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미래가 아닌 오늘을 위해 ‘일’하라 그래야 즐거운 인생이다

  •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입력2011-01-21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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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물은 먹고살기 위해 움직이지만 사람은 ‘일’하며 자아를 실현하고 공익적인 가치도 이룬다. 그래서 ‘일’은 삶의 기반이면서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 가장 좋은 일은 적성에 맞는 일이다. 미래에 실현되는 가치가 아닌 오늘 당장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이 좋은 일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인생이 즐거워진다.
    • 오늘 하루의 성공이 모일 때 미래의 큰 성공도 만들어진다.
    • 하루 종일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들여다보건, 하루 종일 국수를 뽑건….
    미래가 아닌 오늘을 위해 ‘일’하라 그래야 즐거운 인생이다

    성북구 삼선동 ‘장수마을’에서 한성대 예술대 소속 학생들이 ‘희망의 벽화 그리기’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람을 평가할 때 한 가지 방법은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그가 살았을 때 어떤 일을 했는지를 보면 된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자유로운 일은 인생의 만족과 자기 정체성을 갖는 데 꼭 필요하다. 아울러 일을 함으로써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 공동체 속에 뿌리를 내린다. 일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이중의 고통을 안겨준다.

    첫째, 일을 하지 못함으로써 수입이 없는 까닭에 궁핍에 따른 고통을 피할 수 없다. 둘째, 사회 공동체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소외의 고통을 당한다. 일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소용되는 돈을 번다는 뜻을 넘어서서 세계 속에서 자기실현의 계기를 갖는다는 의미가 있다. 일의 영역에 제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은 항상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노동은 주먹의, 사고의, 마음의, 밤낮의 삶의 템포이며, 과학이요, 사랑이요, 예술이요, 신앙이며, 숭배며, 전쟁이다. 노동은 원자의 진동이며 별들과 태양을 움직이는 힘이다.”(에른스트 융거, 여기서는 D. 마킨, ‘인간과 노동’에서 재인용)

    일은 삶의 기반이고 신성한 의무다. 인류 역사에 출현한 모든 문명은 바로 그 원자의 진동이며 별들과 태양을 움직이는 힘인 사람의 노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뛰어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누가 테베의 7대 피라미드를 건설했는가? / 역사책은 왕들의 이름으로 빽빽하다. / 왕들이 그 무거운 돌들을 끌어올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 만리장성이 완성된 날 저녁에 / 석공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베르톨트 브레히트)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구조물들이다. 이것들은 ‘일’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누군가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일컬어지는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호모 파베르, 즉 도구 제작자다. 사람이 본질에서 일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일을 통해 자기실현에 다가가고, “일을 통한 객체와 주체의 창조적 융합은 인간에게 위대성을 부여한다”(D. 마킨, 앞의 책)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그런 까닭에 인류의 역사는 곧 노동의 역사다.

    “노동은 경제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인간은 태초부터 살기 위해 노동을 하여왔다. 인간의 역사는 상당한 정도까지 노동의 형태와 생산수단의 역사, 그리고 노동과정에 의해 창조된 모임과 관계의 역사로 볼 수 있다.”(D. 마킨, 앞의 책)

    우리는 생존의 필요를 위해서 일하지만, 일은 생존의 필요만이 아니라 더 많은 보상을 준다. 일은 아노미, 뿌리 뽑힘, 소외를 극복하게 하고, 자아가 품고 있는 높은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을 함으로써 제 자신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공공적 가치를 갖는 일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되는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위대한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이 없으면 모든 생명은 부패하게 된다.”

