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상회담 기간 중에 백악관 대변인 논평이 한번 나왔는데, ‘잘될 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다’는 식의 유보적인 태도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미국 정치학자 한 사람이 도쿄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미국으로서는 입장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얘기한 게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는데….
“소견이 좁은 사람들인데, 앞에서 말한대로 대량살상무기와 핵문제, 인권문제는 추후에 나올 문제이지요.”
―다시 묻습니다만, 앞으로 한미관계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십니까?
“나는 북한이 다시 핵과 미사일 문제를 들고 나오지 않는 한 한미관계에는 문제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사실 우리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들이 그런 문제가 불거져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방적 조치라고 볼 수 있어요.”
―일각에서는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서 중국은 이득을 얻었고, 미국은 손해를 봤다고 얘기를 합니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 나는 우리 대통령과 시각을 같이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 문제를 과거의 냉전적 사고의 틀 속에서 바라보거든요. 부정적인 제로섬 게임, 다시 말해 ‘네가 져야만 내가 이긴다’는 식의 개념으로만 봤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윈-윈(win-win)의 상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미국은 손해를 보고 중국은 이득을 봤다는 시각은 전략적 현실주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인데, 나는 오히려 이번 게임은 남북한과 주변 4강 모두가 다 이기는 윈-윈의 상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한반도 주변정세를 미·중간의 헤게모니 쟁탈전, 이렇게 보는 시각도 엄연히 있지 않습니까?
“그건 현실주의적인 시각인데, 나는 그것도 좀 과도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제를 그런 시각으로 보면 실제로 문제가 그렇게 발전된다는 겁니다. 그런 시각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는 차라리 신현실주의적 시각, 신자유주의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신현실주의라는 이론은 모든 걸 상대적인 게임에서 봅니다. 저 나라보다 우리가 더 얻느냐, 덜 얻느냐만 따지니까 국가간의 관계가 더 복잡해지고 갈등관계가 되기 쉽거든요. 그러지 말고 국가간의 관계를 포지티브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저 나라도 얻고 나도 얻는다, 이런 발상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런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고 주변국들과 얘기하면 우리가 주도적인 입장에서 그들을 설득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계를 설정해 나갈 수 있다, 이거지요?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게 역할분담입니다. 교류협력과 통일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다, 한편 주한미군과 평화체제 전환문제는 4자 회담에서 다루고,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문제는 미국이 3국 공조에 의해서 하고. 이것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3두마차입니다.”
―그 세가지 중 양자 관계(bilateral relations)는 그럭저럭 해왔지만, 4자 회담은 지금까지 별 힘을 쓰지 못했지요.
“주한미군 문제가 본격 대두되면 4자회담도 활성화될 수 있어요. 앞으로 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 교류협력이 확대되면 그것이 군사적 신뢰구축으로 이어지면서 남북한간에 평화선언도 나올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이런 모든 것을 위해서는 북한이 현 난국에서 웬만큼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경제도 좀 활성화되고, 자체 변화도 좀 있고, 자신감도 생기고, 덩샤오핑식의 그런 변화가 오도록 우리가 만들어주자는 게 김대통령의 생각이고, 나는 그게 좋은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바람직한 과정을 거쳐 통일도 가능하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입니다. 통일은 합의에 의한 통일이어야 하니까. 그 때까지 저쪽에 유일체제가 계속된다면 김정일의 결정으로 통일이 될 수도 있고…. 우리 남쪽은 다원주의 사회니까 선거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고. 저 쪽에서 큰 변화가 없는 한 우리 쪽에서 먼저 통일을 하자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람이 왕래하고, 경제공동체가 되고, 이렇게 사실상의 통일만 이뤄지면 되는 거니까.”
옆에서 본 김정일
―이번에 남북간에 오고간 얘기 중에서 정부가 공개하기 곤란한 부분도 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배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 특히 보수 진영을 어떻게 설득해 나가느냐가 향후 큰 숙제일 것 같습니다만.
“공동선언 1항에 있는 자주의 해석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고, 남북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대목에 대해서도 큰 논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앞으로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이 많이 만나서 좋은 방안을 만들어보자고 한 겁니다. 이건 좋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걸 해놓았으니까 큰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번 정상회담 자체가 일반인들에겐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국민이 TV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그렇게 장시간 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과정에서 인식상의 큰 변화 내지는 혼란감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옆에서 직접 보니까 어떻던가요?
“카리스마가 아주 강하고, 자신만만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한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어느 정도냐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춘향전이 지금까지 남북 다 합해서 일곱 편이 나왔는데, 북에서 세 편, 남에서 네 편인데, 이번에 임권택 감독이 만들어서 칸느 영화제에 출품한 ‘춘향전’은 사실주의가 상당히 강한 영화더구만요’ 이러더라고….”
