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소설의 성소(聖所), 자전(自傳)의 형식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0-12-21 17: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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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성소(聖所), 자전(自傳)의 형식

    ‘자전소설 1-4’<br>강출판사, 각권 1만2000원

    여기 42편의 자전소설이 있다. 소설가 42명의 이른바 ‘자전소설’이 빚어내는 세계란 희귀한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이라는 말은 하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세계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 개성만큼 제각각이고 각자가 표방하는 언어와 형식은 다 다르다. 소설이라는 우주를 잘 탐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범주론을 환기해야 하는데 ‘예술’로서의 소설, ‘사상’으로서의 소설, ‘오락(재미)’으로서의 소설에 대한 기준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자전소설의 범주는 어떻게 될까. 김경욱의 ‘미림아트시네마’에서 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작가후기…그렇다. 책을 읽을 때 나는, 작가 후기부터 훑어본다. (중략) 나에게 작가 후기, 혹은 작가의 말은 책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후기만 그럴듯하게 쓰는 작가는 없다. 나이 서른이 넘으면 자신의 인상에 책임져야 한단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서만 후기를 쓴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후기는 정직하다. (중략) 말하자면, 내게 보낸 이 글이 그에게는 작가 후기와 같은 것이리라. 내색은 하지 않지만 그는 지금 퍽 난처한 기분이리라. 진실 게임을 할 때처럼 난감한 기분, 시시콜콜 까발릴 수도, 그렇다고 너절하게 둘러댈 수도 없는, 그런 기분 말이다. (중략) 결국 작가 후기만큼의 정직함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해성사를 하거나 사기를 치는 수밖에. -김경욱, ‘미림아트시네마’, ‘자전소설1 축구도 잘해요’에서

    작가들에게 자전소설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난다. 김경욱의 작품 첫 대목이 보여주듯 작가 후기로서의 정직함, 진실게임의 난감함, 고해성사의 진지함. 또는 슬쩍 딴전 피우듯 둘러대듯이 능청스럽게 사기(소설 본연의 임무)를 치는 일.

    나는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

    42편의 자전소설은 대부분 이 두 갈래의 갈림길 앞에서 전자의 길을 선택하고 있고, 몇몇 작품만이 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전자의 길에 들어선 작품들이 전하는 공통의 내용을 함축해서 전하면 ‘나는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에 대한 고백이다. 그들이 소설이라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를 발견하게 된 어떤 순간, 또는 어느 시점, 또는 어느 시기의 사람, 거리, 가족-집, 매체(영화, 음악), 역사적 사건 등등. 방현석(밥과 국), 김경욱(미림아트시네마), 정이현(삼풍백화점), 김숨(럭키슈퍼), 김중혁(나와 B) 등등.



    김송이 / 그 여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 내가 그 여자의 이름을 안 것은 유치장으로 넘어간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특별면회를 다녀오다 그녀의 이름을 보았다. 그녀가 갇힌 방 앞에 걸린 명패에는, 김송이 22 여 집시,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남부지원의 같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호송차를 함께 타고 왔다. 호송차 안에서 그녀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중략) 전태일 / 산은 변함이 없다./ 아이들을 기다리며 겨울로 가고 있는 북한산을 멀리 바라본다. 십일월…십일월이다. 산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산 아래는 온통 아파트 천지로 변했다. 산 아래의 모든 것이 변했는데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중략) 송철순 / 누구에게나 순정한 시간이 있다. / 송철순이 일했던 세광물산은 내가 조직을 담당했던 5공단에 있었다. 나는 인노협의 조직 1부장이었다. 지금도 인천에서 나를 만났던 사람들은 나를 방부장이라고 부른다. 그 이름에 나는 부채감이 아직 남아 있다. -방현석, ‘밥과 국’, ‘자전소설4-20세기의 이력서’에서

    그해 봄, 나는 음반 매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음반을 파는 게 나의 정식 업무였지만 매장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중략) B를 처음 만난 날, 나는 혼자서 음반 매장을 지키고 있었다. 저녁 일곱 시를 넘긴 시간이었고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을 한 후였다. 나는 계산대에 앉아 사이키델릭하기로 유명한 어떤 그룹의 신보를 듣고 있었다. (중략) 음반 매장에서 오랫동안 일하진 않았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 손님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계산대 쪽을 자주 흘끔거린다거나, 음반 뒷면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다거나,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문다면,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그가 그랬다. -김중혁, ‘나와 B’, ‘자전소설1-축구도 잘해요’에서

