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中道’를 선점해야 대권 잡는다

  • 모종린

    입력2005-05-04 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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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선거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접전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부시 행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우리 정부와 국민의 관심은 신정부가 추진할 외교안보 정책의 향방에 쏠려 있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 기존 정책에 대한 재검토 작업이 시작되고, 특히 한반도 정책처럼 논란이 많던 이슈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조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전망하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지난 2년간의 선거 준비 및 운동기간에 보여준 부시 진영의 이념 성향이다. 선거기간 중 부시 후보는 당내 보수 강경파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중도 노선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부시 행정부가 대체로 실리적이고 온건한 한반도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부시 후보가 중도 노선으로 2000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과정과 결과가 한국에 주는 의미는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를 지배하는 조류는 정보화, 세계화, 그리고 이념의 재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념 측면에서 보면, 사회주의의 실패로 수세에 몰렸던 진보 세력이 90년대 중반 이래 ‘제3의 길(The Third Way)’이라는 새로운 노선으로 선진 각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保革 대결 패턴

    미국의 경우 신민주당(New Democrat) 운동은 월터 먼데일이 레이건에게 참패한 8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 92년 클린턴을 대선 후보로 내세움으로써 비로소 당내 패권을 장악했다. 2000년 선거에서도 신민주당파는 정통 진보세력의 견제를 물리치고 시장경제, 첨단기술, 균형재정 등 보수적인 정책을 적극 수용하는 경제정책으로 대선에 임했다.



    한편 92년과 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주당 노선에 연패한 공화당은 2000년 선거에서 승리할 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략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상황은 공화당에 확연하게 불리했다. 전통적으로 미국 대선은 경제 상황에 크게 좌우되는데, 경제 호황기에 야당이 집권당을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덕성에 흠집이 있긴 하지만 클린턴 대통령 역시 6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서 공화당이 승리했다는 것은 세계적인 지배 이념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제3의 길’의 행보에 제동을 건 일대 사건으로, 21세기 이념경쟁 구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2000년 미국에서 벌어진 보수 정당과 ‘제3의 길’을 표방한 진보정당 사이의 한판 승부를 선거전략 차원에서 분석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 보는 것은, 앞으로 2년도 남지 않은 우리 나라 대선에서 나타날 이념 경쟁에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한국의 정당정치를 재조명해보면, 한국 역시 세계의 이념적 흐름에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000년 미국에서처럼 2002년 한국에서도 보수 야당과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집권당이 격돌할 것이며, 그 결과는 21세기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제3의 길’은 원래 시장경제 논리와 시민연대 및 정의의 원리를 결합하려는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중도 좌파노선을 의미하지만, 이 글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당이 시장경제 원리를 적극 수용하는 시도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보수 공화당이 승리한 것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 역사적 맥락을 우선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 미국 정당의 이념적 대립구도는 1930년대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대에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자유방임적 시장 중심 정책으로 경제 공황을 극복하려고 했던 후버의 노력이 실패하자 미 국민들은 새로운 비전을 요구했고, 이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민주당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뉴딜(New Deal) 진보주의였다.

    뉴딜 진보주의는 시장의 자율적인 회복기능을 기다리지 않고 정부가 적극 개입해서 총수요를 확대해야 한다는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거시정책에서 출발했다. 루스벨트가 대선에서 처음 승리한 1932년부터 레이건 대통령이 승리하는 1980년까지 근 50년 동안 뉴딜 진보주의는 미국사회 전반에서 정부 역할을 확대시키면서 미국 정치의 지배이념으로 기능했다.

