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을 이룰 수 없다”…분노, 좌절이 테러의 씨앗
- 테러범은 확신범…처벌 강화로는 못 막아
- 범행 기회보다 범행 동기를 줄여라
발단은 51일 전인 2월 28일이었다. 종말론을 신봉하는 다윗파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와 신도들이 기관총 등 불법무기를 쌓아놓고 마약 복용, 미성년자 간음 등을 일삼는다는 제보에 따라 이날 주류·담배·화기단속국(ATF) 요원들이 수색영장을 발부받고 웨이코 북동부에 위치한 다윗파 집단 거주 건물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다윗파 신도들이 총격전을 벌이면서 저항해 요원들은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51일간 대치가 지속됐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4월 19일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을 중심으로 장갑차까지 동원한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최루탄을 건물에 투입하면서 작전이 시작됐는데, 건물 안에서 화재가 발생해 어린이 21명과 임산부 2명을 포함해 7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연방정부를 전복하라!”
비극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이라고 해야 하나. 1993년 3월 웨이코에서 대치 상태가 이어지고 있을 때 한 청년이 이곳을 방문한다. 그의 이름은 티모시 맥베이. 그는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조용하게 지낸 맥베이는 2년제 대학에 다니다 군에 입대했다. 걸프전에 참가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맥베이는 1991년 12월 제대한 뒤 뉴욕 버팔로에서 잠시 경비원으로 일하다 극우파 민병대(militia)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맥베이는 청소년기부터 무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극우파 민병대는 연방정부와 진보 좌파가 국민을 억압, 수탈한다고 여기는 단체다. 정부의 폭정에 무력으로 대항해야 하며 이것이 미국의 헌법정신이라고 믿는다. 200여 년 전 영국의 폭정에 대항해 무기를 들고 미국 독립을 성취한 민병대와 자신들을 동일시한다. 또한 자유와 인권을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 헌법정신을 무시하는 연방정부를 뒤엎는 것이야말로 ‘제2의 미국혁명’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수정헌법 제2조는 “규율이 잘 갖춰진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州) 정부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행여나 연방정부가 영국과 마찬가지로 독재와 폭정을 휘두르지 않을까 염려했다. 만약 연방정부가 ‘괴물’로 변해 각주의 자치권과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려 든다면 또다시 총기를 들고 연방정부를 타도해야 하므로 총기 보유 권리를 헌법 조항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미국은 땅이 넓다. 100㎞를 달려도 집 한 채, 사람 한 명 만나기 어려운 지역이 꽤 있다. 예컨대 강도를 당해 신고를 하더라도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는 데 최소 몇 시간이 걸리는 곳이 많다. 따라서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극우파 민병대 조직이 주로 인구밀도가 아주 낮은 미국 북서부 지역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극우파 민병대는 개인의 총기 보유를 신줏단지처럼 신봉하기 때문에 정부의 총기 규제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들은 언젠가 있을 ‘제2의 미국혁명’을 위해 수시로 비밀 집회를 열고 깊은 산속에서 집단적으로 군사훈련을 받는다.
연방정부에 적대감을 가진 맥베이는 1992년 불법 무기소지 혐의로 민간인 랜디 위버가 연방수사관들에게 반항하다 사살되자 증오심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에 웨이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4월 19일 참사 소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불을 지폈다. 정부에 대한 응징을 결심하게 만드는 직접적 동기가 된 것.
1995년 4월 19일. 웨이코 사건이 발생한 지 정확하게 2년째 되던 날, 오클라호마의 연방 청사 건물이 폭파되고 16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맥베이와 그의 동료 테리 니콜스의 범행이었다. 오클라호마 중심가에 위치한 뮤러(Murrah) 빌딩을 무너뜨린 폭탄 테러는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할 때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테러 사건이었다. 사망자가 168명에 달했다. 사망자 중엔 6세 미만 어린이도 19명 있었다. TNT 2300t 규모의 폭발이었다. 리히터 지진계는 3.0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측정했다. 엄청난 폭발력으로 인해 폭탄이 터진 뮤러 빌딩 주변 건물 324채가 부서지거나 손상을 입었고 86대의 차량도 파손되거나 불탔다. 재산 피해가 6억5000만 달러(약 7100억 원)에 달했다.
테러범은 확신범
폭파범 맥베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90분 만에 체포됐다. 오클라호마 고속도로 순찰대원이 자동차 번호판 없이 주행하던 그의 차량을 세워 검문하던 도중 자동차 안에 있던 불법 총기를 발견하고 체포했다.
