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이 불법인지 알고 있으며, 발각되면 패가망신할 것이 명백함에도 절제하지 못하고 음란행위를 한 김 전 지검장의 행위는 틀림없이 성도착, 그중에서도 노출증에 해당한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원래 성도착(paraphilia)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para’(~에서 벗어난)와 ‘philia’(사랑, 우정)가 합쳐진 단어로서 1920년대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스테켈이 처음 만들어 쓴 것으로 알려진다. 성도착은 일반적으로 특이하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성적 행위를 기술할 때 사용된다. 특히 비정상적 상황이나 물체, 행동에 성적으로 집착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하는데, 그 정의는 시대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적 통념에 의해 조금씩 바뀌어왔다.
성도착 중 노출증에 해당
성도착의 종류를 세분화하면, 대략 550가지로 구분이 가능하다고 알려진다. 1952년 미국정신의학회가 처음으로 발표한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Ⅰ에서는 성도착을 성적 일탈(sexual deviation)로 명시하면서 하위 범주로 동성애, 복장도착증, 소아기호증, 물품음란증, 성적가학증 등이 있다고 정한 바 있다. 이후 DSM은 1968년 두 번째, 80년 세 번째, 94년 네 번째 개정작업이 진행됐고, 2013년엔 DSM-Ⅴ까지 나왔다.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의 최근판인 DSM-Ⅴ에서는 성도착을 관음증, 노출증, 마찰음란증, 성적피학증, 성적가학증, 소아성애증, 물품음란증, 복장도착증, 그리고 달리 분류되지 않는 성도착 등으로 구분한다. 예컨대 인격체가 아닌 특정 물품과 관련한 성적 집착, 자신이나 상대방이 고통이나 굴욕을 느끼게 하는 성행위, 소아나 동의하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성행위 등도 성도착의 대표적 유형인데, 적어도 6개월 이상 이런 종류의 성적 흥분을 강하게 일으키는 공상, 성적 충동, 성적 행동이 반복되면서 임상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일으키거나 사회적, 직업적 또는 기타 중요한 영역에서 장애를 일으키는 경우 성도착 장애(Paraphilic Disorders)라고 진단한다.
흥미로운 점은 DSM-Ⅱ까지 성도착에 포함됐던 동성애가 DSM-Ⅴ에서는 더 이상 성도착의 일종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회문화적 시각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정신의학적으로는 성도착에 해당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모두 법률적 제재를 받는 건 아니다. 특히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고통을 추구하는 성적피학증이나 스타킹과 같은 여성의 복장을 남성이 착용하는 등의 복장도착증, 하이힐 등 여성이 사용하는 물품에 집착을 보이는 물품음란증 등은 법적 처벌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성도착 유형이다.
또한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는 도착적 행위라 할지라도 형벌의 경중이 다 똑같지 않은데, 피해자의 신체를 접촉하는 도착적 행위와 그렇지 않은 도착적 행위는 성범죄 처벌 수위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보니 비접촉 성범죄, 즉 피해자의 신체를 접촉하지 않는 성적 일탈행위에 대해선 범죄라고 인식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최근 단속이 집중되는 비접촉 성범죄 중 대표적인 것이 인터넷을 통해 아동음란물을 제작·배포하는 행위다.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의 개정으로 2012년부터 아동음란물 유포자를 적발해 수강명령 등 처벌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이러한 행동에 대해선 개인의 성적 취향(소아성애)일 뿐 범죄라는 인식이 희박하다.
관음증의 본질
불법성에 대한 인식은 희박하지만 형사처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또 다른 성도착 행위는 관음증이다. ‘훔쳐보기(peeping)’라고 일컬어지는 이 행위는 피해자를 성적인 방식으로 몰래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 주로 알몸이거나 옷을 벗은 사람, 때론 성관계 중인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관음증에 해당하는 행위인데, 최근엔 스마트폰을 이용한 도촬(盜撮)이 관음증적 욕구를 분출하는 경로로 활용된다. 지하철이나 계단 혹은 화장실 등에서 여성의 치마 속이나 웃옷 안을 훔쳐보고 이를 촬영해 유포하는 등 단순한 관음증에서 출발한 행위가 최근엔 첨단 정보기술(IT)과 접목돼 우리 사회에 만연한다. 관음증의 본질은 상대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비밀스럽게 지켜본다는 사실 자체로 희열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주로 공공장소에서 단속 대상 행동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범법행위임엔 틀림없으나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던 또 다른 비접촉 성범죄는 김 전 지검장의 행위와 관련된 노출증이다. 속칭 ‘바바리맨’이라고 불리는 노출증 환자들은 피해자에게 자기 몸의 일부, 그중에서도 성기를 노출하고 외설적 표현을 하는 행위로부터 즐거움을 얻는다.
정신의학적 관점에선 자신의 성기를 낯선 사람에게 내보이고 싶다는 반복적이고도 극심하며 자극적인 성적 환상과 성적 충동을 느끼고, 경우에 따라선 행동으로도 옮기는 문제가 6개월 이상 지속될 때 노출증 진단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