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를 비롯해 각급 기관에서 쏟아내는 각종 공문서, 기업에서 업무 중에 발생하는 각종 문서도 그 자체로 현실의 반영이며 기록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숙제로 나오는 일기(日記) 역시 날마다 남기는 기록이라는 뜻이고, 나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역사를 기록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기록하는 것(ecording), 이것이 역사의 첫 번째 행위다.
둘째, 기록된 인간의 경험을 잘 관리해 후세에 넘겨주는 일이다. 여러 나라에 있는 국립기록관(National Archives)이나 지방기록관, 종교단체나 학교의 기록관들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기록관을 박물관, 도서관과 함께 3대 문화시설로 생각하는데, 아쉽게도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기록관이 시민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한 4대 사고(史庫)의 전통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대목이다. 서서히 나아지리라 믿는다. 이렇게 역사를 보존하는 것(archiving), 이것이 두 번째 역사 행위다.
셋째, 이렇게 보존된 기록을 통해 그 경험, 즉 역사적 사실을 재현(再現·representation)하는 일이다. 앞서 남긴 기록을 사료(史料)라고 하고, 이렇게 재현하는 행위를 역사서술(historiography)이라고 한다. 필자가 지금 쓰는 이 글의 성격도 기본적으로 역사서술의 영역에 속하며, 기타 논문이나 저서도 대체로 역사서술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역사나 다른 흥미로운 시대에 대해 알려주는 일은 모두 이 역사서술에 속한다.
기록-보존-재현, 이것이 역사다. 우리는 종종 기록-보존은 빼놓고, 재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에 대한 오해를 낳는다. 자, 그러니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인생을 녹음해두고, 잘 보관했다가 훗날 손자, 손자의 아들딸들이 다시 듣고 되새길 수 있게 해보자. 거듭 말하거니와 그 자체가 곧 역사적 행위다.
사관(史觀)

조선시대 백자로 만든 타구(唾具). 침 뱉는 그릇이다. 관청 사무실이나 집안에서 침 뱉는 데 쓰였다. 같은 시기, 유럽 궁정에서는 식탁에서 침을 뱉지 않는 것이 예절로 정착했다.
하지만 사관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록-보존보다 역사서술, 즉 재현의 단계가 아닐까 한다. 재현은 기록-보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재현은 기록-보존 단계에서 남긴 사료가 없으면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재현은 사료의 제한, 기록-보존 단계에서 이뤄진 선택의 제한을 그대로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기록-보존의 목적이 ‘한 시대의 경험을 후대로 전승한다’는 다소 일반적인 성격을 띠는 데 비해 재현은 어떤 동기나 이유를 가지고 특수한 배경 속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사관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이 나온다. 우선 재현하려고 하는 주제나 대상과 관련된 사료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아무리 관심이 크더라도 남아 있는 사료가 적으면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다음으로 재현의 ‘이유나 동기’, 그 재현 자체를 규정하는 인식체계, 즉 재현하는 사람이 그 재현을 수행할 때 적용하는 사유방식이 두 번째 조건이다. 이를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단하고 나누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 행위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피스테메는 대상을 설명하면서 담론을 구성하는 방식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바로 이런 ‘세계=대상을 질서 지우는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은 역사적으로 변천해왔다는 것이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의 논지였다.(이규현 역, 민음사, 2012)
담론
예를 들어 알아보자. 우리는 지금 밥상에서 밥을 먹을 때 상 위나 바닥에 함부로 침을 뱉지 않는다. 그런데 왜 침을 뱉지 않을까? 답은 뻔하다. “더러우니까!” 사실 난 침이 왜 더러운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남녀의 키스는 침이 있어서 감미롭다. 침이 더럽다는 분들, 키스는 어떻게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관념을 따라가보자.
“좋다, 그럼 침이 왜 더러운가?”라고 묻는다면 “병균이 옮으니까!”라는 반응이 나온다. 아마 현대인이라면 이런 문답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은 없을 터. 침에 병균이 묻어 감염될 위험이 있으므로 식탁에서 침을 뱉지 않고, 나아가 길거리같이 사람 많은 곳에서도 침을 뱉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인식은 타당한 것인가?
흥미롭게도 식탁에서 침을 뱉지 않는 예절은 유럽의 경우 11, 12세기에 생겨났다. 그것은 궁정에서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한 태도의 하나로 등장했다. 높은 분 앞에서 침을 뱉는 것이 미안해서 생긴 예절이었다.(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역, ‘문명화과정’, 한길사, 1996) 이 사실이 전해주는 진실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