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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권 핵심 실세가 회고하는 문민정부 5년(下)

  • 송문홍songmh@donga.com

YS정권 핵심 실세가 회고하는 문민정부 5년(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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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장차관·수석들 ‘文民’ 역사의식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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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취임사에도 나와 있지만, 저는 문민 민주정부의 탄생을 민족 중흥의 새 봄이 열리는 것으로 봤습니다. 유례없는 압축적인 산업화를 이룩한 터전 위에서 30여 년의 군사문화를 청산하고 마침내 문민정부를 우리 손으로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고, 산업화를 이룩한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를 이룩한 도덕적 세력이 힘을 합한다면 위대한 한민족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꿈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런 내용을 대통령 연설문이나 담화, 그리고 제가 참여해서 기초한 취임사에 절절하게 담았습니다.

김영삼 정부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됐던 시대적 소명이라면 군사문화의 청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문민정부 탄생이야말로 광복 이후 정치사에서 건국에 버금가는 이슈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사문화의 청산이 쉬웠던 건 아닙니다. 제가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가끔 들었지만, 어떤 때는 밤에 잠이 안 온다는 거예요. 예컨대 군인사를 해야 하겠는데 과연 이걸 할 건가 말 건가, 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때문에 잠이 안 오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에 조깅하면서 ‘그래도 해야지’ 이런 비장한 각오로 대변인을 불러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내가 식당에서 경호실장이나 차장과 점심식사를 하면, 이런 군인사가 있을 때마다 경호실은 초긴장을 했다고 합니다. 전 직원이 밤을 새우고, 그만큼 경호 부담이 늘어났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김영삼 정부가 군사 정치문화의 청산이라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을 성실하게 다하지 않았느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로 그 덕분에 그 후 국민의 정부도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의 나쁜 병폐,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의 그릇된 관행과 타성, 제도와 의식, 거품과 허세,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오는 좌절감 등을 일컬어서 한마디로 한국병이라고 규정하고, 한국병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변화와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취임사의 내용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기초에 참여했다고 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14대 대통령 취임사는 아주 잘된 겁니다. 현실인식이 정확했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짚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취임사에서는 또 국민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했습니다. 아마 대통령 취임사에서 국민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YS식 개혁의 특징과 한계

이렇게 취임사에서는 장엄하게 개혁을 언급했지만, 사실 개혁이 그에 걸맞게 체계적으로 이뤄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서 폭탄처럼, 파편적으로 전개됐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민정부 초기의 개혁은 대통령에 의한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개혁안을 발표할 때마다 국민은 열화 같은 성원과 지지를 보냈고,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천정부지로 올라갔습니다.

김대통령은 취임 직후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경제인들에게 단 10원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지만, 이건 엄청난 결단이었고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뒤에 밝혀졌지만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기업들로부터 수천억 원씩 챙긴 건 보통이었고, 퇴임하는 장관이나 수석을 불러다가 수억 원씩 줬다고 해요.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한 뒤로는 그런 일이 모두 없어졌어요. 물러나는 사람도 대통령에게서 뭘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대통령도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이렇게 공직사회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당시에 제가 재벌들을 만난 일이 있는데, 진짜 안 받느냐고 물어요. 사실이라고 대답하니까 오히려 당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돈 주고 공사도 따내야 하는데 돈을 안 받겠다고 하니까 어떡하라는 말이냐, 이러는 거예요.

아무튼 이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선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하거니와 김영삼 대통령은 이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당신 아들이나 측근들까지 이 약속을 지키도록 철저하게 챙기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적어도 대통령 자신만큼은 임기 말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고 믿습니다.

