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호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황달, 복통, 눈병 달고 산 숙종

  • 이상곤│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3-05-22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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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숙종ㆍ인현왕후가례의’ 재현행사.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다.

    아마도 가장 이른 나이에 한약을 먹은 사람은 현재 해병대에서 복무 중인 필자의 작은아들(한의대 재학)일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황달을 앓아 한약을 먹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시 인진호탕을 처방해 10cc씩 나눠 사흘 정도 먹였다. 그랬더니 증상이 바로 사라졌다.

    요즘 “한약은 간(肝)에 나쁘다”는 양방 쪽 의견만 듣고 한약 복용에 거부감을 가진 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간질환에 한약이 널리 쓰였고 약효도 좋았다. 한약 말고는 달리 약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약이 간에 나빠 환자에게 해를 끼친 사례는 보기 힘들다. 조선의 왕들도 간염이 왔을 때 한약으로 치료했고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 대표적 인물이 숙종(李諄·1661~1720)이다. 숙종의 간염 증상은 15세 때인 재위(1674~1720) 2년 9월에 시작된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9월 13일 머리가 아프고 인후통이 생기자 의관들과 공조좌랑 이국헌이 감기로 진단하고 대표적 감기 처방인 형방패독산을 복용케 한다. 이튿날에도 두통과 인후통이 지속되자 숙종의 외당숙 김석주가 나서 의관들과 함께 처방을 변경한다. 소시호탕에 맥문동 갈근 지모 황백을 더하여 처방한다.

    이후 증세는 호전되는 듯했지만 9월 17일 갑자기 수라를 들기 싫어하면서 오한과 오심 증상이 시작된다. 가슴이 답답한 증상에 초점을 두고 양격산을 처방하기도 하고, 밥맛을 당기게 하는 이공산, 소요산이라는 처방으로 바꿔보기도 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9월 25일 숙종의 얼굴과 눈이 누렇게 변해가자 의관들은 황달 증세로 진단하고 처방을 급선회한다. 황달을 치료하는 시령탕을 처방한 지 3일 만에 얼굴과 눈의 노란빛이 가시기 시작한다. 피부색에 윤기가 돌고 오심 증세가 줄어들면서 밥맛이 돌아왔다.

    시령탕을 쓴 지 5일이 지난 9월 30일 황달 빛은 완전히 사라졌고 수라와 침수도 일상적 상태가 되면서 시령탕을 보다 온화한 처방인 백출제습탕으로 바꿨다. 10월 2일 황달을 치료한 지 7일 만에 의관들에게 ‘평상시와 같으니 더 이상 묻지 마라’고 하교한다.”



    肝은 봄과 나무를 상징

    현대의학은 황달을 유발하는 간염을 일반적으로 전황달기, 황달기, 회복기 3기로 나눈다. 전황달기는 황달이 생기기 1~2주 전의 기간으로 약간의 열감과 관절통, 피로감, 무기력증 등 감기 증상과 같은 증세가 나타나고 식욕부진, 오심, 구토 등 소화기계 증상과 상복부 불쾌감을 호소한다. 황달기는 황달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1~2주간으로 증상이 가장 심한 기간이다. 회복기는 황달이 점차 사라져 1~6주 뒤 회복되는 기간이다.

    숙종의 치료 기록들은 이런 해석과 딱 맞아떨어진다. 한약 복용 일주일 만에 황달이 사라지고 간염 증세가 회복됐다는 것은 현대의학의 시각으로 봐도 진기록이다. 그만큼 한약의 간염 치료효과가 뛰어나다는 증거다. 안타까운 사실은 숙종이 어린 시절 황달을 앓았으면서도 간 건강을 관리하지 못하고 간과 관련된 질병을 앓다 간경화 증세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다. 그는 황달 발병 이후에도 45년을 더 살았지만 평생 간질환 관련 증상을 나타냈다.

    한의학에서 간은 봄과 나무를 상징한다. 여린 새싹들이 땅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것은 봄이 가진 생명력, 즉 힘 때문이다. 새싹의 생명력, 자신보다 수백 배 무거운 흙더미를 뚫고 지상으로 솟아나는 힘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 봄은 ‘spring’이다. 용수철처럼 압축된 힘으로 튀어오르는 에너지를 가졌다는 뜻이다.

