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이 정도 이야기를 들으면 ‘걸출한 인물’ ‘탁월한 역량’ 같은 긍정적 평가보다는 ‘너무 오래한다’ ‘장기집권’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그는 이번 총장 선임 과정에서 “이제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이사회에 강하게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학 경영이 갈수록 만만찮은 상황에서 대학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가 기준일 뿐 총장의 나이나 연임 여부 등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이사회의 판단이었다.
‘28년’ 총장 임기 시작
사립대의 경우 총장 선임 권한은 재단이사회에 있지만 아무리 이사회라 하더라도 총장으로서 함량 미달인데‘낙하산’처럼 앉히려고 하면 대학 구성원들의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만약 총장 선임 과정에서 이사들 사이에 갈등과 파행이 불거졌는데도 ‘밀어붙이기’ 식으로 임명을 강행하면 교직원과 학생, 동문, 지역사회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동안 신 총장이 보여준 리더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오래한다’는 이유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분위기다.
계명대 총장후보추천위원회는 올해 6월 10대 총장을 선임하기 위해 후보 14명을 이사회에 추천했고, 이 중에서 신 총장 등 3명이 최종 후보로 올라갔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이사회가 개최한 학교발전계획 발표에서 스스로 적임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2명은 발표회에서 신 총장을 적임자로 추천했다. 신 총장도 “그동안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 더 이상 총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럼에도 이사회는 신 총장의 연임을 결정했다. 기자는 계명대의 총장 선임 과정을 보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대학은 국립이든 사립이든 사회적 재산인 공공재다. 총장의 역량을 관찰자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계명대 성서캠퍼스 본관. 열정과 순수를 상징하는 붉은 벽돌과 흰 기둥으로 지어졌다.
‘인식의 균형’을 위해 기자는 또 총장 직선제가 간선제(이사회가 선임)보다 바람직한 것처럼 여겨지는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직선제는 대학 구성원들이 총장을 투표로 선출하므로 아주 민주적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측면이 있다. 진정한 직선제는 투표권을 교수뿐 아니라 교직원과 학생, 학부모, 동문, 지역사회까지 ‘최대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직선제라 해도 교수가 사실상 총장을 선출하고 교직원과 학생에게 겨우 몇 개의 투표권을 할당하는 것이 대학가의 현실이다.
15세에 생선운반선으로 미국행
신 총장의 이력은 화려함 그 자체다. 프린스턴대 박사(독일문학)에 뉴욕시립 퀸스칼리지 교수, 연세대 교수, 세계대학총장회의 이사, 폴란드 스웨덴 이탈리아 명예영사, 중국 공자아카데미 이사, 폴란드 국립쇼팽음악원과 중국 푸단(復旦)대 등 13개 대학 명예박사 또는 명예교수, 그리고 독일 폴란드 정부 훈장, 프린스턴대 대학원 ‘주요 동문 100인’ 선정 등 그동안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며 남긴 발자취다.
6·25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 6월 대구 계성중을 졸업한 ‘소년 신일희’는 부모님이 마련해준 100달러를 쥐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생선운반선을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2주 만에 미국 서부 샌디에이고 해안에 도착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2주 후 동부 뉴욕에 도착한 뒤 목적지인 코넷티컷 주 켄트 시에 있는 켄트고교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멀미에다 망망대해여서 겁이 나기도 했지만 ‘부모님이 뜻이 있어 미국에 가라고 했나보다’ 생각했을 뿐 싫다거나 좋다는 느낌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친 신태식(1909~2004) 박사는 평양숭실전문학교와 일본 도호쿠(東北)제국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계성중 영어교사로 교육계에 몸담았다. 계성학교 교장 때 기독교 학교인 켄트고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자녀 한 명은 유학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어린 장남을 머나먼 미국에 혼자 보내면서 “알아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짧은 당부만 했다.
신 박사는 종합대학 승격 전 계명대 학장을 지냈으며 계명대 설립과 초기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계성중 졸업생으로 평생 가까웠던 박목월 시인은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을 존중하는 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