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오네긴<br>알렉산드르 푸슈킨 지음,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젊을 때는 화려한 겉모습과 대단한 조건에 시선을 빼앗기던 젊은이들이 나이가 들면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삶을 멋들어지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더 깊고 더 오래가는 가치에 눈을 뜨는 것이다. 좀 더 성숙해진 우리 자신의 눈에 비친 상대방의 아름다움은 비로소 제 빛을 발하게 된다. 그 사람의 외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본래 지닌 미덕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야말로 성숙한 관계의 시작이 아닐까.
푸슈킨의 소설로 시작돼 오페라나 연극을 통해 전 세계에 불멸의 인물이 된 예브게니 오네긴. 그가 바로 이 ‘뒤늦은 눈뜸’의 주인공이다. 오네긴은 젊은 시절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하지만 그 우울증은 좌절된 꿈이나 견딜 수 없는 고난 때문이 아니라 삶에 대한 권태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얻었다. 재산도, 여인도, 명성도. 오네긴은 그 무엇에서도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화려한 외모와 엄청난 재산, 천부적인 재능까지 갖춘 매력 만점의 남자였다. 무엇을 더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오네긴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여인의 구애를 받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할 만한 여자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타찌야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오네긴은 갑자기 사망한 친척의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시골마을로 내려온다. 그는 이제 소란스러운 사교계에도 시큰둥해지고, 여인들의 미소에도 괘념치 않으며, 유혹하는 일에도 넌더리가 났고, 친구들과의 우정까지도 지겨워한다. 결투나 총, 칼 등 당시 러시아 남성들을 사로잡은 자극적이고 열정적이며 치기어린 젊음의 상징들에도, 오네긴은 흥미를 잃어버린다.
순수와 열정의 화신, 타찌야나
도시 청년이던 오네긴이 시골에 내려오자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인다. 사람들도 바뀌었고, 풍경도 바뀌었고, 풍습도 바뀌니, 그는 잠시나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내 그마저 싫증을 내고,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열정적인 문학청년 렌스키다. 오네긴은 렌스키가 결혼 상대로 생각하던 올가와 그녀의 언니 타찌야나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고, 순진한 처녀 타찌야나는 오네긴에게 반하게 된다.
남자들에게 적당히 ‘밀당’을 할 줄 아는 새침데기 올가와 달리, 타찌야나는 연애의 비법 따위는 전혀 모른다. 그녀는 인생에서 처음 다가오는 사랑의 불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철없는 염세주의자 오네긴에게 푹 빠져버린 타찌야나는 아무 꾸밈없이 자신의 감정을 남김없이 고백해버린다.
당신은 사람을 싫어하신다더군요. 이런 촌구석에서는 모든 게 지루할 테지요.
그러나 저희는… 저희는 내놓을 게 없어요.
순진하게 당신을 반기는 일 외에는.
(…) 당신은 왜 이곳에 오셨나요?
안 오셨다면, 이 잊혀진 쓸쓸한 시골에서
저는 영원히 당신을 모른 채,
이런 끔찍한 고통도 모른 채 살았을 텐데요.
어수룩한 마음의 동요도
시간이 가면 가라앉아 (미래는 모르는 법이죠?)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아
정숙한 아내가 되고
후덕한 어머니가 되었을 텐데요.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타찌야나는 스스로의 전 생애를 던져 사랑의 불길에 뛰어든다. 그는 오네긴을 유혹하기는커녕, 오네긴에게 먼저 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써서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고백해버린다. 편지는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영혼의 해맑은 순수를 눈부시게 증언한다. 하지만 오네긴은 그녀의 순정을 받아주지 않는다. 타찌야나는 올가와 달리 어여쁜 얼굴도, 장밋빛 뺨도, 관능적인 미소도 지니지 않았다.
