 내용들이다.

    [ 현재의 경찰시스템을 폐지하고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혁명적인 방법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3개월 후에 김구를 송진우 암살과 관련해 구금하고, 이어 이승만을 구속한다. 이승만에 대한 체포 혐의가 될 만한 사항은 충분하다. 그러면 여운형 암살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경찰국장인 장택상을 즉시 파면하고, 그의 추종 간부급 수백 명도 축출해 대대적인 경찰개혁에 나선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주도하는 ‘한국민주당’을 해체한다. 우리는 장택상이 여운형을 암살 전날에 만나 국외로 떠날 것을 권고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여운형이 거절하자 그들이 살해했다. 장택상은 이승만 박사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이다(여운형이 암살 되자 이승만은 미망인에게 조문을 보냈다). 여운형의 암살은 남한 정국 변화의 분수령이 됐다. 이승만 박사와 김구 등과 그의 추종세력 20여명을 퇴출시키고 경찰개혁을 단행하고 나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조선청년동맹, 한국광복청년회, 서북청년회 등을 포함한 18개 청년단체를 즉시 해산시킨다. 이 같은 단체들이 해산되면 한국인들은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김규식과 같은 양심적인 중도파를 지도자로 세워야 한다. 이들에게 미 군정이 힘을 실어주면 된다. ]

    한국인에게 새로운 정신을

    강용흘의 보고서는 정치개혁뿐 아니라 교육,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의 주요 현안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놓고 있어 한국현대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보편화된 성인교육시스템의 도입을 강조했고, 경제분야에서는 “1934년 현재 한국의 금생산량 가치가 전체 지하자원의 59.3%로 6917만원”이라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열거했다. 문화분야는 자신이 작가이기에 남다른 열정을 담았는데 “한국의 좋은 소설이나 시, 극본 등을 번역해 미국 독자들에게 읽혀야 한다.” 또 “춘향전이나 심청전 등을 미국 관객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가 안타깝게 표현한 대목도 있는데 “남한의 불안한 정국 때문에 북한으로 가버린 훌륭한 예술인들을 다시 불러야 한다”면서 “나는 적어도 50여명의 월북 예술인 명단을 갖고 있다”고 적었다. 보고서의 결론도 시 구절을 연상케 한다.

    [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기다려왔다. 아메리카인들이 우리에게 약속한 자유와 독립을. 그러나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일어나야 한다.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정신을’, 그리고 우리들에게 ‘새로운 모럴’을 탄생시켜야 한다. ]

    미 군수사당국은 1946년 8월19일 서울 미 군정청 공보실 주선으로 열린 강용흘 부임 기자회견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이 회견 내용은 정보공유를 위해 추후 1950년 8월29일자로 FBI에 보내졌다. 인터뷰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 강 : (모두발언) 나는 정치에 대해 많은 사항을 알지 못한다. 한 가지 내가 아는 바는 미국정부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의 독립정부 설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여론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이 세계에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강대국이 존재하고 있다. 양국은 상호 우호관계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이 한국에서 철수한다면 한국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미묘한 위치에 있다. 과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모두 한반도에서 치러졌다.

    질문 : 미국인들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강 : 아주 극소수만 알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 일본의 선전 때문에 잘못 알려졌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주류 언론들이 한국을 알리기 시작했다.

    질문 : 한국에서의 당신 임무에 대해 알려주기 바란다.

    강 : 그 대답은 내가 말할 성격이 아니다.

    질문 : 당신은 정치인 OOO[이름삭제]에 대해 잘 아는가?