    미국판 이념 경쟁사(史)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새 개척(New Frontier) 정신,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그램도 기본적으로 뉴딜 진보주의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1950년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1960∼70년대 리처드 닉슨 등 공화당 대통령들이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뉴딜 진보주의에 대응하는 본격적인 이념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당시 공화당 주류는 뉴딜 진보주의의 대세를 인정하고, 진보적 색채를 가미한 보수주의를 표방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의 일부 강경파들은 작은 정부, 경제자유, 강력한 국방력, 보수적 사회관을 강조하면서 꾸준히 진보주의 헤게모니에 도전했고, 1964년에는 자파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데에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골드워터는 대선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참패했고, 공화당 보수운동은 다시 침체됐다. 공화당 보수 진영은 정부의 지나친 개입의 폐해가 현실로 나타나는 1970년 말에 다시 재기의 기회를 잡아, 1980년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을 후보로 내세워 지미 카터의 민주당에 승리했다.

    신자유주의 슬로건을 내건 레이건은 대선 승리를 자신의 이념에 대한 지지로 평가하고 정부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그 후 12년 동안 공화당은 두 번 연속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는 미국정치의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았다.

    민주당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해 초기에는 전통적인 뉴딜 진보주의 노선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1984년 민주당 먼데일 후보가 이러한 진보 노선으로 레이건에게 참패하자 민주당 내부의 보수 세력이 진보 노선에 반발했다. 주로 남부 출신 의원과 주지사가 중심이 된 이른바 남부 민주당(Southern Democrats) 그룹은 경제형평, 재분배, 국방예산 삭감, 관대한 사회정책에 치중하는 민주당 다수 노선을 개혁하기 위해서 민주당지도자회의(DLC, 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라는 조직을 당 외곽에 설립했다.

    DLC는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이념에 대응하려면 민주당도 신자유주의를 일부 수용해서 공화당에 빼앗긴 중도적인 민주당 유권자를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재정안정, 자유무역, 규제완화 등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일부 수용하되 사회정의 구현과 시장 실패의 보완을 위해서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일방적인 평화주의보다는 힘에 기초한 현실적인 대외정책을 지지하고 범죄 등 사회질서 파괴행위에 대해 정부가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DLC의 초기 지도자는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찰스 랍(Charles Robb)이었고, 당시 테네시주 초선 상원의원이었던 앨 고어,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도 DLC의 창립 회원이었다.

    DLC의 전략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중도 투표자로의 이동(move toward the center)’ 전략이었다. 즉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부동층이 존재하는 이념 스펙트럼의 중도 방향으로 자신의 노선을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에서 처음 시도된 진보정당의 기존 전략 수정은 그 후 유럽으로 확산,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와 독일 사민당의 게하르트 슈뢰더가 이와 같은 ‘제3의 길’을 채택했다.

    1984년부터 민주당 내부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DLC는 1992년 경제 침체기에 드디어 기회를 포착, 클린턴 후보를 내세워 12년 만에 정권을 잡았다. 민주당은 그 후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빠르게 세력을 회복해 1996년 대선에서도 승리, 민주당 출신으로는 루스벨트 이후 처음으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한편 1992년 이후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공화당에게도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공화당은 1994년 ‘국민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보수 노선으로 상원에서 우위를 확대하고 1952년 이후 처음으로 하원에서 다수를 획득했다. 당시 공화당의 하원 장악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민주당의 92년 대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치가 공화당 중심으로 재편됐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은 1994년의 승리에 고무되어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강경노선을 채택함으로써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됐다. 특히 사회 분야에서 낙태 금지, 복지예산 삭감 등의 개혁 정책을 감행, 진보세력의 기반인 소수 민족과 노동계, 그리고 저소득층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었다. 이처럼 클린턴의 중도 노선에 대응하는 공화당 보수파의 이념은 급진적이었고, 그 결과 민주당의 방만한 재정 지출, 정부 규제, 관대한 범죄정책에 반발하여 레이건 연합에 합류했던 보수적 민주당원들이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와 1996년 대선에서 민주당에게 승리를 안겨 준다.

