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본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그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느니라”라는 성경 문구를 독일어로 번역하며 ‘말씀’ 때문에 고민한다. 결국 그는 ‘말’도, ‘뜻’도, ‘힘’도 아닌 ‘행위’를 가장 적합한 역어로 선택한다. ‘말’(=논리=학문)에 대한 염증, 그와 나란히 ‘행위’(=삶)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드디어 삶이, 더욱이 악마에게서 선사받은 삶이 펼쳐진다. 기대해봄직하다.
그러나 정작 파우스트의 모험은 악의 심연을 엿보고 싶은, 심지어 그 밑바닥까지 가보고 싶은 우리의 은밀한 욕망을 별로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상징과 알레고리, 신화적인 요소의 범람, 집필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구성적 단절, 운문 장르의 특성상 불가피한 지나친 비약과 암시 등은 일차적인 독해조차 어렵게 한다.
실상 파우스트가 악마를 보는 까닭은 많은 부분 그가 신의 자리를 넘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욕망조차 악마를 통해 그를 유혹해보고자 했던 신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면? 과연 이 작품의 핵심은, 우리의 감미로운 기대와는 달리, 악마의 실체와 악의 향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마마저 지배하는 신의 존재, 악마저 포용하는 선의 힘을 강조한다. 이런 전제하에 파우스트가 체험하는 삶을 살펴보자.
그레트헨 비극

독일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 있는 괴테(오른쪽)와 실러의 동상.
이것이 이른바 그레트헨 비극(‘초고 파우스트’라고 불린다)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우리의 신파극을 연상케 하는 이 시민 비극은 메피스토펠레스의 기획에서 보자면 죄악과 타락에의 유혹이다. 실제로 파우스트를 사로잡은 그레트헨은 귀족 아가씨도 아닐뿐더러 별로 미인도 아니다(“저는 아가씨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아요.” 1권, 141쪽). 그러니까 파우스트는 그야말로 악마의 묘약, 즉 약 기운에 취해 그녀에게 반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은유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파우스트는 악마의 의도와는 달리 단순한 육적 쾌감 이상의 것을 성취한다. 지고지순하고 숭고한 사랑의 카타르시스와 비극, 이것이 그가 열정의 시험에서 얻은 소중한 체험이다. 1부의 결말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5월1일 전야, 발푸르기스의 밤이 끝날 무렵, 파우스트는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을 발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를 책망하며 감옥에 잠입한다. 형리(刑吏)를 기다리며 불안에 떨고 있던 그녀는 파우스트-하인리히의 등장에 열광하지만 탈옥하자는 그의 권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망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들이 절 노리고 있을 텐데요. / 구걸한다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에요. / 게다가 양심의 가책은 어떡하고요? / 낯선 고장을 떠돌아다니는 건 또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요. / 결국 그들이 절 붙잡고 말 텐데! ”(1권, 246쪽) 보다시피 그레트헨이 도주를 거부하는 것은 비단 “양심의 가책”, 즉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든 그레트헨은 죽음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구원받는다. 그리고 2부의 마지막에 ‘속죄하는 한 여인’이 되어 파우스트의 구원과 부활의 순간을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