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이혼 조장, 가정 붕괴 등 공동체 가치를 파괴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근거가 없는 주장이에요. 그런 현상은 하드웨어 중심으로 사회가 빠르게 재편되면서 육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 데서 비롯된 문제지 페미니즘 탓이 아니에요. 페미니즘은 그 문제를 푸는 하나의 방안을 내놓았을 뿐이에요. 그 안을 합리적으로 따지면서 다른 양육 방식도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그 모색 과정에 남자들도 적극 참여하면서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가정도 살려야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 시점입니다.
그 전까지는 잘 살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다들 ‘아파트 평수나 늘리자’고 말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르잖아요. 열심히 산다고 아파트 평수가 커지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서울대 보내겠다고 해서 다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삶이 뭐냐, 이런 얘기를 하게 됐죠. 결론적으로 말해 파탄은 페미니스트 탓이 아닙니다.”
조한교수는 페미니즘에 대한 일부 비판론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에 따르면 ‘파탄’의 원인은 하드웨어 중심의 압축적 경제성장과 그것이 낳은 불균형, 거대 권력 국가주도적인 경제발전의 후유증이다. 그녀는 “파탄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이 사회의 문제를 풀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못박았다.
남녀관계는 권력관계
―여자가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일부 공산주의국가에서는 여자들에게 남자들과 똑같이 일거리를 주는 대신 국가가 아이들을 맡는 제도를 운영했잖아요. 그런데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죠?
“위에서 주도한 개혁의 한계죠. 가정까지 국가가 통제해 ‘애를 탁아소에 보내라’고 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 키부츠를 떠나는 부부들은 아이를 자기 손으로 키우고 싶은 사람들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잘 기르는 것, 이것이 대다수 사람에게는 가장 소중한 일이죠. 또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고. 그런데 남자는 밥벌이만 하는 생계 부양자로 전락했어요.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에서 소외되고. 남녀 두 사람이 같이 아이를 돌보면서 질 높은 탁아소에도 보낼 수 있는 캐어링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해요. 페미니즘의 목적은 가정파괴가 아니라 참 가정을 만들자는 거예요.”
―페미니즘에 대해 겉으론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속으론 남자처럼 되고 싶다거나 남자가 가진 권력을 뺏으려는 시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중 남녀가 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나도 남자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예전엔 평등을 얘기하며 억울해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세상을 망쳐 놓은 데 대한 분노가 있을 뿐이에요.”
―최근 페미니즘에 맞선 남성운동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성도 피해자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성해방운동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권리 문제만 집착하는 근시안적인 운동도 있고….”
―권리 차원이 아니고요. 사실 가부장제만 하더라도 지금의 남성들이 원했던 제도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잖아요?
“그래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니까요. 왜 남성들이 여성운동에 동참하지 않는지. 우리 아들은 너무 열심히 참여하고 있어요. 페미니즘운동 기획하고 성폭력방지운동에도 나서고.”
그녀의 진단에 따르면 지금 한국 사회엔 신뢰의 관계가 무너졌다. 경제발전 신화가 무너지면서 국가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그녀는 가정을 신뢰의 출발지로 본다. 부모가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 신뢰의 기본이 싹튼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나빠져야 남자들이 정신을 차릴 텐가, 하는 생각도 해요. 언젠가는 남자들이 우리(여자들)를 모셔갈 때가 있을 거예요. 장관 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뭐 중요하겠어요? 그 권력 가졌다고 행복할 것도 아니잖아요? 대안적인 힘에 만족하는 마음이 중요한 거죠.”
그녀는 “남자들이 언제까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살려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남자들의 지배욕망이 문제일까요? 호주제 폐지에 대한 반응도 그렇고…. 집안의 중심은 남자가 돼야 한다고들 얘기한단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권력의 문제예요. 노예와 주인의 관계라든가 흑인과 백인의 관계에서 유추해 보는 것이 타당하죠. 그걸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안 되죠.”
매춘여성 인권 종중해야
―페미니즘은 남녀 관계를 지배와 권력 관계로 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그 지배욕을 생물학적인 욕망으로 간주하면 샛길로 빠지는 거죠.”
―어느 글에선가 남성을 ‘여성의 희생 위에 기생하는 존재’라고 표현하셨는데, 남녀를 너무 적대적인 관계로 보시는 것 아닙니까.
“적대적인 관계잖아요, 아니에요?(웃음) 그런데 흑인운동을 하는 것은 백인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려 하는 거잖아요?”
조한교수는 여자에게서 인류 구원의 가능성을 엿본다고 말했다. 여자는 애를 키우면서 그 애가 살아갈 세상을 고민하기 때문이란다.
“여자는 남자보다 제대로 된 고민을 할 위치에 있어요. 남자는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고 고민하는데 거기선 대안이 나올 수 없죠. 반면 여자는 자식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죠. 남자들에 대해 화도 나고. 세상을 망쳐놓고 그럴 수가 있나. 아이들이 방황할 때도 애들이 왜 저렇게 불안해할까, 여자는 계속 그런 걸 고민하죠.
제가 일하는 ‘하자센터(서울시 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에서 보면 청소부 아줌마는 아이들을 완벽하게 이해해요. 그런데 청소부 아저씨는 쟤들이 왜 저러나, 그러고 말죠. 그게 참 큰 차이예요. 남자가 행복하게 사는 유일한 길은 가장 가까운 여자와 소통하는 거예요. 그게 아마도 남자가 구원받는 길이 아닐까….”
―소통의 페미니즘이네요.
“달리 말하면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만드는 페미니즘이죠.”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겠지요?
“의식이 바뀌지 않으니 법이나 제도 등에 의해 혼이 나는 거죠. 미국의 스탠포드대학에서는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이 일어나면 학교가 엄청난 벌금을 물어요. 그래서 대학 당국에서는 엄청난 돈을 들여 변호사나 성폭력상담소 사람들을 초빙해요. 그들이 출석 불러가면서 교수들을 교육해요. 그런 식의 의식교육이 필요해요.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여자들도 더 이상 못 참으면 이혼해야 해요. 그래야 다음 세대에 여자들의 위치가 나아지죠. 여자가 ‘노’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어요. 그렇지 못하고 계속 끌려가 그 체제가 유지되면 세상은 더 나빠지겠죠.”
―매매춘 문제는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딜레마 아닙니까.
“문제가 복잡하죠. 그런데 남성 중심적인 성 개념이 바뀌지 않으면 남자들은 계속 소외된 쾌락을 찾게 되요. 여자들도 따라서 그걸 즐기게 되고. 어쩌면 남성 매춘부를 찾겠죠. 요즘 신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절제의 민주주의, 절제의 유토피아를 주장하는 것도 그런 취지에서죠. 페미니스트들이 내놓을 대안도 소외되지 않은 성을 찾는 거지, 남자가 하니까 여자도 한다, 그런 건 아니죠.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찰나적인 성을 즐기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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