    2000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이념 경쟁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 패턴을 읽을 수 있다. 첫째, 지배 이념의 급진적인 교체는 기존 이념의 대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자유방임주의적 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뉴딜 진보주의가 등장했으며, 50여 년이나 계속된 뉴딜 진보주의 지배와 그 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가 나타났다. 클린턴이 말했듯이 진보주의가 시장의 무절제에서 시장을 구하려는 시도였다면,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무절제에서 정부를 구하려는 시도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존 지배이념이 크게 실패하면 그와 상반된 이념으로 대체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둘째, 집권당의 이념이 아직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할 때, 야당은 여당의 이념을 일부 수용하는 중도노선을 채택해야 선거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의 뉴딜 진보주의가 지배 이념이었을 때 공화당의 아이젠하워와 닉슨은 중도 전략으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부시 정부를 무너뜨린 클린턴의 ‘제3의 길’도 전형적인 중도 전략이었다.

    반면에 야당이 집권당의 지배적 이념에 정반대되는 이념으로 성공한 사례는 찾아 보기 힘들다. 1964년 보수노선으로 당시 지배 이념인 진보주의에 대응했던 골드워터가 참패했고, 1984년과 88년 전통적인 뉴딜 이념으로 당시 지배 이념인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에 도전했던 먼데일과 마이클 듀카키스도 패배했다.

    셋째, 특정 이념과 이를 처음 표방하는 정당의 성쇠는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는 공화당이 1992년 선거에 패배한 이후에도 미국과 세계의 정치·경제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민주당이 작은 정부, 규제완화, 조세감면 등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혁명적인 이념체계로 집권한 정당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정책과 경제 성과의 불확실한 관계에 있다. 경제 성과는 경제정책 이외에 많은 변수에 의해 결정되지만, 유권자들은 이에 관계없이 경제실패의 책임을 집권당에 추궁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 정당의 정책 노선은 지지를 잃고, 그 공백을 야당의 정책노선이 메우게 되는 것이다. 집권당이 초기의 성공 이후 자만과 안이함에 빠져 국정에 소홀해지고, 유권자들이 장기 집권을 의도적으로 견제하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넷째, 미국 정당의 이념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반·합의 전개과정과 흡사한 수렴과정을 겪어왔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이념대결을 비교해보면, 고어 후보의 제3의 길과 부시 후보의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 nservatism)’는 거의 동일한 노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이념의 수렴화 현상은 21세기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3의 길’에 대한 부시의 대응

    2000년 대선에서 고어가 내세운 제3의 길에 대응한 공화당의 딜레마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클린턴·고어의 ‘제3의 길’ 자체에 대한 이념적 대응 문제였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성공적인 집권당의 이념에 이기는 방법은 그 이념에 한층 가까운 중도 이념을 선택하는 것이다. 부시 후보도 이를 인식하고 초기부터 온정적 보수주의라는 중도노선을 표방했다.

    경제 분야에서 민주당이 이미 기존 공화당 노선을 대폭 수용했기 때문에 부시는 두 당의 견해 차이가 상대적으로 컸던 사회와 복지 분야에서 민주당에 가까운 노선을 선택해야 했다. 즉 여성과 소수 인종의 공화당 지지도를 떨어뜨렸던 낙태금지, 차별수정계획(affirmative action) 반대를 완화하여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부시는 사회보장, 교육, 빈곤 문제에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 공화당도 이런 정책해결에 관심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둘째, 부시는 공화당의 전통적인 표밭이던 남부와 서부를 굳게 지키고 중부와 동부의 중립지역을 공략해야 했으나, 단일주로서는 가장 큰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캘리포니아가 이 전략의 걸림돌이 됐다.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했던 캘리포니아는 1970, 80년대 라틴계 인구의 급증으로 민주당 우호지역으로 돌아섰으나 캘리포니아는 처음부터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주였다.

    셋째, 민주당 정부의 약점인 도덕성 상실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문제였다. 미국 국민이 클린턴 스캔들에 실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불만이 고어에게 옮겨질지 확실치 않았고, 과거 음주 운전과 여성편력 경력이 있었던 부시 자신도 선거에서 도덕성을 마냥 강조할 수는 없었다.

