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전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이 분석한 독일 통일의 진실

“독일 통일 원동력은 포용 정책 아닌 힘의 우위” “서독 경제원조가 동독 민주화 혁명 지연시켰다”

  •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원장 donyoum@naver.com

    입력2011-01-21 13:3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1990년 8월부터 3년간 주독일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면서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봤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으로 일했으며 독일 통일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과 평론을 써왔다.
    • 최근엔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이라는 제목의 책도 펴냈다. 그런 그가 한국에 전파된 기존의 인식과는 다른 시각에서 독일 통일을 들여다본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1990년 10월 독일의 통일을 관심 있게 지켜본 이들 중 하나가 바로 한국 국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배웠다.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독일 통일의 교훈이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적극적인 교류·협력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나 조급한 통일, 흡수통일로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경제를 일으켜 세운 후 천천히 통일해야 한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노태우 정부는 독일 통일 다음해인 1991년 12월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서둘러 체결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북한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했다. 생생히 지켜본 독일 통일의 후유증은 한국 사회에서 통일을 두려워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른바 ‘통일 회의론’이다. 독일 통일의 어두운 측면만이 부각되면서 독일 방식의 통일은 경계하거나 기피해야 할 모델이 됐고, 이러한 인식은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필자는 독일 통일에 관한 한국 사회의 이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통일의 배경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독 정부가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이후 동독과 적극적인 교류·협력 정책을 추진해온 것이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다. 독일 통일 이후 4년간 국내 일간지에 게재된 사설 40건을 분석해보면 47%(19건)가 독일의 통일을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화해협력의 산물이라고 평가했고, 32%(13건)가 서독의 정치·경제·도덕적 우월성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 이전 서독에서는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기민당·CDU)과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사민당·SPD)이 교차적으로 집권하면서 서로 다른 통일정책 혹은 내독(內獨)정책을 추진했다. 기민당의 정책은 서독을 민주적이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친서방 정책으로 ‘힘의 우위’를 확고히 함으로써 통일을 이루겠다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기민당 정부는 소련의 중립화 요구를 거부하고 친미·친서방 노선을 견지하면서 민주제도의 정착과 경제재건에 주력했다. 1955년에는 통일에 장애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1979년 소련이 동유럽에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했을 때는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퍼싱-2 미사일과 크루즈미사일의 서독 배치에 동의하기도 했다.



    힘의 우위 > 햇볕정책

    특히 ‘여우’라는 별명을 가졌던 기민당 출신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동서 진영 간의 대결이 종결되고 유럽에 협력체제가 정착되거나 소련 경제가 어려워져 소련이 동유럽 지배를 포기하는 경우, 중·소 분쟁이 격화되어 소련이 아시아 지역에 역량을 집중하는 경우에만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 예측했다. 이제와 돌아보면 ‘여우’가 얼마나 탁월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사민당은 소련이나 동독과 화해·협력하고 동독의 안정을 도우면 공산정권이 변화해 통일이 가능해지거나 ‘사실상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른바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이다. 이에 따라 사민당은 서독의 중립화 또는 동서양 진영을 끊임없이 오가는 ‘시계추 외교’를 모색했고, 서독의 NATO 가입에 격렬히 반대했다.

    사민당의 동방정책이 동서독 사이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해 민족의 이질화를 방지하고 분단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교류·협력으로 동독 공산정권이 변화해 가능해진 것이 아니다. 동독 주민들의 시위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이들이 서독과의 통합을 원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더욱이 정확히 말해 당시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을 완화하는 데 목표를 둔 ‘평화적 분단 관리’ 정책이었다.

    일각에서는 동방정책으로 동서독 주민 간에 접촉과 교류가 활발해져 1989년 동독 혁명과 통일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는 동독 혁명이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 민주화 혁명에 성공한 후에야 가장 늦게 일어난 배경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서독의 지원이 동독의 민주화 혁명을 지연시켰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동독 혁명 당시 서독 정부가 사민당의 주장대로 동독과의 화해 분위기 손상을 우려해 동독 탈출민의 수용을 제한하고 동독에 경제지원을 했다면, 통일에는 훨씬 더 오랜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경제적 지원의 성격이다. 당시 서독 정부는 동독에 대한 각종 지원이 공산정권 강화에 이용될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했다. 동독이 먼저 요청할 때 반드시 대가를 받고, 서독의 지원을 동독 주민들이 알게 하는 방법으로 지원한다는 원칙도 고수했다. 특히 무상원조나 현금지원은 엄격히 제한해, 동서독 기본합의서 체결 11년 후인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19억5000만마르크(약 1조2000억원)의 은행차관을 주선해주었을 뿐이다.