1994년 8월13일에는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발표했습니다. 그 일주일 전쯤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올라갔더니 금융실명제를 준비하던 팀이 마련한 담화문 초안을 내게 주셔서 제가 새로 썼습니다. 아시다시피 금융실명제는 전두환 정권 때에도 하려고 했다가 워낙 반대가 심해서 못 했던 겁니다. 이것을 김영삼 대통령이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이건 이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담화문의 서두를 이렇게 썼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라고 썼어요. 내가 이걸 쓸 때 새 역사가 시작된다는 흥분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상당히 오랫동안 금융실명제야말로 개혁 중에 개혁이요 우리 시대 개혁의 중추이자 핵심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시행했던 금융실명제가 유감스럽게도 일반 법령으로 바뀌어서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못한 채 문민정부 마감과 함께 유보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매우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문민정부 시대의 개혁은 사실 체계적이라기보다는 대통령 결단에 의해서 단발적으로 이루어졌어요. 대통령이 비밀리에 준비해 기습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에 그만큼 충격적 위력이 있었고, 그것이 또 개혁의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중심제하에서는 대통령의 성격과 스타일, 품성에 따라 국정운영의 내용과 모습이 달라집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특징이라면 스스로 모든 걸 솔선하고, 책임도 자신이 지겠다, 이런 특징 때문에 군인사라든지,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같은 것들을 과감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개혁을 체계적으로 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것도 사실입니다.

민주화운동 탄압하던 사람들 여전히 득세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 저는 엄청난 개혁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한국위원회와 같은 개혁 총괄기구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알력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조화하느냐, 또 누구를 신한국위원회의 멤버로 하느냐에 따라서 개혁의 내용과 방향이 설정되기 때문에 이걸 상당히 두려워했던 게 아닌가. 그래서 신한국위원회는 결국 구성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이후 문민정부의 개혁이 유기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전개되기보다는 대통령에 의해서 파편화된 개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부연한다면, 개혁은 도덕적인 힘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힘이 있을 때 개혁이 가능하고,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융실명제 발표 때까지 그나마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정치자금을 한 푼도 안 받겠다, 내가 먼저 재산공개를 한다”는 이런 도덕적인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대통령이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제가 청와대에 들어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마침 금융실명제를 유보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서 대통령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융실명제 담화문을 기초한 저로서도 거기에 애착이 있었고, 또 대통령이 개혁 중의 개혁이라면서 그토록 집착했던 금융실명제를 유보하는 법안에 자기 손으로 서명해야 한다는 게 참 괴롭겠다 싶어서 “그 신념에 변함이 없다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겠느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내가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국회가 들어주겠느냐” 그러면서 체념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김현철 사건이 터지고 IMF사태가 터지고, 그래서 도덕적 힘이 다 빠져버렸을 때입니다. 국회의원 수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어요.

저는 공보수석은 아니었지만 가끔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서 이런저런 연설문을 쓰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제가 의도했던 것은, 문민정부의 정통성을 민족·민주 위에 확실하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93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닷새쯤 전에 대통령이 이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는데, 거기서 저는 “문민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썼습니다. 또 그 해 8월에 박은식 선생을 비롯해서 임정요인들의 유해가 상해에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묻혔는데, 그때에도 저는 “문민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 문민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담화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국민의 정부나 문민정부나 마찬가지인데, 국민의 정부는 확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민주화의 대의를 분명하게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저는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물론 김영삼 정부의 한계는 3당 합당입니다. 그러나 3당 합당을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해도 그 원칙은 세워야 하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원칙 없는 야합이 아니라, 정의와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화해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아쉽고 후회스러운 것 중에 하나입니다.

화해는 야합이 아니라 반성과 통회, 용서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새롭게 출발하는 악수여야 합니다. 두 세력이 힘을 합치더라도 도덕적 힘을 가진 민주화 세력이 주체가 되고, 전문가 집단이라 할 근대화 세력이 전문성을 펼치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원칙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금도 똑같지만 민주화운동 시절에 탄압하던 사람들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고, 민주화가 됐는데도 반성하거나 자신의 죄를 고백한 일이 없어요. 그때도 어물쩡 넘어가는 식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에도 어떻게 하면 이런 것을 바로 세울 수 있을까 많은 고뇌를 했지만, 벽이 워낙 두꺼웠고 저희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과 교감하는 것에 그쳤을 뿐 이걸 체계적으로 확립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고 후회스럽습니다.

