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대우그룹 해체는 당시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 기업의 파산으로 기록됐다.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 세계로 나아간 이 다국적기업은 1997년 동아시아를 타격한 금융위기 와중에 몰락했다.
“Catch-Up 실행가와 해석가”
9월 2일 서울 중구 한국금융연구원에서 만난 신 교수는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라는 낱말을 사용하면서 대우의 몰락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를 설명했다. “야사와 정사가 뒤바뀌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내 견해가 정사였는데 지금은 야사다. 성장동력을 되찾으려면 정사와 야사가 원래 위치로 되돌아가야 한다.”
‘김우중과의 대화’는 발간되자마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김 전 회장이 15년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서다. 언론은 “무리한 확장 경영으로 부채가 늘어나 시장에 의해 무너졌다”와 “다른 처방을 제시하면서 관료에게 맞서다 본보기로 해체됐다”는 주장의 대립에 주목했다. 신 교수는 “책의 초점이 조명받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경제의 방향과 관련한 중요한 논쟁을 담았는데 그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는 게 아쉽다는 뜻이다.
지난 일을 회고할 때 잘한 일은 허용되는 범위에서 돋보이게 말하고, 잘못한 일은 말하지 않거나 합리화하는 게 사람 심리다. 김 전 회장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화와 자료를 취사선택해 책으로 엮은 사람 또한 정보를 처리해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신이나 믿음을 투영하게 마련이다.
경제학자로서 저자의 성향을 파악하면 ‘김우중과의 대화’의 행간을 더욱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신 교수는 주류 경제학(신고전학파)에서 비켜선 학자다. ‘보이지 않는 손’(자유시장)보다 산업정책, 산업금융 같은 국가와 민간의 협력을 강조한다.
신 교수는 한국 경제가 선진국을 ‘캐치업(Catch-Up·따라잡기)’하는 과정을 20세기 후반의 일본, 19세기 후반의 유럽과 비교한 연구로 학자로서의 이름을 알렸다. 한국의 반도체·철강산업을 틀로 삼아 제도와 기술이 캐치업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하기도 했다.
그는 ‘김우중과의 대화’를 ‘캐치업의 실행가(Practitioner of catch-up)’와 ‘캐치업의 해석가(Interpreter of catch-up)’의 만남으로 규정했다. 그에게 김 전 회장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창업 1세대의 한 명이면서 “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지만, 많은 사람에게 경제적 피해를 안긴 중범죄인이기도 하다. 2006년 법원은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김 전 회장에게 징역 8년6개월과 추징금 17조9253억 원을 선고했다. 그룹 해체 후 대우 계열사에 공적자금으로 투입한 국민 세금이 30조 원에 달한다. ‘김우중과의 대화’에 담긴 시각이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비주류 경제학자’의 김우중論
▼ 세계 경제학계에서 비주류다.
“비주류? 맞다. 비주류라 하지 말고 혁신적 경제학자라고 해달라. 비주류가 혁신적일 수 있다.”
신 교수는 학자로서의 성향이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비슷하다. 2002년 장 교수와 함께 ‘Restructuring Korea Inc.’(2002,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 적도 있다.
“‘Restructuring Korea Inc.’에서 가장 잘못된 구조조정 사례로 꼽은 것이 대우차였다. 한국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완수했다는 주장이 지금껏 정사의 위치에 있다. 나는 1998년부터 일관되게 IMF 프로그램을 비판해왔다. 한국의 저성장과 양극화는 모두 당시 잘못된 구조조정의 산물이다. 우리는 ‘Restructu
ring Korea Inc.’를 쓰면서 저성장 시대가 오리라 예측했다. 경제학자로서 예측이 들어맞은 데 자부심을 느끼지만, 한국 경제가 나빠진 것이 안타깝다. 더 늦기 전에 경제 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신 교수(80학번)는 장 교수(82학번)의 서울대 경제학과 2년 선배다. 신 교수가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해 두 사람은 3, 4학년을 함께 다녔다. 신 교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매일경제’에 입사해 14년 동안 기자, 논설위원으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