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월드컵 출전에서 북한은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당시엔 월드컵 본선에 16개국이 올라왔다. 8강전을 위해 리버풀로 이동하는 북한팀의 뒤를 3000여 명의 미들즈브러 팬이 따라왔다. 북한팀의 경기에 매료된 이들이 원정응원에 나선 것이다.
포르투갈은 1962년 우승팀인 브라질을 3-1로 제압하고 올라온 팀이었다. 북한은 처음 3-0으로 밀어붙이다가 결국 5-3으로 패했다.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에우세비오가 혼자서 4골을 몰아넣었다.
북한 주민들은 시차 때문에 새벽 1시에 라디오로 이 경기 생중계 방송을 들었다. 중계는 북한 아나운서계의 전설 이상벽(1997년 작고)이 맡았다. 세 골을 먼저 넣었을 때 이상벽의 목소리는 활기에 넘쳤다. 하지만 한 골 한 골 먹힐수록 그의 목소리는 힘이 빠졌다. “아, 또 유세피오였습니다” 하는 중계방송을 4번이나 들으면서 북한 주민들은 그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북한에선 에우세비오를 유세피오라고 부른다. 네 골째를 허용했을 때부터 이상벽은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 전역이 새벽에 눈물바다가 됐다. 이탈리아가 아직도 박두익을 잊지 못하듯이, 북한 사람들은 지금도 유세피오를 잊지 못한다.
‘토털 사커’의 원조
하지만 북한은 첫 출전한 월드컵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들이 선전한 비결은 뭘까. 사람들은 대개 ‘토털 사커’의 원조를 네덜란드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보다 10여 년 전에 북한팀은 이미 ‘전원수비 전원공격’에 가까운 전술을 펼쳤다. 신장의 열세를 오직 죽어라 달리는 것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런던월드컵이 열리기 전 “이번 대회에 출전한 북한팀은 어떤 팀이냐”고 묻기도 했던 스탠리 라우스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북한과 칠레 경기를 참관한 뒤 주장 신영규를 지목하면서 세계적 선수라고 평가했다. 월드컵이 끝난 뒤 라우스 회장이 “공격에 에우세비오, 수비에 신영규, 골키퍼에 야신이 있다면 세계 최강팀이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북한에 돌아온 축구선수들은 함북 주을 온천 요양소에서 몇 달간 머무르며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이때 김정일의 정권 장악에 분기점이 된 갑산파 숙청사건이 벌어졌다. 갑산파란 일제 식민지 시절 함경남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 계열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일성은 1968년 3월 비밀리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유일체제 수립에 방해가 되는 갑산파 숙청을 결정했다.
이런 숙청 분위기에 대표팀도 말려들었다. 대표팀이 갑산파의 지도자이자 북한 2인자였던 박금철 당 중앙위원회 조직담당부위원장과 김도만 선전담당부위원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이유였다. 실제 박금철과 김도만은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해 축구를 크게 활용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바뀌면서 선수들은 끝없는 사상투쟁회의를 벌이고 자아반성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 신영규는 지주 아들이라는 점이 문제가 됐다. 대표팀은 결국 숙청돼 지방에 흩어졌다. 이때의 숙청바람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1968년 중순 지방 중견 간부직의 3분의 2가 공석이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는 대표팀이 8강전을 앞두고 제국주의자들의 ‘기생 작전’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숙청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숙소에 침입한 외국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해 다리에 맥이 빠져 5골이나 허용했다는 것이다. 소문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천리마축구단을 자부하던 북한팀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그렇게 정신자세가 풀어졌다는 점은 믿기 힘들다.
숙청된 선수들이 가장 많이 배치된 곳은 함경북도 경성군의 생기령요업공장. 노동자가 됐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당시 요업공장의 출퇴근길에서 공을 발로 툭툭 튕기며 가는 전직 대표팀 선수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보석은 진흙탕에 묻어도 보석이다. 몇 년 뒤부터 요업공장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축구단이 전국대회에서 늘 1등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8강 주역 대다수가 함북에서 추방생활을 해서인지 지금도 함북 축구팀은 각 도 축구팀 가운데서 최강이다.
10년간의 ‘혁명화 기간’이 지난 뒤 북한 당국은 일부 선수들을 복귀시켰다. 이미 현역 나이를 훌쩍 넘긴 까닭에 대개 감독이 됐다. 그러나 일부는 영원히 묻혔다. FIFA 회장이 극찬했던 신영규가 대표적이다. 북한 당국은 그가 1996년에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런던월드컵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월드컵 본선 아시아 선수 최초 골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박승진은 1980년대 중반 요덕정치범수용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가 “먹어본 벌레 중에 바퀴벌레가 가장 맛있었다”고 말했다 해서 수용소에서 그의 별명은 ‘바퀴벌레’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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