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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받은 이들 재도전 돕는 게 내 사명”

‘너클볼 인생’ 허민 고양 원더스 구단주

  •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dhp1225@naver.com

“상처 받은 이들 재도전 돕는 게 내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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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美독립리그 투수
  • ● “KBO가 원더스 존중 안 해 해체”
  • ● “내년부터 100억씩 투자하려 했는데…”
  • ● “50세까지 메이저리그 도전할 것”
“상처 받은 이들 재도전 돕는 게 내 사명”
“너클볼은 스테로이드 먹은 나비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전 보스턴 레드삭스 포수 제이슨 베리택이 한 말이다. 정확한 표현이다. 너클볼은 마구다. 제대로 제구되면 어느 타자도 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너클볼은 스테로이드보다 더 강력하다. 하지만 나비처럼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너클볼은 예측불허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너클볼 투수들은 공을 던질 때마다 신에게 기도한다. 신만이 낙구 지점을 알기 때문이다.

야구계와 IT 업계가 원더홀딩스(위메프 지주회사) 대표이사 겸 고양 원더스 구단주 허민(38)을 가리켜 ‘너클볼 인생’이라 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늘 예측불허의 승부수를 띄웠고, 그 승부수가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9월 11일 야구계는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국내 최초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가 KBO(한국야구위원회)와의 재계약을 포기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원더스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3년간 구단을 이끌면서 애초 창단을 제의했던 KBO와 구단 운영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반복해 확인했다”며 “아쉽지만 한국 최초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는 2014년 시즌을 끝으로 도전을 멈추고자 한다”고 밝혔다.

2011년 9월 15일 원더스는 KBO와 3년 계약을 맺었다. 2012시즌부터 2014시즌까지 프로 2군리그 팀들과 경기를 치렀고, 프로에서 방출됐거나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선수를 영입해 육성해왔다. 그런데 KBO의 잦은 말 바꾸기와 기존 구단들의 비협조로 창단 때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원더스 핵심 관계자는 “애초 KBO가 우리 측에 독립구단 창단을 제안했을 땐 2012년부터 바로 정식 2군리그에 편입시켜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막상 독립구단을 창단하자 ‘2013년부터 2군리그에 편입시켜주겠다’고 말을 바꿨다”며 “이마저 다시 말을 바꿔 올 시즌엔 아예 ‘2군리그 편입이 어려울 것 같다’고 통보해왔다”고 털어놨다.

기존 구단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독립구단이 창단했을 때 기존 구단들은 “해마다 수백 명의 아마추어 선수가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채 야구 실업자가 되고, 프로에서도 시즌 종료 후 수십 명의 실업자가 쏟아지는 게 우리 야구의 현실”이라며 “이 선수들에게 마지막 패자부활전의 무대이자 재취업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원더스의 탄생은 야구계가 두 손 들어 환영해야 할 낭보 중의 낭보”라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원더스가 2012년 데뷔 첫해 2군리그 팀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연일 화제가 되자 구단들은 “독립구단이면 독립리그에서 활동해야지 왜 프로팀들과 같이 놀려는지 모르겠다”며 KBO에 “원더스의 정식 2군리그 편입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강경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3년간 150억 원을 투자하며 야구선수들의 프로 재도전을 조건 없이 도왔던 원더스는 환영과 존중보다는 냉대와 견제를 일삼는 야구계에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급기야 3년 계약 기간이 종료되자 ‘재계약은 없다’고 발표하며 해체를 선언했다. 원더스는 “이렇듯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 재계약을 한들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반문했다.

원체 실망감이 컸던 것일까. 원더스는 “마음을 돌려 다시 독립구단을 운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이미 버스는 떠났다”고 선언했다.

‘야구’하려고 서울대 진학

이용철 KBS 야구해설가는 “슈퍼스타 선수나 감독도 아니고, 독립구단 구단주가 이처럼 높은 신망과 인기를 구가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주변 지인들로부터 ‘도대체 허민이 누구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민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유명 사업가이자 독립구단 구단주임에도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그 흔한 인터뷰 기사도 찾기 어렵다. IT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기자는 허민을 “너무나 유명한 무명 사업가”라며 “모든 이가 그의 이름을 알지만, 아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세간의 화제인 허민은 누구일까. 그는 어째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것일까.

인터넷 검색란에 ‘허민’을 치면 꼭 따라붙는 연관 검색어가 있다. ‘천재’ ‘야구’ ‘서울대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장’ ‘괴짜 사업가’ ‘위메프’ ‘너클볼’ 등이다.

허민은 1976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산에서 알아주는 수재였던 그는 부산 대동고 1학년 때까지 서울대 전자공학과 진학이 확실한 모범생이었다. 허민의 대동고 동기 김영환 세무사는 허민에 대해 “학교 밖에선 어땠을지 모르지만, 학교 안에선 친구들과 장난도 잘 치고, 잘 노는 평범한 학생이었다”며 “그런데도 시험만 보면 성적이 전교 1, 2위를 다퉈 친구들 사이에서 천재로 불렸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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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dhp122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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