    강 : 아니다. 아주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이 자신을 ‘정치인’이라고 칭하는 데 대해 관심이 없다. 본질적으로 나는 정치인을 존경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나라에서도 정치인들에게 조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정치인들이나 미국의 정치인들을 믿지 않는다. 오직 진정한 예술가만이 양심적이고 정직할 뿐이다. 정치인들은 다음 선거에서 이기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

    미 군부가 사회주의자로 낙인찍다

    강용흘이 미국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점에 대해 이경원 선생은 “강용흘은 자신이 미국 헌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고 분석했다. 강용흘은 1947년 7월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인 앨버트 웨드마이어 중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그와 만난 자리에서 “남한은 지독한 경찰국가 중의 하나”라고 보고해 주위의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강용흘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한국계 미국학자 워터 K. 류도 저서 ‘코리’에서 “강용흘이 미 군정시절 16개월간 한국에 근무하면서 미 군정이 조종하는 한국경찰의 횡포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고 밝혔다. 워터 류는 또 “본래 강용흘의 정치적 입장은 온건파에 속했으나 미 군정 근무를 마친 후 죽을 때까지 이승만 정권, 그리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와 베트남전쟁 등을 포함한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대해 비난했다”고 적었다. 워터 류는 결론적으로 “미 군부에서 강용흘을 ‘사회주의에 편향한 작가’로 낙인 찍었으며, 당시 ‘매카시 선풍’과 맞물려 이승만 정권의 압력과 모함을 받아 강용흘의 삶은 비참해졌다”고 주장했다.

    강용흘은 1943년 사상문제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연방수사국(FBI)의 인터뷰를 받았다. 자신의 후견인 격인 켄트 켈러 전 하원의원의 배려 덕분이었다. 켈러 전 의원은 여러 나라 언어에 통달하고 특히 일본어에 능통한 강용흘을 FBI 산하 SIS(특별정보부)의 특별직원으로 채용토록 후버 국장에게 부탁했다. 1940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조직된 SIS는 서방국가 내에서 미국에 위험이 되는 정보사항을 탐지하는 것이 주업무였다.

    그해 3월5일 인터뷰에서 강용흘은 만약 FBI의 SIS 요원으로 채용된다면 남미 지역으로 가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당시 일본과 전쟁중이었던 미국으로선 일본계 이민자가 많은 남미 국가들도 정보수집 대상지역이었다.

    그러나 FBI는 강용흘이 사회적으로 너무 알려진 인물이고 특히 일본인 사회에서도 주목받는 점 등을 이유로 채용을 거절했다. 인터뷰 보고서에는 “현재로서는 우리가 SIS에 특정 개인을 선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되지 않음”이라고 적혀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시민권이 걸림돌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 정부를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의 자격조건 우선순위는 시민권자라야 한다. 지금도 이 규정은 변함이 없다.

    동양인배척법에 도전하다

    강용흘에게 미 시민권 혜택이 주어질 뻔한 기회가 있었다. 색다른 인연을 맺어온 켄트 켈러 하원의원의 도움으로 의회에 관련 법안이 상정됐던 것. 당시 동양인에게는 시민권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황색인종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1924년 ‘동양인배척법’이 통과됐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방법은 의회입법으로 시민권을 받는 길뿐이었다.

    켈러 의원은 미연방 하원의원이 되기 전인 1925년 자동차로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자동차 동승을 부탁하는 강용흘을 만나 며칠을 함께 여행하게 됐다. 대화를 통해 켈러는 강용흘이 범상치 않은 청년임을 발견하게 되고, ‘동양인배척법’으로 시민권의 길이 막혀 있다는 강용흘의 한탄에 “희망을 가지라”고 용기를 심어주었다. 후에 켈러가 일리노이주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리고 강용흘은 ‘초당’으로 미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강용흘 시민권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됐다. 제76차 의회 회기인 1939년 7월10일 켈러 의원이 하원법안(HR 7127)을 제출했고, 상원에서는 강용흘 부인의 고향인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 매튜 닐리 상원의원이 상원법안(S. 2801)을 냈다. 시민권부여 입법안은 만장일치제였다. 시민권위원회에서 마련한 서명지에는 ‘초당’을 출판한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의 편집장 맥스웰 퍼킨스가 주도해 문화계, 학계, 예술계, 언론계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사 92명이 지지성명과 함께 서명했다.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작가 펄 벅도 동참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뉴욕한인교회에 함께 나갔던 임창영과 유학생으로 만난 시카고의 한순교 등 2명이 참여했다.

