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호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광해군은 聖君, 중립외교의 화신?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입력2013-05-22 16: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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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 나간 임금’ 광해군이 마치 성군처럼 인식되고 있다.
    • 대규모 궁궐 공사로 백성의 삶을 파탄으로 몰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를 중립외교의 화신인 듯 얘기한다.
    • 백과사전에도 그렇게 나온다. 어느 경제학자는 조선의 19세기가 ‘체제의 위기’ ‘근대를 예비하는 시기’였다고 한다. 또 다른 식민지 근대화론 발상이다.
    • 이 모두는 통계를 왜곡하거나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된 일반화의 오류다.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통계청 통계전시관. 현대사회의 통계는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통계를 놓치면 잘못된 역사상을 가질 수 있고, 통계를 오해해도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 나아가 통계를 왜곡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현대사회에서 통계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분야가 없을 듯하다. 오죽했으면 이 하나의 행위를 놓고 통계청이라는 관청까지 생겼겠는가. 이는 계량화라는 근대적 생활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물론 통계는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또한 과거 사람들이 통계를 멀리했던 것도 아니다. 인구, 재정, 세금, 농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 통계가 필요했다. 예나 지금이나 규모의 계량화는 우리 삶을 이해하기 위한 유력한 방법이다. 이번 호에선 통계를 소홀히 해서 밝히지 못했던 시대상 하나, 통계를 왜곡 또는 과신해서 벌어진 잘못된 논의 하나, 이렇게 두 가지를 다뤄 보겠다.

    나라 말아먹기

    광해군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라 말아먹기’라고 할 수 있다. ‘말아먹기’라는 다소 거친 말을 쓴 이유는, 이외에는 달리 그 느낌을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야 광해군이 ‘정신 나간 임금’이라는 걸, 그 시대 나라가 임진왜란 때보다 더 쑥대밭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식민지 강점 시대를 거치면서 광해군이 중립외교의 화신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마치 성군(聖君)인 듯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동안 광해군의 내치(內治)에 대해 별 언급이 없었는데, 한명기 교수 등이 광해군 시대 궁궐 공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올바른 평가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여전히 광해군의 궁궐 공사 규모나 파장에 대해서는 그리 인식이 깊지 못하다. 궁궐 공사를 위해 석재, 목재, 철 등의 공물을 대규모로 걷어들여 공납제 개혁인 대동법을 무력화했고, 양전(量田)도 안 된 상태에서 추가로 전세(田稅)를 부과해 직접세 징수의 공정성을 해쳤다. 궁궐터를 확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 주민을 내쫓고 강제로 집터와 골재를 기부 받은 것은 약과였다.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매관매직은 물론, 은(銀)을 받고 죄인을 풀어줌으로써 형법제도를 문란하게 했다. 귀양 보낸 사람도 돈을 받고 풀어줬다.



    궁궐 공사에 미쳐 대외관계는 ‘눈치 외교’가 됐고,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광해군은 훈련도 안 시키고 한겨울에 옷도 제대로 못 챙겨준 자신의 군대를 만주 땅으로 파견했다. 파견 군대의 대장은 강홍립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後金)과의 심하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사자 가족에게 주라고 보낸 위로금도 착복해 궁궐 공사에 탕진했다.

    살기 위해 그랬겠지만, 나는 반정(反正)을 일으킨 사람들이 불쌍했다. 이런 나라를 맡아서 어쩌려고 반정을 했나 싶었다. 아무튼, 살자고 했겠지…. 농업기반 사회에서 파탄 난 민생과 재정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올 수도,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올 수도 없다. 고스란히 농업생산력이 회복되고 거기서 재원이 쌓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인조 초, 광해군 시대의 사초 등을 편찬한 ‘광해군일기’는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았다. 조선시대에 왕대(王代)별로 편찬하던 실록 중 재정이 부족해서 실록 편찬을 중지한 유일한 경우였다. 광해군이 얼마나 알뜰하게 재정을 파탄 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 와중에 정유재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정유재란 때 후금 군대의 앞잡이는 강홍립! 중립외교를 위해 광해군이 파견한 심복이자, 심하전투의 패장. 1만3000의 군사 중 9000여 명을 전투에서 죽게 하고, 혼자 살아남아 결국 조국 침략의 앞잡이가 됐다. 그런데 일부 역사가들은 강홍립 덕분에 황해도 백성이 덜 죽었단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토 히로부미의 간신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아니라 이완용, 송병준이 나라를 팔아먹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들판에 뒹구는 시체들

    궁궐 공사에 주목하고도 그 규모와 악영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엄연히 남아 있는 통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데 큰 이유가 있다. 실록에 남은 통계자료는 경험상 매우 신뢰도가 높다.