6세 미만 어린이를 포함해 168명이나 죽게 만들었으면서도 맥베이는 억울한 민간인 피해를 막고자 연방 청사 건물을 폭파했다고 진술했다. 맥베이가 테러 대상으로 삼은 기준은 대표적인 연방 수사기관인 FBI, ATF, 마약수사국(DEA) 가운데 두 곳 이상이 입주한 건물이어야 했다. 애리조나 주에 살던 맥베이는 테러 대상을 애리조나, 미주리, 텍사스, 아칸소에서 찾았다. 처음엔 아칸소 주의 주도(州都)인 리틀록(Little Rock)의 40층 높이 연방 청사 건물을 생각했지만, 청사 바로 앞에 꽃가게가 있어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증언했다.
1994년 12월 맥베이는 오클라호마 연방 청사 건물을 사전 답사 목적으로 찾았다. 1977년 세워진 9층짜리 건물에 알프레드 P 뮤러 연방법원 판사의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빌딩엔 DEA, ATF, 사회보장국과 육군 및 해병 모집단이 들어와 있었다. 맥베이가 뮤러 빌딩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이 건물 정면이 유리로 돼 있어 건물 폭파 모습이 시각적으로 극대화돼 전달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작용해서다. 또한 건물 바로 앞에 다른 건물이 없어 인근 민간 건물과 시민에게 피해를 덜 주리라고 생각했다.
맥베이는 범행 당일 버지니아 주의 슬로건이기도 한 ‘Sic Semper Tyrannis!’(폭군에게는 언제나 이렇게 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로마 시대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한 뒤 외쳤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링컨 전 대통령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 역시 범행 직후 자신의 일기장에 같은 문구를 적은 바 있다.
맥베이는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자유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폭군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체포될 당시에도 제퍼슨의 또 다른 명언인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할 때 자유가 있고,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하면 폭정이 있다”는 슬로건이 적힌 자동차 범퍼 스티커를 갖고 있었다. 맥베이는 스티커 밑에 “지금부터 자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글귀를 덧붙여놓았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빼앗는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다”는 존 로크의 주장도 적었다.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철저하게 믿은 확신범이었다.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그는 자신의 범행을 반성하지 않았다. 테러범들이 흔히 얘기하듯이, 마땅히 했어야 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식으로 합리화하고 변명만 늘어놓았다. ‘연방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권력’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런 얘기도 했다.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국군대 병사를 보세요. 이들 누구 하나 개인적으로는 아무 죄도 없지만, 악의 제국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겁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맥베이는 일부러 웨이코 참사 2주년인 4월 19일을 범행일로 골랐다. 이날은 미국 독립전쟁의 첫 전투로 기록되는 렉싱턴 및 콩코드 전투가 발발한 지 22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매년 4월 세 번째 월요일을 ‘애국자의 날’로 기념한다. 맥베이는 1997년 6월 2일 살인죄로 사형 판결을 받는다. 2001년 6월 11일 피해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극물 주사방법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연방정부 차원에서 38년 만에 처음 집행하는 사형이었다.
‘미국의 정신’ 바꾼 9·11
>맥베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3개월 뒤인 2001년 9월 11일 전 세계를 경악게 한 사건이 벌어진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의 충격도 9·11 테러의 그것에는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진주만은 미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미국 본토, 그것도 미국의 심장인 뉴욕과 워싱턴이 직접 공격받는 테러가 발생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클라호마 참사가 내부의 적이 저지른 범행이라면 9·11 테러는 외부의 적에 의한 범죄였다. 19명의 알 카에다 테러범은 4대의 여객기를 공중 납치했다.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을 이륙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던 아메리칸항공 11편 여객기와 유나이티드항공의 175편 여객기가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오전 8시 46분과 오전 9시 3분 차례로 충돌했다. 두 빌딩은 두 시간도 채 못 돼 무너져 내렸다.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워싱턴의 덜레스 국제공항을 출발한 아메리칸항공 77편은 오전 9시 37분 미국 수도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 펜타곤으로 돌진했다. 펜타곤 서쪽 건물이 일부 파손됐다. 유나이티드항공 93편 여객기는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노렸다. 그러나 승객들이 납치범들과 격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항공기는 펜실베이니아 주 생스빌의 한적한 곳에 추락했다.
1993년 4월 19일 텍사스 주 웨이코 다윗파 집단 거주 건물에서 경찰의 진압 작전 중 화염이 일고 있다.
