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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 회고록

끈기와 저력의 후임자 현병철 위원장

‘이카루스의 날개로 날다’ ⑨

  • 안경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ahnkw@snu.ac.kr

끈기와 저력의 후임자 현병철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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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권의 정치적 중립성-인권위 독립성 흔들
  • ● 끝내 무산된 하버드법대 특강
  • ● 퇴임 후 프랑스 파리로 걸려온 의문의 전화
  • ●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훈장을 사양 한 까닭
전임자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후임자의 성공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기관의 위용이 살아야만 떠나간 사람도 빛나는 법이다. 기념사의 상투적인 문구, “오늘날의 우리 위원회가 있기까지 기여하신 분들…” 속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은근한 자부심도 누릴 수 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 쉽게 쓰지만 딱히 실체는 없기 십상이다. 대중의 정서만큼 믿지 못할 게 따로 없다. 실제로 떠난 옛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다. 지난 일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불만의 초점이 현재의 삶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역대 수장 중에 초대 위원장 김창국 변호사만 3년 임기를 채웠다. 그만큼 인권위원장은 힘든 자리다. 이렇다 할 권력도 없이 전후좌우 사방에 적이 포진해 있다. 인권위엔 확실한 우군이 없다. 오로지 국민(과 인간)이라는, 정체불명의 후원군에 의지해야 한다. 그 힘든 인권위의 수장 자리를 3년 버텨냈고 게다가 유례없이 연임까지 하는 사람이 있다. 나의 후임자, 현병철 위원장의 남다른 끈기와 저력이 부럽다. 취임 첫날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인권옹호자들의 끊임없는 항의와 비판, 사퇴 요청을 버텨낸 그의 확신이 놀랍다. 그의 확신은 임명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소신이기도 하다.

재임 기간 현 위원장이 남긴 공적이 왜 없겠는가?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모르지만 무수할 것이다. 또한 수장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인권위가 일상 업무를 통해 많은 국민을 달래고 품었을 것이다. 본시 공직을 떠난 사람은 몸담았던 기관의 업무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다. 그게 전관으로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통념과 상례에도 불구하고 전임자인 내가 그의 연임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힘들여 쌓아올린 인권위의 위용에 결정적인 상처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독립기관 인권위의 자부심이다.

인권에는 정치의 색채를 띠지 않을 수 없는 주제와 영역이 있다. 때때로 ‘정치의 인권화’ 현상도 불가피하다. 나라 안의 문제에 인류와 인간성의 이름으로 타국과 국제사회가 간섭한다. 개입자가 표방하는 인권이라는 숭고한 이념의 이면에 감춰진 검은 동기가 있다. 군사, 경제 강대국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이렇듯 인권을 이용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인권이 먼저 정치의 선봉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권위는 정치적 중립과 독립적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인권의 정치화를 막아야 한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인권위를 ‘좌파정부’의 유산으로 보는 정치철학의 소유자로 비친다. 그는 인권위를 무력화하는 것이 곧바로 사회적인 선이라고 믿는 듯하다. 현 위원장은 이러한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충실하게 대변해왔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중립과 인권위의 독립성을 결정적으로 훼손했다. 더 큰 잘못이 있다. 그는 자신이 수장인 기관 구성원의 화합을 앞장서서 해쳤다. 인권위는 여느 정부기관과 다르다.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합의제 기관이다. 개개인의 성향과 믿음이 존중되고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상임위를 무력화하고, 많은 위원과 조력자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다양한 배경과 철학의 구성원을 포용하는 대신 비판적 성향의 직원을 박해했다. 눈에 거슬리는 직원을 쫓아내고 남은 비판자를 징계로 다스렸다. 그들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직원들 사이에 불신과 반목의 골을 깊이 파놓았다. 이 모든 처사가 청와대와의 교감 아래 이루어졌다는 의심이 든다.



