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호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오항녕은 극우 파시스트다!’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입력2014-02-20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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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쟁 또는 토론이란, 어떤 가정이나 전제에서 합리적 추론을 통해 모종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 통상 이 과정에선 서로 소통하는 과정이나 근거나 사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오류나 왜곡이 꼭 의도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자. 조금만 산만하거나 마음을 놓으면 그 틈으로 오류가 스며든다. 나는 예외겠지, 하는 생각이 바로 오류의 출발이다. 그렇다고 너무 주눅 들진 말자. 오류를 줄이기 위해 그동안 그렇게 소쩍새 울 듯, 서리가 내리듯 오류의 양상과 종류를 훑어오지 않았던가. 지금 논쟁이나 토론 과정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점검하면서 그동안의 논의를 정리하는 중이다.

    논쟁이란 음모가 아니다. 논쟁 또는 토론이란, 어떤 가정이나 전제에서 합리적 추론을 통해 모종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한다. 통상 논쟁 과정에선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가 있을 수 있고, 근거나 사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전자를 의미론적 오류, 후자를 실체적 오류라고 한다. 의미론적 및 실체적 오류와 왜곡의 대표적 사례에 대해 우리는 지난번에 교학사 고교 한국사교과서(권희영, 이명희 대표집필)의 사례를 들어 살펴봤다. 시의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학사 교과서가 역사학의 쟁점에 대해 전형적인 오류를 워낙 다양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의미론적 왜곡엔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모호함의 오류. 이 오류는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표현이나 단어를 사용한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계급, 문화, 교육, 정당, 봉건제, 낭만주의 등의 용어는 누구나 아는 듯하지만, 논의하는 그 맥락에서 정의(定義)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종종 서로 다른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모호함은 곧잘 혼동으로 이어진다.

    ‘확실히’=‘아마도’(?)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대학 도서관에 비치된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초간본. 때론 긴 분량의 저술도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낳곤 한다.

    개념에 가까운 용어 사용도 오류를 수반하지만, 역사학자의 과장(誇張)도 오류를 낳는 데서는 예외가 아니다. 역사학자들도 설득력을 높이려다 보면, ‘때때로’ 대신 ‘항상’, ‘가끔’ 대신 ‘때때로’, ‘드물게’ 대신 ‘가끔’, ‘한 번은’ 대신 ‘드물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이 ‘확실히’라고 말하면 ‘아마도’로 알아들어야 하고, ‘아마도’라고 말하면 ‘혹시’ 정도로 알아들어야 하며, ‘혹시’라고 말하면 ‘추정컨대’ 정도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또한 ‘말할 필요도 없다’는 말은 종종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며, ‘알려져 있지 않다’는 말은 ‘나는 모르겠다’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문장을 시작하며 곧잘 덧붙이는 ‘사실’이라는 말은 단지 ‘내 생각에는’이라는 의미이고, ‘의심할 것도 없이’라는 말은 오히려 ‘의심할 만한 요소가 있는데 내가 무시했다’는 뜻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비꼬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가의 판단’을 마치 ‘역사의 판단’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의미론적 오류는 신문의 타이틀, 인터넷 뉴스 제목에서 자주 발견되듯이, ‘강조의 오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른바 ‘낚였다’는 느낌이 들면 ‘강조의 오류’에 넘어간 경우일 때가 많다. 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오류가 ‘흑백논리의 오류’다.

    흑백논리의 오류

    춥다/덥다, 빛/어둠, 선/악, 자유/부자유, 좌익/우익 같은 용어가 그것이다. 춥다(선선하다)/덥다(따뜻하다)는 것 사이엔 아무런 고정된 기준이 없다. 실내에서 20℃면 더운 느낌이 들다가도 밖에 있으면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열대지방에 살던 사람은 28℃ 되는 날씨가 선선하지만 온대지방에 사는 우리는 덥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특정한 목적 아래 정확히 구분할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 구분은 언제나 임의적인 구분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구분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임의적이고 정도의 문제이기 때문에 ‘실제’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음지와 양지는 구분되는 듯하지만, 햇빛이 직접 비치든지 반사되어 비치든지의 차이일 뿐이고, 심지어는 음지에서도 더 어두운 곳이 있고 비교적 환한 곳이 있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무시한 채 아예 검다/희다는 구분으로 환원시킬 때, 여기서 우리가 자주 쓰는 용어, ‘흑백논리’가 나온다. 둘째 문제점은 이러한 자의성을 절대화할 때 생긴다.