    동독 주민 탈출 도운 콜 총리

    한국의 행보는 이와 사뭇 달랐다. 독일 통일이 화해와 협력의 결과라고만 생각하고, 우리가 먼저 포용 태도를 보이면 북한도 개혁개방의 길로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측의 지원이 북한 정권의 강화에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평범한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 동지가 선군정치로 미국과 남한을 쥐락펴락하기 때문에 쌀을 보내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탈북자들의 전언은 이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북한이 폐쇄사회라 한들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해서도 오해하기는 마찬가지다. 흔히 1970년 동서독이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을 계기로 2년 뒤 동서독 기본합의서가 체결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에 총 네 차례 열린 공식 정상회담은 1987년 9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동서독 관계의 발전이나 통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특히 1차와 2차 정상회담은 동독 측이 소련의 종용에 따라 서독의 제안에 응한 것이어서 첨예한 견해차이만 확인했을 뿐 성과가 전혀 없었다. 소련이 서독과의 관계개선에 소극적이던 발터 울브리히트 서기장을 호네커로 교체한 후에야 기본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1차 남북 정상회담도 막연한 기대를 갖고 거액의 대가를 지급하기보다는 실무회담을 통해 실질적 합의에 도달한 후 이루어졌어야 옳았다.

    과대평가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의 역할이다. 흔히 독일 통일 최고의 공로자라고 평가받는 그는 분명 독일 통일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과 동유럽의 변화를 선도했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해 동유럽의 탈(脫)공산화 혁명을 가능케 했으며, 동독의 개혁을 촉구하고 시위의 무력진압에 반대해 ‘평화혁명’의 여건 조성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소련과 동유럽의 변화를 가져온 ‘역동성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역사의 흐름에 떠밀린 ‘역사 무대의 수동적 배우’라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독일 통일을 수락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다가 국제정세의 변화와 서방 측의 압력에 부득이 동의했다. 결국 그의 역할도 화해나 협력에 의해 이뤄졌다기보다는 ‘힘의 우위’가 불러온 결과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렇듯 그간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간과한 부분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의 역할이다. 콜 정부는 1989년 8월 헝가리와의 비밀 교섭을 통해 헝가리를 통한 동독주민의 탈출이 가능토록 함으로써 동독주민의 대량 탈출을 촉발했고, 수많은 어려움과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9년 8월 이후 동독 탈출민 46만명을 전원 수용한 바 있다. 또한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후에는 국내외의 격렬한 반대를 예상하면서도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해 통일의지를 확고히 천명하는가 하면, 동독 혁명 당시에는 공산정권의 경제지원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등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좌절과 불만을 통일로 연결시켜나갔다. 이렇듯 동독의 변혁과정에서 서독 정부가 취했던 기민하고도 적극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그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기억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서독 내에서도 통일 논의가 금기시되던 1989년 9월부터 독일 통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함으로써 콜 정부가 적극적인 통일노력을 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 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고, 고르바초프의 집권기반 연장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을 압박해 독일 통일을 승인하도록 유도했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미국이 보여주었던 역할의 크기는 한반도의 통일과정을 상정해보면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통일 후유증 원만하게 극복

    ‘흡수통일’이라는 방식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에는 오해가 적지 않다. 쉽게 말해 독일의 흡수통일은 잘못된 것이며, 되도록 피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체제로의 병합을 원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었다. 흡수가 아닌 대등한 통일을 한다면 양측의 체제를 서로 절충하고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이 과연 북한체제의 어떤 부분을 수용하고 절충할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김일성 주체사상의 권위주의 체제 사이에 과연 양보가 가능한 부분이 있을까. 시장경제를 버리고 사회주의 경제를 수용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조급한 통일로 인해 독일 사회가 겪은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우리는 우선 북한 경제를 일으켜 세운 뒤에 점진적인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 있어 빠른 속도의 통일 외에 다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동독 탈출민의 폭증을 막기 어렵고, 동독경제는 이미 파탄 상태에 이르러 동독 민주정부가 신속한 통일을 요구한 데다, 고르바초프의 실각 가능성이 커서 신속한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과연 한반도에 통일의 기회가 온다면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더욱이 시장경제 체제에 익숙하지 못하고 부패가 심한 북한에서 기대처럼 경제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경제상태가 호전된 북한이 통일에 응할지도 미지수다. 오히려 남북 간에 정치·경제적 격차가 큰 상태에서만 통일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전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이 분석한 독일 통일의 진실