    물론 궁궐 공사에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갔는지 산출하는 것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석재·목재·철 등은 어딘가에서 구입해 조달하기도 했겠지만 나무와 돌은 주로 공유지에서 채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철도 나라에서 운영하는 철점(鐵店)에서 조달했을 것이다.

    또한 지방·중앙에서 동원된 일꾼의 인건비에, 전문 기술자들의 공임까지 계산해야 온전한 공사 총액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조사가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공사비 규모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공사가 한창이던 광해군 9년 6월 상황에 대해 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영건도감에서 3개월 동안에 쓴 것을 살펴보니, 들어간 쌀이 6830여 석이고 포목이 610여 동이었으며, 당주홍 600근의 값은 포목 60동이었고 정철(正鐵)이 10만 근에 이르렀으며, 각종의 다른 물품도 이와 비슷했다. 이를 모두 쌀과 포목으로 충당해 한 전각을 영조하는 데 들어가는 것이 적어도 1000여 동을 밑돌지 않았다.

    이 기록은 당주홍(唐朱紅), 즉 중국산 안료인 주홍 600근을 수입해 오려다가 가격이 60동이나 돼 사오기가 어렵게 되자 국내산 주홍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났던 기사에 대해 사관이 한 말이다. 주홍이란 수은과 황으로 만든 붉은빛의 고급 안료로 대궐의 문에 칠한다. 지금도 궁궐에 가면 볼 수 있듯이 문에 칠한 붉은빛 도는 안료다. 이 안료로 각 전(殿)이나 월랑(月廊)과 문, 벽 및 누각을 칠했다.

    사관은 또 이른바 영건도감의 ‘낭청이라고 하는 자들부터 아래로 장인(匠人)들에 이르기까지 그럭저럭 날짜나 보내면서 한갓 늠료(料·삯)만 허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쌀과 포목은 한계가 있는데 공역은 끝날 기약이 없어 백성들의 골수까지 다 뽑아냈으므로 자식들을 내다 팔았으며, 떠도는 자가 줄을 이었고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 왕왕 목매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관은 상황이 이럼에도 ‘저 영건도감에 있는 자들은 너무도 어려워서 계속할 수 없다는 의견을 임금에게 고하지는 않고, 매번 백성들에게 긁어모아 크고 사치스러운 궁궐 짓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고 했다.

    인경궁·경희궁을 지으면서 광해군이 백성을 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광해군은 “철거하는 민가의 주인들에게 각별히 알려 그들로 하여금 조용히 옮겨가도록 하고, 소요를 일으켜 나의 부덕을 더하지 말게 하라. 재목과 기와의 값을 일일이 분명하게 계산해 속히 제급해주라”고 전교했다. 그러나 사관은 철거에 따른 현실을 “궁궐 하나를 지음에 민가를 철거해 도로에 떠돌아다니면서 울부짖으며 의지할 곳이 없는 자가 거의 수백 호나 되었다”고 적고 있다.

    게다가 전답 4결당 1필을 거두던 결포를 1결당 1포씩 거두는 방안이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원래 4결당 1필을 거두는 것도 평상시 전세(田稅)의 25% 인상이었다. 25%가 아니라 100% 인상이 추진된 것이다.

    결국 조삼모사(朝三暮四), 1결당 1포를 두 번에 걸쳐 나눠 거두자는 의견, 혹 2결당 1포나 3결당 1포를 거두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복정(卜定)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이 제출됐다. 광해군은 이 중 가장 세금이 무거운 방안, 즉 1결당 1필을 거둬 쓰라고 전교했다. 이제 또 서별궁(西別宮)을 짓게(營建) 되자 광해군 9년 7월, 영의정 기자헌조차 반대하는 차자(箚子·약식 상소문)를 올릴 정도였다.

    궁궐 공사 ‘올인’

    임진왜란 이전 국가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전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실제 전결(田結·농사짓는 실제 땅)의 총수는 약 113만 결이었다. 선조 36년(1603) 계묘양전(癸卯量田)으로 파악된, 농사짓는 실제 전결은 29만 결로 줄었다. 전쟁 전의 약 25%였다. 광해군이 할 일은? 권력자나 토호들이 숨긴 토지를 찾아내고 과세해 자영농의 세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밖으로 드러난 토지에만 결세를 부과해 힘없는 백성들의 삶을 옥죄었다.

