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도스토예프스키‘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 김연경│소설가 koshka1@hanmail.net

    입력2010-12-22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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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소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깊은 울림과 통찰을 전한다. 세월이 흘러도 빛나는 고전은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소설가 김연경씨가 대표적인 명작 소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세계 명작 다시 읽기’를 연재한다. 첫 번째 작품은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다. <편집자 주>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움푹 꺼진 퀭한 눈이 러시아의 영혼을 상징하는 듯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를 보면 이 러시아의 대문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십분 만족되는 듯싶다. 넓은 이마와 움푹 꺼진 퀭한 두 눈은 곧 광활하고도 깊은 러시아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서양인답지 않게 툭 불거진 광대뼈 역시 어딘가 독특한 느낌을 준다. 고동색의 무성한 턱수염 속에서는 이성의 광기와 영성의 은총이 영원토록 사투를 벌이는 것 같다. 끝으로,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한 저 시선의 끝은 어디일까? 결국 그의 소설을 들추는 수밖에 없다. 우선 전기를 간략히 보자.

    소설가로서의 무게에 비하면 생활인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가난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다. 그러곤 전공에 따라 공무원(무관)이 되었으나 이내 싫증을 냈다. 결국 전업 작가의 길을 택했고 그 순간 가난은 그의 실존이 되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된 셈이다.

    그럴뿐더러 간질병이 평생 그를 쫓아다녔다. 도박벽 역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의 문학 속에서 승화작용을 거친다.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고뇌하는 인텔리겐치아에 관한 소설이다. 그 고통이 너무도 깊기에 그들은 간질발작이나 도박의 절정과 같은 찰나적인 황홀경을 꿈꾼다. 그들의 목표는 늘 유토피아 건설이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20대 때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을 드나들며 푸리에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서적을 읽고 새로운 사회 체제의 가능성을 논하곤 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애초 각본에 따라 사형 집행 당일 총이 발사되기 직전, ‘사형극’이 극적으로 중단된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8년간 유형살이를 한다. 다시 문단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에 슬라브주의자가 돼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좌익이나 우익이냐, 무신론자냐 광신도냐’가 아니다. 삶이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관념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목숨을 대가로 얻어낸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다.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최고 소설로 손꼽히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하 ‘카라마조프’) 역시 궁극적으론 삶에 바치는 찬가라고 할 수 있겠다.



    친부 살해의 테마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도스토예프스키는 환갑을 앞두고 완성한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아내에게 헌정했다.

    19세기 후반 스코토프리고니예프스크 시(市).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지주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세 아들을 얻었다. 첫 부인 소생의 드미트리(28세)는 퇴역 중위인데, 난폭한 면이 있으나 타고나길 마음씨가 착하다.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이반(24세)은 이지적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자연과학도다. 역시나 두 번째 부인 소생인 알료샤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얌전한 청년으로서 어머니의 광신에 가까운 신심을 물려받아 수도사가 되고 싶어한다.

    그밖에 암암리에 표도르의 자식으로 통하는 스메르쟈코프가 있는데, 하인 겸 요리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를 빼면 모든 아들이 아비에게 버림받고 타인의 품을 전전하며 자라났다. 한데 세 아들이 갑자기 아비의 집을 찾아온다. 대체 왜? ‘카라마조프’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단 문제는 ‘돈’이다. 드미트리는 오래전에 고인이 된 어머니가 자기 앞으로 남긴 유산을 받아내고자 한다. 물론 표도르가 돈을 내줄 리 없다. 그 와중에 드미트리는 표도르가 오랫동안 눈독을 들인, 그의 사업 파트너이기도 한 그루셴카에게 반하고 만다. 그뿐이 아니다. 겉보기엔 제법 점잖은 이반이 드미트리의 약혼녀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사랑한다. 결국 아비와 아들이 돈과 여자 때문에 다투고 배다른 두 형제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기괴한 신경전을 벌이는 형국이 된다.

    이렇듯 ‘카라마조프’는 그 상상력의 측면에서 거의 신화에 가깝다.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고 아비의 여자를 탐하다니. 그 거칠고 적나라한 표현 방식에서는 시쳇말로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질투에 사로잡힌 아들이 아비의 집에 쳐들어와 아비의 얼굴을 문자 그대로 짓밟고 쌍욕을 퍼붓는 장면을 보라. 이 소설이 두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빨리 읽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즉 오이디푸스 신화 자체의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측면과 작가의 직설적인 화법. 물론 추리 소설적인 장치(“누가 표도르를 죽였는가?”)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소설적 흥미의 저변에 깔린 것은 죄와 벌, 자유와 양심, 신의 존재와 그 가치 등 대단히 철학적인 물음이다.