    (왼쪽) 기민당 출신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소련의 중립화 요구를 물리치고 친서방 정책을 견지했다. (오른쪽) 사민당 출신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분단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잠시 독일 통일의 후유증에 대해 되짚어보기로 하자. 통일 이후 독일은 매년 연방예산의 25~30%, 15년간 총 1조4000억유로를 동독 지역에 쏟아 부었다. 이 가운데 60%가 실업보험이나 건강보험 등 소비성 지출이었다. 재정적자가 늘어나고 실업자가 증가하자 통일 독일은 ‘유럽의 문제아, 유럽의 병자’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동독 주민들이 시장경제 체제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실업급여로 생활수준은 높아졌지만 가장이 실직한 가정이 겪는 좌절과 절망, 서독 사람들에 견주어 느끼는 열등감 등 어려움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렇듯 통일 독일이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은 단순히 통일 때문만은 아니다. 서독경제가 안고 있었던 ‘선진병(病)’도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통일 이후 독일은 선진병을 극복하고자 2003년부터 일종의 내핍계획인 ‘어젠다 2010’을 추진했고, 이제는 대부분의 후유증을 극복해내어 ‘펄펄 나는 독일경제’로 부활하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유럽 최고수준에 도달했고, 재정적자도 대폭 개선됐으며, 수출도 호조를 보여 2005년 이후 세계 1위 자리를 회복했다. 이는 동독 지역도 마찬가지여서 1991년 서독 지역의 35%에 불과하던 취업자 1인당 생산량이 2007년에는 77%에 도달했고, 주민소득도 서독 지역의 83%에 달했다.

    메르켈 총리, 플라첵 사민당수, 티어제 연방하원 의장 등 동독 출신 인사들이 통일 독일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동독 지역 주민들의 2등 국민 의식도 상당부분 해소됐다. 이제 남은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소될 수 있는 것에 가깝다. 독일의 통일 후유증이 자유민주체제의 기본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가운데 원만하게 극복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최근에는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은 독일인들이 “독일에는 별문제가 없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그리 걱정을 하느냐”고 되물을 정도다. 한국에 부임하는 독일대사들이 항상 강조하는 것은 “후유증이 두려워 통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부작용은 통과의례로 여겨야

    그간 한국의 학계에서는 독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통일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성공사례로서의 독일 통일보다는 실패사례로서의 독일 통일에서 교훈을 얻자는 주장이었다. 정부 관계자들 역시 “선발자의 영광은 독일에게, 후발자의 이익은 우리에게”라며 지난 20년 동안 후유증 없는 통일방안 짜기에 골몰해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독일 통일과정에서 발생한 ‘실책’은 대부분 불가피하게 선택된 ‘차선책’일 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동서독의 화폐교환 비율을 높이 책정한 것만 해도 통일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동독 주민들의 이주 물결을 억제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 저축보호, 이주물결의 억제, 동독 정부와 주민의 강력한 요구 등을 반영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우리가 이렇듯 독일 통일의 과정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품고 있는 동안, 북한은 그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남북관계에 반영해왔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우선 북한은 개혁·개방과 교류·협력이 체제에 미칠 부정적인 측면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동독 공산간부의 몰락을 당 간부교육 자료로 삼은 것이나, 금강산 관광지역을 철저히 외부와 격리한 조치도 이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사회는 이제 통일에 관한 그간의 환상과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선 우리가 호의를 보이면 북한 체제도 이에 응답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김정일 체제가 동독 공산정권처럼 쉽게 붕괴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곤란하다. 동독에 압력을 가했던 고르바초프의 소련과 지금의 중국은 다르기 때문이다. 햇볕정책이 북한 체제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역시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이 동독 몰락의 교훈을 체화하고 있는 현재 상태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전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이 분석한 독일 통일의 진실
    廉燉載

    1943년 강릉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박사(정책학)

    주독일대사관 공사

    국가정보원 1차장

    現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원장

    저서:‘경제전쟁시대의 안기부의 역할’‘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


    마지막으로 반드시 버려야 할 사고방식은, ‘통일 계획을 잘 짜면 후유증 없는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이다. 통일의 후유증은 분단 기간에 이미 잉태된 ‘분단의 후유증’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룬다면 반드시 겪어야 할 일종의 통과의례인 것이다. “분단은 고통 분담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동독의 마지막 총리 로타 드메지어의 충고를 귀담아들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