    “미국 지성인의 책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진실은 이러하다. 매카시 상원의원을 만드는 운동은 이성, 용기, 도덕성이다. 케네디 상원의원은 비이성, 기회주의, 비도덕성을 대변한다. 진실은 이렇다. 도덕적으로 남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도덕적인 인물과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진실은 이렇다. 목적은 결코 수단을 합리화할 수 없다. 미국 지성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매카시와 케네디 사이에서,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는 미국 역사학자 벤슨(Lee Benson)과 셴턴(James P. Shenton)이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5월 20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낸 광고 내용이다. 벤슨과 셴턴은 매카시 상원의원을 지지했고, 케네디 반대파였다. 여기서 매카시는 1950년대 반공주의로 미국 사회를 얼어붙게 했던 조지프 매카시와 다른 인물로, 반전주의자인 미네소타 주의 유진 매카시(Eugene McCathy) 상원의원을 가리킨다. 광고, 선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광고는 매카시와 케네디라는 이름을 곧장 도덕성과 비도덕성이라는 모호한 용어와 결합시켰다. 흑백논리의 시작이다. 이 논리가 어디서 본 듯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주위를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모호한 용어에 대해선 정의를 내리고 시작할 필요가 있다. 변치 않을 정의가 아니라, 적어도 논의되고 있는 맥락에서 적절하고 합당한 정의가 필요하다.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이제 실체적 오류에 대해 살펴보자. 의미론적 오류가 복합적이거나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소통을 가로막는 오류라고 한다면, 실체적 오류는 논증에 부합하지 않는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생겨나는 오류를 말한다. 아마 사례를 보면, 아, 이런 오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먼저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the fallacy of argument ad verecundiam)가 있다. 라틴어 ‘verecundiam’이란 수줍음, 겸손, 부끄러움이란 뜻이다. 이 오류는 좀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효과가 큰 수사법으로, 곧잘 상대방을 기 죽게 만들기도 한다. 반대의견을 유지하려면 뭔가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야 한다.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공자(석가, 하느님)가 말씀하시길’ 등으로 시작하는 논법이 여기에 속한다.

    한때 모 대학교 석·박사학위 논문의 첫 문장은 “조선후기 사회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농업분야에서 상업적 경영이 이루어져 신분제가 붕괴되는 중세 해체기였다”로 시작하고, 저명한 입론자의 논문(저서)을 1번 각주로 달면서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자기들이 배운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게 흠이랄 것은 없지만, 지나치게 한결같아서 조금 보기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 조선후기가 서양 봉건제의 해체와 같은 양상을 보인다는 증거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엔 다음과 같은 변종들이 있다.

    ① 현학적인 단어에 호소하기 : ‘~주의’ ‘~적’과 같은 어미를 수반한 용어를 쓰는데, 대개 의심, 혼동, 비논리, 부정확성, 무식함을 슬쩍 감추고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방편으로 이용된다.

    ② 참고문헌에 호소하기 : 부적절하거나 과도한 참고문헌을 각주에 달아서 논증하는 방식이다.

    ③ 인용문에 호소하기 : 언젠가 어떤 학생이 낸 리포트가 거의 모두 인용으로 되어 있어서 놀란 적이 있다. 인용문임을 정확히 표현하는 점에선 정직했으나, 자기 논리가 부족한 건 곤란하다.