    앞서 영건도감이 3개월 동안 사용했다는 궁궐 공사 비용을 계산해 봤다. 쌀 6830여 석, 포목 610여 동, 정철 10만 근이 들어갔다고 했다.

    ① 쌀 6830여 석 + 포 600동[≒7000 석(1동=50필, 1필≒3~4두(4필≒1석), 50필≒12석)]≒1만3000여 석

    ② 정철 10만 근[정철 1근에 쌀 1두 7승, 쌀 1석≒8근]≒1만2000여 석

    ①+②≒2만5000여 석. 이것이 석 달 동안의 비용이니 한 달 비용≒8000여 석

    계산은 가능한 한 줄여 잡았다. 한 달에 8000여 석이 들어갔다고 보면 1년에 적게 잡아도 9만 석이었다. 정철의 경우 당시 무기 제조를 담당하던 군기시(軍器寺)에서 1년 동안 거두는 공철(貢鐵)이 1만 근이었다(‘광해군일기’ 권80, 6년 7월 25일). 즉, 나라의 1년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나 되는 철을 석 달 동안 궁궐 짓는 데 허비했다. 이 정도면 북쪽에서 흥기하는 후금에 대한 방비는 이미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것도 기억해두자.

    한편 이로부터 2년 뒤인 광해군 11년의 기록에 따르면 영건도감에서 1개월 비용을 4000 석으로 잡고 있다(‘광해군일기’ 권101, 11년 4월 22일). 그러면 광해군 9년과 11년의 기록에 따라 대략 1개월에 4000석에서 8000석, 1년에 4만여 석에서 9만 석 정도가 궁궐 공사 비용이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호조에서 거둔 전세(田稅)가 연간 8만~9만 석이었다. 그것도 광해군대가 아니라, 양전을 거쳐 형편이 나아졌던 인조대의 통계다. 나중에 대동법 개혁에 따라 전세로 되는 공납이 전세의 3배 정도 됐다. 호조의 전세+선혜청의 대동미, 이것이 일단 조선 정부의 직접세에 해당하는 전세 재정 규모였다. 공납 중에서 지방 재정에 투여되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아도 그렇다.

    그러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궁궐 공사비는 전체 국가 예산의 15~25%가 들어간 셈이다. 이 비용은 현재 대한민국 국가예산 중에서 교육비나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 앞서 지적했듯, 과세에서 권력자와 토호는 빠졌으므로 일반 백성의 부담은 훨씬 컸다. 이러니 민란, 반정이 안 일어나면 이상한 일이었다. 광해군대를 그리워하는 분들, 내가 제시한 이 통계에 대해 먼저 해명해야 한다.

    재앙과 인구 변동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경복궁. 약 700칸의 전각이 있었다.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사직단 인접한 곳의 민가를 헐고 경복궁보다 10배 큰 인경궁 공사를 시작했다. 광해군대 궁궐 공사의 규모와 악영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는 통계자료를 소홀히 다룬 데 있다.

    실록에 실린 통계자료를 하나 더 소개한다. ‘현종실록’ 권20에 실린 인구 통계다. “한성부에서 호구(戶口)의 수를 올렸는데 식년(式年)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통계는 한성부에서 총괄하고, 3년에 한 번 호구를 조사했음을 알 수 있다. 1672년(현종13) 10월 30일의 기사인데, 1670년(경술), 1671년(신해) 두 해에 걸친 조선시대 최대의 기근을 거친 뒤였다. 두 해의 기근으로 100만 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중 5부(京中 五部)는 원래 호수가 2만4800호인데, 남자는 9만8713명이고 여자는 9만3441명이다. / 경기는 호수가 10만7186호인데, 인구는 46만9331명이다. / 관동은 호수가 4만6145호인데, 인구는 21만7400명이다. / 해서는 호수가 9만6049호인데, 인구는 38만6685명이다. / 관북은 호수가 6만8493호인데, 인구는 29만614명이다. / 호서는 호수가 17만8444호인데, 인구은 65만2800명이다. / 영남은 호수가 26만5800호인데, 인구은 96만60명이다. / 호남은 호수가 23만6963호인데, 인구는 84만9944명이다. / 관서는 호수가 15만4264호인데, 인구는 68만2371명이다. / 경외 도합은 호수가 117만6917호인데, 인구는 469만5611명으로, 남자가 254만1552명이고, 여자는 215만4059명이다. / 제주는 호수가 8490호인데, 인구는 남자가 1만2557명이고, 여자가 1만7021명이다.