    상징은 현상과 내면 질서의 조합이다. 이처럼 간의 본질은 튀어오르는 양기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솟아오르는 힘을 수렴하고 진정시켜 에너지의 균형을 이루려 한다. 이는 간이 가진 또 하나의 성질, 즉 음기다. 우리 신체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체온을 섭씨 36.5도로 유지하는 것처럼 간도 항상성을 추구한다. 음기와 양기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양적인 뜨거운 힘은 정신적으로는 흥분과 분노로 표출되며 투쟁을 주도한다. 눈은 불꽃으로 이글거리다 심하면 병이 든다. 눈은 간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렇게 밖으로 터져 나가는 화를 진정시키고 수렴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힘이 음기다. 음기의 대표적 음식은 신맛을 내는 것들이다.

    한의학은 간에 질병이 생기면 간과 관계된 계통의 기관에 전신적 증상을 일으킨다고 본다. 흥분을 잘하고, 눈이 나빠지며, 아랫배가 긴장되고 굳어진다. 아랫배는 튀어오르는 간의 양적 속성을 드러내는 밑바닥이다. 동의보감과 중국 의학서 난경(難經) 또한 아랫배와 눈에 나타나는 증상, 화를 잘 내는 성격 등을 간질환 진단의 요점으로 봤다.

    ‘간이 병들면 양쪽 옆구리 아래가 아프면서 아랫배까지 땅기고 성을 잘 낸다(동의보감).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얼굴빛이 퍼렇고 성을 잘 낸다. 속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배꼽 왼쪽에 동기(動氣)가 있으며 눌러보면 단단하고 약간 아프다. 병으로는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 눈은 간이 허할 때 잘 보이지 않는다(난경).’

    이들 의학서는 간이 허할 경우, 즉 음기가 모자랄 때는 신맛이 나는 음식인 참깨 개고기 자두 부추를 먹어 간을 보하도록 했다. 피로할 때 마시는 한방 드링크제에 신맛이 나는 작약이 많이 든 것도 그 때문이다. 간이 실하다는 개념은 간이 투쟁을 주도하는 장군이라는 정의에서 유래한다. 투쟁은 긴장이 필수이며 근육의 지나친 긴장은 쥐가 날 듯 땅기는 증상을 유발한다. 이런 증상을 완화하려면 단맛이 든 멥쌀, 대추, 쇠고기, 아욱 등을 권한다. 이런 논리가 한의학에서 말하는 식보(食補)의 핵심이다.

    흥분하고 배 아프고

    숙종은 한의학서에 나오는 이런 모든 증상을 평생 달고 살았다. 15세 때 황달성 간염을 앓은 이후 작은 일에도 흥분을 했으며 쓸데없이 애간장을 태웠다. ‘애간장’이라는 말 속에도 간 질환에 대한 한의학적 진단의 핵심이 숨어 있다. 오죽하면 간장(肝腸)을 녹이고, 태우고, 졸이고, 말린다는 표현을 썼을까. ‘애’는 초조한 마음속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초조함을 강조해서 붙인 것이다. 실록은 숙종이 분노한 모습을 여러 차례 기록했다.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어지지 않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내의원의 문안에 비답하기를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여 자못 수습할 수가 없다’고 했다.”(재위 14년 7월 16일)

    재위 21년 9월 13일 숙종은 계속된 흉년에 대한 해결책을 쓴 비망기(備忘記)를 신하들에게 내리면서 “큰 병을 앓은 나머지 조금만 사색함이 있어도 문득 혈압이 올라온다”고 했다. 실록에는 달아오르는 열을 주체하지 못해 화를 내는 숙종 때문에 신하들이 덜덜 떠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도 있다.

    “최계옹이 상소하기를, 신하들이 벼슬을 질곡(桎梏)처럼 여기고 궁에 들어가는 것조차 무서워하며 벌벌 떤다. (임금 앞에 서면) 발을 포개고 서서 숨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당시 홍문관이었던 최계옹은 1710년(재위 36년) 숙종의 지나친 편당성과 화를 잘 내는 성격적 결함에 직격탄을 날리는 상소를 쓴 후 제주목사로 좌천된다. 숙종은 분노조절 장애 증후군쯤 되는 질환을 앓은 셈이다. 모두가 간이 튼실하지 못했기 때문이 벌어진 일이다.

