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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이 분석한 독일 통일의 진실

“독일 통일 원동력은 포용 정책 아닌 힘의 우위” “서독 경제원조가 동독 민주화 혁명 지연시켰다”

  •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원장 donyoum@naver.com

전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이 분석한 독일 통일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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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주민 탈출 도운 콜 총리

한국의 행보는 이와 사뭇 달랐다. 독일 통일이 화해와 협력의 결과라고만 생각하고, 우리가 먼저 포용 태도를 보이면 북한도 개혁개방의 길로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측의 지원이 북한 정권의 강화에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평범한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 동지가 선군정치로 미국과 남한을 쥐락펴락하기 때문에 쌀을 보내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탈북자들의 전언은 이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북한이 폐쇄사회라 한들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해서도 오해하기는 마찬가지다. 흔히 1970년 동서독이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을 계기로 2년 뒤 동서독 기본합의서가 체결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에 총 네 차례 열린 공식 정상회담은 1987년 9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동서독 관계의 발전이나 통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특히 1차와 2차 정상회담은 동독 측이 소련의 종용에 따라 서독의 제안에 응한 것이어서 첨예한 견해차이만 확인했을 뿐 성과가 전혀 없었다. 소련이 서독과의 관계개선에 소극적이던 발터 울브리히트 서기장을 호네커로 교체한 후에야 기본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1차 남북 정상회담도 막연한 기대를 갖고 거액의 대가를 지급하기보다는 실무회담을 통해 실질적 합의에 도달한 후 이루어졌어야 옳았다.

과대평가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의 역할이다. 흔히 독일 통일 최고의 공로자라고 평가받는 그는 분명 독일 통일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과 동유럽의 변화를 선도했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해 동유럽의 탈(脫)공산화 혁명을 가능케 했으며, 동독의 개혁을 촉구하고 시위의 무력진압에 반대해 ‘평화혁명’의 여건 조성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소련과 동유럽의 변화를 가져온 ‘역동성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역사의 흐름에 떠밀린 ‘역사 무대의 수동적 배우’라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독일 통일을 수락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다가 국제정세의 변화와 서방 측의 압력에 부득이 동의했다. 결국 그의 역할도 화해나 협력에 의해 이뤄졌다기보다는 ‘힘의 우위’가 불러온 결과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렇듯 그간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간과한 부분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의 역할이다. 콜 정부는 1989년 8월 헝가리와의 비밀 교섭을 통해 헝가리를 통한 동독주민의 탈출이 가능토록 함으로써 동독주민의 대량 탈출을 촉발했고, 수많은 어려움과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9년 8월 이후 동독 탈출민 46만명을 전원 수용한 바 있다. 또한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후에는 국내외의 격렬한 반대를 예상하면서도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해 통일의지를 확고히 천명하는가 하면, 동독 혁명 당시에는 공산정권의 경제지원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등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좌절과 불만을 통일로 연결시켜나갔다. 이렇듯 동독의 변혁과정에서 서독 정부가 취했던 기민하고도 적극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그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기억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서독 내에서도 통일 논의가 금기시되던 1989년 9월부터 독일 통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함으로써 콜 정부가 적극적인 통일노력을 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 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고, 고르바초프의 집권기반 연장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을 압박해 독일 통일을 승인하도록 유도했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미국이 보여주었던 역할의 크기는 한반도의 통일과정을 상정해보면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통일 후유증 원만하게 극복

‘흡수통일’이라는 방식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에는 오해가 적지 않다. 쉽게 말해 독일의 흡수통일은 잘못된 것이며, 되도록 피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체제로의 병합을 원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었다. 흡수가 아닌 대등한 통일을 한다면 양측의 체제를 서로 절충하고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이 과연 북한체제의 어떤 부분을 수용하고 절충할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김일성 주체사상의 권위주의 체제 사이에 과연 양보가 가능한 부분이 있을까. 시장경제를 버리고 사회주의 경제를 수용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조급한 통일로 인해 독일 사회가 겪은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우리는 우선 북한 경제를 일으켜 세운 뒤에 점진적인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 있어 빠른 속도의 통일 외에 다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동독 탈출민의 폭증을 막기 어렵고, 동독경제는 이미 파탄 상태에 이르러 동독 민주정부가 신속한 통일을 요구한 데다, 고르바초프의 실각 가능성이 커서 신속한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과연 한반도에 통일의 기회가 온다면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더욱이 시장경제 체제에 익숙하지 못하고 부패가 심한 북한에서 기대처럼 경제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경제상태가 호전된 북한이 통일에 응할지도 미지수다. 오히려 남북 간에 정치·경제적 격차가 큰 상태에서만 통일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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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원장 donyou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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