    끝에 사관은 “대체로 우리나라는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데 호적에 들지 않은 여자가 매우 많다. 신해년의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잇따랐다. 그런데 이것은 호적에 들어 있는 숫자만 의거해서 기록한 것이다”라고 썼다. 당시 조선 정부의 처지에서 파악한 호구에 여자가 들어갈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역(役)’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울해하거나 분노할 일이 아니다. 지금 여성이 인구 파악의 대상이 되는 것은 조세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는 “그냥 사실을 아는 사람과 역사가를 구분하는 것은 일반화”라고 했다. 일반화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법칙이다.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그런데 사실 일반화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름 붙이기라고 부를 수 있는 분류 개념. 예를 들어 전체주의, 봉건제 △일반적인 법칙이나 규칙성 △특정 지정학적 구역이나 시대에서 얻은 조건을 지칭한 일반적 진술. 예를 들면 “동아시아 민중봉기는 농민과 지식인이 결합한 인민주의적 성격을 띤다” 같은 것 △어떤 조류나 경향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진술. “1970년대보다 1980년대에는 젊은이들이 장발을 덜 선호했다” 같은 것 △ 통계적 규칙성 △ 어떤 역사적 인물에 대해 그의 동기, 행위를 감안해 붙이는 성격 부여 △ 사건에 대한 특정한 설명이나 해석 △ 가치가 들어간 평가 △ 역사 자료의 선택이나 증거 인증을 위한 절차 규칙

    물론 이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 통계적 규칙성은 다른 모든 분야의 ‘일반화’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범주다. 통계적 일반화는 추론 과정을 통해 개별 사실에서 연역되는 설명이자 진술이다.

    조선 19세기 위기론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역사비평’ 101호. 수량경제사는 역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데 기여한 점도 있지만, 통계에 기대어 시대상을 잘못 그려낸 점도 적지 않았다. 조선 ‘19세기 위기론’이 그것인데, 소장학자들이 수량경제사의 오류를 정리한 논문을 모아놓았다.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는 ‘조선에는 17세기 이후 소농(小農) 사회가 성립하였고, 근대를 예비하는 관료제, 토지 사유, 시장경제 등의 요소가 농축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소농 사회는 18세기의 안정을 거쳐, 19세기에는 인구의 감소, 시장 수의 감소, 토지 생산성의 하락, 미곡의 국가적 재분배로서의 환곡제 해체, 사회적 안전판인 동네(里) 공동체와 친족 공동체의 분열과 동요로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한국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특질’, 한국개발연구원, 2000,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이영훈 교수는 19세기 위기의 첫 번째 증거로 인구의 감소를 말하고 있다. ‘맬서스의 위기’, 즉 생활수준의 하락에 따른 인구의 감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맬서스의 위기는 여러 시대와 문명에서 널리 보이는 현상이다. 인구 감소가 유독 조선사회에서만 재앙적 충격을 안겨 체제가 자멸할 정도였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더 적극적인 근거로는 18~19세기 조선의 인구가 연평균 0.62%의 속도로 증가했으며, 더구나 0.35% 증가한 18세기에 비해 19세기에는 0.83%나 증가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동안 인구 증가-감소를 연구할 때 활용한 족보가 사료로서 더 검토돼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족보는 생활수준이 높았던 양반들의 것이 많고, 20세 이상까지 살아남은 남성 중심의 기록이다.

    ‘19세기 위기론’의 핵심 근거 중 하나는 19세기 들어 토지 생산성이 4분의 1까지 급격히 하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성의 하락 증거도, 두락당 총생산액이 아니라 두락당 지대 수취량을 근거로 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수확고를 분석한 최근 정진영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후반의 생산성은 18세기와 유사하다. 185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말까지 수확고는 1857년 50두를 시작으로 1880년대 전반에 저점을 찍은 뒤 1920년대까지 30두를 전후로 등락을 거듭하며 1921년까지 이어진다.

    지대량의 추이 역시 19세기 후반에도 지대량의 변화가 거의 없거나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인구가 일부 감소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두락당 생산량이 4분의 1~3분의 1 수준으로 하락했다면 길게는 수십 년간 대부분의 사람이 기아선상에 한참 못 미치는 조건 속에서 꾸준히 납세도 하면서 생존을 유지해나간 셈이 된다. 가능했을까?