    특히 ‘카라마조프’에서 친부 살해는 일차적 의미의 범죄(아비를 죽이다)를 넘어 정치적 혁명(왕-차르를 죽이다), 나아가 형이상학적 반항과 무신론(신을 죽이다)을 아우른다. 실제로 이 소설이 쓰일 무렵 무신론과 허무주의를 표방한 급진파 쪽에서 각종 테러가 일어났고 황제(알렉산드르 2세) 시해 시도도 있었다. ‘카라마조프’는 이런 현상에 대한 극우파 작가의 우려와 불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젊은 날 새로운 유토피아 건설에 목말라 했으며 그로 인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 소설의 주인공들의 정신적 편력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단순한 ‘찬반’(Pro et Contra)에 그칠 리는 없지 않겠는가.

    무신론자 이반

    도스토예프스키는 창작 노트에 이반을 무신론자라고 정의했다. 소설 속에 자주 나온 표현을 정리해보자.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멸에 대한 믿음을 제거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반은 알료샤를 앞에 두고 반문한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세계에 악이 존재할까? 인간이 신의 닮은꼴로 창조되었다면 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 부조리함 속에 뭔가 대단히 고매한 목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설령 그럴지라도 나의 ‘유클리드적’, 즉 3차원적 지성으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또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이반은 말한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테제가 나온다.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예로 들어가며 역설한다. 신이 의도한 ‘조화’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마저 희생해야 한다면 그 비싼 입장료를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입장권을 양심에 따라 정중히 반납한다고. 알료샤의 말대로 ‘반역’이다. 신에 대한 반역, 즉 이반의 무신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 없는 유토피아’ 건설이다. ‘대심문관’을 보자.

    에스파냐의 세빌리아, 종교재판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5세기말, ‘그’가 나타난다. 대심문관은 민중을 사로잡은 ‘그’를 곧바로 체포한다. 이어 밤이 되자 남루한 수도복을 입은 대심문관이 감옥을 찾아온다. 대심문관의 기나긴 고백의 내용은 실상, 복음서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유혹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다. 악마가 황야에서 수행 중인 그리스도에게 세 가지 제안을 연거푸 내놓는다. 돌을 빵으로 바꿔라, 절벽에서 뛰어내려라, 내 앞에 경배하라 등. 대심문관은 그것을 각각 기적과 신비와 권위에 대한 유혹으로 풀이한다. 어떻든 그리스도가 당당히 물리쳤던 저 유혹을 대심문관은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대심문관의 논리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빵과 자유의 역학 관계에 있다. 인간이란 본디 그리스도의 믿음과는 달리 너무도 나약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자유라는 짐을 덜어주고 빵을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 대심문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빵”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총체적이고 영구적인 우수에 대한 해답을 함께 줄 수 있었을 것이니 ― 그건 다름 아니라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이 찾는 그 대상이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만장일치로 그 앞에 함께 경배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가련한 피조물들은 나나 다른 사람이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그 앞에 경배할 수 있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함께’ 경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지. 자, 바로,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으로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권, 김연경 옮김, 민음사, 2007, 535쪽)