    ④ 길이에 호소하기 :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가 떠오른다. 국내 동서문화사에서 14책으로 출간했는데, 아마 많은 독자가 기념비적인 저술의 분량 때문에 설득되지 않았을까. 이와 함께 ‘세부 사실에 호소하기’도 지적해두고 넘어가자.

    수학으로 기죽이기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한 장면. 사람들은 수학 공식으로 제시된 질문이나 답변에 대해 기죽는 경향이 있다. 과학적 증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⑤ 수학적 표현에 호소하기 : 말 그대로 ‘수학의 심벌’에 호소하는 경우다. 이에 대해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오일러와 디드로의 유신론(有神論) 논쟁이다. 제정 러시아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옛 소련 때 레닌그라드로 개명됐다가 다시 바뀜)에서 에카테리나 2세는 유럽 각국의 학자와 문인을 초빙해 문화를 꽃피우려고 노력한 계몽 군주였다. 백과전서파의 철학자 디드로(Denis Diderot)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디드로는 유물론자였고, 무신론자였다. 에카테리나는 그의 사상이 젊은이에게 퍼지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고,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어느 날 신의 존재를 증명한 수학자가 있으니 원한다면 공개적인 곳에서 그 증명을 보여주겠다는 소식을 디드로에게 전했다. 디드로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그가 상대할 사람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오일러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오일러는 디드로에게 말했다.

    “(a+b^n)/n=X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디드로 씨! 답해보시오.”

    “…….”

    전하는 말로는 수학을 몰랐던 디드로가 한마디 대꾸도 못해 망신당했으며, 에카테리나 2세는 디드로에게 그만 프랑스로 돌아가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화는 실화가 아니다. 원래 이 이야기는 티볼트(Tiebault)의 ‘베를린에 머문 20년의 추억(Mes souvenirs de vingt ans de sjour Berlin)’에 나온 일화를 바탕으로 한 개작이라고 한다. 수학자 오일러가 아니라 그냥 러시아 철학자였으며, 디드로는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수학이나 통계숫자가 종종 근거 없는 주장을 감추려는 방법으로 쓰인다는 점을 확인하는 일화로 보고 싶다. 또한 이 일화는 수학 수식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수학 공식에 대한 거부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필자가 학부생, 석사생이었을 때는 워드프로세서가 보급되지 않아 리포트를 펜으로 써서 발표했다. 다행히 복사기는 활용할 수 있어서 함께 읽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다 20MB, 40MB의 하드 용량을 가진 컴퓨터를 구입한 것이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할 무렵이었다. 이때 가진 착각이 하나 있었다. 바로 출력을 해서 보면 마치 훌륭한 리포트를 쓴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런 느낌이 많이 사라졌지만, 한동안 이는 일부러라도 현혹되지 않도록 조심했던 일이다.

    하지만 반대 경우도 있다. 인쇄물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 블로흐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1918년, “참호에서는 인쇄된 것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진리라는 여론이 퍼져 있었다. 선전이나 검열이 상당히 강화됐기 때문에 거꾸로 사람들은 인쇄된 것을 믿지 않았다”라고 했다.(The Historian´s Craft, New York, 1953)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때의 미국이 그러했고, 1980년대 신군부 치하에서의 한국 사회가 그러했다. 이 경우엔 오류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민심(民心)의 영역에서 다뤄야겠지만.

    ‘오항녕은 극우 파시스트다!’

    토론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오류 중에 편견에 호소하는 오류(the fallacy of argument ad hominem)가 있다. 이것 역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핵심은 사람들의 주의를 토론 자체에서 토론자로 옮겨놓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필자 자신이 자주 겪는 일이라서 아예 그 사례를 놓고 설명하는 편이 편하겠다.

    이태 전인가, 어느 날 같은 층에 연구실이 있던 교수 한 분이 내 연구실로 들어오시면서 “오 교수! 알고 보니 극우 파시스트던데?”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멀뚱히 쳐다보는 나를 보고는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시내 한 서점에 갔다가 신간 코너에서 책을 뒤적이는데, 목차에 내 이름이 나오는 책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 목차에 ‘오항녕의 극우 파시즘’이라고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을 사왔느냐고 물었더니, 그분 왈, “그런 책을 왜 사?” 그 뒤로도 가끔 나를 보고 장난 삼아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었다. 근원은 바로 그 책이었다.