    법안통과가 난항을 거듭하자 언론들은 이례적으로 사설과 기고문을 통해 강용흘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극성을 부리던 당시 미 주류사회가 보여준 이 같은 지지운동은 이민100년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려한 대로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황색인종’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만한 사항이 한 가지 있다. 당시 법안 지지자들 중에 이미 FBI가 파악하고 있는 공산주의 전위조직체에 연관된 인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루이스 아다믹, 존 체임벌린, 크리프턴 패디맨, 로저 볼드윈, 로크웰 켄트, 프랭크 킹돈 박사, 막스 레너 교수, 루이스 멈포드, 허먼 레이식 목사 등이다. 이들의 존재가 걸림돌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FBI 보고서에는 입법 제안자인 켈러 의원에 대한 사상적 지적이 적혀 있다. 문건기록에 따르면 1939년 1월20일 전국에 방송된 켈러 의원의 라디오 연설문 중 공산주의 문건에서 자주 인용되는 어구들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또 펜실베이니아주 출신 가이 모서 의원이 1941년 4월8일 FBI와 접촉해 켈러 의원이 공산주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고 시사했다.

    “민주주의를 사랑합니다”

    강용흘이 남긴 강연록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한국문제, 특히 자유와 독립에 대한 그의 애정은 놀랍다.

    [ 나는 민주주의를 사랑합니다. 독재를 증오합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화합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한마디가 칼에 대항하는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 사이의 분쟁에서 설득과 논쟁을 이끌어냅니다. 민주주의는 문명인답게 인간의 잘못에 직면하기도 하며 그들의 탐욕을 조화시킵니다. 민주주의만이 인간이 몸부림치며 추구하려는 균형된 자세와 품위, 자존심이며 그것들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자유라는 것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중략) 대부분의 한국민은 한국이 통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통일을 이루느냐는 데에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북한은 오스트리아의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이 중립국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UN은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합니다. 남한의 이승만은 북한에 자신이 주도하는 국회를 인정하기를 바라면서도 내각에 북한 인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총선을 두고 북한측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또 남한의 군사력을 증강시켜 무력으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분단되어 있습니다. ]

    이경원이 1960년대 찰스턴 가제트 신문에서 기자로 일할 때, 강용흘은 이미 수년 전부터 일정한 직업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그 사례비로 근근이 살아갔다. 이경원은 그를 위해 로터리클럽이나 사회단체 등에 부탁해 강연할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지방에서 잘 알려진 신문기자라는 점을 이용해 강용흘에게 강연자리를 알선한 것만도 6~7건이 된다. 당시 강용흘은 이경원과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은연중에 강연자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 나는 5월14일 오후 8시 노스 캐롤라이나 윈스턴 세일에 있는 와후 포레스트 칼리지에서 ‘동양문화가 서양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 강연을 할 예정이네. 그런데 이 강연 전후에 다른 강연 스케줄을 잡기 위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네. 그 전에 자네를 만났으면 하는데, 이곳에 있는 동안 러셀 우드 교수집에 머물 예정이라네. (1958년 5월6일자)

    자네 편지와 기사 고맙게 잘 받았네. (중략) 찰스턴에 있다니 아주 반갑네. 내 아내의 고향이거든. 아내의 이모인 포터 여사가 그곳에 살고 있지. 그녀의 아들인 가이 포터와 연락을 취해도 괜찮네. 나도 이번 봄에 내려가면 자네를 방문할 수 있겠군. 거기서 강연을 해도 좋고. 지난번 자네가 뉴욕에 왔을 때 만나지 못해 서운했다네. 언제 뉴욕에 오는가? 뉴욕에 오면 나한테 연락을 주게나. 한국 친구들한테선 연락이 오는가? (1959년)