    이것이 신 없이 건설된 유토피아의 실체다. 여기서 우리가 파시즘과 나치즘의 전조를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 역사 속의 대심문관이 많은 경우 세속적 권력에 눈이 먼, 극도로 부패한 가톨릭 위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반의 대심문관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또 저 ‘선택받은 자’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그리스도처럼 황야에서 풀뿌리와 메뚜기로 연명하며 수도 생활을 했다. 그랬던 그가 신이 아닌 악마의 원칙을 받아들여 유토피아 혹은 반(反)유토피아를 만든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무덤 뒤엔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신도, 불멸도, 저 세계도 없다면 결국 양떼(우매한 중생)에게 필요한 것은 지상의 양식인 빵과 우상(경배의 대상)밖에 없다. 이 도저한 허무주의가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경멸의 복합작용에서 비롯됐다니,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데 그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그림자 신)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그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오직 자기 혼자만 이 거대한 ‘기만’의 고통을 감수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역시 대심문관의 오만한 선민의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어떻든 이반의 이론적 극단인 이 분신은 일종의 ‘악마’이되 매혹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인간의 본성과 맹점,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대심문관만큼 날카롭게 꿰뚫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의 무신론이 실제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작가는 이반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도발적인 사상과 함께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다. 다소 과격하게 말해, 나를 낳아준 아비를 죽일 수도 있는 자유, 바로 그것이다. 이론의 극단에서 신을 죽이고 신 없이 자기만의 왕국을 만든 이반이지만, 정작 아비가 살해되자 당황한다. 문제의 3000루블을 내놓으며 스메르쟈코프는 반쯤은 씁쓸하게, 반쯤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하인이자 제자이며 분신인 스메르쟈코프가 주인이자 스승이자 원상인 이반을 압도하는 섬뜩한 순간이다.

    “그때만 해도 도련님은 줄곧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자기 입으로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선 왜 그렇게 불안에 떨고 계신 거죠, 정작 도련님 자신이 말입죠?”(3권, 259쪽)

    이반이 무신론적 원칙하에 품었던 ‘기대의 권리’란 무엇인가. 실상 법률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에게 어떤 죄를 묻기는 상당히 힘들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부작위의 죄 혹은 미필적 고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반 스스로 세운 ‘내 안의 법정’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이런 식이다. 형과 아버지 사이에 모종의 비극이 생길 것임을 예감하고 심지어 그러길 기대했다(“한 마리의 독사가 다른 한 마리의 독사를 잡아먹을 거야, 두 놈 다 그 길밖에 없어!” 1권, 296쪽). 그 기대에 스메르쟈코프가 은근슬쩍 개입했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인 수단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책임하게 집을 떠나버렸다. 말하자면 이반은 자신의 욕망과 욕망할 수 있는 자유 때문에 죄인이 된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이반은 양심이 켕기는 것을 느낀다. 나를 낳아준 아비마저 죽일 수 있는 자유에 맞서, 행동이 아닌 욕망까지 관장하려는 ‘양심의 자유’가 고개를 들이민다. 그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결과 범인이 드미트리라는 억지스러운 확신을 얻는다. 그럼에도 희뿌연 자책은 계속되고 그는 구태여 세 번씩이나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간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순간, 양심의 자유에 따라 모종의 윤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즉 늦은 시각이지만 당장 예심판사나 관련자를 찾아가 증거물을 내놓고 스메르쟈코프와 자신을 동시에 고발하는 것. 하지만 왠지 그는 그 일을 내일로 미룬다. 왜 이런 유예가 필요했을까. 중요한 것은 스메르쟈코프가 곧 자살할 것임을 예감, 어쩌면 기대했다는 점이다. 그날 밤, 바깥에서 누가 창틀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분신-악마가 말하지 않는가. “저건 자네 동생 알료샤가 아주 뜻밖의 흥미진진한 소식을 갖고 온 걸세, 내 장담하지!”(3권, 298쪽)라고.

    이튿날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호언장담과 자살에 대들기라도 하듯 기어코 법정에 나간다. 하지만 문제의 3000루블까지 내놓아도 아무도 그의 진술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자, 이반이 감내한 수치를 과연 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반의 ‘내 안의 법정’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전날 밤 즉시 자수하지 못한 죄, 즉 유예와 비겁함의 죄까지 떠맡아 완전히 광기의 늪에 빠진다. 이반의 고뇌는 그가 향유한 자유의 용량에 비례한다. 그가 ‘위대한 죄인’인 것은 엄밀히 말해 죄의 크기가 아니라 자유와 양심의 크기의 따른 것이다. 죄 자체보다는 죄의식이 이반을 윤리와 도덕의 극점으로 이끄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순되는 원칙의 대립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블라디미르 광장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동상.

    대체로 ‘카라마조프’는 서로 모순되는 원칙의 대립 위에 구축되었다. 가령 알료샤 대 이반, ‘그’(그리스도) 대 대심문관(적그리스도), 신 대 악마. 물론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길 잃은 양’을 ‘신’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좀 더 온건한 표현으론 ‘화해’다. 이 임무를 맡은 알료샤는 신성(神性)의 육화 같은 존재, 혹은 소설 속에 강림한 그리스도다. 다시 ‘대심문관’으로 돌아가자.