가슴으로 쓴 이임사

나는 아직도 현 위원장이 내 후임자가 된 상세한 경위를 알지 못한다. 분명히 정무직 인사에 필요한 내부 검증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다만 바깥 사회에서 기대하는 인권위 수장으로서의 자격에 대해서는 전혀 검증이 없었다. 후일 사석에서 만난 청와대의 한 인사는 내게 “후임자가 좀 그래서…”라며 민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감해하는 그에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쨌든 낯설고 힘든 그 자리를 맡게 된 현 위원장의 처지를 내심 동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이 대통령은 그가 인권위와 인권에 낯선 인물이기에 더욱 적격자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국제사회는 물론 국내 인권사회에 이름조차 생소한 현 위원장을 임명한 이상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로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통령은 국제인권은 안중에 없었다. 그의 연임을 두고 열린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인력과 예산이 준비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하는 것을 들었다.

2009년 6월 30일, 예고한 대로 제출한 인권위원장 사표가 7월 8일자로 수리됐다. 당일 이임식을 치렀다. 언론이 주목했다. 많은 직원이 친필로 쓴 기념 앨범을 만들어주었다. 근래에 들추어보니 새삼 애잔한 마음이 든다. 특히 직장을 잃고 나서 생계수단조차 마땅치 않을 것 같은 직원들의 근황이 걱정이다. 대부분 지난 3년 동안 한 번씩은 만났다. 쓴 술잔과 메마른 한숨밖에는 건네줄 것이 없어 가슴이 아렸다.

나의 이임사는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곰곰이 생각하고 나름대로 정성을 쏟아 쓴 글이다. 사적인 소회를 굳이 감추지 않되 대통령, 정부, 언론, 시민사회, 인권단체, 헌법재판소, 인권위, 각각에 대한 비판과 건설적인 제안의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내심 작은 역사적 문서가 되기를 바랐다. 지금도 인터넷에 전문이 돌고 있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내 글을 나누어주고 행간에 담긴 한국 사회의 현실을 토론한 교사가 교장에게 잔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학부모가 문제를 삼았다는 후문이다.

“법이 보장한 임기 만료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앞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사유는…새 정부의 출범 이래 발생한 일련의 불행한 사태에 대한 강한 책임을 통감함과 동시에, 정부의 지원 아래 새로 취임할 후임자로 하여금 그동안 심각하게 손상된 국제사회에서의 한국 인권의 위상을 회복하고 인권 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할 전기를 마련해드리고 싶은 강렬한 소망과 충정 때문입니다…저는 인권이란 이념적 좌도 우도 아니고, 정치적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일용할 양식인 인류 보편의 가치라는 믿음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으며, 위원회와 ‘긴장 어린 동반자’의 관계인 시민사회와도 일정한 거리를 둘 것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든 언론에 대해서 동일한 기준과 성의로 자료제공과 홍보활동을 할 것을 독려하고, 제 스스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인권의 고귀한 가치는 정권의 교체나 연장에 따라 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정권의 교체는 국민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결코 국민은 인권의 탄압이나 후퇴를 선택할 리 없습니다. … ‘선진 사회’를 기치로 내걸고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1년 반이 지난 이날까지 그 장점이 만개하지 않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인권위의 수장으로서 느낀 소감은 적어도 인권에 관한 한, 이 정부는 의제와 의지가 부족하고, 소통의 자세나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아무리 내 나라, 내 정부에 대해서 불만이 깊더라도 국제사회에서는 내 나라, 내 정부의 입장을 최대한 옹호하는 것이 공직자의 도리임을 믿는 저이지만 그간 빚어진 실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국제 사회에서 변론할 자신과 면목이 없습니다.…권한쟁의심판의 청구를 헌법재판소에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입장이 다를수록 요구되는 정부기관 간의 대화와 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비극이기도 합니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이끌어왔다는 칭송을 받고 있는 헌법재판소는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이 사안을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헌재는 1년 6개월 동안 판단을 미루었다. 마침내 2010년 10월 26일 본안심사를 하지 않고 각하결정을 내렸다. 인권위가 헌법에 명시된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당사자적격이 없다는 이유였다. 나는 헌재의 결정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헌재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축소해버렸다. 인권위의 주장이 법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본안결정으로 기각해도 무방했을 터다. 인권위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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