    한의학에선 아랫배가 땅기고 아픈 증상을 산증(疝症)이라고 하는데, 간에 문제가 생기면 이런 증상이 찾아온다. 꼭 간 질환이 아니어도 산증이 생길 수 있다. 차가운 물 속에서 성관계를 가진 후 여성의 아랫배가 차갑고 땅기고 아프면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이에 속한다. 성관계 후 아랫배가 물에 의해 식으면서 근육이 굳어져 아래를 데워야 할 기운들이 근육 사이로 스며들지 못하고 위로 치밀어 올라 생긴 증상이다. 이런 증상에는 반총산이라는 처방이 특효다.

    중국 최고(最古)의 의학서인 황제내경은 산증을 ‘아랫배에 병이 생겨서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나오지 않는 것인데 찬 기운 때문에 생긴다’고 설명했으며, 의학입문은 ‘산증이 간의 질병으로 발생한다’고 규정했다. 숙종의 첫 산증 발병 기록은 재위 22년 12월 3일에 나온다. ‘상(上)에게 처음 산증이 발병하여 아랫배가 찌르는 듯한 자통이 심했다. 상황이 매우 급하여 곡골이라는 경혈에 뜸을 뜨고 나았다’고 적혀 있다. 재위 29년에는 숙종이 자신의 산증과 함께 화증에 대해서도 답답함을 호소한다.

    “상이 말하기를, 몇 년 전부터 이 병(산증)의 뿌리가 이미 생겼는데, 처음에는 약간의 통증을 느낄 뿐이더니 어느 새 이 지경이 되었다. 상이 또 탄식하기를, 사람이 자고 먹는 것을 제때에 하여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였다. 성질이 너그럽고 느슨하지 못하여 일이 있으면 내던져두지를 못하고 출납(出納)하는 문서를 꼭 두세 번씩 훑어보고, 듣고 결단하는 것도 지체함이 없었다. 그러자니 오후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되고 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증(火症)이 날로 성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내가 병의 원인이 있는 곳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숙종의 눈병을 치료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굼벵이(왼쪽)와 녹내장 치료에 사용된 냉이.

    눈병 치료하는 굼벵이

    숙종은 눈병 때문에도 고생했다. 물론 그 뿌리는 간 질환이었다. 재위 30년 12월 11일 실록은 이렇게 적었다.

    “화증이 뿌리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로 깊은 고질이 되어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 (…) 오랜 시간 수응하면 화염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나의 눈병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숙종 43년에는 눈이 어두워져 신하들의 보고조차 장지(壯紙)에 큰 글씨로 간략하게 쓰도록 했다. 심지어 혼례식을 올린 후 인사 온 왕세자 부부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내가 눈병이 이와 같으니 왕세자빈의 얼굴을 보고 싶어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한의학은 눈을 불의 통로라고 본다. 어두운 밤길에서 고양이를 보면 눈이 파랗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간 질환으로 발생한 분노와 초조함의 화병은 불의 통로에 불을 더해 안 신경을 위축시킨다. 숙종의 눈병에 내의원은 공청(空靑)이라는 약물을 썼다. 기록엔 ‘중국에서 어렵게 구한 귀한 약물’이라고 돼 있다. 한의학에서 밝히는 공청의 약리작용은 이렇다.

    ‘간에 화가 있으면 피가 뜨겁고 기가 위로 치솟아 혈맥이 통하지 않게 된다. 간에 열을 내리면 오장이 안정되어 눈의 여러 가지 증상이 회복되는데 공청의 찬 맛은 쌓인 열을 없애준다.”

    공청은 양매청(楊梅靑)이라고도 한다. 청은 색깔, 공은 내부가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양매는 모양을 뜻하는데 중국음식점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과일 여지(枝·리즈)와 비슷하다. 구리가 있는 광산에서 나며 속이 빈 공작석을 가리킨다. 공작석 속에 난 구멍에 물이 들어 있는 것을 최고로 여기며 비어 있는 것을 그다음으로, 속이 찬 것을 하품으로 본다. 좋은 것은 녹내장으로 실명하거나 바람이 불면 눈물이 나는 증상, 눈에 막이 생겨서 가리는 예막(膜) 질환을 치료한다.