    한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구만. 자네를 볼 수 있어 아주 기쁘다네. 지난 1948년 2월3일 웨스트 버지니아 테크에서 강연을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곳에서 강연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군. 나의 장모 루비 나이트 여사가 62년 전 그 대학의 창립자였고, 장인인 조시아 킬리께서 첫 번째 총장으로 취임했던 곳이니 말일세. 나의 강연료와 날짜를 적어 보내겠네. 내 강연 매니저인 피트와 펄 벅은 100~400달러를 받아 주었다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곧 만나세. (1959년 2월11일자) ]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소위 지역 유지 200여명이 모인 로터리클럽에서 연설할 때였다. 연설이 다 끝났는데 시간이 조금 남자 강용흘은 느닷없이 햄릿의 독백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가 햄릿을 줄줄 외우는 모습에 청중의 시선이 모이자 강용흘은 약속된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계속 읊어나갔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해 결국 서너 명 앞에서 끝을 맺어야 했다. 비즈니스맨에게 햄릿의 독백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날 강용흘은 사례비로 200달러를 받았다. 그의 나이 60세 때의 일이다.

    강용흘의 큰아들 크리스토퍼 강은 궁핍했던 시절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아버지가 헌팅턴에 집을 구입해놓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노숙자처럼 살았을 것이다. 돈이라곤 한푼도 없었다. 우리집 옆에는 1차대전 중에 할아버지가 승리를 기원하며 만든 몇 에이커의 텃밭 ‘빅토리 가든’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농작물로 연명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번도 친구들에게 일자리가 없다는 얘기를 내비친 적이 없다.”

    크리스토퍼 강의 회고는 이경원이 처음 강용흘을 만났을 때의 기억과 일치한다. 그는 “나는 ‘찰스턴 가제트’ 기자 시절 강용흘의 강연 섭외 에이전트나 다름 없었다. 강용흘은 당시 떠돌아다니는 철새처럼 이 대학 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근근이 살았다. 마치 미국의 노숙자들이 구세군 종교단체에서 저녁을 타먹기 전에 찬송가를 부르듯, 강용흘은 로터리클럽 등에서 점심을 먹기 전에 연설을 했다. 그는 30년 동안 ‘단벌 신사’로 연단에 올랐다.”

    강용흘은 이경원이 자신처럼 20대 초반의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 왔으면서도 대학에서 영자신문 ‘코리아 메신저’를 발행하는 실력에 감탄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처지를 의식해서인지 부러워하기도 했다. 1950년 이후로 전임 교수직은 물론 정식 취업도 할 수 없었던 그는 가끔 “경원이, 자넨 운이 좋은 사람일세”라고 말했다고 한다.

    떠돌이 강연자 생활을 하던 1961년 강용흘은 찰스턴 가제트 신문사로 이경원을 찾아갔다. 당시 이경원은 신문기자로, 그의 부인은 응급실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강용흘은 이경원 집에 머물면서 낮에는 두 아이의 보모 노릇을 하고 저녁 무렵 집을 나서 이경원이 근무하는 신문사로 가서는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이경원을 책상 옆에 앉아 꼼짝 않고 지켜보곤 했다. 이경원의 이야기다.

    “내 옆에 앉아 있는 강용흘이 마치 사무실에 있는 가구처럼 느껴졌다. 퇴근시간이면 강용흘은 우리 신문기자들과 함께 신문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중국식당으로 찹수이를 먹으러 갔다. 거기서 우리는 5시간 넘게 이야기를 했다. 강용흘이 화제를 이끌어갔다. 기자들 앞에서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 토머스 울프 등 우리가 다 아는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중국의 고서에 나오는 공자왈 맹자왈도 줄줄 외웠다. 우리 시골뜨기 기자들은 흥분하면서 좋아했다. 음식점 주인도 신이 나 문 닫을 생각도 않고 국수며 완탕 수프 등 음식을 계속해서 내왔다. 마치 백과사전이 말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은 천재”

    강용흘은 집에서도 중국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큰아들 크리스토퍼 강의 이야기다.

    “집에선 국수말고는 다른 한국음식은 많이 먹어보지 못했다. 국수 먹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는 차가운 닭국물에 닭고기를 넣고 김치를 넣었다. 김치는 아버지가 담갔다. 아버지는 중국음식을 좋아했고, 중국음식만이 먹을 만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중국음식을 자주 만들었다. 자랄 때 만두나 불고기 같은 한국음식은 먹어보지 못했다. 그런 게 뭔지도 몰랐다. 일본 음식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본에 대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도 않았다.”