YS만이 할 수 있는 일

저는 재임하는 동안 이른바 보수진영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렸는데, 저를 공격한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역사성을 보면 대체로 반민족·반민주·반통일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어요. 민주화세력이 중심이 되어서 정국이 운영되거나 역사가 나아간다면 자기네가 받을지 모르는 불이익, 피해, 자기네가 저지른 범죄에 극히 민감했고, 그래서 저를 공격한 수법이라는 게 아주 모략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갑자기 밑도끝도없이 아무개는 빨갱이다, 그러니까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입증할 책임은 너에게 있다, 이러는 겁니다. 어떤 때에는 어떻게 대응해볼 수도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문민정부가 민족·민주라는 역사의식이 투철하지 못했던 데에 기인합니다.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문민정부 아래서 총리, 장·차관, 수석을 했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문민정부의 역사적 성격과 소명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깨닫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대통령도 마찬가집니다. 문민정부가 어떤 성격을 가진 정권이냐에 대해서 확실한 소명의식이나 철학·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말만 문민정부였지 문민적 성격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있는지, ‘이게 문민이다’라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얘깁니다.

앞에서 단편적으로 얘기했지만 문민정부가 12·12와 5·18 진상을 규명하고, 거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법정에 세워 단죄한 것은 아마 김영삼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국민의 정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제가 단언하거니와, 못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못하는 일입니다.

94년 8월경 민정수석실에서 12·12와 5·18의 공소시효가 94년 8월13일에 끝난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전두환 정권이나 노태우 정권 때에는 누가 이 문제를 제기할 수 없지 않았느냐, 그 기간을 빼고 공소시효를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때 5·18 관련자와 유가족들이 공소시효 산정이 잘못돼 있으니 새로 산정해달라는 소송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헌법재판소 판결로 94년 8월이 아니라 95년으로 1년쯤 더 연장됐습니다. 그 무렵에 허삼수, 허화평 등 5·18 핵심세력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5·18, 12·12를 규명하자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의식도 없었어요.

그런데 공소시효 만기는 되어 가고, 그래서 제가 어느 날 대통령을 찾아가서 “이거 기소합시다”고 말했어요. 대통령 말씀이 “민주당에 국회의원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냐” 이러세요. 제가 “헌법에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되기 때문에 굳이 구속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조사는 철저하게 하자. 그래서 법정에 세워서 단죄하자. 95년이 광복 50주년 아닙니까? 우리는 이제까지 미움과 갈등의 50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자고 제안하면서 대통령께서 대규모 일반사면권을 발동하면 진실도 규명하고 화합도 이룰 수 있지 않으냐” 대충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그때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기껏해야 ‘미흡한 부분은 훗날 역사에 맡기자’는 정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가족들이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신군부 쪽 사람 58명을 고발했는데, 검찰이 조사한 뒤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해괴한 결론을 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게 어떻게 해서 단죄가 됐느냐, 엉뚱하게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전두환 비자금도 있다는 얘기가 돌면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고, 이에 따라 특별법을 제정해서 처리됐습니다. 제가 대통령께 제안했을 때 했더라면 특별법을 제정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때는 공소시효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검찰이 기소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정치보복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소급입법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특별법을 제정해서 5·18과 12·12사태의 진상규명을 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정도에 따라서 처리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공소시효를 훨씬 넘긴 뒤에 특별법 제정이라는 방식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가 공자 말씀처럼 대의명분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문민정부가 그런 대의명분에 입각해서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물 핑 돈 대통령

자칫 제 자랑이 되겠습니다만 교문사회 수석비서관으로서 제가 한 일을 몇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문(文)에 해당되는 분야는 거의 제가 담당했습니다. 교육·문화·체육·보건·사회·환경·여성·사회 일반을 담당했는데, 그러니까 경제와 안보를 제외한 전 영역입니다. 부처로는 6개쯤 됩니다.

저에게 주어진 첫 과제는 교육재정을 GNP 대비 5%로 확충하는 일이었는데, 이게 대통령 공약사항이었어요. 경제부처라는 게 굉장히 인색하고, 경제적 이해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비효율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 싸우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그러나 저는 그때 역사상 처음으로 GNP 대비 교육 5%의 예산을 확보했습니다. 최근 들어서 교육예산이 다시 줄었다고 해서 저는 불만인데, 그만큼 긴장감을 가지고 경제부처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면 예산확보가 참 어렵습니다.

