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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장애인 권익 지킴이 박종태

“장애를 무기 삼지 말고 당당히 살아야죠”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장애인 권익 지킴이 박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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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태씨는 선천적 장애인이 아니다. 하지만 성도 부모도 모르는 그는 장애인 못지않게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의 한 시립아동보호소에서 자란 그는 ‘자신의 이름이 왜 박종태인지’ ‘언제 태어났는지’ 전혀 모른다.

-아동보호소 시절은 어땠습니까.

“한마디로 악몽이었죠. 많은 아이들이 들락날락하고 안정감이 없는 곳, 가난한 부모들이 아이들을 내팽개쳤다가 찾아가는 곳…. 열두 살까지 살았지만 좋은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배를 많이 곯아서 그런지 이렇게 키가 작고 몸도 허약해요(그의 키는 155cm 남짓하다). 배고픔을 참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왜 그렇게 아이들을 배고프게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보호소 시절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영양실조로 죽어가던 원아들을 보던 일입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어요.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이곳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1970년대 초 열네 살이 되던 해 그는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직업연수원으로 터전을 옮겼다. 아동보호소 내에 개설된 중학과정을 1년 정도 마쳤을 즈음이었다. “이것이 학력의 전부”라며 그는 쓸쓸히 웃었다.

“직업연수원에 가서야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따뜻한 한 끼 식사를 하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몰라요. 따뜻한 밥만 먹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목공일을 배우기 시작했죠.”

1년 정도 목공 교육을 받은 그는 솜씨 좋은 기능공이 될 수 있었다. 15세 때 가구목공소에 취직했지만 돈을 버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맞는 일도 많았고 일이 힘들어 코피를 쏟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더 좋은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열여섯 되던 해 교통사고를 당해 온몸에 깁스를 한 채 1년여 동안 입원하게 되었다. 특히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쳐 인공관절을 해박아야 했다. 하지만 보살펴주는 이가 없어 치료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오히려 병원의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교통사고 당한 후 결핵 걸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용변 처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죠. 결국 병실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어요. 같은 병실의 환자들이 저를 다른 병실로 보내라고 항의까지 했으니까요. 병실 쓰레기통에 대소변을 해결했으니 얼마나 냄새가 났겠어요. 유일한 해결책은 밥을 먹지 않는 것이었죠. 먹지 않으면 용변 횟수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2∼3일에 한 번 한밤중에 몰래 용변을 봤어요. 나중엔 그것도 들통이 났는데, 정말 죽고만 싶었지요. 이런 모든 일들이 다 제가 잘못해서 생긴 것으로 알았죠.”

1년여의 힘든 시간이 지나 퇴원하긴 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한 그는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결핵에 걸리고 만 것. 다행히도 직업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수녀들 덕에 경기도 파주에 있는 천주교 요양소에 갈 수 있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가 찾아가는 이는 성직자들이었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영혼을 거두어준 하느님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요양소에서 건강을 회복한 그는 20세 때 공장의 일용직 노동자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확 바꾸게 해준 사람을 만나게 됐다.

“교도소 출소자를 상대로 자립운동을 펴는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까지 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만 했어요. 하지만 저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그분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죠. 그래서 목사님과 함께 교도소 출소자를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된 거죠. 5년간 활동했는데, 사실 쉽지 않았어요. 시행착오도 많았고 그때마다 적잖이 회의도 느꼈죠.”

결국 출소자 돕기 활동을 그만두었지만 그의 성격은 확 바뀌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던 그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 된 것. 그후 그는 대한항공 계열사인 한국항공에서 화물운송과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직업학교 시절 인연을 맺었던 수녀가 충주 성신 맹아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것을 알게 됐다. 맹아학교에서 수녀의 일을 도우면서 그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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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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