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호

청각의 오아시스에서 문화 욕망을 채우다

홍익대 앞 북카페 ‘토끼의 지혜’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3-05-23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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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음의 도시에서도 가장 번잡한 홍대 앞에 터 잡은 ‘토끼의 지혜’(사진)는, 우선 조용했다. 좌석은 대체로 2인용.
    • 책의 수준이 일정했고 더러는 귀한 책도 눈에 띄었다.
    청각의 오아시스에서 문화 욕망을 채우다
    프랑스 파리. 그 도심지의 허공으로 전철이 기계음을 내며 달린다. 폴은 전철 소리에 경악한다. 전철의 제동장치가 내는 잔인한 마찰음 때문에 폴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소리친다. “제기랄!”

    영화 ‘파리의 마지막 탱고’의 첫 장면이다.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불안과 불만으로 일그러진 초상화를 전면에 내건다. 영국의 자기 파괴적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두 점이 영화의 시작을 지배한다.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과 ‘이사벨 로우스톤의 초상화’다.

    소음의 도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은 베이컨의 전시회에 가서 그 충격의 불안과 파괴를 보고는 곧 그만큼이나 문제작이 될 영화 ‘파리의 마지막 탱고’의 주인공을 말론 브랜도로 결정하게 된다. 가토 바비에르의 신경질적인 재즈 음악에 얹혀진 베이컨의 분열적인 초상화, 그리고 이어지는 첫 장면, 폴(말론 브랜도 분)이 고가 전철 밑에서 “제기랄!” 하고 소리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그로부터 곧장 부조리한 상황 속으로 치닫는다.

    그런 정황을 우리는 나날의 도시 일상에서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시는 소음투성이다. 자동차 경적, 공사장의 중장비 소리, 지하철에서 휴대전화 하는 소리, 일방적으로 전도를 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소리, 젊은이들을 훈계하는 ‘철없는’ 노인들의 소리, 도시 모퉁이 곳곳마다 들어선 휴대전화 가게의 영업용 음악 소리…. 소음은 다른 소음과 섞여 더 큰 소음이 된다. 소음과 소음 사이, 그 잠깐의 휴지부마저 곧이어 습격해 오는 또 다른 소음에 의해 빈틈없이 메워진다. 그 사이를 걸을 때, 우리는 흡사 영화 속의 폴처럼 “제기랄!” 하고 외치고 싶어진다.



    청각의 오아시스에서 문화 욕망을 채우다

    홍대 앞은 소란스러우면서도 고즈넉한 공간이다.

    실례를 보자. 한국환경공단이 대구광역시를 조사했다. 도로변 5곳에 소음 자동 측정기를 설치해 분석했는데, 2009~2011년 월별 평균 소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준치를 웃돌았다. 대구는 밤낮으로 시끄러운 도시로 확인된 것이다. 낮에는 36개월 모두 평균 소음도가 기준치 65㏈을 훨씬 넘는 71㏈ 이상이었고 그중 72㏈을 넘긴 경우도 22개월이나 됐다. 밤에는 대부분의 측정 기간이 기준치(55㏈)를 웃돌았다. 도심 도로뿐만 아니라 병원, 학교, 주거지 심지어 녹지까지 주야간 평균 기준치를 넘겼다.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에 따르면 병원 실내에서 30㏈ 이상이면 수면을 방해받게 되고, 거주지의 실외에서 55㏈ 이상이 지속되면 심한 불쾌감을 갖게 되며, 교통량이 많은 도심지에서 70㏈ 이상 지속되면 청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청력 손실이나 이명 증상 같은 육체적인 피해에 더해 초조, 불안, 불쾌, 식욕 부진, 불면, 학습능력 저하 같은 부작용이 뒤따른다.

    대구 지역의 대표적 일간지 ‘매일신문’의 2013년 4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러한 도시 소음 때문에 불쾌감이 극도에 달한 시민들끼리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4월 10일 오후 7시 30분경 대구 동구 율하동 도로에서 A(23)씨 차량과 B(31)씨 차량이 마주 보며 교행하던 중 B씨가 경적을 울리자 A씨가 시끄럽다고 언성을 높였고 이에 B씨도 욕설을 퍼부었으며 끝내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서로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방 차량의 뒷거울을 발로 차는 폭력 시비가 벌어졌다.