    하지만 실록은 공청이 그다지 효험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시력감퇴 증상을 치료한 약은 무엇이었을까. 기록에는 없지만 추론하자면 굼벵이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 청나라 때 나온 약물학서인 본경소증은 굼벵이의 효능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체에서 피(血)는 음식물이 위장에서 삭고 삶아지고 쪄지는 더러운 상태에선 벗어났지만 맑은 에너지인 기(氣)로 변환되기 전 상태의 물질이다. 음식물을 받아들여 깨끗한 혈액으로 전환하는 역할은 간이 맡는다. 굼벵이는 더러운 두엄에서 태어났지만 가장 맑은 매미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더러운 것을 맑게 하는 작용을 한다. 혈액이 말라들어 가거나 나쁜 피를 정화해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치료한다.’

    요즘 시중에서 간염이나 간경화에 굼벵이를 쓰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처방이다.

    마지막까지 고통 준 肝

    많은 사람이 과연 한의학이 눈 질환을 치료할 수 있었을지 의문을 나타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실명을 일으키는 녹내장도 치료했다. 더 대단한 것은 그 치료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냉이(정확하게는 냉이의 씨앗)를 썼다는 점이다.

    냉이 씨의 약명(藥名)인 석명자(蓂子)의 한자 뜻은 냉이의 효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석()은 나무를 깨서 나눈다는 뜻이고, 명(蓂)은 어둡다는 뜻이다. 눈이 캄캄하고 어두운 것을 깨서 없앤다는 의미다. 동의보감에 기록된 냉이 씨의 효능은 좀 더 구체적이다. ‘청맹목통(靑盲目痛)하여 사물을 볼 수 없는 질환을 치료한다’고 쓰여 있다. 청맹목통은 녹내장의 전형적 증상으로, 겉으로 보기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고 통증이 심한 상태를 가리킨다.

    한의학은 녹내장이 방수의 흐름이 나빠지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방수는 수정체와 각막 사이에 흐르는 눈 속의 눈물로, 혈액에서 걸러져 나온 것인데 흐름이 나빠지거나 안구 속에 고이면 눈의 압력이 높아지고 시신경을 눌러 시력을 저하시키고 통증을 일으킨다.

    냉이는 물을 몸 밖으로 뽑아내는 이수나 이뇨 작용을 통해 녹내장을 치료한다. 특히 동네 어귀 냇가에 많이 자라는 큰황새냉이가 효험이 좋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석명자는 큰황새냉이를 말한다. 물가에 자란 것이 눈 속의 물을 빼내는 효능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어린 순과·잎은 뿌리와 더불어 이른 봄을 장식하는 나물이다. 냉이국은 뿌리도 함께 넣어야 참다운 맛이 난다. 데워서 우려낸 것을 잘게 썰어 나물죽을 끓여 먹기도 한다.

    하지만 안질환이 문제가 아니었다. 숙종 재위 40년에 들어서면서 간질환은 악화일로였다. 난경에 ‘간이 병들면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숙종은 이런 증상을 그대로 보였다. 재위 40년 4월 27일 실록은 “상의 환후가 7개월 동안 계속돼 증세가 백 가지로 변해 부기(浮氣)가 날로 더해졌다”고 했다. 부종이 계속되자 선조의 증손으로 종친이었던 유천군 이정은 “성질이 강력한 약을 쓰면 안 된다”는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수환(導水丸)’이라는 처방을 고집했다. 이 약이 크게 효험을 보이자 감탄한 숙종은 스스로 시를 지어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여덟 달을 온갖 방술로 다스렸지만 한 가지 환약으로 빠른 효험을 얻었네. 지극한 그 공로 내 마음에 새겨두니 종친에게 은총을 표하노라.”

    유천군이 처방한 도수환은 대황, 목통, 견우자 등의 약재를 포함한 약으로 강력한 이뇨 효과와 대변의 관장 효과를 겸한 처방이었다. 이 약으로 큰 효험을 봤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숙종에겐 대소변을 제대로 못 본 게 가장 큰 문제였던 셈이다. 이런 일련의 치료 사실을 살펴 보면 숙종의 주요 질병은 간질환이었으며, 그 범주 안에서 지속적으로 상태가 악화됐음을 알 수 있다. 숙종은 재위 45년 10월 아들 연령군이 사망하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46년 5월에는 간경화 말기 증세인 복수가 차올랐다.

