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앞서 이미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경험했고, 무려 64년간 영국을 통치하면서 최장수 재위 기록을 가지고 있는 왕은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1819~1901)이다. 그는 1897년 6월 22일 당시 78세 때 즉위 60주년을 맞았다. 1901년 1월 22일 만 81세로 병사할 때까지 64년 재위 기간 크리미아전쟁과 아편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고, 세포이 반란도 무난히 진압했으며, 산업혁명으로 경제발전을 이루고 참정권 확대와 교육 보급 등 영국을 최고 번영기로 이끈 인물이다. 이 때문에 후세 사가들은 그의 통치 기간을 ‘빅토리아 시대’라고 따로 부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획을 그은 시대로 평가하고 있다.
‘살아 있는 문화유산’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영국 국민의 사랑과 존경심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영국의 텔레그래프지(誌)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위 60주년에 즈음해 실시한 가장 위대한 군주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35%)에 이어 2위(24%)를 차지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현역 프리미엄을 감안하면 사실 빅토리아 여왕의 인기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조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3위는 15%를 받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1603·재위 기간 1558~1603)이 차지해 1~3위 모두 여왕이 싹쓸이한 것이다. 흔히 영국을 ‘여왕의 나라’라고 하는 게 무리도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19년 5월 24일 당시 왕이었던 조지 3세의 넷째아들 켄트공 에드워드 왕자와 독일 하노버 왕가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1820년 사망했고, 이후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교육과 통제 속에서 과잉보호를 받았다. 이 때문에 철이 든 후부터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로 알려진 콘로이 경(Sir John Conroy·1786~1854)의 교육 방침과 후견인 역할에 대해 줄곧 탐탁지 않게 여겼다.
빅토리아 여왕은 사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와 3명의 삼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 두 삼촌은 후사가 없었고, 또 한 명의 삼촌은 두 딸이 모두 어린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그는 공식적으로 다섯 번째 왕위 계승 서열에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1820년 그의 할아버지 조지 3세가 사망하자 큰 삼촌이 조지 4세(George IV·1762~1830·재위 기간 1820~1830)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조지 4세의 재위 기간 중인 1827년 둘째 삼촌이 사망하고 아버지도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후계자는 셋째 삼촌밖에 없었다.
셋째 삼촌은 조지 4세가 후사 없이 1830년 사망하자 65세의 고령으로 왕위에 올라 윌리엄 4세(William IV·1765~1837·재위 기간 1830~1837)가 된다. 그리고 그 역시 1837년 계승권을 가진 적자(嫡子)를 남기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마침내 빅토리아 여왕은 불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즉위할 당시 영국 정부는 휘그당(Whig Party) 출신 총리인 멜버른 경(Lord Melbourne·1779~1848)이 이끌고 있었다. 휘그당은 영국 최초의 근대 정당 중 하나로 1832년의 선거법 개정 후 토리당은 보수당(자본가, 지주 대표), 휘그당은 자유당(산업가, 소시민 대표)으로 발전했다. 산업혁명 결과 노동 계급의 성장으로 1906년 노동당이 결성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체계가 자리 잡게 된다.
어쨌든 멜버른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여왕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첫 결혼에 실패한데다 자녀가 없었던 멜버른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자상한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대했고, 빅토리아 여왕도 그를 신뢰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그러나 멜버른은 1839년 의회 선거에서 패하자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빅토리아 여왕도 어쩔 수없이 반대당인 보수 토리당(Tory Party)의 지도자 로버트 필 경(Sir Robert Peel·1788~1850)에게 총리직을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인사 갈등 문제로 그가 정부 참여를 거절하자, 다시 멜버른을 총리로 복귀시킨다. 이후 또 다른 선거 패배로 멜버른은 1841년 다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다음 총리직은 로버트 필이 맡는다.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에 오르고 3년 뒤인 1840년, 사촌인 색스코버그 고터 가(家)의 앨버트 공(Prince Albert·1819~1861)과 결혼한다. 여기에는 평소 어머니와 콘로이 경의 지나친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멜버른 경의 조언이 큰 몫을 했다.
어쨌든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를 사랑하게 된다. 독일 출신인 앨버트는 처음에는 영국 사회에서 다소 소외되었지만, 고결한 인품과 풍부한 교양으로 여왕을 사로잡았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훌륭한 조언자 역할을 해내며 멜버른의 자리를 대신했다. 앨버트의 현명한 중재 역할로 모녀 관계도 나아졌다.
결혼 후 빅토리아 여왕은 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1861년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가 사망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가 남긴 기록을 통해 어머니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닫고 어머니의 죽음을 비통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