    노동이 사회의 윤리적 기초를 이룬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 몸을 써서 하는 노동으로 제 생계를 세우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엄성이 깃든다. 그러나 스스로 노동에서 소외되거나 면제된 자들은 누군가에게 빌붙어 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 노동 없이 소득을 얻는 자의 영혼은 혼돈과 무질서에 떨어지고 그 속에서 타락하며 결국은 부패에 이르고 만다. 우리 사회에는 일을 할 수 있는데도 놀고먹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 놀고먹는 사람들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경우를 보는 것은 드물지 않다. 그게 문제인 것은 놀고먹는 사람들이 협동적 조화가 필요한 사회에서 불협화음 만들어내며 결국은 사회의 공정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놀고먹지 마라

    서재 창가에 10여 년쯤 전에 보리수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늦봄에는 가지마다 달콤한 빨간 열매가 가득 열린다. 그게 새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보리수가 익을 무렵이면 종일 갖가지 새들이 드나들며 홍보석 같은 열매를 쪼아댄다. 물까마귀, 멧비둘기, 까치, 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들이 번갈아가며 열매를 따먹는 것이다. 그 새들의 생계현장을 지켜보며, 새나 사람이나 생계를 위해 수족을 부지런히 놀리는 일은 숭고한 도덕적 책무임을 새삼 깨닫는다. 동물도 먹이 활동을 하고, 짝짓기 활동을 통해 제 DNA를 퍼뜨리고, 보금자리를 만드는 따위의 일을 한다. 그러나 동물과 사람이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둘의 생산 사이에는 근본적인 다름이 있다.



    “동물은 단지 그 자신에게 혹은 그의 새끼들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을 만들 따름이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생산하나, 인간은 반대로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그것은 단지 직접적인 육체적 필요의 지배 아래서만 생산을 하나, 인간은 육체적 필요로부터 자유로운 때도 생산을 하며, 사실은 이 자유 속에서만 참답게 생산을 한다. 동물은 단지 그것 자체만을 생산하나 인간은 자연의 전체를 재생산한다. 동물의 생산은 직접적으로는 그의 육체에 소속되지만 인간은 자유롭게 그의 생산물과 마주 선다. 동물은 그가 소속한 종(種)의 표준과 필요에 맞추어 사물을 형성하지만 인간은 모든 종의 표준에 맞추어 생산할 줄을 알며 또한 모든 곳에서 어떻게 하면 고유의 표준을 객체에 적용시킬 것인지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미의 법칙에 따라서 사물을 형성할 줄 아는 것이다.”(카를 마르크스, ‘경제·철학 수고(手稿)’, 여기서는 D. 마킨, 앞의 책에서 재인용)



    동물은 단지 목전의 생물학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일한다. 반면에 사람은 그것을 넘어서서 자아실현과 공익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아울러 먹고 사는 것과 무관하게 단지 탐미적 사물의 형성을 위해서도 기꺼이 일한다. 동물은 제 몸과 새끼들을 생명과 안전을 구축하는 소아적 기준의 활동에 머문다면, 사람은 노동 행위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진화하는 노동의 윤리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람은 동물보다 조금 더 숭고한 존재다.

    몇 해 전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밥을 끓이시는 팔순 노모를 시골로 모셨다. 그랬더니 노모는 영농인으로 변신하셨다. 노모는 텃밭에 감자를 심고 고구마를 심고, 들깨를 심고, 콩을 심으셨다. 땅의 빈자리마다 호박을 심고 갖가지 채소를 심으셨다. 시골에 내려온 뒤 동무도 없고 소일거리도 없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시더니 텃밭 가꾸기에 재미를 붙이셨다. 노모는 일을 하니 밥맛도 더 좋다고 하신다.

    그러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일은 쉽지 않다. 밭에 뿌린 씨앗들은 새들이 날아와 쪼아 먹고, 싹이 나면 고라니들이 내려와 잘라 먹었다. 싹들이 잘 자라도록 가물면 물을 주어야 하고, 수시로 풀들을 뽑아야 한다. 팔순 노모는 그 고단한 일을 잘도 하신다. 지난 가을에도 누런 호박덩이를 거두고, 들깨를 수확해 들기름을 몇 병 짜오셨다. 팔순 노모가 새 일에 재미를 붙이고 그 일 속에서 생산의 기쁨과 경탄을 느끼는 걸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즐겁다. 사람은 대지를 갈고, 땡볕 아래서 잡초를 뽑고, 풀을 베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빵을 굽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동화를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날마다 기상 상태를 관측하고, 접시를 닦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만드는 일들을 하며 평생을 보낸다.

