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에 번역된 미국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의 신작 ‘제1의 성’에 따르면 미래 사회는 경제력 면에서 여성에게 유리한 사회다. 그 동안엔 근육의 힘이 필요한 산업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머리를 쓰고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는 산업이 주종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헬렌 피셔는 또 미래산업의 중심이 네트워킹, 곧 사람 간 관계를 중요시하는 산업이 된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그 점에서 여성들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다. 최교수는 “헬렌 피셔에 따르면 경제권이 여성에게 넘어가고 여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게까지 될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제1의 성’은 ‘뉴욕타임스’로부터 두들겨 맞았어요. 근거 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한 것 아니냐고 해서. 제 생각에도 헬렌 피셔의 얘기가 다 맞을 것 같진 않아요. 다만 여성의 경제력이 남성에 버금갈 정도로 커지리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제 생각엔 여성의 경제력이 굳이 남성을 능가하지 않더라도 여성이 스스로 충분히 먹고 살 때가 되면 지금의 남녀관계가 크게 바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신호들이 보입니다. 경제력이 풍부한 여자들은 결혼은 하지 않고 정자만 달라,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더욱이, 예전엔 정자를 누군가에게 받아야 했지만, 요즘은 정자와 난자를 인터넷에서 사고 파는 시대입니다. 제가 여자라고 칩시다. 좋은 직장 있고, 직장 탁아소에서 아이들을 맡아주고, 그러면 미쳤다고 남편을 모시고 사느냐는 거죠. 인터넷에서 정자 사 가지고 아이 낳아서 혼자 키우고, 내 배짱대로 살고, 내가 즐기고 싶으면 오늘 저녁에 어느 남자에게 전화해 ‘우리 집에 올래’ 해서 불러들여 즐기고…, 그런 시대가 오면 남자들이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나를 선택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그런데 예전과 달리 남자가 여자에게 별로 줄 게 없으니 굉장히 어렵죠.
그런 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성비를 가진 우리나라는 아주 위험해요. 어머니들이 병원에서 여자 아이들을 너무 지운 탓에 지금 여자가 귀하잖아요. 2020년엔 남녀 비율이 1.25 대 1이 된다는 통계가 있어요. 이건 굉장한 비율입니다. 남자 다섯 명 중 한 명은 여자를 못 찾는다는 얘기죠. 남자들이 여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죠. 엄청난 변화가 올 겁니다. 내기하라면 할 수도 있어요.”
무릎꿇는 남자들
―남아선호 사상이 오히려 남성 지배 사회를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는군요?
“붕괴시키게 되겠죠.”
―여자들이 자업자득이라고 하겠는데요?
“그런데 그걸 누가 주도했느냐, 여자들이 했어요.”
―참 역설적인 얘기네요.
“여성이 남자 아이를 원해서 그런 일을 한 거예요. 결국 딸을 낙태시키고 아들만 낳은 어머니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겁니다. 아들 중에 결혼 못하는 아들이 생길 테니까요. 또 여자가 귀하니 결혼하려면 딸 가진 집에 완전히 굽혀야 하지요. 그럼 결혼해서 기도 못 펴고 살 테고.”
―동물의 세계에서도 가부장제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까.
“포유류 동물세계에는 처첩제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수컷 한 마리가 여러 암컷을 거느리죠. 그런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겉으로 드러난 것과 속사정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조랑말을 연구하고 있는데, 수말 하나가 여러 암말을 거느려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나이 많은 암말이 지배권을 갖고 있습니다. 암말 여럿이서 집단을 이루고 그 암말 중 제일 우두머리가 수말을 하나 선택해요. 너 들어와, 하고. 그 수말로 하여금 여러 암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죠. 수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아낼 권위를 가진 것이 바로 나이든 암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 하면 음식을 먹을 때 보면 알 수 있어요. 만약 그 수말이 왕초면 제일 먼저 먹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나이든 암말이 먼저 먹어야 다른 말들도 먹기 시작해요. 사자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수사자가 암사자를 거느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암사자들이 만든 사회에 수사자가 들어와 얹혀 사는 겁니다.
