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考試 권하는 사회

  • 곽대중

考試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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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시병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 사회를 한번 보십시오. 어려서부터 너는 커서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머리를 쓰다듬고, 10년을 매달렸어도 일단 합격만 하면 그 동안 쏟아부은 시간적· 금전적 대가를 어렵지 않게 찾습니다. 이런 사회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유능한 인재들이 고시에 몰리는 것은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밤새 내린 폭설로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사람들이 이른바 ‘고시촌’이라 부르는 신림 9동으로 올라가는 10번 마을버스는 더 이상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화랑교에서 멈춰버렸다. 할 수 없이 걸어 올라갈 수밖에. 차라리 잘된 일이다. P씨와의 약속은 3시간이나 남아, 그 동안 천천히 걸어 올라가며 탐색전을 벌이기로 했다.

신림 9동은 서울대 입구에서 신림사거리로 가는 도로를 입구로 하여 언덕으로 올라가며 이루어진 동네다. 먼저 저지대인 대로변은 고시학원으로 시작된다. ‘본원 출신 사법시험 전체수석, 행정고시 00명 합격’이라는 커다란 플래카드를 내건 학원들이 쭉 늘어서 있다. 그리고 이곳은 이른바 ‘다운타운’으로 술집, 당구장, 카페, 비디오방, PC방, 만화방이 가장 밀집한 곳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이곳이 정말 우리나라 고시 합격생의 90% 이상이 거쳐간다는 그 고시촌인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조금 위로 올라가 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보이는 건 온통 고시원과 독서실뿐.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둘러봐도 10여 개의 독서실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에도 몇 개씩 생기고 없어지는 독서실이지만 대강 300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독서실과 독서실 사이는 ‘고시 전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식당과 분식점들이 다리를 놓는다. 거기에 간간이 보이는 빨래방과 공인중개사 사무실, 그리고 서점. 이런 풍경이 언덕 중간까지 이어진다. 다운타운과 중간지대는 하루종일 지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대개는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의 젊은이들. 노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가파른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면, 고요함이 조금씩 더해간다. 다운타운과 중간지대가 공부와 잠, 먹는 곳을 따로 하는 신세대 고시생들의 구역이라면, 윗동네는 한방에서 공부하고, 잠자고, 주인 아줌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일체형(一體型) 고시생들이 많이 사는 구역이다. 할아버지 몇 분이 모여앉아 떠들썩하게 정치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복덕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예전엔 라면 먹어가며 고시공부해서 판검사 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요새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돈 있는 집 아이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거고, 집에서 받쳐주지 못하는 애들은 산 위에 있는 싼 집 알아보는 거고. 10여 년 전만 해도 고시원은 다 거기서 거기였는데 요즘 새로 짓는 고시원들을 보면 거의 호텔 수준이야. 그러니 이젠 고시공부도 돈 있어야 하는 거라고.”



이곳에서 30년간 복덕방을 해왔다는 이모씨(52)는 ‘빈고부저(貧高富低)’라는 표현으로 신림동 고시촌의 배치를 설명했다. 처음 고시공부를 시작하여 아직까지는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거나 경제적으로 유복한 환경의 고시생은 다운타운의 신축 고시원에 머무르고, 네댓 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면서 집안의 원조가 끊겼거나 부유하지 못한 가정의 고시생들은 산 위의 방을 찾아 점점 언덕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딱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그럴듯한 설명이다.

실제 이곳 고시촌의 방값은 천차만별이다. 잠만 자는 여관형인지, 숙식을 해결하는 일체형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방 하나를 칸막이만으로 막아놓은 10만원짜리부터 샤워시설을 갖춘 40만원짜리 원룸형 빌라까지 다양하다. 대체로 학원, 독서실과 가까운 저지대는 비싼 편이고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싼 방이 많다.

3만~5만명이 북적거리는 고시촌

신림동 고시촌에는 올빼미족이 많다.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가 아침 9시경에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아침식사를 거르는 대신 11시부터 1시 사이에 ‘아점’(아침 겸 점심)을 치른다. 이곳에서 하루 이틀 사는 사람들이 아니니 손맛 좋은 식당은 널리 알려져 있다. 떠들썩한 식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사법시험 원서 접수 기간이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올해 경쟁률과 출제경향에 대한 것들이다. 어젯밤 내린 눈을 걱정하며 휴대폰으로 고향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분주히 음식을 나르는 주인 아주머니는 “불경기라지만 이곳에선 별로 느끼지 못한다. 고시라는 제도가 없어지지 않는 한 신림동은 항상 수만 명의 고정 손님을 껴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신림동의 고시생 수는 대략 3만 명에 이른다. 지방에서 방학 동안 올라오는 사람들이나 학원강의만 청취하는 사람들을 합하면 신림동 식구는 5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럼 이들이 한 달 동안 쓰는 돈은 어느 정도일까.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여학생 세 명에게 물어보니 그들의 평균 생활비는 월 80만원선. 고시원비 30만원에 독서실비가 10만원, 학원수강료가 8만∼15만원, 밥값으로 15만원 정도가 든다. 여기에 책값, 기타 생활비를 합치면 80만원은 오히려 적은 액수다.

여학생들은 그나마 술이나 유흥을 별로 즐기지 않아 생활비가 적게 들지만 남학생들의 경우는 더 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대략 80만원을 평균으로 했을 때, 3만 명이 이렇게 소비하면 월 240억원. 물론 이들이 줄곧 신림동에서만 소비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신림동은 고시생들이 먹여 살리는 ‘고시 특구(特區)’라 할 만하다.

물론 전국의 고시생들이 신림동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야를 전국으로 넓혀보면 고시생들의 소비액수는 훨씬 커진다. 2000명을 뽑는 2000년 사법시험 1차 응시자 수는 2만3249명, 행정고시 응시자 수는 1만2556명이었다. 여기에 지난 한 해 기술고시, 법무사, 변리사, 공인회계사 시험에 응시한 인원인 5만5000여 명을 합치면,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10만 명에 육박한다. 전국적으로 이들이 시험공부에 쏟아붓는 돈은 천문학적 액수에 이르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고시의 폐해는 이런 물적 낭비에만 있는 것일까. 미리 약속이 되어 있던 고시생 P씨를 만나보았다.

P씨의 올해 나이는 서른둘. 고시 5수생이다. 고시생 하면 떠올리는 것은 부스스한 머리, 뿔테안경, 대강 깎은 수염, 칙칙한 검은색 코트…. 그러나 그건 80년대 중반쯤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신림동 고시촌의 젊은이들은 모두 말쑥한 차림으로, 외모만 보면 여느 젊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P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요즘 유행하는 더플코트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로 나타났다. 다짜고짜 무엇 때문에 그리 오랫동안 고시공부를 붙잡고 있느냐고 물어봤다.

“처음에는 정말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합니다. 그러다 한두 해는 훌쩍 넘어가죠. 첫 시험은 한번 보자는 식으로, 두 번째 시험은 정리해보는 식으로 말입니다. 보통 세 번째 시험쯤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덤벼듭니다. 그러다 안 되면 뭔가 실수가 있었나 보다 생각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서 한 해, 거기서 또 한 해…. 이렇게 해서 강산이 바뀐다는 10년을 절반 꺾게 되는 것은 기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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