다음으로 1만5000명에 달하는 전교조 해직교사들을 복직시켰습니다. 이건 대통령 공약사항이 아니었지만, 김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제가 대통령을 한번 만난 기회에 해직 교사들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실직 교사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대통령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눈물이 비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수석비서관이 된 뒤에 대통령이 해직교사 복직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실제로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해직교사들 거의가 복직됐습니다.

사실 정부 내부에서는 ‘전교조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고 거칠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전교조 쪽에서도 어느 정도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못합니다. 조직 내부의 지도력이랄까 이런 것 때문에 경쟁적으로 강경해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사람들도 압니다. 자기네가 조금만 양보하면 정부 안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 입지가 강화되어서 더 많은 사람이 복직될 수 있다는 것을.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잘 압니다. 그런데 조직 내의 지도력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강경론을 들고 나오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까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죽을 지경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부나 이런 세력이 올바른 길로 가려면 진정한 사쿠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잘 되려면 그런 용기있고 건강한 사쿠라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금 많은 지탄을 받지만, 저는 그분이 대통령으로서 장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 자신에게 대단히 엄격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가령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에 조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사과문을 제가 썼어요. 사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은 ‘빨리빨리’가 흐름이었던 전 정권시절에 지어진 불가피한 산물이지 엄밀하게 보면 문민정부가 책임질 일은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터질 때마다 김대통령은 우리가 잘못한 일이니까 사과성명을 쓰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상당히 솔직하고 담대한 분입니다.

군사문화의 죄악 중 첫번째는…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지도자로서 훌륭한 자질과 좋은 덕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한때나마 그렇게 환호했던 것도 그런 자질과 덕목이 발휘됐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사람들이 잘못 뽑았다고 하는데, 적어도 제가 보기에 그때는 잘못 뽑은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도 반성할 점은 반성해야 합니다. 대통령에서 물러나기 얼마 전에 제가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퇴임하면 아마 대통령께서 상상하지도 못하는, 인간사회라는 게 이런 거라는 걸 느끼시게 될 거다. 당신 손으로 임명한 사람들이 당신에게 등을 돌리고 어떻게 얘기하고 다닐 것인지, 그런 걸 지금 준비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IMF니 뭐니 했을 때 YS를 변호하고 나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지금은 철저하게 외로워지는 게 당신의 업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뵐 때마다 어른답게 처신해 주시기를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언론과 국민도 너무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인데, 그 대통령을 모멸하면 자기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어쨌든 이 땅에 문민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대통령이고,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진 정부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하자 없이 예우를 받아야 할 대통령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에는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법률상 대통령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 것까지 따지지는 않더라도 법원의 확정판결로 나온 추징금을 내지 않으려고 비굴하게 아첨하는, 그런 대통령들과는 구별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질문) 오랫동안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국정에 참여한 분으로서, 나에게 이런 게 부족하구나 하고 느낀 게 있었습니까?

“많지요. 나는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과 군사 정치문화가 저지른 죄악 중에서도 가장 큰 것으로, 민족의 발전과 인류 문화의 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수많은 인력을 반독재 투쟁으로 소진시킨 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국정을 맡으면서 우리의 경륜과 시야가 너무 좁다는 것, 자만일지 모르지만 저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국정에 그렇게 어두운 편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재야 출신 국회의원들은 시야가 좁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안 했다는 겁니다. 우선 가장 급한 것이 반독재 투쟁이었으니까. 그런 사람들 논리는 단순합니다.

가령 농민운동을 한 사람은 농지를 전용하거나 담보로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농촌이 잘되려면 농촌에 도시 자본이 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농민운동을 한 사람들은 농촌에 도시자본이 들어가면 농민을 잡아먹는 걸로 생각합니다. 그런 편협한 고집 같은 게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더 넓은 세계를 향해서 더 높은 꿈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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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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