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호

동양 이미지에 감성 액션 결합

최민식 출연 화제작 ‘루시’

  • 노광우 │영화 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입력2014-09-19 1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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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 이미지에 감성 액션 결합
    뤽 베송은 영화 ‘마지막 전투’(1983)를 연출하면서 영화계에 등장했다. 그 후 ‘서브웨이’(1985)에 이어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친숙한 ‘그랑 블루’(1988)를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 ‘디바’(1981), ‘베티 블루’(1986)를 만든 장 자크 베넥스와 더불어 ‘누벨 이마주(Nouvelle Image) 세대’로 불렸다.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영상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얻었다. 1980년대 미국에선 뮤직비디오가 등장했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유명세를 탔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 뤽 베송은 스크린에 새로운 영상 감각을 펼쳐 보인 셈이다.

    우리나라 관객은 뤽 베송의 영화 중 특히 ‘니키타’(1990)에 주목했다. 니키타라는 어린 여성을 주인공으로 둔 액션 스파이 스릴러물인 이 영화는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니나’(존 배드햄, 1993)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됐고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만들어졌다. 당시 여성이 액션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시아에서 양쯔충(楊紫瓊)이 주연을 맡은 홍콩의 ‘예스 마담’시리즈가 인기를 끌던 정도였다. 서양의 여성 총격 액션물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이후 뤽 베송은 ‘레옹’(1994), ‘제5원소’(1997), ‘메신저’(1999)처럼 할리우드와는 다른 감성을 지닌 대중영화를 연달아 내놓는다. 특히 ‘레옹’은 1980년대와 1990년대 할리우드의 실베스터 스탤런, 아널드 슈워제네거, 브루스 윌리스 같은 근육질 남성이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액션 영화와 달리,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내는 새로운 액션영화였다.

    ‘니키타’이래 뤽 베송의 액션영화들은 주로 남성이 아닌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그래서 ‘감성적 액션’을 지향한다. 여성이 극한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영화를 전개한다. ‘레옹’의 경우 레옹(장 르노)과 마틸다(나탈리 포트만)의 부녀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한 관계가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한다.

    홍콩 무술과 접목



    뤽 베송은 2000년대 들어 영화 연출보다 영화 제작에 치중한다.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홍콩의 쿵푸 액션을 도입해 동작의 화려함과 속도를 강조한다. ‘택시’ 시리즈, ‘트랜스포터’ 시리즈, 그리고 이연걸이 주연을 맡은 ‘키스 오브 드래곤’(2001)이 대표적이다. 이는 미국의 ‘매트릭스’ 시리즈가 홍콩 무술영화의 와이어 액션과 ‘영웅본색’ 유의 총격 액션을 도입한 것에 비견될 만하다. ‘니키타’의 어둠과 적막에서 ‘택시’의 스릴과 속도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루시’는 뤽 베송이 영화 제작에 전념하다 다시 연출을 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전체적인 뼈대에선 ‘니키타’의 연장선에 있다. 거기에 최민식이라는 걸출한 아시아 배우를 끌어들인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은 동양 영화뿐 아니라 서양 영화에도 영향을 끼친다. 최근 서양 영화들은 아시아적인 특성을 현저하게 반영한다. 즉 빈번하게 아시아 지역을 영화의 배경 공간으로 삼고, 아시아 배우에게 중요 역할을 맡기며, 아시아 연출가나 기술자를 고용한다. ‘루시’에서 한국 배우 최민식이 악역을 맡은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 뤽 베송의 감성적 터치와 최민식의 캐릭터가 잘 맞아떨어지는 면도 있다. 또한 아시아 지역인 타이완의 타이베이는 이 영화의 주요 공간 배경으로 등장한다.

    ‘루시’는 뇌세포 연구 전문가인 노먼 박사(모건 프리먼)가 파리의 한 대학에서 생물과 진화에 관해 특강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영화 중반까지 노먼 박사의 강연과 타이베이에서 벌어진 사건이 교차 편집된다. 이러한 교차편집은 같은 시간대 지구 반대편에서 각기 벌어지는 두 사건의 논리적 연결성을 암시한다. 동시에 각 장면에 나오는 동물들의 행동이 주요 인물들의 행동을 설명한다.