    넷째, 텍사스 주지사 외에는 공직 경험이 없는 부시가 자신의 경력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였다. 워싱턴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일반의 반감이 팽배한 분위기에서 공직 경험 부족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TV토론 등 본격적인 선거운동과 정책 토론이 시작되면 부시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부시의 전략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부동표 공략에 나서는 중도노선 선택이었다. 미국의 유권자 중 공화당 지지세력은 기업가 그룹·보수 종교계 (Religious Right)·백인 남성 등이고, 민주당 우호세력은 노조·소수인종·환경단체 등이다. 한편 전통적인 부동층으로는 중산층 여성·천주교인·노년층·라틴계 유권자들인데, 1996년 대선 당시 클린턴 후보는 이들 부동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 후보는 중산층 여성그룹에서 16%, 천주교인에서 11%, 고령층에서 5%, 라틴계에서 48% 차이로 공화당의 돌 후보를 따돌렸다.

    부동층을 공략하기 위해 부시 진영은 우선 ‘담론의 정중함(civility of discourse)’과 개인의 책임성을 강조하면서 클린턴과 고어 정부의 도덕적 약점을 조용하게 공략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또 클린턴 정부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군부, 고소득층 등을 겨냥해 국방개혁, 조세감면을 제시하고 무엇보다 대통령직의 권위와 신뢰회복을 약속했다.

    부시 진영은 또한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영역이었던 복지·교육 분야에서 새로운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그 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던 부동층의 지원을 호소했다. 연금제도의 개혁, 은퇴한 노령 시민을 위한 처방약 제공, 그리고 교육개혁 등이 민주당 성향의 부동층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선거 기간 중 부시 후보는 깅리치 전 하원의장으로 대표되는 공화당 내 보수 진영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자신을 온정적인 보수주의자 또는 통합을 이끌어내는 사람(uniter)이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여성 후보와 소수 인종의 표를 인식하여 낙태, 동성연애, 차별수정계획 등의 문제에 대해 모호한 주장으로 일관했다.

    부시 후보는 서민적이고 호인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십분 발휘, 자신을 ‘행동하는 개혁가’라고 칭하고 ‘진실한 국민을 위한 진실한 계획(real plans for real people)’을 제시한다는 선거 테마를 개발했다. 이 전략은 물론 과장되고 엘리트 의식이 강한 고어와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부시 진영은 공화당 보수파의 지나치게 강경한 언어와 행동이 국민의 지지를 잃게 한 근본 원인이라고 판단, 화해적이고 통합적인 선거운동에 역점을 두었다. 그 예로 상대의 약점을 부각시키는 부정적 광고는 당에게 맡기고, 부시 후보의 광고는 모두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담았다.

    경기가 호황이고 평화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부시 진영으로서는 이러한 중도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관건은 과연 부시 후보가 자신의 중도 노선을 2년의 긴 선거기간 동안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

    대통령 후보들이 대선에서 중도노선을 유지하기 힘든 첫째 이유는 예비선거라는 변수 때문이다. 부시의 경우 공화당의 지명을 받기 위해서 2000년 초 아이오와에서 시작된 예비선거에서 과반수 이상의 대의원을 확보해야 했으며, 다양한 성향의 공화당원들이 참여하는 예비선거에서 중도 노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예비선거가 시작되기 전에는 한결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주장하는 백만장자 스티브 포브스가 부시의 경쟁자가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막상 선거가 시작되자 정치자금법 개혁을 테마로 삼은 존 맥케인 후보가 부시를 위협했다. 부시보다 더 중도적인 맥케인 후보의 등장으로 부시는 원래 의도보다 더 보수적인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뉴햄프셔에서 맥케인에게 일격을 당한 직후인 2000년 2월2일 부시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위치한 보수 기독교의 본산인 밥 존스대학에서 강연한 이유도 그때까지 일정 거리를 두었던 보수 종교계에 지지를 호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부시는 슈퍼 화요일 이후 맥케인 후보의 도전이 약화된 후에나 자신이 원래 의도했던 중도노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편 고어는 예비선거에서 자신보다 더 진보적인 빌 브래들리 전 상원의원과 싸워야 했다. 민주당의 전통적 기반인 노조의 지지를 받은 브래들리는 고어의 중도 노선을 비난했으며, 고어도 이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이때부터 고어 진영은 공화당의 세금감면안과 사회보장제도 개혁안에 대해서 부유층만을 위한 정책이라는 계급주의적 비난을 시작한다.