    일은 그가 속한 현실과 공동체 속에서 그의 자리를 확고하게 만들어준다. 일하는 것의 보람과 효과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자유의지로 일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서 의미의 생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일하는 사람은 노동의 순수함에 집중함으로써 불필요한 걱정과 근심이 만드는 압박감에서 놓여난다. 일은 그 자체로 삶이 되고, 그것의 심오함을 반복함으로써 인격을 닦는 수행이 되기도 하다.



    “일은 사람이 늙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준다. 일이 곧 내 삶이다. 나는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결코 권태롭지 않고 늙지 않는다. 희망과 계획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늙는다. 일과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다.”(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귀천을 따지지 마라

    미래가 아닌 오늘을 위해 ‘일’하라 그래야 즐거운 인생이다
    일이 갖는 가장 중요한 효과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그것에 오롯하게 ‘정신을 팔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는 일하지 않는 자들을 관찰해보면 분명해진다. 실직자나 노동현장에서 물러난 퇴직자들은 처음엔 일에서 놓여난 한가로움을 만끽하지만 나중에는 권태에 빠지게 된다. 그 권태 속에서 수없이 많은 잔 근심의 포로가 된다. 그의 마음은 온갖 헛된 망상과 근심거리들이 들끓는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그 모든 사태는 그의 ‘정신을 팔게’ 해주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 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일은 실존의 막연한 불안을 구체적인 것, 즉 육체의 피로와 교환하는 과정이다. 일에 몰입해 크고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을 작고 분명하고 구체적인 목표로 지워갈 때 우리는 봉급이라는 과실을 수확하고, 우리 의식을 갉아먹는 죽음이라는 항상적 불안에서 벗어난다. 젊은 시절에는 귀천을 따지지 말고 많은 일을 해보는 게 좋다. 특히 나이 들어서 하기 어려운 거친 일들을 광범위하게 해보는 게 좋다. 너무 안락하고 보수가 많은 일을 찾는 것은 좋지 않다. 많은 보수보다는 보람이 많은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좋다. 아니 차라리 무보수로 일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처지가 되면 보수는 작고 보람은 큰일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런 즐거움과 보람은 없고 강제된 수고는 많은 일 속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죽어가는 사람이 많다. 이때 일은 그것에 달라붙어 있는 노동자를 소외시킨다. 그들은 마지못해 일하며, 그 의미 없이 되풀이되는 노동 속에서 추악한 산업의 부속물로 전락할 따름이다.



    “사물과 상품의 세계에 점점 더 큰 가치가 부여됨과 비례해서 인간의 세계는 가치가 떨어져간다. 사람의 노동은 ‘그 자신으로부터 역행하며 그로부터 독립되고 그에게 속하지 않는’ 활동이 된다. 그의 노동은 그에게 본질적인 것이 되는 대신 외면적인 것이 되며, 그는 노동 속에서 그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의 활동 속에서 기쁨을 느껴야 할 것임에도 불행을 맛보며, 그의 정신적·신체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전시켜야 할 터임에도 ‘그 몸을 괴롭히고 정신을 파괴하게 된다.’”(D. 마킨, 앞의 책)

    기쁨이 없는 강제적인 노동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옥죄고 결국은 무너뜨린다. 일이 필요의 압박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것일 때 사람은 그 일 속에서 자기실현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 행복한 삶이란 나의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사용해서 하는 일 속에서 자아와 일의 통합이 이루어질 때, 즉 내 존재의 시간을 행복하게 쓸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쉽게 돈 벌지 마라