    강용흘은 언제나 부인 프랜시스에 대해 문학의 동반자로서 존경심을 보냈다. 그의 책 ‘동양 선비 서양에 가다’에는 부인과의 만남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강용흘과 프랜시스는 1928년에 결혼했다. 강용흘은 결혼식의 추억도 강연 내용에 포함시키곤 했다.

    [ 찰스턴은 나의 미국 고향이다. 아내 프랜시스 킬리와의 결혼식은 찰스턴에 있는 그녀의 할머니 저택 정원에서 치러졌다. 신부는 친할머니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고조할머니가 쓰셨던 ‘보닛’ 모자를 썼다. ]

    2004년 5월 서울대출판부에서 간행된 ‘강용흘(김욱동 저)’에는 강용흘과 부인 프랜시스와의 결혼에 대해 ‘당시 비교적 자유롭다는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이민족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어떻게 버지니아주에서 명문 가문 출신의 여성과 결혼을 했는지 의문이다. 인종차별의 장벽을 뛰어넘었는지 의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강용흘의 큰아들 크리스토퍼 강은 이경원과의 인터뷰(2003년 2월28일)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말한다.

    “어머니는 웰슬리대를 다녔으며 졸업 후 옥스퍼드대에서 희랍고전학을 연구했다. 당시 천재적인 문학자로 알려진 프란세스 피거슨이라는 남자에게 반해 사랑에 빠진 어머니는 그를 설득해 옥스퍼드로 오게 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동성연애자라고 고백했다. 그 후 어머니는 지적인 남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아버지를 선택했다. 내 기억으로는 두 분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이 있었다고 들었다.”

    첫사랑에 실패한 프랜시스가 평소 이상형인 ‘천재’와 결혼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해서 강용흘을 만났다는 것이다.

    찰스턴 출신의 두 여인

    강용흘과 이경원은 닮은 점이 많다. 특히 미국 여성을 부인으로 두었고 공교롭게도 부인들의 고향도 같다. 강용흘의 부인 프랜시스와 이경원의 부인 페기가 모두 찰스턴 출신이다. 프랜시스는 이경원에게 “한국 남자가 찰스턴 출신 여자와 결혼을 하는 건 확률적으로 어려운 일 아니냐”며 이경원을 무척 반가워했다고 한다. 프랜시스가 이경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정스러움이 흠뻑 묻어난다.

    [ 친구에게. 제가 우리 가족의 비서가 된 기분이에요. 다른 식구들은 편지를 쓴 지 꽤 오래지요. 그래서 제가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제 옆자리에는 로버트(막내아들)가 항상 말하는 귀여운 셰인(이경원의 아들)의 사진이 놓여 있지요. 아기가 아주 총명하게 생겼어요. 아기 아버지가 쓴 기사 2건을 최근 이모 애비 포터가 보내주어서 우리는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그 기사들은 펄 벅에 대한 것과 남편의 시민권 추진운동에 관한 기사였어요. 축하해요! 활기가 넘치는 기사들이에요. 아주 선견지명이 있어요.

    남편은 12월1일부터 순회강연 중이랍니다. 버지니아에서 강연 6건을 했어요. 랜돌프-맥콘대학, 스위트 브리어대학, 리츠버그대학, 버지니아 주립대학, VMI, 버지니아대학 등이에요. 남편은 그 낡고낡은 올즈모빌 자동차는 가져가지 않았답니다. 그 차는 지금 집 밖에서 눈에 묻혀 있어요. 하지만 남편은 플로리다까지 내려가 친구 차를 빌려 타고 집으로 운전해 올 예정이랍니다. 미시시피에 들러 우리 큰아들 크리스토퍼를 만나고 오려는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못 보고 올 것 같아요. 막내아들 로버트가 웨스트 버지니아에 갔을 때 이 기자님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해주었어요. (중략) 언제 뉴욕에 오세요? 만나 뵈면 너무 좋겠어요. 셰인이 아직 어려서 이번 크리스마스는 감흥이 없겠지만 내년부터는 다를 거예요. 지켜보세요. (1962년 12월10일) ]