    “시약청에서 입진하였다. 성상의 환후는 복부가 갈수록 더욱 팽창하여 배꼽이 불룩하게 튀어 나오고, 하루에 드는 미음이나 죽의 등속이 몇 홉도 안 되었으며,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정신이 때때로 혼수상태에 빠지니, 온 조정과 백성(中外)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후 한 달 만에 숙종은 세상을 떠났다.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경기 고양시 서오릉 내 숙종의 무덤인 명릉.



    두창과 인두법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지석영이 우두 시술에 사용한 우두침과 유리판.

    숙종의 목숨을 빼앗은 병이 간질환이라면 그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질환은 조선시대 민중을 무척이나 괴롭힌 두창(痘瘡·천연두)이다. 예부터 마마, 손님, 포창(疱瘡)으로 불렸으며 일본에서는 천연두(天然痘), 중국에서는 천화(天禍)라 불린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백세창(百世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백세창은 평생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전염병이라는 뜻으로, 한번 전염병에 걸려서 살아남으면 재발하지 않는다는 면역의 기본원리를 우리 조상들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연두는 공기로 전파되는 바이러스(variola)가 일으키는 질환이다. 일단 감염되면 고열과 발진이 일어나고 두통, 구토, 몸살 증상이 수반되며 2~4일이 지나면 얼굴, 손, 이마에, 이후에는 몸통에 각각 발진이 생긴다. 증상이 일어난 지 8~14일이 지나면 딱지가 앉고 흉터가 남는다. 천연두에 대한 기록은 4세기경 진(晉)나라 의사인 갈홍이 의서에 상세히 기록한 것이 처음이다. 우리에겐 조선 태종 때부터 본격적인 기록이 나타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인식됐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는 4세 이전의 영아 40~50%가 두창으로 사망한다고 했다.

    조선 후기엔 두창 치료법으로 인두법을 주로 썼다. 인두법을 처음 소개한 인물은 공식적으로는 정약용이다. 어린 시절 두창을 앓다가 죽을 뻔한 데다 여러 아이를 두진으로 잃은 아픔 때문에 인두법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청나라 강희자전에서 “모든 두즙(痘汁·천연두즙)을 코로 받아들여 숨 쉬면 (천연두가 빠져) 나가게 된다. 이를 신통한 종두법이라고 한다”라는 구절을 보고 질병을 내부에서 외부로 밀어내는 보편적 한의학적 논리에서 외부에서 내부로 심는 종두법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조선의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허준. 일개 의관에 불과하던 허준은 광해군의 천연두를 치료함으로써 당상관에 제수된다.

    핵심은 두창의 딱지인 시료를 채취하는 방법이었다. 천연두의 고름인 두장(痘漿)을 직접 채취해 쓰는 법과 두창을 앓은 이의 옷을 입히는 법, 마마 자국을 말려 가루로 만든 뒤 코로 빨아들이는 법 등이 있었는데,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으로는 습기 있는 두흔(痘痕·마마 자국)을 코로 빨아들이는 수묘법(水苗法)이 권장됐다.

    이런 방법은 잘못하면 감염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묘를 만드는데, 좋은 묘를 구해서 도자기 병에 넣고 밀봉해 숙묘 단계로 변화시켜 사용한다. 이때 모든 책임은 의사가 짊어져야 한다. 그러자 시중에선 갖가지 황당한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종두에 적합한 계절과 날짜, 시료 채취용 아이의 선택방법이 따로 있으며, 이를 잘 정해야 만일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의 인두법이 분명히 효과를 보였다는사실이다.

    우리 역사의 전면에 허준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도 두창이 있다. 일개 의관에 불과한 허준이 어의 양예수를 제치고 선조의 총애를 받은 것은 광해군의 두창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두창을 과감한 처방으로 치료하자 선조는 그를 일약 당상관에 제수했다. 허준은 그 이전까지 두창 증세와 기존 전염성 질환의 증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두창이라는 이름을 정확한 병명으로 분리해 공식적인 의학용어로 확립한다.

    천연두 전문 의사 유상

    숙종에게 두창은 잊을 수 없는 질환, 원수 같은 질환이었다. 첫 부인인 인경왕후, 그다음으로는 숙종 자신이 두창을 앓았고, 왕세자인 연령군도 두창에 걸려 고생했다. 특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숙종의 두창을 치료하기 위한 기도에 나섰다 무리해 세상을 떠난다.

