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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 글: 김지현 / 일러스트: 이승애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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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학원생 이경원은 ‘초당’의 문장을 인용해 자신의 글로 다시 써내려갔다. ‘인터내셔널 유학생의 밤’ 행사에서 그의 연설은 대성공이었다. 학생들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전원의 세계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강용흘을 만나고 싶다.’

강용흘을 알려면 그 시대배경과 동서양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이경원 선생은 필자에게 누차 강조했다. 당시 미국사회의 소수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이민자로서 ‘제2의 고향’에서 동화돼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외로운 삶의 여정은 동시대를 살았던 이민자가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강용흘의 외로움을 나는 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역경을 겪어야만 했으니까. 강용흘의 감수성은 복잡 미묘하다. ‘은둔의 세계’에서 살던 그가 산업사회에 노출되었으니 복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0년대는 미국사회에서 ‘황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던 때로 동양인들에 대해 말살정책을 폈을 정도다.

대학원생 이경원은 강용흘의 정신세계에 감명을 받고 얼마 안 있어 그에게 편지를 썼다. 당시 대학 내에서 발간하던 ‘코리아메신저(1951년 창간)’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그는 강용흘에게 언론에 기고한 칼럼이나 저널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강용흘은 모 잡지에 영문으로 번역해 기고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내왔다. 이경원은 이 글을 사촌 김인환씨가 그려준 강용흘의 초상화와 함께 ‘코리아메신저’에 게재했다.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강용흘은 서서히 이경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갔다.

1955년 대학원을 졸업한 이경원은 ‘얄루(Yalu) 리뷰’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취재차 뉴욕에 가는 길에 강용흘을 만나기로 했다. 학수고대하던 첫 만남이었다. 기대에 부풀었던 강용흘을 만난 순간 이경원의 머릿속은 놀라움과 연민의 정이 교차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난 느낌이었다’는 것. 그가 상상했던 작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은 평범했고 펄 벅의 ‘대지’에 나오는 중국인 노동자 같은 행색이었다. 한국의 기품 있는 ‘선비’를 만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강용흘의 막내아들 로버트가 함께 나와 있었다. 미국에서 처음 보는 한국계 혼혈아였다.

이듬해인 1956년 이경원은 테네시주의 ‘킹스포트 타임스 앤드 뉴스’에 채용돼 정식 일간신문 기자생활에 들어갔다. 그해 그는 외딴 롱아일랜드에 사는 강용흘을 몇몇 친구와 함께 찾아가곤 했다. 이 선생은 당시 하루가 걸리던 자동차 여행에 함께했던 친구들을 김광한(인디애나대 정치학과), 변해수(컬럼비아대), 그리고 김동환(노스캐롤라이나대, 중학교 후배)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인, 셰익스피어를 외우다

강용흘 집에 들어서니 쾨쾨한 책 냄새가 진동했다. 강용흘의 모습은 1년 전 뉴욕에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형편없었다.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중국인 노동자 옷을 입고 있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강용흘은 그때 롱아일랜드 인근의 중국인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다. 홍콩 출신인 중국인 농장주가 영어를 잘하는 강용흘을 고용했던 것이다. 그날 강용흘은 모국에서 유학 온 젊은이들을 위해 평소 자신이 아끼던 한용운의 시를 읊어주었다. 새벽녘까지 시에 심취해 암송해 대는 그를 학생들은 넋이 나간 듯이 쳐다보았다. 어느새 강용흘의 눈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뉴욕한인교회가 펴낸 ‘뉴욕한인교회 60년사(1981년 간행)’에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교우 명단이 실려 있다. 가나다 순으로 약 90명이 수록됐는데 맨앞에 강용흘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한국의 정치 교육 문화 또는 경제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많다.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을 비롯해 이승만과 대통령선거에서 격돌했던 조병옥, 국회의원 정일형, 이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장덕수, 문교부 장관을 지낸 오천석 등이다. 강용흘은 1920년대 말 교회 기숙사에서 오천석과 함께 지냈다. 당시 교우 수는 30명 정도였다. 오천석은 교회 60년사에 기고한 ‘향수 짙은 허드슨 강변’이라는 글에서 강용흘을 흥미롭게 그렸다.

[ 당시 나의 룸메이트는 은행에 다니는 황창하씨였고, 김현철 윤성순 강용흘 이철원씨 등 여러 분이 같이 기숙하고 있었다. 뒤에 ‘초당’을 써서 장안의 종잇값을 올린, 당시는 뉴욕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고 있던 강용흘씨는 물론 재주가 비상한 사람이었지만 기인, 괴인으로도 남 뺨칠 인물이었다. 그는 가끔 밤중에 우리 방으로 뛰어들어와 자고 있는 황씨와 나를 깨워 앉혀놓고는 “셰익스피어보다도 훌륭하고, 밀턴도 뛰어넘을 만한 걸작을 지었으니 한번 들어보라”고 명령하고는 기고만장한 폼으로 자작시를 줄줄 외곤 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우리는 눈을 비비며 어서 끝나기만 기다렸지만 그의 시는 기숙사 옆을 흐르는 허드슨 강물처럼 계속 흘러나오는데 질색이었다. 우리는 그를 천하제일의 시인이라고 추켜세우며 달래서 겨우 자기 방으로 가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소년시절에 읽은 당시(唐詩)를 줄줄 외웠을 뿐 아니라, 서양 명작품도 거침없이 암송하였다. 그래서 그는 뉴욕대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 높은 교수로 환영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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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지현 / 일러스트: 이승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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