―그건 김위원장이 영화광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고….
“남한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이번에 KBS와 ‘조선일보’는 북쪽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했었거든. 그런 터라 KBS 박권상 사장이 식사 때에 조금 씁쓸해 보이는 겁니다. ‘한겨레신문’ 최학래 사장은 헤드 테이블로 갔는데…. 그래서 내가 박사장도 이 쪽으로 오시라고 권했어요.
그래서 김대통령이 박사장을 KBS 사장이라고 소개하니까 김위원장이 ‘내가 KBS를 제일 많이 봅니다’ 이러는 겁니다. 내가 옆에서 ‘MBC와 SBS는 어떡하구요?’ 하고 물었더니 김위원장 말이 ‘내가 항상 관영방송을 보는 버릇이 있어서…’래요. 그게 15일 오찬장에서였어요.
사실 15일 오찬이 이번 정상회담의 클라이맥스였어요. 북측에서 권력서열 20위 안에 든 사람들은 모두 참석했거든. 조명록 총참모장을 비롯해서 현철해 총정치국 조직담당, 장성택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은 우리측 경제계 인사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했고, 연형묵, 김용순 등 실세들은 모두 다 왔어요. 물론 14일 만찬에도 왔었지만 15일 오찬에는 핵심들이 모두 참석했어요.
김정일 위원장은 뛰어난 사람이에요. 15일 오찬장에서 조명록 총정치국장에게 인사말을 시켰거든. 내용은 간단해요. 6·25 50주년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북이 군사적 대결상태를 하루 빨리 극복해서 평화의 길로 가자는 내용이었어요. 우리쪽에선 임동원 국정원장이 일어나서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양측의 최고 지도자 앞에서 각각 안보 책임자들이 일어나 ‘싸우지 말자’ ‘화해하자’는 말을 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 아닙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이런 농담도 했어요. ‘오늘 아침에 국방위원회 회의를 열었는데 내가 국방위원회 위원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대남비방, 상호중상 하는 일 없도록 하라고 했더니 우리 국방위원들이 그럽디다. 남쪽이 하지 말아야 우리도 안할 거라고. 이거, 김대통령께서 알아서 조치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김위원장의 분위기를 조정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남북 안보책임자의 인사말
―우리 쪽에서 임동원 원장이 인사말을 한 건 현장에서 바로 결정된 겁니까?
“저 쪽에서 ‘우리는 조명록 차수가 나가니까 임동원 원장이 나오라’고 했던 거지요. 김위원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말하는 건 이런 식이에요. ‘우리가 전기를 달라는 건 그 쪽에 없는 것을 달라는 게 아니라 여분이 있으면 좀 달라는 것이다’ 이거에요.
북쪽에 가면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는 구호가 붙어 있는데, 운전수에서 안내원, 전체 사회가 이번 회담의 성공을 위해서 혼신의 정성을 기울였어요. 왜, 우리 기업인들이 대체로 보수성향이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이 ‘나도 세뇌돼서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들 말했어요.
국가간의 정상회담이라는 게 사실 격식을 따지는 자리인데, 격의없이 돌아가면서 모두들 술 따르고, 재벌총수들도 김위원장에게 술 따르고 술 따라받고, 장성택 부부장이 재벌총수들 모시고 김위원장에게 가서 돌아가면서 술을 따랐습니다. 그런 분위기였으니, 엄청나게 혁명적이던 거지. 우리 대통령께서도 와인을 대여섯 잔이나 마셨으니….”
―14일 만찬 때에도 모두들 술을 꽤 마신 것 같더군요?
“14일도 그랬지만 15일 오찬 때는 더했다구요. 그러니까 서로들 술 따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도 불렀지. 분위기가 완전히 잔치집이었으니까.”
―이번 정상회담에 대단한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로서는 그런 분위기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이해가 안되지요. ‘뜨거운 가슴’으로 이대로만 하면 잘 되는 거라고. 그런데 여기서 ‘냉철한 머리’를 갖고서 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겠지…. 김대통령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말하기를 그렇게 좋아하던 분이 말씀을 아끼면서 상대방 말을 듣고, 김정일 위원장이 말을 더 많이 하게 했어요. 단독 회담 때에는 우리 대통령이 말씀을 더 많이 했다는데, 공식석상에서는 김대통령이 말을 아끼시면서 김정일 위원장이 말하는 걸 많이 들었지요.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 김대통령에게 예우하는 것은 참 지극 정성이었어요. 14일 만찬장에서는 다른 테이블에 계신 이희호 여사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고…, 그걸 단순히 쇼맨십이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 양반이 얘기하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게 그냥 빈 말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분명한 것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번에는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보였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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