    실록에 기록된 두창의 첫 번째 희생자는 숙종의 전 부인이자 사씨남정기로 유명한 김만중의 조카딸 인경왕후였다. 숙종 재위 6년의 일이었다. 10월 19일 인경왕후가 두창이라는 확진이 떨어지자 숙종과 명성왕후는 창경궁으로 옮기고 인경왕후는 경덕궁에 남아 있다 10월 26일 승하한다. 재위 9년 10월 18일에는 숙종이 두창에 걸린다. 치료는 처음엔 내의원에서 주도했다. 하지만 승마갈근탕이라는 처방이 오히려 발열 증세를 심하게 일으키자 두창 전문의 유상(柳)이 입시해 치료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화독탕으로 열을 가라앉힌 후 동의보감의 보원탕 처방을 썼다. 10월 27일 얼굴에 생긴 곪은 종기 때문에 증상이 다시 심해지자 사성회천탕이라는 처방으로 바꾸어 투여한다.

    사성회천탕은 보원탕이라는 처방에 웅황(雄黃·천연 비소화합물)을 더한 것으로 선조, 광해군 때의 인물인 학송 전유형이 만든 독자적인 처방이다. 전유형은 해부학적 지식을 중요하게 여긴 독특한 의사이자 문신으로, 두창에 대한 그의 처방은 박진희 이경화 등 조선 후기 의사에게 널리 퍼졌다. 이런 노력 덕택일까. 10월 29일 숙종은 열이 내리고 얼굴에서 딱지가 떨어지면서 호전됐다. 치료를 주도한 유상은 ‘증보산림경제’를 지은 유중림의 아버지로 서얼 출신이었다. 이후 유상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지중추부사로 두 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리면서 연령군의 두창 치료에도 참여한다.

    엄동설한의 찬물 세례

    숙종의 두창은 권력지도까지 바꿔놓았다. 명성왕후가 숙종의 치료를 위해 기양법(祈禳法)을 행하다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14세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어머니의 강력한 보호를 받았지만 결국 두창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실록에 기록된 명성왕후의 모습은 한마디로 ‘극성스러운 어머니’ 그 자체였다. 재위 1년 6월 21일의 기록이다.

    “당초에 자전(명성왕후)은 여러 공자들이 은밀히 화를 일으킬 뜻을 품었음을 알고, 행여 독살 시도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임금의 음식을 모두 친히 장만하여 손수 갖다 드렸다.”

    대비의 과도한 간섭으로 직접 음식을 장만하다보니 신하들 사이에 뒷말이 나왔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엄마표 집밥’ 덕분일까. 숙종은 조선 왕 중에서 영조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었다.

    명성왕후의 과도한 자식사랑은 결국 자신의 명을 재촉한다. 급한 마음에 무당을 불러 점을 봤는데 숙종의 두창이 명성왕후에게 든 삼재(三災) 때문에 생겼다는 점괘를 받는다. 명성왕후는 비장한 각오로 무당의 처방에 따라 삿갓을 쓰고 소복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았다. 엄동설한에 물벼락을 맞은 그녀는 결국 병을 얻고 그해 12월 5일 승하했다. 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상이 두창을 앓았을 때 무녀 막례가 술법을 가지고 금중(禁中·대궐)에 들어와 기양법을 행하였는데 대비가 매일 차가운 샘물로 목욕할 것을 청하였다.” “박세채가 상소하여 맨 먼저 이 말을 내었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여러 번 쟁론하여 마침내 유배하게 되었다.”

    45년 재위 내내 肝질환 고통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진행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엄동설한에 차가운 물로 목욕하다 대비가 죽자 신하들은 무녀 막례를 처형하라고 여러 차례 건의하지만 숙종은 끝내 유배형으로 사건을 종결한다. 명성왕후의 아버지는 서인 김우명(1619~1675)으로 남인(윤휴)과의 대립에서 패하고 화병으로 죽은 인물이다. 명성왕후는 말과 글로 ‘음식을 끊고 자결하겠다’는 말을 내릴 정도로 남인을 증오한 인물이었다. 남인 출신 장옥정(장희빈)이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숙종은 어머니가 죽자 장옥정을 다시 입궐시켜 숙원에 봉했다. 천연두가 조정의 권력지도까지 바꾼 셈이다. 조선시대도 그렇지만, 지금도 지도자의 질병과 건강은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요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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