    19세기 위기론을 주장하는 이 교수는 대일(對日) 무역의 쇠퇴를 중요하게 거론했지만, 대청(對淸) 무역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규모, 무시할 대상이 아니었다. 유승주, 이철성의 공동연구를 보자.

    대청 홍삼무역이 공인된 것은 1797년이었다. 처음에는 사신과 역관들이 가져갈 수 있는 수량이 120근이었다. 당시 홍삼 1근의 가격은 은(銀) 100냥, 동전 300~400냥에 달했다. 법정 쌀 가격(1석 5냥)으로 환산하면 60~80석에 해당하는 고가품이었다. 청에 가서 팔 때는 동전 1100~2300냥으로 국내의 3.5~7.5배에 달했다.

    처음에는 사신 행차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는 목적에서 시작됐는데, 돈이 되다보니 점차 재정을 보용할 목적으로 규모가 커졌다. 1811년에 200근을 시작으로, 1847년에는 4만 근으로 급증했다. 1881년에는 2만5000근으로 내려갔지만, 포삼 무역으로 거두는 세입은 4만 근일 때의 20만 냥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히 국가적 수입이라고 할 수 있다.

    홍삼 판매 농가 역시 엄청난 이윤을 남기고 있었다. 1910년 무렵 중국 시장에서 판매되는 각국산 최상급 인삼 1근의 가격을 보면 만주산 20원, 미국산 50원, 일본산 18원인데 비해 개성산은 200원에 이르렀다. 정조 연간의 가격을 대입해보면 홍삼 4만 근 수출액은 4400만~9200만 냥에 달한다. 1807년 당시 서울로 올라오는 동전이 135만 냥이었고 이는 당시 총 통화량의 7분의 1에 달하는 규모였다. 법정 쌀 가격에 따라 환산하면 880만~1850만 석에 해당한다. 19세기 조선 왕조 재정에서 국가적 물류 규모가 500만 석 정도였으니, 홍삼 수출액은 천문학적 규모였던 것이다.

    또 다른 역동의 시대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조선시대 청나라에 인삼을 팔아 남긴 이윤은 국가 재정의 1.6~3.6배에 달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삼은 효자 무역품이다.

    ‘19세기 위기론’은 통계적 일반화 자체, 즉 근거자료와 논리에 맹점이 많다. 더구나 그것은 “식민지는 근대 시장 체제가 구축되는 시기였다”는 인식에 기초해 제시된 역사상이다. 그 결과, 한국 근대는 온전히 일본에 의해 이식된 것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일제 식민주의 정체성론과 차이가 없다. 이는 서구, 근대중심주의의 시각으로 비서구와 전근대를 모두 타자화하는 논리인 셈이다.

    ‘위기론’과는 달리, 19세기는 새로운 역동성을 창출하던 시대였다. 농민들은 인구 증가와 생산성 하락 등 위기 상황에서 다량의 노동력을 투입해 버텨나갔으며 경작 작물을 다각화해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또 지대율 감하도 생산성의 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배층이 체제의 위기를 외면하는 현실 속에서 ‘향촌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혹은 사회적 관계의 변화 속에서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던 노력의 소산으로 보인다.

    1862년 삼남 지역을 휩쓴 민란이나 1894년 동학농민전쟁도 체제 위기, 생존 위기에 따른 즉자적 저항이 아니었다. 조선 사회의 체제와 지배 이념 속에서 누적된 경험과 다양한 분야의 변화 속에서 내면화한 나름의 정당성, 즉 인정(仁政)과 민본(民本) 이념을 기반으로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이었다(배항섭, ‘19세기를 바라보는 시각’, 역사비평 권101, 2012).

    정조 사후, 19세기엔 정치적으로 사림정치 질서가 무너지고 외척 세도정치가 진행됐다. 세도정치와 삼정(三政) 문란, 아마 많이 들어본 ‘위기’ ‘몰락’의 키워드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서울과 지방에서는 전통적 질서의 와해와 함께 다양한 학풍과 종교 운동이 나타났다(유봉학, ‘실학과 진경문화’, 신구문화사, 2012). 서울 학계에서는 북학과 서학이 유행하고 천주교가 세력을 확대했다.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 등은 그 우뚝한 인물이다. 동학(東學)은 지방 지식인들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창조적 발상, 바로 그것이었다. 지혜로운 자, 역사의 새로운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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