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영자는 직원을 당근과 채찍으로 제어하고 싶어 한다. 당근은 보상(reward), 채찍은 공포(fear)다. 경영자는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게 승진이나 보너스 등 보상을 제시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해직, 승진 누락, 남앞에서 망신당하는 것 등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어 직원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몰아세운다.
이렇게 당근과 채찍을 사용해 경영하는 기업은 사실 노예제도를 운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직원을 자유의지가 없는 노예, 혹은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이다. 아이는 달래거나 혼을 내야 부모 말을 듣는다. 그러나 성인이라면 부모가 뭐라 하기 전에 스스로 자기 일을 알아서 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성인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갖는다. 그런데 유독 기업 경영에서는 성인인 직원이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며 아이 취급하는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는 겉으로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 억지로 시켜서 일하는 노예보다 자발적으로 일하는 시민의 작업 효율이 더 높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왜 현대 기업들은 이렇게 야만적이고 비효율적인 수직적 경영문화를 유지하는 걸까?
그 비난은 ‘경영(management)’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20세기 초 경영학자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Taylor)에게 돌아가야 한다. 테일러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해야 하는 각각의 작업을 정확하게 조직화된 단순 동작으로 세분화, 표준화했다.
이러한 테일러리즘(Taylorism)은 직원을 생각하는 사람(Thinkers), 즉 관리자와 행동하는 사람(Doers), 즉 노동자로 명확하게 구분지었다. 따라서 관리자는 계획을 세우고 아이디어를 내는 지적인 작업만 했고, 노동자는 현장의 반복적인 육체 업무만 했다. 서로 간의 업무가 완벽하게 분리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부문장 이상의 매니저는 기업 전략과 실행 방안을 연구하고, 그 밑에 있는 중간관리자급 이하 직원들은 하달되는 작업만 기계적으로 하는 이분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테일러리즘은 현재 전 세계의 모든 조직에 걸쳐 표준이 됐다.
이 테일러리즘을 극복해낸 회사가 바로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일본의 경제 상황에서 도요타는 제한적인 자원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Thinker와 Doer를 분리해 운영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하는 수 없이 현장 근로자인 Doer가 Thinker의 역할을 같이 해야만 했다. 도요타는 현장의 노동자에게 제품을 개선하고 문제가 생길 경우 라인 전체를 멈출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런 시스템에서 나온 것이 우리가 잘 아는 간반(Kanban·看板) 시스템과 Just-In-Time 같은 혁신이다. 이들은 Doer와 Thinker가 합쳐진 Thoer 역할을 해낸 것이다.
동기야 어찌 됐든지 간에 도요타의 Thoer들은 1960~70년대 제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도요타의 성공은 똑똑한 관리자 덕이 아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역량을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실 이렇게 Doer와 Thinker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Thoer의 등장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산업혁명 이전의 기업 대부분은 Thoer들에 의해 운영됐다. 장인들이 운영하는 공방에서는 모두가 기획을 하고 동시에 노동을 했다. 제공해야 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가치 복잡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드는 제품은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고 생산과 판매가 소비자와의 일대일 거래를 기본으로 형성됐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이러한 가치 복잡성이 급격히 하락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얼마나 비용을 낮출 수 있는지가 유일한 관심거리가 됐고 규격화된 생산만이 성패의 척도가 됐다. 표준화에는 성공했지만 그만큼 가치의 척도는 단순해진 것이다.
1970년대 들어 상황은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진행되면서 공급 능력이 수요를 월등하게 넘어서게 됐고 이에 따라 소비자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가 됐다.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이 대두했고 가치의 복잡성은 다시 산업혁명 이전의 수준으로 반등했다. 이러한 시대에는 테일러리즘으로 성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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