    이 작은 사건의 각 항목에 이 나라 대도시의 주요 도심지를 쳐넣고 그 나이와 이름을 다르게 바꿔놓아도 실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일상 폭력’의 한 장면이 된다. 서울이든, 광주든, 부산이든 상관없이 20대나 50대나 70대나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고 삿대질을 하고 욕설을 퍼붓다가 끝내 주먹질까지 한다. 그 순간에도 도시의 소음은 그들의 모든 행동과 자제되지 못한 심리적 충동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라도 하다는 듯 데시벨을 더 올린다. 우리도 그 한 무리가 되어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워놓고 서로 삿대질을 하는 사람들 곁으로 지나가면서 경적을 신경질적으로 눌러댄다.

    이렇게 도시 소음이 밤낮으로 높은 데시벨을 유지하면서 일부 명금류가 둥지를 틀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명금류(鳴禽類)라고 하면 다소 딱딱한 표현인데 영어로 ‘the songbirds’라고 하는 이 명금류는 ‘사람이 듣기에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내는 새’를 뜻한다. 꾀꼬리, 할미새, 여새, 종다리, 참새, 동고비, 직박구리, 휘파람새 등이 명금류다. 그들이 도시의 소음에 지쳐 사라지는 중이다. 도심지에서 수컷의 노래는 자동차 경적이나 중장비나 각종 기계음에 뒤섞여 울리게 된다. 암컷들은 이 혼란 속에서 짝짓기에 적합한 상대의 울음소리를 분간해내지 못한다. 그들의 개체 수는 줄어든다. 새 소리가 사라지는 도시, 그 안에서 우리는 인공의 소음을 더 많이, 더 악착같이, 더 높은 데시벨로 내뱉는다.

    화창한 금요일 오후

    출근하러 집에서 나올 때 이미 ‘가장’이라거나 ‘아버지’ 혹은 애지중지 곱게 자랐던 딸이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며 자존심을 내려놓고 나온 상황 아니던가. 외근 과정의 도로나 퇴근 이후의 술자리에서 수많은 소음이 우리를 포박하고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제기랄!”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김기택 시인이 시 ‘우리나라 전동차의 놀라운 적재효율’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승객들이 미처 다 밀려나가기도 전에

    한떼의 사람들이 또 밀려들어온다.

    빈틈, 퉁겨져나간 사람들 뒤에 생긴

    저 좁디좁은 빈틈을 향하여

    머리와 팔다리와 구두들이 밀려온다.

    아무리 튼튼해 보이는 벽도 온몸으로 부딪쳐 밀면

    발자국 하나 디딜 공간이 나온다는 것을

    노련한 승객들은 잘 알고 있다.

    차곡차곡 구겨넣어진 사람들을 한번 더 누르며

    전동차 문이 있는 힘을 다해 닫힌다.

    전동차가 출발한 다음에도 비명과 신음이

    찌그러진 사각기둥마다 새어나오지만

    사람들은 빠르게 정사각기둥을 되찾아가고

    몸 비틀 때마다 벌어지던 빈틈도 모조리 메워버린다.

    빠르고 정확하다, 우리나라 승객들의

    자동화된 저 순발력!

    찌그러졌던 사각기둥들은 어느새 반듯하게 펴지고

    사람들은 다시 질서정연하고 고요해진다.

    나는 지금 서울에서도 가장 번잡한, 아니 한국, 더 범위를 넓혀 동아시아의 주요 도시 중에서도 가장 번잡하고 떠들썩한, 홍대 앞을 걷고 있다. 저녁 8시에 공연을 보기로 했는데, 마침 잡혀 있던 오후의 회의가 너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족히 서너 시간은 홍대 앞에서 보내야만 하는 사정이 생긴 것이다.

    도심의 오아시스, 북카페

    이른바 ‘불금’(불타는 금요일)이라, 마치 레고블록처럼 일제히 기립해 나란히 서있는 수많은 카페와 와인바와 클럽과 라이브 극장과 노래방과 맥줏집과 불고기집과 키스방과 휴대전화 가게와 편의점과 옷가게와 떡볶이집과 대창구이집 사이로, 그 각각의 집들마다 내뿜는 소음 사이로 걸어야만 하는 상황, 결국 나는 화창한 날씨의 금요일 오후를 압도적인 소음 사이에 갇혀 지내게 된 것이다. 뜻밖에 얻게 된 세 시간의 여유를 아껴 쓰고자 나는 몇 군데 북카페를 둘러보기로 했다.