그대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빛에 눈을 뜨는 순간
푸슈킨은 타찌야나를 이렇게 묘사한다. “촌스럽고 우울하고 과묵하고 숲속의 사슴처럼 소심하여 제 집에 살면서도 손님처럼 어색하게 굴었다”고. 부모님께 응석 한번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또래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아본 적도 없으며, 그저 독서와 몽상에만 흠뻑 빠진 문학소녀 타찌야나. 남자들은 모두 올가만을 쳐다볼 뿐, 타찌야나의 매력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네긴도 그 똑같은 남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목소리로, 그녀에게 거부의 뜻을 분명히 밝힌다. 자신은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는다고. 당신처럼 정숙하고 순진한 처녀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행복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소.
내 영혼은 행복을 모르오.
당신의 미덕들은 내게 부질없소.
나는 그걸 받을 자격이 없소.
인생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권태와 우울에 빠진 오네긴은, 타찌야나의 편지를 부담스러워한다. 자신은 그토록 순수한 열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어디에도 얽매이기 싫어한다. 그는 자유를 꿈꾸지만, 사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기피한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해본 적도 없으며, 간절히 원하는 그 무언가를 향해 최선을 다한 적도 없다. 그리하여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하는 타찌야나의 순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골생활의 무료함에 지친 오네긴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유일한 친구 렌스키의 연인 올가를 꾀어내어 춤을 추고, 친구의 배신에 분노한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오네긴은 결투에 자신을 내맡긴다. 결투를 거절하는 것이 결투에 응해 이기는 것보다 더욱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을, 오네긴은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제도나 인습에 관심이 없는 척하지만, ‘결투라는 풍습’을 통해 남성성을 인정받으려는 그 시대의 관습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예정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는 듯이, 오네긴은 둘도 없는 벗 렌스키를 총으로 쏘고 만다.
그럼 누굴 사랑해야 하나? 누굴 믿어야 하나?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행동, 모든 말을 친절하게도 우리 눈높이에 맞춰줄 사람은?
우리를 헐뜯지 않을 사람은?
(…)우리의 결점조차도 눈감아줄 사람은?
절대로 우리를 지겹게 하지 않을 사람은?
친구의 주검을 보고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오네긴은 행방을 감춘다. 결투에서 승리했지만, 그 승리가 얼마나 치욕스러운지를 깨달은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타찌야나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로 다시 돌아온다. 오네긴은 어느새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타찌야나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가 너무도 우아하고, 기품 있고, 주목받는 여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녀가 공작부인이 됐기 때문이 아니다. 파티에 나온 모든 여자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그녀는, 미모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갈고 닦아온 지성과 지혜로 홀연히 빛났다.
그는 미친 듯이 타찌야나를 향해 구애를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오네긴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한다.
“어째서 지금은 저를 쫓아다니시나요?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에 들게 되었나요? 지금은 상류 사회에 드나드는 몸이 되었고 부와 지위를 갖추었고 제 남편이 전장에서 불구가 되어 저희 부부가 황실의 총애를 받으니 그러시는 것 아닌가요? 저의 불명예가 만인에게 알려진다면 당신은 사교계에서 유부녀를 정복했다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 아닌가요?”
뒤늦게 자신이 진정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를 깨달은 오네긴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천하를 방랑하며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를 고민하고 나서야 뒤늦게 되찾은 사랑은 이미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다. 아니, 그녀는 그대로이지만 그녀의 상황이 그대로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우아한 여인으로 거듭났다. 오네긴은 자신의 뼈아픈 실수를 깨닫지만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정열을 바쳐 사랑을 향해 돌진하지만, 상처 입은 그녀의 영혼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얻었기에, 그 어떤 것도 진정으로 감사히 여기지 않은 것이다. 방탕하고 속물적이며 허영으로 가득 찬 그의 모든 결점까지 다 이해해주던 타찌야나의 사랑을 깨닫게 됐을 때, 이미 마지막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는 우울을 핑계로, 권태를 핑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진실한 사랑의 순수한 빛을 외면해버렸던 것이다. 오네긴의 죄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에게 다가온 행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죄, 자신에게 저절로 굴러들어온 인생의 축복에 감사하지 못한 죄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