    그러나 부시와는 달리 고어는 예비선거를 끝내고 민주당 지명을 얻은 후에도 주로 전통적 민주당의 지지세력인 중하층 유권자를 목표로 하는 선거전략을 고수했다. 선거자금 면에서 부시 후보에 비해 열세였던 고어 후보는 민주당의 선거자금원인 노동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은 또 클린턴과 다르게 보이려 했던 고어의 의도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선거기간 중 고어는 스캔들로 얼룩진 클린턴을 선거운동에서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클린턴과 연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민주당의 최대 치적인 경제 호황을 홍보하는 데에 소극적이었고, 그러다 보니 클린턴 시대에서 소외됐던 빈곤층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문제를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대선 후보들은 예비 선거를 거치면서 선거운동에 물질적·인적 지원을 해주는 전통적 지지세력과 새롭게 지지를 확보해야 하는 부동층 사이에서 필연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이번 선거에서는 부시 후보가 고어 후보보다 이런 당내 갈등을 원만하게 관리했다.

    대통령 후보가 자신의 중도 노선을 유지하기 어려운 둘째 이유는 정보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나타난 현상이지만, 각 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도는 선거 과정에 여러 번 바뀐다. 선거 전문가들에 따르면, 후보의 기본 메시지는 단기적 상황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때그때 국면에 따라 기본 전략을 수정하고 싶은 충동을 극복해야만 선거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 점에서도 공화당이 유리했는데, 이는 부시의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후 부시 후보는 자신이 선거기간 중에 집중하고 싶은 이슈로서 사회보장제도, 교육, 의료보험, 단 세 가지 안건을 참모들에게 제시했다. 자신이 열정을 가지고 있고,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의 하나인 텍사스 주지사로서 경험이 있는 이슈를 중심으로 선거운동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소박하고 단순한 성격의 부시는 선거운동도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수준에서 추진한 것이 오히려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는 데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2000년 미국 대선이 ‘제3의 길’의 미래에 주는 함의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보수 진영이 ‘제3의 길’ 노선에 대응하는 전형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미국 정치학자들은 선거 전에 고어의 승리를 예측했다. 미국 대선을 예측하는 통계학 모델에 따르면 선거 결과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거시경제 상황이며, 2000년 미국 경제의 호황을 고려할 때 민주당이 적어도 8% 이상의 차이로 공화당에 승리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고어 후보를 선거인단 수에서 승리하고, 총투표 수에서도 33만7576표(총투표 수의 0.3%) 차이로 승리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전략 차원에서 보면 부시의 전략은 의외로 범상한 것이다. 상당한 지지를 받는 집권당의 이념과 경쟁하려면 그에 가깝게 자신의 이념을 조정하는 중도 노선이 유리하다는 교훈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둘째 교훈은 2000년 대선에 패배했지만 진보주의의 승부수인 ‘제3의 길’이 실패한 선거노선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선 민주당은 선거에서 더 많은 유권자의 표를 얻었다. 그리고 고어는 선거기간 중 전통 진보주의 성향을 너무 강하게 보였다. 이런 이유에서 DLC 위원장인 알 프롭은 고어의 패배가 ‘제3의 길’ 노선의 패배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또 민주당 보수파들은 이번 선거에 출마한 자파 의원들이 대부분 재선에 성공하여 민주당 의석수가 상·하원 모두 늘어난 것을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논쟁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3의 길과 보수진영의 대결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제3의 길’

