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자랑스러운 국가정보원의 직원으로서 보안이 나와 우리 원(院)의 생명임을 명심하고 업무상 취득한 내용은 어떠한 경우에도 누설하지 않을 것을 엄숙히 다짐합니다.”
국가정보원 직원은 누구나 외우고 있다는 보안선서다. 정보기관은 첩보의 수집과 정보의 생산, 그리고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정보활동을 하면서 접하게 된 일을 밖으로 알리지 않는 보안에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정·첩보와 공작 활동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보안이기에 이들은 행사 때마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이 선서를 반복한다.
국정원 직원의 보안 의식은 법으로도 강요된다. 국정원 직원이 되는 자는 국가정보원직원법 제15조에 따라 원장 앞에서 “본인은 국가안전보장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으로서 투철한 애국심과 사명감을 발휘하여 국가에 봉사할 것을 맹세하고, 법령 및 직무상의 명령을 준수·복종하며, 창의와 성실로써 맡은 바 책무를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다짐한다.
다짐은 이 법 17조에 의해 다시 강요된다. 17조 1항에 ‘직원은 재직 중은 물론 퇴직한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도 본의 아니게 재판이나 수사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그때 이 조항을 근거로 증언을 거부하거나 거짓 증언을 하면 불이익을 받거나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한 때에는 원장의 허가를 받아 진술을 한다. 국정원직원법은 17조 2항과 3항, 4항 등에서 원장은 군사, 외교, 대북관계 등 국가안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증언을 허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현직을 막론하고 국정원 직원은 허가받지 않은 내용을 유출해선 안 된다.
정치권으로 새나가는 정보
이렇게 보안을 강조하지만 국정원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정치 풍향에 춤추는 직원이 나오고 정치권으로 정보가 새나는 현상이 일어난다. 과거에는 원장을 비롯한 정무직 간부들이 이 조항을 위반하는 사례가 많았다. 대부분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를 돕기 위해서였는데, 다음 정권에서도 한 자리를 하려는 의도였다. 더 오래전에는 정보 예산으로 여당 후보의 당선 확률을 알아보는 여론조사를 실시해서 어디를 더 공략하라는 등의 판단 의견을 달아 갖다 바치기도 했다. 노골적인 정치 관여였다.
요즘은 공채 출신인 하급 직원들도 정치 관여를 한다. 이들은 제대로 정보교육을 받았지만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정보를 유출한다. 이러니 국정원은 큰 선거가 있고 나면 지탄을 받고, 내적으로는 ‘정치의 시녀’로 전락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지난해 18대 대통령선거 직전에 일어난 국정원 여직원 사건이 그런 사례다.
이 사건을 단순히 국정원 소속 여직원이 정치에 관여한 것으로만 보면 단견이다. 첫 수사를 맡았던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의지로 그런 쪽으로 흘러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권 과장의 수사에 대해 경찰 밖은 물론이고 안에서도 “무리한 수사” “권 과장이 오히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1차 진급하고 계급정년 걸려
여직원 사건 뒷면에 정치 진출을 꾀한 전직 국정원 직원이 관련돼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권은희 과장의 수사에 대해 분노하는 국정원 직원들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다. 이 사건은 너무도 명백한 정치 관여이다. 여직원 사건은 이 사건 때문에 발생했다. 이 사건을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DJ) 후보가 당선된 것은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대한민국 권부(權府)는 영남 출신 중심으로 운영돼왔다. 정보기관과 군, 검찰, 국세청, 경찰청, 감사원, 청와대 등 권력 기관의 요직에는 영남에서 태를 끊은 사람들이 즐비했다. 여타 지역 출신은 그 나머지를 나눠 가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