    청각의 오아시스에서 문화 욕망을 채우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카페꼼마’.



    청각의 오아시스에서 문화 욕망을 채우다
    카페라? 나는 원래 번잡한 곳을 싫어하고 어디에 죽치고 앉아서 시들시들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 따위를 경원하다 못해 저주하는 편이다. 카페가 그런 곳이다. 왜 저기에 앉아 있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이태 전, 가을에 누군가 내게 물었다. 문화 쪽으로 많이 활동하시고 글도 쓰시고 하니까 자주 가시는 카페 있으세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 간단한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깔려 있었다.

    별볼일 없는 글이나 쓰면서 어디 분위기 좋다는 카페에 앉아, 오는 사람 불러 앉히고 먼 데 있는 사람 불러내서 또 맞은편에 앉히고 간다는 사람 억지로 다시 앉혀놓고 하나마나한 얘기를 떠들면서 연신 눈을 좌우로 돌리고 그러면서 무슨 문화인사인 양 정치에서 문화까지 ‘국산사자음미실’ 각종 분야에 돼먹지 못한 ‘뒷담화’나 떠들면서 소일하는, 그런 사람 아닙니까?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래서, 그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로는 더욱 더 카페에 앉아 있는 일을 멀리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세 시간의 여유를 해결할 방도가 마땅히 없었다. 하여, 잠시 유체이탈해 도심의 일상 속에서 그나마 잠시의 여유가 된다고 하는, 이름하여 북카페라고 하는 곳을 몇 군데 둘러보기로 했다.

    책과 저자에 대한 모독

    하긴 지난겨울에 어떤 사회적 의제에 대해 발설하고 그에 대해 논하고 청중의 의견도 귀담아듣는 이른바 ‘북콘서트’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 공간이 홍대 앞의 북카페였다. 한국 출판계의 중추가 되는 어느 출판사가 장만한 그 북카페의 한구석에서 나는 토론자로 두 시간가량 머물렀는데, 익숙지는 않았지만, 여느 대학 대강당이나 호텔의 워크숍 룸에서 벌이는 관습적인 심포지엄과는 그 풍경이 달라서 안심이었다. 카페에서의 토론이라, 이는 저 계몽주의 시대 이래 유럽의 시민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문화 풍경이거니와 그 연원이 우리 문화예술계에서도 짧지 않다. 저 일제강점기의 종로나 전쟁 직후의 명동이 그러했거니와 1970년대 원서동의 ‘공간’은 소극장과 카페가 하나의 문화적 대세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제 그런 판형이 홍대 앞에서 다른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다.

    정치·사회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쟁론서를 펴내고 있는 후마니타스가 합정역에서 상수역으로 가는 길가에 마련한 북카페 ‘책다방’은 홍대 앞 북카페의 1번 타자 역할을 해왔다. 그밖에 문학동네가 ‘카페꼼마’를 열었고 내가 몇 차례 들렀던 창작과비평사의 ‘인문카페 창비’가 있는가 하면 그와 더불어 한국문학의 쌍끌이가 되는 문학과지성사도 산울림소극장 근처에 ‘KAMA’를 장만했고 자음과모음이나 휴머니스트 같은 출판사도 자사 사옥의 1층이나 지하를 북카페로 단장해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이자 자사 출판물을 활용한 대중 강의와 북콘서트의 장으로 쓰고 있다.

    후마니타스의 ‘책다방’은 2010년 8월 문을 열었다. 출판사 업무를 보는 사무실과 북카페가 1층 공간을 나눠 쓰는 중이다. 이 출판사의 직원들이 ‘마음 편하게’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이 될까 싶을 만큼, 1층의 중심은 카페다. 그 한 켠으로 편집부가 있는데 유리창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작은 공간을 아껴서 찾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귀한 것은 심각한 자동차 소리나 불쾌지수를 치솟게 하는 온갖 소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청각의 오아시스다.

    혼자서 찾기도 하고 두셋씩 짝을 지어 찾기도 하고 여럿이서 공부를 하기 위해 찾기도 하는데, ‘책다방’은 그런 요구를 적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꽤 많은 사람이 한국 정치의 현재를 진단하고 그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논구하는 장소로도 쓰인다. 그뿐만 아니라 ‘책다방’의 미덕은 자기네 출판사가 펴낸 책만이 아니라 마치 작은 동네 도서관처럼 각 분야의 주요 서적을 알차게 구비해놓은 데 있다.

