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오른쪽)과 김정은.
박 사장은 지난해 8월 이후 언론인을 만난 적이 없다. ‘신동아’가 9월 12일 그를 인터뷰했다.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북한 고위인사들의 생각에 초점을 맞춰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쟁이건 협상이건 적 혹은 상대의 생각을 알면 승리의 수단을 마련하기 쉽다. 비즈니스 이해 탓에 북한에 편향된 듯한 발언 내용도 없지 않았으나 가감 없이 소개한다. 박 사장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를 ‘원수’라고 표현했다. 박 사장의 코멘트에서는 이 표현을 그대로 살렸다. 박 사장은 평양에서 자동차 조립공장과 호텔을 운영하다 지난해 북한 당국에 지분 일체를 넘겼다.
“북한 붕괴? 그럴 일 없다”
▼ 북한 정세를 어떻게 보나.
“어제(9월 11일) 저녁 방송을 보니 미국 중앙정보국(CIA) 출신 전문가가 나와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더라. 김정일 위원장은 20년을 교육받고 책임자가 됐는데 김정은 제1비서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지도자가 된 터라 역할도 제대로 못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미숙하다는 것인데, 틀린 얘기라고 생각한다.
김정은 원수는 외국에서 공부했다. ‘꽉 막힌 곳에 머무르지 말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 세상을 배운 후 정치를 하라’는 김정일 장군의 뜻이었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처음 정권을 잡았을 때보다 김정은 원수가 집권한 후의 변화가 10배 넘게 크다. 시도 때도 없이 군부를 갈아치우는 것을 보라. 하루아침에 별 뗐다 붙였다 하는 것을 누가 하겠나. 본인이 하는 거지. 마음에 들 때까지 갈아치우는 것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 김정은 권력이 공고해 붕괴하지 않을 거라는 뜻인가.
“그렇다.”
▼ 장성택 숙청이 김정은 권력을 공고하게 하는 데 득이 된 것인가.
“장성택이 그렇게 죽은 다음 김정은 원수의 처지가 어땠겠나. 이미지 측면을 볼 때 득 본 게 없다. 처음으로 손에 피를 묻힌 것이다. 장성택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질타하는 분위기다. 내부적으로 기강을 확립해 이끌어나갈 기회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법론이 옳았는지 의구심이 든다.”
▼ 숙청 전 장성택의 위상은.
“장성택의 기세가 대단했다. 지난해 2·16 행사(김정일 생일) 만찬 때 일화다. 장성택이 행사장에서 술에 취해 머리를 탁자에 의지하는 모습도 보였다. 김경희 비서(김정은의 고모)도 현장에 있었는데, 장성택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앉아 측근들과 식사했다. 김영남(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고위인사가 모두 모인 자리인데 어떻게 저러나 싶더라. ‘야, 저 양반이 세기는 세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장성택은 못 마시는 나한테도 술을 강권했다. 술잔을 입에 대고 내려놓았더니 끝까지 다 마시라더라. 그런 성격이 세력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종국엔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었지만. 장성택은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다.”
▼ 김경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였나.
“지난해 7월 행사장에서 장성택과 함께 봤을 때도 건강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10월 10일 노동당 창건기념일 때 마지막으로 봤다. 한국에 그의 와병설이 돌던데 비교적 건강했다. 아무 문제없이 걸어 다녔다. 아직도 건강할 거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죽은 뒤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 장성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해 7월이겠다.
“장성택이 내가 김정은 원수와 악수하고 사진 찍고 난 후 다가와 축하한다고 얘기했다. 나는 김정은 원수가 북한의 리더가 되기 전부터 소통했다.”
▼ 장성택은 실제로 중국과 가까웠나.
“그랬던 것 같다. 처신을 잘못해 스스로 무덤을 판 것 같다. 중국과 가깝다는 것을 과시해 죽음을 재촉한 측면이 있다. 중국도 장성택을 부추기면서 나중에 대안이 될 듯한 느낌을 줬다. 중국의 그런 태도 탓에 피해를 보지 않았나 싶다. 장성택은 기본적으로 개방 성향이었다. 개방이 돼야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장성택은 일을 할 때 남쪽도 염두에 두고 진행했다. 장성택에게 ‘황금평에 저도 좀 끼워주십시오’ 했더니 옆에 앉은 김양건 부장에게 ‘박 사장도 넣어주라’고 얘기한 일화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