    노먼 박사가 강연하는 시간에 타이베이에서 학교를 다니는 루시 밀러(스칼렛 조핸슨)는 한 호텔에 들어간다. 지난밤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의 부탁으로 이 호텔의 VIP룸에 투숙한 미스터 장(최민식)에게 서류가방을 전달해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

    그러나 루시는 호텔 프런트에서 미스터 장의 부하에게 납치된다. 이후 그녀는 미스터 장의 잔인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두려움에 떤다. 미스터 장은 가방 안에 든 물건이 자기가 원하던 파란색 약물임을 확인한다. 이 약물은 중독성 마약이다. 미스터 장은 루시와 그 이전에 잡혀온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의 배에 파란색 약물 비닐 팩을 넣어 운반책으로 활용하려 한다.

    루시는 구타를 당하던 중 배 속에 든 약물 비닐이 터져서 약물에 중독된다. 그런데 약물이 온몸에 퍼져갈수록 전에 없던 능력이 생겨났다. 병원 응급실에서 터진 약물을 제거하던 중 루시는 의사의 설명을 통해 이 물질이 새로 개발된 CPH4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물질은 소량 복용 시 즉각 환각에 빠뜨린다. 그러나 다량 복용 시 초능력을 갖게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즉 뇌와 신체의 기능이 활성화해 정신적·육체적 능력이 극대화하는 것이다. 주변 물체를 통제하는 염력,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텔레파시 능력도 얻게 된다.

    루시는 모건 박사와 프랑스 경찰인 델리오 경사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먼저 떠난 세 명의 마약운반책을 붙잡는다. 미스터 장은 프랑스로 따라와 약물을 탈취하려 한다. 미스터 장의 부하들과 경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다. 그동안 루시는 모건 박사 일행이 보는 앞에서 약물을 모두 흡수한 뒤 뇌를 100% 활용하게 된다. 그녀는 우주의 비밀을 캐냈고, 실험실 컴퓨터에 자기 스스로를 접속했다. 이어 모건 박사에게 중요 자료를 담은 USB를 건네고 사라진다.

    미스터 장이 죽은 후, 모건 박사와 델리오 경사는 루시의 행방을 궁금해한다. 이때 델리오의 휴대전화에 “나는 모든 곳에 있다”라는 루시의 문자가 뜬다.

    영화는 모건 박사의 말을 빌려 생명의 비밀, 유전을 통한 지식의 전수에 대해 논한다. 또 철학자 하이데거처럼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언급한다. 이어 인간이 권력과 이익에 집착해왔음을 한탄한다. 이와 관련해 모건 박사와 루시는 지적인 미덕을 지닌 인물로, 미스터 장은 탐욕에 사로잡힌 잔인한 인물로 묘사된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는 루시의 문자는 오시이 마모루의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의 마지막 대사와 유사하다. ‘공각기동대’에서 구사나기 모토코 소좌는 사이버 세계와 일체화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비슷한 말을 내뱉는다. ‘루시’와 ‘공각기동대’는 디지털 세계로 변해가는 현실 세계에서의 실존(實存)을 고민한다. 다만 ‘루시’에서 여성은 디지털 시대의 약자에서 절대자로 변화한다. 이는 여성성을 문제의 해결자로 제시해온 뤽 베송의 궤적과 맞닿는다.

    최민식과 ‘공각기동대’

    사실 뤽 베송이 ‘공각기동대’ 장면을 따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제5원소’(1997)에서 생체재생술에 의해 살아난 외계인 리루(밀라 요보비치)는 실험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린다. 이 장면도 ‘공각기동대’에서 모토코가 마천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차용한 것이었다.

    동양 이미지에 감성 액션 결합
    노광우

    1969년 서울 출생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


    최민식은 ‘레옹’과 ‘제5원소’에 출연한 게리 올드만과 비교되곤 했다. 미스터 장이 호텔 객실에서 시체를 절단하다가 서서히 걸어 나오는 모습, 부하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모습은 게리 올드만이 ‘레옹’에서 보여준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미스터 장은 게리 올드만만큼 복합적 성격을 담고 있진 않다. 미스터 장은 독특한 내면의 성격을 보여주기보단 그저 짧은 시간 동안 카리스마적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아마 뤽 베송은 최민식의 연기력보다는 그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형이상학적 실존 문제와 아시아적 특성들을 함께 버무리기엔 90분이라는 상영시간은 너무 짧았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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