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이유 때문에 박종웅의 소신을 말하는 글인데도 어쩔 수 없이 YS가 중심소재로 등장하는 걸 피할 수 없다. 박종웅의 생각이나 가치관은 대부분 YS와 관련된 발언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발언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홈페이지를 찾은 한 젊은이는 ‘전직 대통령을 따라 다니며 직언 하나 못하고 개인 비서질을 하고 다니는 한심한 현직 의원’이라고 그를 비난한다. ‘YS의 똘마니’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등장한다. 그나마 호의적인 측의 반응이래야 ‘쓸 만한 사람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도동 대변인으로 활약하기 이전만 해도 그는 정치권에서 꽤 괜찮은 국회의원으로 꼽히던 사람이다. 관련사안의 맥을 짚어내는 성실한 의정활동으로 여러 매체에서 국감스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국회문광위에서 ‘싸움닭’으로 통하는데 국감 때마다 쟁점사안에 대한 대정부 공세를 주도해서 피감기관의 ‘기피인물 1호’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정치성 질의에 치중하면서도 나름의 평가를 받는 것은 ‘각론’을 무시하지 않는 그의 집요함 때문이라는 게 한 언론의 평가다. 그는 93년에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오던 언론과 종교계의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연간 조단위를 넘어선다는 종교계 헌금문제를 제기하면서 종교계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고, 현재 현안이 되고 있는 언론개혁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과 척지면 안된다는 정치권의 금기를 깨고 언론사 기업공개, 언론사 세무조사, 언론인 재산공개, 족벌, 재벌언론의 소유구조를 집중 거론해 일부 언론에 밉보이기도 했단다.
상임위별로 평가하는 베스트의원에도 여러번 선정됐고, 특히 전체 의원의 40% 가량이 한달에 한 번 꼴로 회의에 빠진다는 국회상임위의 최다 참석의원에 포함돼 성실한 의정활동의 증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부 정치부 기자들의 평가처럼 학벌도 좋고 능력도 있는 국회의원이었던 것이다.
YS에 대해서만은 예외지만 그는 반골기질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박종웅은 1953년 부산 출신으로 경남중·고교를 졸업했는데, 경남고 2학년 재학시절에는 3선개헌 반대데모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서는 당시 서울대 5대 패밀리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이념성이 강한 경제법학회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금배지는 이총재가 준 게 아니다”
그가 YS와 인연을 맺은 건 그의 나이 27살 때 신민당 총재 기획실 총무를 맡으면서부터다. 그는 이후 민추협 기획위원, 통일민주당 총재공보 비서,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보좌역, 민자당 총재 보좌역 등을 맡아 YS를 보좌했는데 특히 87, 92년 대선 때는 YS의 연설문 작성을 도맡을 정도로 YS의 신임을 받았다.
문민정부 출범 후 민정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그는 한 달 만에 국회의원으로 변신하는 행운을 잡는다. 93년 3월 부산 사하구에서 보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때 YS는 자천타천으로 거론되던 10여명의 후보를 제쳐놓고 박종웅에게 공천장을 준 것이다.
특별한 지역적 기반도 없는, 당시 갓 마흔을 넘긴 젊은 비서관 박종웅 공천은 당내외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출마지역 지역구 사람들의 집단적 반발로 선거 기간 초창기에는 지역구 조직조차 접수하지 못하고 악전고투를 벌여야 할 정도였다. 더구나 대중적 지명도가 거의 없었던 박종웅은 자신이 YS와 함께 조깅하는 광경이나 청와대에서 업무 보고를 하는 장면 등을 담은 홍보전단을 통해 당시 국민적 지지율이 80%를 넘던 YS와 ‘밀접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이 선거에서 박종웅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YS의 절대적인 후광에 힘입어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 행운의 과정을 거치며 박종웅은 YS를 절대적인 존재로 마음에 아로새긴다.
“YS가 가는 길이 낭떠러지거나 누가 뭐라고 비난을 하더라도 나는 YS와 같이 갈 수밖에 없다. 그건 나에게 그런 ‘엄청난 인간적 배려’를 해준 ‘정치적 아버지’에 대한 당연한 의리이기 때문이다.”
그 심정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박종웅의 이런 인식은 다분히 탄력적이다. YS와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는 이회창총재에게 박종웅이 ‘배은망덕하다’는 비난까지 퍼붓자 한 기자가 그에게 묻는다.
“이총재가 공천을 해줘 당선했는데 이총재를 향한 질타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쾌하다.
“금배지는 총재가 던져주는 게 아니다. 총재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사람부터 공천을 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엄밀히 지역주민이 뽑아준 것이지 당에서 뽑아준 것은 아니라고 본다.”
93년 당시 민자당 총재이던 YS가 자신을 공천한 것은 ‘엄청난 인간적 배려’고 지난해 이회창총재가 자신을 공천한 것은 지역주민의 힘이라는 게 박종웅의 생각인 모양이다.
그의 정치적 위상이 예전과 다르니 그럴 수도 있기는 하겠다.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쌀 한말을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먹고 살 만한 시절에 쌀 한말을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은 양적으로는 같아도 질적으로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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