    이반은 ‘대심문관’을 ‘그’의 키스로 끝맺는다. ‘그’가 대심문관에게 건넨 화해의 몸짓이리라. 단, 대심문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원칙에서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 특히 용서라면 대심문관의 성격상 더욱 더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신-그리스도일지라도 상대방이 달가워하지도 않는 용서와 구원을 베풀 권리는 없잖은가. “입맞춤은 노인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예전의 이념을 고수하는 거지.”(1권, 554쪽) 이반의 이 말은 그래서 비극적이다.

    한편 ‘대심문관’의 바깥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대심문관과 ‘그’의 관계를 반복하지만 그 강조점이 전혀 반대다. 알료샤는 기나긴 이야기를 끝낸 형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이반은 표절이라고 외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즉 이반 역시 동생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과 논리를 철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대심문과는 달리 화해의 몸짓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어찌 보면 여기에 화해의 전령으로서 알료샤가 갖는 의미가 들어 있는 셈이다.

    실상 이반의 무신론에 맞서는 알료샤의 사상은 정확히 사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그는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계와 타자는 또한 그에게 늘 구체적이다. 가령 이반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반면, 알료샤는 하루 24시간을 항상 발로 뛰어다니며 남을 돕는다. 물론 이 청년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조시마 장로가 사망하자 그 시신에서 방향이 아닌 썩는 냄새가 풍긴다. 그렇다면 그는 성자가 아니란 말인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료샤는 이 ‘기적’에의 유혹을 극복해낸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죽은 사람의 몸에서 썩은 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과 성스러움은 결코 서로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즉 장로의 시신을 통해 기적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장로의 위업이나 신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할 만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믿기 때문에 기적을 본다는 것.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알료샤가 꾸는 꿈(갈릴래아의 카나)을 보라. 그것은 깊은 믿음이 불러낸 기적의 표현으로서 이반의 악몽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알료샤의 ‘영성’이 신의 존재를 보는 반면(epiphany) 이반의 ‘이성’은 그 분열적 성격 때문에 악마를 보는 것이다.

    ‘카라마조프’의 구성적 축이면서 동시에 ‘감성’의 영역을 대표하는 드미트리 역시 알료샤처럼 세계와 인간의 모순 앞에 경외심을 갖고 고개를 숙인다.

    “아름다움이란 정말! 덧붙여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어떤 사람이, 그것도 고귀한 마음과 드높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에서 시작하여 소돔의 이상으로 끝을 맺는다는 거야. 더 끔찍한 것은 영혼 속에 이미 소돔의 이상을 품은 상태에서도 마돈나의 이상을 또한 부정하지 못하여, 그 때문에 죄악을 모르던 젊은 시절처럼 자신의 가슴을 진실로, 진실로 불태운다는 거지. 아니야, 인간이란 넓어, 너무도 넓어, 나는 차라리 축소시켰으면 싶어.”(1권, 228쪽.)

    저 고백은 “악마와 신이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인 거지”(1권, 229쪽)라는 말로 끝난다. 실제로 드미트리는 아비 살해의 누명을 씀으로써 온갖 모순을 감내해야 하는 크나큰 시련을 맞이한다. 그 전말을 간략히 보자.

    그는 결백을 부르짖지만 즉흥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답게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만 되풀이한다. 그렇게 길고 고된 심문이 끝난 후 잠깐 잠이 들었다가 ‘아기’ 꿈을 꾼다. 아이들의 굶주림에 지독한 연민을 느낀 그는 고통과 죄의 연대의식을 넘어서 윤리적 행동을 촉구한다. 심지어 더 이상 죄 없는 아이들이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일이 없도록 그 자신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외친다. 간단히,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못된(!) 생각을 품은 죗값을 달게 받아 옥살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가히 작가로부터 ‘열광자’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이 착한 형을 알료샤는 다독인다. “형은 준비가 안 돼 있고, 또 그런 십자가는 형을 위한 것이 아니야.”(3권, 528쪽)라고. 실은 드미트리 쪽에서도 짓지도 않은 죄를 감당하는 것이 슬슬 두려워진 터다. 간수의 하찮은 횡포도 참기 힘든데 유형생활을 어찌 견디랴!