    김송이, 전태일, 송철순…. 질곡의 1970~80년대를 광장과 거리에서 보내면서 만나고 헤어졌던 인물들을 자전소설 속에 호명한 방현석은 누구보다 한국은 물론 베트남 현대사에서 억압되고 소외된 인간들을 대상으로 따뜻한 휴머니즘을 소설 속에 구현해왔다. 그의 대표작인 ‘내일을 여는 집’‘랍스터를 먹는 시간’의 작품들이 현실 참여적인 그의 작가 정신을 웅변한다. 음반 가게에서 직원과 소매치기 손님으로 만난 두 인물이 기타를 매개로 벌이는 이야기를 자전소설로 형상화한 김중혁은 ‘펭귄 뉴스’ ‘악기들의 도서관’‘엇박자 B’라는 음악 및 대중문화 코드를 작품 속에 적극 활용해 소설적 입지를 굳히고 있는 젊은 작가다. ‘미림아트시네마’를 쓴 김경욱 작가는 첫 소설집과 이후 소설들에서 영화의 제목을 차용해 쓰거나, 영화 주인공 또는 배우를 소재나 제목으로 삼을 정도로 작가의 원체험이 역사나 가난, 또는 가족의 트라우마가 아닌 영화, 곧 시네마 키드임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삶의 특정한 시기는 종종 구체적인 어떤 거리의 풍경으로 기억되곤 한다. (중략) 미림극장, 그의 기억 속 녹두거리 끝에는 미림극장이 자리 잡고 있다. 신림 사거리에서 관악산 방면으로 들어오다 보면 시흥 쪽으로 나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그 분기점 귀퉁이에 있는 건물 지하에 미림극장이 있었다. (중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주말이면 그는 미림극장에 갔다. -김경욱, ‘미림아트시네마’, ‘자전소설1 축구도 잘해요’에서



    방현석, 김중혁, 김경욱 등의 작품들이 정직한 작가 후기의 계보를 보여주는 예라면 정영문(‘파괴적 충동’), 박민규(‘축구도 잘해요’), 김사과(‘매장埋葬’) 등은 정직과는 가능한 한 다른 포즈-사람, 장소, 사건-곧 그들의 여느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허구의 형식으로 자전소설을 쓸 뿐이다. 김경욱이 소설 속에 호출하는 어느 거리, 또는 어느 도시는 김사과에게는 사뭇 다른 시각과 정서로 제시된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할 때 우리는 바스토우 어딘가 사막 가장자리에 있었다. 혹은 이렇게 시작한다. 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강둑에 앉아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매우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혹은 이렇게 시작한다. 미국식 아침식사를 먹는다. 잘게 썬 양배추와 토마토, 두툼한 고기패티를 흰 빵에 얹는다. 기름진 것을 먹는다.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둥근 접시들, 올리브, 베이컨, 피클과 캠벨사의 깡통 수프, 그것들의 다른 이름은 서울이다. 서울은 카길사의 소고기패티를 넣은 흰 밀가루빵이며 그것의 다른 이름은 지옥이다. -김사과, ‘매장’, ‘자전소설2-오, 아버지’에서



    1. 뜨거운 것이 좋아 / 전생(前生)엔 마릴린 먼로였다. 사정이 그런 만큼, 우선 이야기는 마릴린 먼로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정을 알고 난 당신의 생각도 나와 같을 것이다. 모든 이야기엔 절차란 게 필요한데, 이런 경우에 있어선 더더욱 그러하다. (중략) 누가나 자신의 전생을 알고, 이해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차마 좋은 시절을 위하여, 나는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황은 금물, 세계의 시즌은 달라졌고 우리는 변이(變異)한다. -박민규, ‘축구도 잘해요’, ‘자전소설1-축구도 잘해요’에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사소설(私小說)이라는 소설적 전통이, 프랑스에는 자전소설이라는 글쓰기 범주가 하나의 미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소설계에서는 이 둘의 융합한 성격으로 1990년대 초 ‘현대소설’이라는 소설 전문 계간지에서 ‘자전적 사소설’이라는 새로운 코너를 선보이기도 했다. 윤후명의 ‘협궤 열차에 관한 한 보고’, 필자의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등 2년여에 걸쳐 여러 작가가 ‘자전적 사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이후 끊겼던 전통이 이번에 출간된 4권의 ‘자전소설’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지는 미지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자전소설의 정체성을 제기하면서, 슬쩍 작가들의 대변자 자리로 이동해 답을 제시한다. 그는 자전소설이란 그냥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기는 작가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다고 전하고, 예를 들어 “소설가는 자기의 생활이라는 집을 부수어 그 돌로 소설이라는 집을 짓는다”라고 말하는 쿤데라나, “어떤 전기 작가도 내 생활의 비밀을 엿볼 수 없다”는 나보코프의 육성을 통해, 그 작가들 주장의 밑바닥에는 ‘작품=전기’라는 등식이 알게 모르게 깔려 있음을 주지시킨다. 문학평론가 신수정은 김윤식의 우회적인 전언을 ‘세상의 모든 소설은 자전소설이다’라는 경구로 요약한다.

    일찍이 소설이론가 르네 지라르는 소설의 정체를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로 묘파해낸 바 있다. 고해성사(소설적 진실)냐, 사기(낭만적 거짓)냐! 그것이 어떤 형식을 취하든 자전소설은 작가에게 소설이 시작되는 원체험, 또 소설이 끝나는 길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곳, 그리하여 소설의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는 곳, 곧 소설의 성소(聖所)인 셈이다. 2011년, ‘자전소설’이라는 작가들의 진실 게임에 동참하면서 새해를 연다면, 진솔하면서도 유쾌한 한 해를 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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