피해는 막심했다. 여객기 4대에 타고 있던 승객 227명을 포함해 3000명 가까운 사람이 숨졌다. 충격의 여파는 경제에도 미쳤다. 9·11 테러로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던 뉴욕증권거래소가 9월 17일 장을 열자 다우존스지수가 무려 684포인트나 떨어졌다. 포인트 지수로는 가장 큰 하락폭이었다. 한 주 동안 1369포인트, 14.3%가 하락해 1주일 하락폭 역시 증권거래소 개장 이래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충격이 컸던 만큼 반응 또한 민첩했다. 법무부 재무부 교통부 등에 속해 있던 22개 연방 법집행기관을 한곳으로 모아 ‘국토안보부’란 거대한 조직을 새로 만들었다. 직원 17만 명에 1년 예산이 500억 달러(약 65조 원)에 달하는 매머드급 기관이었다. 테러 범죄에 대항하고자 ‘애국법(Patriot Act)’이란 이름을 붙인 특별법도 제정했다. 또한 국가안보국(NSA)에 영장 없이 통신 감청 등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변화였다. 9·11 테러 이전과 이후 미국은 확연히 달라졌다. 1776년 독립 이래 어쩌면 미국을 가장 크게 바꿔놓은 사건이라는 평가도 있다.
미국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나라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헌법과 각종 제도적 장치를 통해 철저하게 권력의 집중을 막았다. 권력의 집중은 곧 독재를 의미하며 이는 개인의 자유 및 인권 보장의 후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9·11 테러가 이러한 미국의 정신이 낳은 시스템을 바꿔놓은 것이다.
핵무기도 못 막는 테러
미국의 공권력 체계는 철저한 분권형 시스템을 특징으로 한다. 독립 이후 이러한 원칙은 줄곧 지켜져왔다. 경찰 조직이 1만7000개가 넘는 것만 봐도 그렇다. 4만 명 이상의 뉴욕경찰(NYPD)부터 5명도 안 되는 초미니 경찰서까지 모두 독립된 조직 및 인사 운용, 예산 수립 권한을 갖고 있다. 상위 조직이란 게 달리 없다. NYPD 같은 대규모 경찰이야 그 아래 경찰서도 있고, 피라미드형 조직체계가 갖춰져 있지만 대부분의 경찰은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중앙정부가 경찰력을 이용해 권력의 집중을 강화할까봐 조직을 잘게 쪼개놓은 것이다. 컨트롤타워가 없는 데다 기능이 중복되다보니 경찰력이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지키고자 이 같은 경찰 시스템에서 비롯하는 문제점을 감수해왔다.
9·11 테러를 통해 세계 최강국 미국은 핵무기와 최첨단 탱크, 전투기도 테러까지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명도 안 되는 테러범 앞에 수백조 원을 쏟아 부은 무기가 무용지물이 된 셈이다. 정보 수집 능력 및 수사력 강화가 절실했다. 흩어져 있는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을 한군데로 모으는 노력이 필요했다. 국토안보부와 국가정보국(DNI)을 서둘러 만든 이유다. 공항 검색 등 국경 출입 절차도 대폭 강화했다. 겉옷은 물론 신발도 벗어야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백스캐터(Backscatter)와 같은 알몸투시기도 설치됐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이런다고 또 다른 대형 테러를 막을 수 있을까. 필자는 9·11 테러 이후 모 매체에 이렇게 쓴 바 있다.
“9·11 테러는 이른바 ‘블랙 스완’과 같은 사건이다. 예측하기가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만약 9·11 테러와 유사한 대형 테러가 다시 발생한다면 이 또한 기존 테러 방식과는 차원이 다르게 벌어질 것이다. 일부에서는 ‘하나의 대형 사고가 발생하려면 수백 개의 선행 조짐이 나타난다’는 하인리히 법칙을 들어 예측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결과론적 해석일 뿐이다. 복잡계 이론을 비롯해 현재 존재하는 어떤 이론과 통계 프로그램에 의존하더라도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변수를 통제해 신뢰할 수 있는 예측 결과를 제시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다.”
9·11 테러 진상조사위원회가 내놓은 예방 실패 원인 중에는 ‘상상력 부족’이 맨앞에 놓여 있다. 상상력 부족이란 말이 뭔가. 어떤 결과가 발생해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말 아닌가. 어떤 상상력을 발휘해야 9·11 같은 테러를 막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9·11 이전에 ‘앞으로 테러가 발생할 수 있으니 이를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막겠다’고 했다면 이를 정부나 의회에서 과연 승인했을까.
낙오자들의 화풀이?
대비를 철저히 해도 테러를 막기 어렵다는 점을 얼마 전 발생한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사건이 여실히 보여줬다. 4월 15일 세계 4대 마라톤 대회 중 하나이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제117회 보스턴 마라톤대회 결승선에서 두 차례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결승선 주변에 있던 3명이 목숨을 잃고 180여 명이 부상했다. 형제 테러범 중 형 타메를란 차르나예프는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사망했고 동생 조하르 차르나예프는 부상을 입고 검거됐다. 미국은 다시 한 번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차르나예프 가족은 다게스탄 공화국으로 이주해 잠시 살다 2002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다 둘째 아들 조하르가 대학에 들어가자 다시 다게스탄으로 돌아가 현재도 그곳에 살고 있다. 타메를란은 2004년 복싱대회에 출전할 때만 해도 당시 지역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꿨다. 하지만 허리 부상 등으로 꿈을 이룰 수 없게 됐다.