    미국에서는 이렇게 정책 대결, 이념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정치학자들은 한국은 고질적인 지역주의 때문에 진정한 정책 대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 뿌리깊은 지역주의가 단기간에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2000년 4월 총선에서 지역주의가 더 강화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에서도 이념 경쟁은 이미 시작됐고, 2002년 대선에서는 이념 경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한국에서도 중도 노선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정당이 승리한다는 가설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속도를 더해가는 이념 대립의 발단은 김대중 정부의 등장에서 비롯됐다. 남북관계를 둘러싼 이념 갈등은 사실상 광복 이후 잠재적으로 계속돼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정당간의 이념 경쟁으로 보기에는 대중적 기반이 부족했고, 그 범위도 남북관계에 치중해왔기 때문에 국가 운영의 철학에 대한 논쟁이라고 보기 어렵다.

    김대중 정부의 이념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필자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전폭 수용하면서도 전통 진보의 가치인 형평·정의·복지를 추구하는 ‘제3의 길’ 노선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당이 자신을 중산층과 서민을 토대로 한 국민정당이라고 선언한 데서도 보이듯 민주당의 기본 노선은 진보주의다. 그러나 민주당이 추구하는 진보는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나 뉴딜 진보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의 병행 발전을 통해 신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통합한 일종의 ‘제3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선 전환은 집권 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0년 초까지도 자신의 저서 ‘대중경제론’에서 피력했듯이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나, 92년 대선 패배 후 이미지의 보수화를 시도해 시장개방, 주식시장 활성화 등의 시장경제 논리를 적극 수용해왔다.

    1997년 당시 김대중 후보의 대선 전략개발에 참여했던 이영작 박사는 중도노선의 선택이 김대중 후보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이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도 노선이 강력한 지배 이념에 대한 성공적인 대응 전략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당, 그리고 그 전신인 국민회의가 자신들의 진보주의를 일부 포기하고 이념 스펙트럼의 중앙으로 이동했다면, 그 반대편에 위치한 보수주의는 어떠한 성격인가. 미국 민주당이 ‘제3의 길’을 선택했을 때 상대방의 이념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그가 중도 노선을 선택했을 때 경쟁 상대로 인식한 이념은 기존의 보수주의였을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세력은 있지만 보수이념은 없다고 흔히 말하지만, 필자는 한국적 맥락에서 보수주의는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단위의 가치체계로 발전할 만큼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이념적 프로그램을 추구했던 박정희 정권의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통치이념은 1962년 이후 근 20년 동안 한국의 지배이념이었고, 이에 대한 도전을 통해 한국 정치사회의 이념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현상은 1979년 박정희 정권의 퇴장 후 가시화됐고, 한국의 정치 엘리트도 진보와 보수,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의 이념 갈등은 서구적 성격의 전통적인 이념 갈등이 아니며 한국적 요인, 그러니까 박정희 시대를 보는 시각차에 기인한다.

    박정희 모델에 대한 도전은 박정희 정권 당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박정희 모델은 박정희 정부가 퇴장하고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에도 한국의 지배 이념으로 유지돼왔다. 박정희 모델이 전면 부정되는 계기는 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찾아왔다.

    현재 박정희 모델은 국내외에서 정경유착, 불평등 성장, 관치금융 등 현재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박정희 모델의 대안으로서 중도 진보주의적인 ‘제3의 길’을 제시하면서, 박정희 모델을 본격적으로 해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경제 모델의 기본 원리는 정부주도의 민관 협력이었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의 개혁 대상도 자연히 기존 모델을 지탱하는 보수세력, 즉 개발주의적 국가권력과 이에 협조한 재벌이 되었다. 재벌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형평, 경제적 집중논리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론, 세계적 기준(global standards) 논리를 동원해서 개혁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와 함께 벤처산업, 중소기업, 외국인 기업 등 새로운 경제세력의 지원을 병행하고 있다. 한편 김대중 정부의 진보적 성격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대북 포용정책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면 한국의 새로운 집권이념으로 등장한 김대중 정부의 ‘제3의 길’에 대한 야당의 대응은 어떤가. DJP 공조의 복원으로 유일한 야당으로 남게 된 한나라당이 이념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분야는 대북정책이다.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상호주의, 인권 차원에서 비판하면서 민주당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가 변화하지 않는 북한에게 일방적인 양보와 지원을 하고 있다고 공격하는 한편, 탈북자와 북한 인권문제에 소극적인 정부의 태도를 비난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포용정책으로 인한 안보의식의 해이이며, 김대중 정부가 고려중인 국가보안법 개정을 저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경제·사회 분야에서 한나라당의 견해는 이념적으로 김대중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의 정책을 각론에서는 비판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사회안전망 확대라는 명분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보수 일각에서 주장하는 박정희 경제모델의 유용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어도 경제 분야에서 한국은 아직 개도국이며 선진국을 추월하려면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하고 자국 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가 한국에서는 정통 보수주의의 논리다.