    대공황의 그늘에서

    강용흘의 처가인 킬리 집안은 원래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명사 집안이었다. 장인은 ‘캐빈클릭’이라는 석탄광산을 운영해 부를 축적했고 웨스트 버지니아주에서 알아주는 부자가 됐다. 그러나 대공황이 이 집안을 파산으로 내몰았다. 크리스토퍼 강의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대공황 때 파산해 우리에게 왔다. 나는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주식(GE, RCA)과 현금, 보험증서 등을 물려받았다. 포드 승용차를 한 대 사고 나자 한푼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는 떠돌이 집시처럼 차 안에 가방을 싣고 전국을 다니면서 텐트를 치고 살았다.

    1934년에 아버지가 구겐하임 펠로십을 받아 유럽을 여행할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포드 승용차를 유럽까지 운송해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함께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물론 호텔에서 기거했다. 그 편이 쌌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호텔에 들어가 방값을 흥정할 때 할아버지는 호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기다렸다. 아버지가 흥정을 마치고 나와 포드 승용차에 올라타는 것을 본 호텔측은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는 부자들만 차를 소유하고 있을 때였다.”

    조시아 킬리를 싣고 유럽을 질주했던 포드 자동차는 ‘Model A Ford형’인데 이 자동차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롱아일랜드에서 발간된 ‘더 롱아일랜더’ 1966년 1월14일자에 ‘40만마일을 누빈 포드 차’라는 제목으로 이 자동차가 소개됐다. 1930년에 800달러를 주고 구입한 이 자동차는 미 전역은 물론 대서양을 4회나 건너 유럽대륙을 달렸다. 어떤 때는 플로리다주 키웨스트 남단에서 알래스카주까지 달렸고, 어떤 때는 메인주에서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까지 대륙을 횡단했다.

    차를 처음 구입했을 때 가솔린 가격은 1갤런에 25센트였으나 30여년이 지나 40만마일을 달린 1966년에는 갤런당 1달러를 넘었다. 차를 구입한 첫해에만 무려 3만2340마일을 달렸다. 가솔린 가격으로 환산하면 329달러 어치를 달린 셈이다. 원래 성격이 꼼꼼한 강용흘의 장인은 자동차 부속품을 갈아 끼운 내역이나 가솔린 주입량을 기록해 차 안에 비치했다. 파산한 뒤에는 아예 자동차 안에 의류 등을 싣고 다녔다. 장인은 1965년에 91세로 사망했는데 화제의 포드차는 나중에 강용흘에게 넘겨졌다.

    강용흘은 문학의 천재였는지 몰라도 실용적인 사람은 못 됐다. ‘동양 선비’라 집안에 못 하나도 제대로 박지 못했던 것 같다. 크리스토퍼 강의 회고다.

    “아버지는 차를 정비한다거나 엔진을 조작하는 등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버리고 다른 고물차를 구입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거기서 물을 길어 식수로 사용했다. 펌프가 고장나기라도 하면 우리는 물 없이 생활해야 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오셔서 테이프를 두르고 안전핀을 꽂아 고쳐놓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시인,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이미륵을 만나다

    강용흘은 구겐하임 펠로십 기금으로 유럽을 여행하면서 ‘동양 선비 서양에 가다’를 집필했다. 강용흘은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는 펠로십을 6개월간 연장 사용하는 극히 이례적인 혜택을 누렸다. 그만큼 그가 창작활동에 성실했고 기금사용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현재 구겐하임재단 기록보관소에는 강용흘이 유럽에서 재단측과 교신한 서신들이 보관되어 있다. 재단에서 지원한 1800달러를 지출한 내역을 세밀하게 보고했다. 결코 풍족하지 않은 기금을 아끼느라 저렴한 호텔을 찾아다닌 흔적들은 물론이고 비자 관계나 환전 등 소소한 일까지 모두 밝히고 있다.