이후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미국인 친구가 한 명도 없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쓸 만큼 미국에 적대심을 드러냈다. 이즈음부터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제부턴가 하루에 다섯 번 이상 기도를 하고 이슬람교도 스타일로 옷을 입었다고 한다. 또 ‘지하드(聖戰)에 내 생명을 바치겠다’는 가사가 담긴 노래를 반복해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타메를란은 지난해 약 6개월간 체첸과 러시아 지역에 머물다 미국에 돌아왔다. 영국의 한 일간지는 타메를란이 이 기간 중 이슬람 반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체첸 테러리스트들과 직접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장학금을 받는 등 꽤 인정받던 동생 역시 대학에 입학한 후 학업 부진으로 고민이 많았다. 의사가 되고 싶어 매사추세츠 대 다트머스 캠퍼스의 의예과에 진학했지만 3학기 동안 7개 과목에서 F를 받았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갈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 것이다. 이들의 삼촌은 사건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인생 낙오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화풀이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꿈을 합법적으로 이룰 수 없는 좌절과 분노가 범죄의 씨앗이 됐다고도 볼 수 있다.
모든 범죄는 범행 동기와 범행 기회를 동시에 충족할 때 발생한다. 둘 중 하나만 없어도 범죄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른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박수 이론’이다. 테러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을 상대로 한 대규모 테러는 미국에 대한 분노를 의미한다. 분노는 범행 동기로 연결된다. 범행 기회만 주어진다면 목숨을 바쳐 테러에 나서고자 하는 동기가 강력하게 ‘코딩’된 잠재적 범죄자들이 줄지어 서 있는 상황이다. 테러범은 확신범이다. 강한 신념으로 무장돼 있는 이들에게 형량을 늘리거나 검색을 강화하는 것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기회’ 막는 데만 급급
맥베이는 미국 독립의 고귀한 정신을 지키고자 스스로를 희생했다고 생각했다. 9·11과 보스턴 테러범들도 거룩한 성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고 믿었다. 극단주의가 무서운 이유다. ‘코딩’이라는 세뇌 과정을 거친 이들은 어떤 테러 예방책이나 방지책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유독 이슬람 문화권이 미국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서 ‘경도와 태도’에 이렇게 썼다.
“이슬람교도가 가진 분노의 배경에는 금전적 빈곤이 아니라 존엄성의 빈곤이 있으며, 교육을 받고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이슬람 젊은이들의 분노가 극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프리드먼은 또 이슬람교도의 테러를 막기 어려운 이유와 관련해 이스라엘 테러 전문가와 만나 9·11 테러와 관련해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나는 이번 테러가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 몇몇 특별 조직만으로 실행될 수는 없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번에 비행기를 세계무역센터 건물로 정확하게 조종해서 날아 들어간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테러 전문가는 이를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이륙하고 난 상태에서 그 정도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 보세요. 그들은 착륙 기술을 익힐 필요가 없었어요.’”
미국 정부는 그간 범행 기회를 막는 데만 급급해왔다. 앞서 언급한 공권력 기관 통합에 의한 효율적인 정보 수집 능력 확보, 수사 능력 증대, 검색 및 출입통제 강화 같은 것 말이다. 매년 검색과 출입통제 강화에만 수백억 달러를 쏟아 붓고 있다. 테러 조직의 씨를 말리겠다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쟁을 벌였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국토안보부 유지 비용 등 9·11 이후 들어간 돈이 5조 달러(550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노력들이 보안·군수산업에는 큰 도움이 됐을지 모르지만 테러 방지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이 보스턴 마라톤 폭탄테러 사건으로 드러났다.
미국인에게 오사마 빈 라덴은 대량 학살자지만 아랍의 많은 젊은이에게 그는 로빈 후드 같은 존재다. 미국이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제2, 제3의 오사마 빈 라덴이 나올 수밖에 없다. 테러범들이 지금까지는 비행기나 폭탄을 터뜨렸지만 다음에는 소형 핵폭탄을 터뜨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보안검색 강화에 들어간 예산 중 일부를 아랍권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데 썼다면 어땠을까. 다시 말하지만 테러를 포함한 모든 범죄는 코딩에 의한 범행 동기와 범행 기회가 만나 발생한다. 범행 기회를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면 범행 동기를 줄이는 노력에 더욱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