    이 세상에는 수만 종류의 일이 있다. 그 일들 중에서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 미래에 실현되는 가치만이 아니라 오늘 당장의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즐거운 인생은 즐거운 일을 가질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자신의 신체적·정서적 상태와 잘 조화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로 이끌어 매는 것, 즉 현재의 ‘훌륭한 평형상태(good equilibrium)’에 삶을 세우는 것이다.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삶에서 과실을 수확한다는 것은 인생 그 자체의 즐거움과 보람을 불확실한 미래의 어느 때로 미루는 게 아니라 즉각적으로 맛보게 한다. 그런 하루하루의 작은 성공들이 모여서 미래의 큰 성공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천체망원경으로 별들을 들여다보고, 어떤 사람은 종일 텔레비전의 프로그램들을 들여다본다. 어떤 사람은 물건을 팔고, 어떤 사람은 국수를 뽑는다. 일은 그 자체로서 평등하다. 하지만 한 치과의사가 병원을 접고 우동집을 냈다는 기사를 읽을 때 나는 즐겁다. 대기업에 다니던 사람이 가족을 이끌고 농사를 짓기 위해 귀농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쁘다.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벗고 제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일은 쉽게 돈 버는 일이다. 노동량이나 수고에 견줘 지나치게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은 사회의 공정성을 해치는 일이다. 대개는 남에게 돌아갈 몫을 더 차지하는 것이다. 최악의 일은 남을 기망하거나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사람의 이익을 돌보면서 돈 버는 일이다. 반면에 좋은 일들은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 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일, 집 없는 사람의 집을 짓는 일,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돌보는 일, 그림을 그리고 동화를 쓰는 일 따위다. 그것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힘은 덜 들고 보수가 많은 일자리를 찾는 것이 그다지 어여쁘지 않다. 그런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청춘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 때로는 걱정이 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일 자체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천직을 찾는 게 중요하다. 남이 어떻게 보든 자기 일에서 보람과 신명을 찾는다면 그게 바로 천직이다. 보수가 많은 일보다는 그런 보람을 주는 일들을 찾으려는 젊은이가 많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반대로 보람이나 즐거움보다는 단지 보수가 많은 일들을 찾는 젊은이가 많은 사회는 건강하지 않은 사회다. 그런 사회는 필연적으로 경쟁이 치열하고 여유가 없이 척박할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젊은 시절 한때 험한 일도 했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나는 일에 인생을 저당 잡히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일 속에서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 일을 통해서 물질 자원뿐만 아니라 정신 자원, 즉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더불어 내적인 평화와 고요도 함께 얻어야 한다.

    가구를 만들고 싶다

    내가 찾은 천직은 글 쓰는 일이다. 나는 그 일을 30년이 넘도록 하고 있다. 나는 많은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면서 자유로운 사유와 상상력 속에서 책들을 구상하고 그것들을 쓴다.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출판사에서 인세를 받는다. 그것으로 쌀을 사고 건강보험료와 국민연금을 내고 자식 셋을 키웠다. 더러는 글쓰기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손을 뻗쳐 떼 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현실에 작동하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이다. 더 높이 떠있는 구름 조각을 떼내었을 때 박수를 받지만, 골육의 에너지를 구체적인 쓸모가 없는 공허함을 위해 방출했다는 수치심이 없지 않다. 지금까지 그 일에 만족했지만 가끔은 남몰래 새로운 일을 찾아 전업을 꿈꿔본 것은 그 수치심 때문이다.

    미래가 아닌 오늘을 위해 ‘일’하라 그래야 즐거운 인생이다
    장 석 주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출강

    저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해항로’ 등


    생계비를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로워지면 나는 가구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다. 공방을 만들고 갖가지 도구들을 한쪽 벽에 가지런히 걸어두고 가구를 만드는 일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나는 가구를 만들고 사람들이 공방을 찾아와 그 가구들을 구경하고 사간다. 나는 최소한도의 도구들을 써서 가구를 만드는 일을 하며, 그 창의적인 노동 속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도구들은 나의 손과 기술의 통합이며 연장이다. 그때 나의 일은 기계적 예속과는 무관하게 나의 자발적이면서도 정직한 손과 원시적인 도구들만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이 될 것이다. 나는 전업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가구를 만들면서 얻어지는 사유들을 모아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D. 마킨, ‘인간과 노동’ | 이동하 옮김, 한길사, 1982

    ·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 정영목 옮김, 이레, 2009

    ·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 이영호 옮김, 민음사, 2009

    · 조엘 쿠퍼먼, ‘훌륭한 인생에 관한 여섯 개의 신화’ | 손정숙 옮김, 황소자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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