    유럽여행 길에 강용흘은 독일에서 후에 ‘압록강은 흐른다(1946)’를 펴낸 이미륵(1899~1950)을 만났다. 미국에 강용흘이 있다면 독일에는 이미륵이 있다. 이미륵은 강용흘의 가족을 위해 여름별장을 내주었고, 그의 부인은 밥과 국수를 대접했다. 이미륵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에 나섰다가 상하이로 망명한 후 독일 의사의 양자로 독일에 와서 의학(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전공했으며 나중에 문학과 그림에 심취했다. 강용흘을 만났을 때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강용흘을 만난 이때가 이미륵이 작가로서의 영감을 받았던 시기라고 여러 자료는 밝히고 있다.

    이미륵은 아들을 두었으나 나치에 처형당했다. 그는 그 후 반나치 운동에 가담했다. 강용흘과 이미륵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외국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했다.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도 같았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장덕수, 이광수, 김구 등을 떠올리며 밤을 새워 토론도 했다. 강용흘은 이미륵을 통해 헤르만 헤세를 만났다. 강용흘과 이미륵은 나중에 파리를 함께 여행하고 이탈리아에도 함께 갔다.

    미국에 돌아온 강용흘은 이미륵을 미국으로 데려오고 싶어했다. 이미륵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나치정권 시절이어서 이미륵의 미국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미국에는 FBI의 나치 소탕작전이 한창이었다.

    ‘매카시 선풍’의 희생자

    미국에서는 1919~20년에 일어난 소위 ‘공산주의 공포(Red Scare)’로 진보지식계층 인사들이 수난을 겪었다. 1936년부터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FBI가 나치 추종자와 공산주의 조직체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에 들어가 또다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리고 1940년대 ‘해치법’과 1947년 대통령 행정명령에 따라 FBI는 공무원들의 충성심까지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동양인 강용흘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기까지 미국 정계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 ‘매카시 선풍(1950~54)’은 외국인은 물론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에게까지 휘몰아쳤다. 위스콘신주 출신인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의회를 공화당이 장악하자 당시의 냉전 분위기를 이용해 군장성을 포함한 고위공직자는 물론 대학교수, 작가, 배우, 심지어 유대인들까지 청문회에 소환했다. ‘마녀사냥’이 따로 없었다. 특히 할리우드 연예계를 정화한다는 이유로 검거에 나서 수많은 연예인이 멕시코나 유럽으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매카시 청문회’에 소환된 인사들 중 어느 누구도 유죄를 받지 않았다. 장본인 매카시는 1957년 여론의 비난 속에 생을 마감했다. 현재 스탠퍼드대 도서관에 소장된 ‘매카시위원회’ 관련 자료들 중에는 “확증도 없이 마구 몰아친 매카시의 마녀사냥으로 무고한 사람들의 삶이 유린됐다”는 평가문이 있다. 강용흘의 인생도 바로 그 속에 포함된다.

    강용흘의 큰아들 크리스토퍼 강은 1998년 9월 마이클 게이너 변호사의 도움을 얻어 아버지의 조사기록을 FBI에 요청했다. 정보자유공개법(FOIA)에 따른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약 1년이 지나서 비밀 해제된 아버지의 수사기록들을 받아보았다. 1999년 10월28일 비밀 해제된 기록들이었다. FBI가 가족에게 공개하기 직전에 해제한 것으로 보여진다.

    필자는 크리스토퍼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강용흘에 관한 FBI 자료내용을 인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크리스토퍼는 MIT에서 생화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미 공군장교로 들어가 20년간 복무 후 은퇴했다.

    FBI가 1999년 11월5일자로 크리스토퍼에게 제공한 강용흘 관련 문서는 100쪽이 넘는다. 물론 아직까지 비밀에서 풀리지 않은 관련 서류가 더 있을 것이다. 해제된 비밀문건들은 연방수사국을 포함해 국무부, 미 육군 그리고 해군 당국이 비밀관리하고 있던 기록들이다. 크리스토퍼는 FBI 자료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전혀 없었다”며 “오히려 FBI가 모르는 사실을 내가 알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들은 아버지가 공산당원인지 아닌지 감도 못 잡았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인 수사였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며 확고한 입장을 거듭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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