    이런 경우는 명예훼손으로 고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책에 나온 이야기를 법정으로 끌고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공개 비판을 하자는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토론이나 비판의 생산성에 대해 큰 신뢰를 갖고 있지 않다. 어지간한 소양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토론이나 비판은 불필요한 오해와 야유, 상처로 남기 쉽다는 게 내 경험이자 관찰 결과였기 때문이다. 피치 못해 나와 다른 견해를 논문에서 인용할 때도 최소한으로 그치고, 내 의견을 증명하는 데 주력하는 방향으로 글을 이끌어간다.

    아무튼 그 이상한 책은 적어도 필자를 아는 분들에겐 별로 설득력이 없었던 듯하다. 내가 보수적인 데도 있고 좌파에 가까운 데도 있지만, 극우(또는 극좌) 쪽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결국 내 주변 분들은 내게 장난을 칠지언정 그 책을 사지는 않았다. 그 책은 나에 대한 콘셉트를 잘못 잡은 듯하다.

    이번 논쟁의 오류를 쓰면서 그 책이 생각나서 인터넷 서점을 통해 목차를 확인해보니(나도 그 책은 사지 않았다), 내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 게 불쾌했나보다.(이 주제는 이미 우리가 다룬 적이 있다.) 논거는 논거로 비판해야지, 나를 극우 파시스트로 만들어선 내 논거를 깰 수가 없다. 설사 내가 극우 파시스트라도 바른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광해군일기’의 초고 일부. 조선시대 실록(일기) 중에서 유일하게 간행되지 못하고 초고본으로 남은 광해군일기. 그 의미는 무엇일까? 광해군은 실록을 편찬하지 못할 정도로 나라 재정을 알뜰하게 탕진했다는 사실이다. 인조반정은 이런 바탕에서 일어났다.

    ‘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

    이와 유사한 변종 논리들이 있다. 인조반정(1623) 이후 공신(功臣)들이 광해군 때 권세를 부린 자들의 가옥과 재산을 훈신(勳臣)들에게 나눠주면서 광해군 때 권신들이 도둑질했던 것도 점유하고 백성에게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원성을 사기도 했다.(‘인조실록’ 권2 1년 7월 19일) 종종 인조반정을 비판하는 연구자들은 이를 근거로 반정의 정당성을 비난하고, 광해군대를 합리화한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인조 2년에 공신에게 주는 세곡(稅穀)을 중지했다. 사헌부에선 공신에게 세곡을 주도록 법전에 나와 있지만, “선조(宣祖) 때 광국(光國)·호성(扈聖) 등 여러 공신에게 세곡을 주지 않은 것은 시세를 참작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사(靖社·사직을 안정시킴)의 공은 막대한 공적이기는 하나 공로를 보답하는 은전(恩典)은 나라의 재정 상황을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오늘날 공사(公私) 간에 재물이 바닥나고 세입(稅入)이 부족해 제향(祭享·제사 물품)과 어공(御供·국왕 품위유지비)도 모두 줄였습니다. 많은 공신에게 전례대로 세곡을 지급하는 것은 결코 이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서쪽 변방의 일이 진정되고 나라의 저축이 조금 넉넉해질 때까지 선조 때의 옛 규례에 따라 세곡을 주는 일을 거행하지 마소서”라고 청했고, 인조는 3년 동안 세곡을 주지 말도록 조치했다.(‘인조실록’ 권5 2년 3월 27일) 공신들의 횡포를 근거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비난하는 연구자들은 공신들의 세곡을 3년간 중지한 이 사료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반정에 성공했으니 공신들의 자만과 횡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정 직후, 광해군 재위 15년 이상 지속됐던 궁궐 공사를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궁궐을 짓기 위해 설치했던 영건도감을 비롯해, 나례도감(儺禮都監) 등 12개의 난립했던 도감도 혁파했다. 백성의 고혈을 짜던 조도성책(調度成冊·특별 세금 징수대장)을 소각하는 한편, 민간에 부과됐던 쌀과 포를 탕감해줬다. 인조 즉위 후 삭감한 양이 원곡(元穀) 11만 석이었는데, 당시 호조에서 거두던 1년 세금이었다.

