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켈트족이 범유럽적 정체성의 담지자로 주목받고 있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유럽 중부와 서부에 살았던 켈트족이 선사시대에 이미 유럽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면서 통일된 문화적 전통을 이룩했던 집단으로 새롭게 조명받았다. 즉 우리가 흔히 단군과 고조선으로부터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듯이, 당시 유럽 통합을 주도하던 정치 세력들은 켈트족에게서 오늘날 모든 유럽인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1992년 베니스에서는 ‘켈트족, 유럽의 기원(The Celts, the Origins of Europe)’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렇듯 켈트족은 찬란한 선사 문화를 이룩한 주체이자 범유럽적인 정체성의 담지자로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람들 대부분이 가진 켈트족에 관한 이미지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켈트족이라고 하면 대개 로마를 약탈한 미개 집단, 벌거벗은 채 파란색 물감을 뒤집어쓰고 전쟁을 하던 야만인, 혹은 만화 ‘아스테릭스’에 나오는 술 잘 마시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전사 등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 켈트족은 그리스·로마의 문명 세계와 적대 관계를 맺었던 야만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켈트족에 관한 피상적이고 파편적인 이해에서 비롯한 왜곡된 시각일 뿐이다. 켈트족은 그리스와 로마의 집단들과 충돌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문명 세계의 선진 문물을 수용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집단들도 켈트족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았으며, 특히 켈트족이라는 비(非)문명화된 타자(他者)를 통해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을 되돌아보았다. 즉 켈트족과 문명 세계는 단순히 충돌만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했던 것이다.
벌거벗은 야만人

켈트족의 철기시대 유적.
기원전 1900년경, 지중해 동단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이 발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 본토의 남쪽지역에서 미케네 문명이 나타났다. 미노아·미케네 문명이 성장하면서 그리스 지역은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 중심지로 거듭났다. 크노소스 궁전이나 미케네 성채 등에서 나온 풍부한 양의 유물이 이를 입증해준다. 그리스인은 지중해 지역의 자원을 거침없이 소비했고, 지중해 지역 내에서 충당할 수 없는 물자는 원거리 교역을 통해 멀리 떨어진 이방 세계로부터 들여왔다.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초기 단계에는 주로 동쪽, 즉 레반트 지역과 인더스 문명권과의 교역을 통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 멸망하고 그리스 지역 내 소비가 증가하자 그리스인은 새로운 교역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