    여유 있는 도심 한나절

    그러니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북카페 ‘자음과모음’과는 조금 결이 다른 셈이다. ‘자음과모음’은 절반이 주차장이 된 1층의 나머지 절반을 커다란 통유리로 개방해 마련한 공간이다. 그 안에서는 몇 사람이 책을 읽거나 대화를 하고 있고 그 바깥, 즉 주차장 쪽으로는 진열대가 비치되어 있다. 그 위에는 자음과모음 출판사가 낸 구간 도서들이 할인 가격으로 진열돼 있는데, 좋은 책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물리적인 이유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씁쓸한 풍경이었다.

    마치 백화점의 매대처럼, 그 출판사의 구간 도서들은 ‘팔리지 않은 헌책’처럼 보였다. 그 매대의 입구에는 “득템하세요. 먼저 고르는 사람이 임자”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애교 삼아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문구였지만, 만약 내가 그 책들의 저자였다면 적지 않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좋은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순전히 책 한 권 사고자 하는 독자의 일시적인 기분일 뿐이고 기획자와 편집자와 번역자와 저자는 ‘먼저 고르는 사람이 임자’라는 표현을 썩 흡족하게 받아들일 기분은 아닐 것이다. 그중 한 권을 골라 사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

    청각의 오아시스에서 문화 욕망을 채우다

    홍대 앞 북 카페 ‘비플러스’

    그런 점에서 ‘인문카페 창비’가 그 공간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가대로 자사의 책을 판매하는 것은 상당한 결기로 느껴진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면 책은 정가로 사서 읽는 것이라는 신중한 조언처럼 들린다. 문학과지성사의 ‘KAMA’ 역시 자사 출판물에 대한 최소한의 격조를 지키려는 한편 그동안 문지문화원 ‘사이’를 통해 실천했던 다원예술(문학, 미술, 영상, 음악, 웹아트 등 다양한 장르가 융복합된 예술 행위) 작품과 그 자료들을 비치해 이에 대한 관심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고 있다.

    출판사들이 홍대 앞에 북카페를 여는 데는 ‘책과 독자의 일상적 만남’이라는 소박한 이유 외에도 출판 시장의 극심한 장기 불황이라는 현실적 이유가 더 있다. 전국 읍면 단위까지 세포처럼 퍼져 있던 동네 서점망이 일거에 붕괴되면서 출판사는 서너 군데의 대형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을 ‘갑 중의 갑’으로 떠받들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됐다. 그런 와중에 모색한 하나의 타개책이 북카페 사업이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문학동네의 ‘카페꼼마’. 홍대 앞 주차장 거리 한복판에 1호점이 있고 동교동 삼거리에 2호점이 있다. 북카페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소박하고 약간은 어두침침한, 그런 분위기와 카페꼼마는 사뭇 다르다. 두 곳 모두 1, 2층을 시원하게 텄고 무엇보다 한쪽 벽면에 15단짜리 책장이 설치되어 있다.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는 한길사의 북카페가 이런 거대한 책장으로 상당한 인테리어 효과를 얻고 각종 광고나 영화 촬영 장소 대여로 유명해진 것처럼 카페꼼마의 책장 인테리어 또한 찾는 사람들의 문화적 욕망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일부러 ‘문화적 욕망’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북카페에서는 진짜로 책을 읽거나 책에 대해 토론하는 일보다 책을 인테리어 소품으로 놓고 도심의 한나절을 여유 있게 보내려는 문화 소비의 측면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 ‘카페꼼마’는 2층 높이까지 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실제로 그 위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일부러 이동 사다리를 고정시킨 뒤,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보았으나 그 아래에 꽂혀 있는 책들과 중복되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높은 곳에 비치된 책은 그저 ‘인테리어용’으로 꽂혀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한국 소설뿐만 아니라 신화, 예술, 사상, 세계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읽을 만한 책을 펴낸 곳의 카페라서 한두 시간 머물기에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카페꼼마에서도 자사의 책을 5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한다. 절판된 책을 찾아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거나 책과 관련된 행사 때 출판사로부터 직접 책을 사게 될 경우, 일정하게 할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가에서 유통 마진과 서점 마진을 빼고 팔 여지가 출판사에는 있다. 앞서 북카페 자음과모음에서도 이만한 가격으로 할인해서 판다.