    결국 드미트리는 알료샤와 이반의 독려를 받아 아메리카로 도주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이반의 비극적인 고뇌와 비교된다. 두 형제 모두에게 죄는 욕망 차원의 문제이지만 이반과 달리 드미트리는 죄책감의 굴레를 가뿐히 벗어버린다. 그러나 그의 변덕은 우스운 만큼이나 상식적이지 않은가. 이 대목에서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리얼리즘과 유머가 유달리 빛을 발한다. 온갖 형이상학적 고뇌와 수식어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이 삶-목숨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카라마조프적인 저열함의 힘!

    지상낙원의 은유는 아이들

    과연 신 없는 유토피아가 가능할까. 이반의 이성은 그 꿈에 젖어 있지만 드미트리의 감성과 알료샤의 영성은 영원히 신의 품 안에 머물고자 한다. 신의 존재를 상정하든 말든 ‘카라마조프’에서 영원한 삶을 담보해주는 지상낙원의 은유는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일류샤라는 아이가 그야말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반의 어법을 빌리자면 ‘부조리’하게 죽는다. 그리고 그 아이의 무덤 옆에 콜랴 크라소트킨, 스무로프 등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다. 앞서 이반이 추상적인 아이들의 고통을 근거로 반역을 주장한 것을 상기해보라. 알료샤는 정반대로 구체적인 한 아이 일류샤의 죽음을 근거로 사랑과 용서를 촉구한다. 일류샤의 죽음이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바로 이 아이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순환논리 같지만, 이들이 살아 있기에 또한 일류샤의 죽음이 유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카라마조프들은 아비와 이복형 스메르쟈코프의 죄악과 죽음을 대가로 삶을 선사받는 셈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비와 형제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들-형제들이 앞으로 아름다운 삶을 일궈나가는 것뿐이다. 요한복음에서 취한 제사가 의미하는 바도 이것이 아닐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서 12: 24)

    작가가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려 풀어주는 구약의 ‘욥기’도 비슷한 전언을 담고 있다. 실상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목하는 것은 욥의 신실함과 의로움이라기보다는 신의 시험이 종결된 이후 욥이 보이는 반응이다. 성경 속의 욥과 달리 ‘카라마조프’ 속의 욥은 심히 고뇌하며 반문한다. 예전의 아들딸들을 영원토록 잃어버린 상황에서 과연 새 아들딸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그래도 될까, 하고. 이에 대해 작가는 해묵은 슬픔을 대체할 온화한 기쁨에 대해, 삶의 위대한 비밀에 대해 얘기한다. 음울한 과거를 잊고 이 순간의 삶을 즐기며 밝은 미래를 꿈꿀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생각한 진정한 구원과 부활의 실체다. 이제 작품의 맨 앞으로 돌아가자.

    미래 세계에 바치는 유언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완성한 대작 ‘카라마조프’를 아내에게 헌정했다. 실제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첫 부인과 사별한 25세 연상의 남자 곁에 머물며 14년 동안 알뜰한 살림꾼이자 뛰어난 조력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른바 가정의 행복을 누리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 일기’의 다음호를 준비하고 ‘카라마조프’의 2부를 구상했다. 건강이 악화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아직 죽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역시나 그럼에도 죽음은 그 나름의 원칙대로 그를 찾아왔고, 그는 폐동맥 파열로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딸 류보비는 열두 살, 아들 표도르는 열 살이었다.

    신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金 燕 景

    1975년 경남 거창 출생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과정 수료

    러시아 모스크바국립사범대 문학 박사

    1996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前 경북대 연구교수, 前 서울대 연구원

    現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 소설가, 번역가

    저서: 소설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 ‘미성년’ ‘내 아내의 모든 것’, 경장편소설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장편소설 ‘고양이의 이중생활’, 역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악령’ ‘우리 시대의 영웅’



    ‘카라마조프’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여우’ 같은 아내, ‘토끼’ 같은 두 아이와 더불어 인생의 절정을 구가하며 쓴 소설이다. 그 무렵 간질병 발작으로 사망한 막내아들 알료샤에 대한 피 끓는 애도의 감정도 자연스레 작품 속에 스며들었다. 자,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잠시 떠올려보자. 임종의 침상에서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가 가장 애달파한 것은 두 아이와의 영원한 이별이었을 것이다. ‘카라마조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곧 그의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록이자 그의 아이들,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세계 앞에 바치는 유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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