    한나라당은 또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중도적인 견해를 보인다. 서구 보수주의 정당처럼 작은 정부와 개인 자율이라는 논리로 복지의 확대 자체를 비판하지 않으며,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수혜 대상인 국민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정책집행상의 문제점을 주로 지적해오고 있다.

    한나라당이 일관된 논리를 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정치적 편의에 따라 원칙없이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기도 한다. 관치금융 청산, 기업자율, 시장개방을 주장하면서 국부유출론을 제기하고, 구조조정의 조기완료, 사회안전망 확대를 지지하면서 재정적자의 확대를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박정희 경제모델이라는 정통 보수주의 이념을 거부하면서 시장경제의 구현을 추구하는 서구식 보수 자유주의 이념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당도 적어도 경제정책에서는 이념 스펙트럼의 중앙으로 이동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대선과 ‘제3의 길’

    2002년 정책대결의 향방은 경제상황에 따라 상당 부분 결정될 것이다.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의 정책 실패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이며, 경제 상황이 악화될수록 비난은 더 거세질 것이다. 이 과정에 야당의 논리가 일관된 이념에 기초하지 않고 비판 위주로 흐를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러나 대안 제시 차원에서는 여야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은 이미 ‘제3의 길’을 선택해 이념 스펙트럼의 중앙을 선점한 상태이고, 한나라당도 지금까지 견지해온 중도노선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나라당의 전략은 시장 원칙에 충실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지지하지만, 진보 영역으로 여겨온 복지와 사회 문제에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리라는 면에서 부시의 선거 전략과 유사할 것이다.

    다만 한나라당은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서는 이념적 비판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자신의 지지 기반인 보수진영의 이탈을 막고 그들을 묶는 수단이 필요한데, 표면적으로 이념 갈등이 심각한 남북관계에서 그것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관건은 양당이 표방하는 중도 노선의 일관된 추진 여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한나라당은 시장원칙과 민주주의에 충실한 개혁 정책, 그리고 강경한 대북정책만으로는 지지 기반인 영남권과 안정추구 세력의 지지를 유지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구조조정과 경제개혁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자신의 지지세력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는 방안 강구에 고심할 것이다. 2000년 대선에 부시가 중도노선을 선택했으나 공화당의 지지 그룹인 중상층을 위한 조세 감면을 약속했고, 취임 후 이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 역시 제3의 길을 추진하면서 자신들의 지지 기반인 서민, 중산층, 노동자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문제로 고민할 것이다. 이미 노동계와 농민은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처럼 2002년 대선은 한국에서 ‘제3의 길’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집권 민주당은 지난 3년 동안 구축해온 ‘제3의 길’ 통치 이념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념에 대한 국민의 공정한 심판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나라당 역시 민주당의 통치철학에 대응하는 이념적 메시지 개발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한나라당은 중도 노선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 메시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신문 정치 면은 온통 정쟁, 지역감정, 대권 암투, 정계개편 관련 기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제3의 길’을 둘러싼 이념 경쟁이 조용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02년 대선을 준비하는 여야의 고민은 미국의 정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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