    세금을 거두지 않으면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나. 그런데도 삭감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게 현실이었다. 일단 백성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삭감하지 않으면 백성이 살 수가 없었던 것이 반정 당시, 다시 말하면 광해군 정치의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공신들의 폐단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昏政]를 합리화하지는 못한다는 것, 그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던 반정세력의 지향과 노력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허, 왜들 이래!

    특히 기억해둘 일이 있다.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간행되지 못하고, 즉 활자본으로 5부를 찍어 춘추관과 지방 4사고에 보관하지 못하고, 중초본과 정초본의 형태로 ‘광해군일기’가 우리에게 전해진 이유는, 다름 아닌 예산 부족 때문이었다. 재정 형편이 안 되었다는 사실, 국왕이 즉위하면 제일 먼저 1~2년 만에 간행하던 관례를 인조 초반엔 재정 궁핍으로 어길 수밖에 없었던 사실! 광해군은 정말 알뜰하게 나라를 말아먹었다. 도대체 이런 광해군을 왜 놓지 못하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필자의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 나간 뒤로 일제강점기 이후 꾸준히 지속돼오던 광해군 치켜세우기는 조금 주춤해진 듯하다. 이제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해 민생을 안정시키려고 했다는 주장은 할 수 없다. 그동안 학계의 주장은 사료를 제대로 보지 못한 오류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광해군의 광적인 궁궐 공사의 폐단도 감출 수 없게 됐고, 통합보다 분열과 증오를 키워갔던 광해군의 정국 운영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그럼에도 여전히 광해군의 기회주의 외교는 ‘실리주의’라는 미명 아래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세태가 그렇게 쉽게 바뀌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은 이렇게 변용돼가고 있다. “광해군이 잘못한 부분은 있지만, 그렇다고 인조반정을 정당하게 보는 것은 서인(西人)의 관점이다.” 양비론, 중도론이다. 이런 양비론, 중도론은 무척 점잖아 보인다. 하지만 대개 이런 양비론은 거의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하다. 광해군도 잘못했고, 반정세력도 잘못했다? 달리 바꾸면 광해군도 잘한 게 있고, 반정세력도 잘한 게 있다?

    민생을 보면 된다. 인조반정이 정당한 이유는 민생을 살리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나라와 사회를 살리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말도 부정확하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반정을 하지 않으면 망할 것 같으니까 반정을 한 것이다.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인조반정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그렇게 도탄에 빠진 나라를 넘겨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도대체 그렇게 망가진 나라를 맡아서 어떻게 하려고!

    논쟁이나 비판에서 논제에 집중하지 않고 논제를 논쟁자, 토론자로 돌리면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방식은 진영논리나 패싸움의 오랜 전통이다. 일단 패싸움이 되면 어느 편인지가 중요하며 옳고 그르고는 다음 문제가 된다. 그렇기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아도 되며, 그 속에서 알량한 기득권이나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병폐를 일찍이 간파했던 공자는 말한 바 있다.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오항녕

    1961년 충남 천안 출생

    고려대 사학과, 동 대학원 석·박사

    국가기록원 팀장

    현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저서: ‘조선의 힘’ ‘기록한다는 것’,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 등


    “사람이 싫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말까지 막지는 않는다.[不以人蔽言].” 이 말로도 부족해서 한마디 더 경고했다. “군자는 다른 의견을 조화시키지만 부화뇌동하지는 않으나, 소인은 부화뇌동하면서 조화시키지는 못한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에선 소인 중에 똑똑한 자가 더 많고, 소인이 기승을 부릴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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