    이렇게 파는 책은 대체로 서점에서 더 이상 팔리지 않아 반품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리퍼브 제품(refurbished product)이라고 부르는 게 출판 시장에도 존재한다. 리퍼브 제품은 출판사를 떠나 서점으로 갔다가 원하는 독자를 만나지 못하고 반품 처리되어 다시 출판사로 돌아온 책이다. 다시 내보내봤자 서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창고에 보관해놓으면 관리비용도 들고 결국 낡고 닳은 폐지가 된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50% 할인이라도 해서 때를 놓친 독자들이 다시 찾을 수 있게 하는 게 낫다. 나도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와 레지스 드브레의 현대문화 비평서를 새로 샀다. 언젠가 샀으나 채 읽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진 책들이다.

    그런데 작은 차이가 있다. 북카페 자음과모음은 이 리퍼브 책을 그 무슨 ‘떨이 상품’처럼 진열해놓고는 ‘먼저 고르는 사람이 임자’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런 기분으로 책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헌책방에서 책을 한 권 사더라도 사뭇 경건한 마음으로 스스로 먼지를 털어가면서 귀하게 사는 게 책이다. 반면 카페꼼마는 근사한 책장에 비치한다. 비록 리퍼브 신세가 되어 50% 할인 처분되는 제품이 됐지만 원래 그런 운명의 책이 아니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귀한 책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출판사들이 자기네 책을 진열하거나 판매하는 북카페를 피해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순수하게 책이 좋아서 북카페를 차린 곳으로 걸음을 옮겨보았다. 홍대 앞에는 디자인 전문 북카페 ‘정글’도 있고 한적한 골목에 자리 잡은 ‘비플러스’도 있고 굳이 북카페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수백 권의 책을 구비해 독특한 취향을 드러낸 곳들도 있다. 그러나 그중 몇 군데는, 엄격하게 말하건대, 읽을 만한 책을 제대로 구비하지도 않은 채 그저 책이 한낱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한 곳이다. 그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카페 문화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참기 어려웠다.

    “35번 고객님, 카페모카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한 곳을 정해 저녁의 약속 시간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머물러 있었으니, 홍대 앞 주차장 거리에서 실핏줄처럼 옆으로 번진 골목의 2층에 자리 잡은 북카페 ‘토끼의 지혜’다. 듣자 하니 강남역에 1호점이 있고 홍대 앞의 이곳은 2호점이라고 한다.

    들어서는 순간, 소음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나는 안도했다. 아마도 내가 도심의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를 멀리하는 까닭은 바로 그 악마적인 소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듣는 사람들의 심신 상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틀어놓은 음악이며 바로 옆에 앉은 다른 일행들의 사소한 신변잡사 떠드는 소리며 “35번 고객님, 카페모카와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하는 소리에 질린 탓에 나는 적어도 내가 약속 장소를 정할 수 있는 한, 결코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를 선택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정했다 해도 서둘러 조용한 곳을 찾아 피난하는 쪽이다. 이번 참에 몇 군데 들렀던 북카페도 그 물리적 데시벨은 낮았지만 일정한 소음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어서 참고 견딜 만한 일이 못 됐다.

    ‘토끼의 지혜’는 우선 조용했다. 어디 도서관에라도 온 듯했다. 좌석은 대체로 2인용, 그러니까 혼자 온 사람에게는 널찍하달 수도 있었다. 서너 사람이 모여서 대화나 토론을 하려면 별도의 공간으로 이동해야 했다. 혼자서, 혹은 둘이서 나지막이 얘기하거나 책을 읽도록 공간이 배치돼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의 수준이 일정했고 더러는 귀한 책도 보였다.

    그제야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이 무지막지한 소음의 도시에서 마음 편히 한두 시간 보낼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북카페가 그럴 만한 곳이라고 해서 몇 군데 둘러보았으나 수선스러운 곳도 있었고 무엇보다 언필칭 북카페이건만 책다운 책은 드물었다. 겨우 한군데 자리를 잡아 약간의 독서와 약간의 생각과 약간의 공허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 이 대도시의 ‘불금’ 중에 그나마 안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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