침팬지 사회를 들여다보면 날뛰는 것은 다 수컷이에요. 겉보기엔 수놈이 권력을 쥐고 있죠. 그런데 누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누가 가장 좋은 음식을 먹느냐고 물으면 답은 암놈이에요. 이런 걸 보면 포유동물의 세계는 암컷이 지배하는 세계로 볼 수 있죠.”
최교수 분석에 따르면 고대의 인간 사회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즉 마을의 족장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데, 대개 그 조언자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였다는 것. 조선시대에 ‘대비마마’가 상당한 권력을 가진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본다.
―가부장제는 생물학적 근거가 없는 제도이군요?
“인간 사회의 독특한 문화적 산물이지, 생물학적·진화적 산물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여성들이 가부장제를 타파하려고 하는 건 지극히 정당한 행위로 봐야겠군요?
“동물들이 그러니까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고….”
―자연의 원리에 비춰 말입니다.
“자연의 원리로 보면 분명 가부장제는 근거가 없는 제도입니다. 가부장제의 기본사상은 남성이 중심이 돼 대물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대물림은 여성을 통해 이뤄집니다. 정자는 난자에 유전자의 반을 제공할 뿐입니다. 생식에 필요한 온갖 요소는 난자에 있어요. 난자는 유전자의 나머지 반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전자를 반씩 합해 생명체를 만들어냅니다. 난자에 비하면 정자의 기능이나 역할은 아주 미미한 것이죠.”
대물림은 여성 통해
―그렇지만 정자가 없다면 수정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생물 중엔 처녀생식하는 것들도 많아요. 또 알을 한 번 찔러만 주면 생식이 이뤄지는 것들도 있고요. 정자는 혼자서 자식을 못 만들어도 난자는 혼자서 자식을 만드는 예가 비일비재하죠. 그런데 인간의 경우는 그게 안 돼요.”
―인간의 경우는 절대 불가능한가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런 쪽으로 진화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그렇게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현대 생물학적인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앞으로 체세포로 사람을 복제하는 세상이 온다면 남성이고 여성이고 할 것 없이 다 스스로 아이를 낳을 수 있겠지요.”
―자기 체세포에서 복제해가지고요?
“자기 체세포에서 복제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난자를 살 수도 있죠. 난자를 사 시험관에서 자기 정자와 결합시켜 아이를 만드는 거죠. 그런 세상이 오면 결혼 풍토도 많이 바뀌겠죠.”
―동물들은 생식욕 때문에 섹스를 할지 몰라도 인간은 성욕이나 성충동이 생식욕구보다 강하지 않습니까.
“동물도 짝짓기를 할 때 자식을 낳아야지 하고 짝짓기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인간도 섹스를 하다 보면 저절로 자식이 생기게끔 자연선택이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섹스를 무지무지 좋아하게끔 진화했어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늘 성에 사로잡혀 삽니다. 다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가 있는 거죠.”
동물의 세계에서 유추하면 남성의 성충동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듯싶다. 최교수의 견해로는 성범죄의 범위가 넓어지고 처벌규정이 강화된 지금 남자들은 무조건 몸조심할 수밖에 없다. 때로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동물 세계에서도 수컷은 치근거리는 동물이고 암컷은 빼는 동물입니다. 원천적으로 (성충동을) 없앨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이성적인 수준에서 여성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규범을 만들어 지키는 수밖에 없는데, 최소한 직장이나 사회에서 여성에게 수치심을 안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죠. 어쨌든 한동안 시계추가 저쪽(여자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제까지 남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남자들이 완벽하게 조심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온 것이죠. 한동안 추가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세월이 좀 지나면 서서히 중심으로 돌아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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