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간 화해와 통일,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이산가족 상봉, 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의 교류로 민족 운명을 새롭게 진전시키려는 노력이 정상회담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웅변한다. 이 전환의 역사에 충실한 마음과 자세가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줄 것이다.》
지 지난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두 손을 굳게 맞잡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감동스러운 광경은 지난 50여년 간고(艱苦)의 역정을 겪었던 우리의 민족주의가 새롭게 소생하는 역사적 현장이었다. 우리의 분단은 남과 북을 하나로 묶는 민족주의가 올바로 서는 일에서 그 극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로써 한반도 주변 열강의 패권전략에 희생되지 않을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을 비롯한 주변 열강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가장 우려해온 것이 바로 ‘민족주의적 기류’ 또는 ‘민족주의적 정서’가 한반 도의 미래를 움직여 나가는 핵심적인 힘으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분단 해결의 과정에 민족 당사자 원칙이 더욱 확고해지고, 더 이상 외세가 개입 할 여지는 소멸되다시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우려는 우리에게 있 어서 그야말로 절절한 기원이라는 점에서 이번 정상회담이 끼친 영향과 공헌은 이 루 말할 수 없다.
우리의 경우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허무는 세계화의 노도 앞에서 민족주의가 마치 구시대적 유물처럼 여겨지는 상황이 지난 수년간 벌어지긴 했다. 그래서 남북 정상회담의 감동이 너나 할 것 없는 뜨거운 민족정서로 확산되면서 사태는 달라지고 있다.
한때 민족주의에 대한 강조가 세계화의 시대적 흐름을 소화 하는 일에 있어서 장애가 된다는 논의마저 나왔다. 아예 민족주의를 폐기하는 것이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논리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 내부에 살아 있는 공동의 역사적 생명력을 우습게 여긴 허황된 외세추종적 논리와 주장에 불과했음이 이번에 드러난 셈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서 어느 가까운 동맹국가와도 나눌 수 없는 민족적 감격과 역사적 유대감을 남과 북이 공유하는 체험을 함으로써 냉전체제의 해체과정에 무엇이 가장 분명한 민족문제 해법의 지표인가를 혼란없이 확인해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아무리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 현실인식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해도,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반만년 세월에 걸친 공동의 역사가 발휘하는 힘은 모든 차이를 압도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하며
우리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남과 북, 공동의 생존전략은 우리 민족이 하나라는 것, 그리하여 그 하나됨의 혈통적 뜨거움을 누구에게도 앗길 수 없는 고유의 자산으로 삼아 우리의 근·현대사를 그토록 고단하게 해왔던 열강의 패권 전략을 함께 이겨내고 새로운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을 합하는 것에 관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민족주의는 남과 북이 공동으로 수립하고 관철시켜나가야 할 국제전략에 있어서 흔들릴 수 없는 원칙이며 생명선이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 의 기본 성격은 이미 7·4 공동성명에서도 천명되었듯이 ‘자주’라는 한 마디에 명확하게 압축된다고 할 수 있다.
자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의 운명을 외세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의 민족적 역량에 기초하여 독자적으로 풀어나가는 자세를 의 미한다. 이것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제국주의 열강이라는 야수의 발톱에 제물로 바쳤던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 없다는 엄숙한 민족적 의지와 결단의 산물이다. 이 역사의 유산을 포기하는 선택은 그 결과가 어떤 것이 될지 자명하다.
물론 이 민족주의는 자주를 내세운다고 해서 폐쇄적인 수구 논리 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오늘날과 같이 지구촌적 규모의 교류와 개방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닫힌 민족주의’는 현실적으로도, 그리고 개념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민족적 자주를 희생시켜가면서 세계화의 흐름에 동행하는 것은 민족의 운명을 고난에 빠뜨리는 일일 뿐이다.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이를 중심으로 세계질서의 새로운 창출에 당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바람직한 세계화의 원리인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새로운 식민지로의 전락과정이 된다. 기존 세계화는 국제 금융자본에 의한 지구적 규모의 식민지화를 그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새로운 수준의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바는 대외적 친선 관계를 확보해나가는 작업이 민족의 자주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외세도 우리 민족의 자주를 침해하려 들 경우 남과 북 모두 순순 히 굴종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공동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6월13일 순안공항에서 같은 차를 타고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은 그 어떤 외세도 민족문제에 끼어들 여지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과시하는 장면이었다. 이는 남북 정상의 만남과 대화를 주변 열강이 배후에서 음모적으로 조정할 수도, 혹은 각본에 따라 마음대로 관리할 수도 없다 는 엄연한 현실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외세가 온갖 촉각을 세우며 우리 민족 의 단합과 공동의 국제전략 형성의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 민족 내부의 속 깊은 대화가 가능한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연출한 것은 기존질서 타파에 민족주 의가 어떤 파괴력을 가지게 될 것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바로 이 힘을 새롭게 추진하기 위한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사실에서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패권전략과 한반도
21세기 동북아 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대치선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형성될 것이라 는 점은 누구에게도 분명하다. 미국의 세계전략상 지금과 같은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속도와 성장규모는 매우 위협적이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장악은 향후 미국에 있어 사활적 관건이라고까지 할 만한 상황이다.
미국은 한·미·일로 이어 지는 삼각점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압축해나가는 방식으로 자신 의 패권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중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차단할 수 있는 국제적 동맹체제를 굳히는 것이 미국의 동북아 전략이 겨냥하는 목표인 것이다. 이를 관철하기 위한 지역적 기초는 한국의 자원을 미국의 전략적 고려에 따라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일본의 후방배치 내지는 전진배치까지 가능하도록 한 미·일 가이드 라인이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군사전략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의 성장을 억제하는 봉쇄정책을 펼치려 든다.
이에 더하여, 북한과 우호적 관계에 들게 되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을 측면에서 압박해 들어갈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미국은 대북한 정책의 기조를 저울질하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 내부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서 자신의 정책적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을까가 관심사항이다. 따라서 북한의 군사적 저항능력의 약화와 개방체제로의 유도가 대북정책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북한의 무장해제를 뜻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전략은 이미 그 의도가 노출돼 있다. 현실적으로 그 실현에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미국의 패권전략이 북한에 먹혀들기에는 역사적 경험과 전례, 그리고 북한의 외교적 원칙상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국이 우리에게 가해오는 압박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통한 대북 압박전술의 구사가 예견되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핵과 미사일 문제를 거론해달라는 요청은 바로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서는 한반도에서 냉전체제가 풀리고 남북이 대화한다는 것은, 대(對)중국 패권전략적 목표에 봉사하는 한 반길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한반도 관리전략에 차 질이 빚어진다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이러한 대중국 포위정책에 편승하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어차피 중국의 성장은 일본에도 막대한 부담이 된다. 그래서 중국이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삼는 상황을 보호막으로 삼아 자신의 무장력 강화를 꾀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 군사적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착착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해서 이 지역에서 지금 당장 미군이 물러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될 경우 군사적 경쟁과 패권전략상 중국과 직접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존재는 당분간 필요하다는 견해다. 일본으로서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을 미국을 통해서 관철하겠다는 셈이다. 이러한 판국에 한반도에 화해와 민족적 단결의 기류가 흐르는 것은 일본에 또 하나의 부담이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 과거의 ‘대동아 공영권’을 새롭게 복구하는 것이 내심 최대의 국가적 목표다. 그래서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대동아 공영권의 축으로 삼아 미국 유럽 등과 나란히 어깨를 겨누고, 세계 3대 지역통합에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고자 한다.
더욱이 현재 유럽이 경제통합을 일정 정도 완료하고 정치통합까지 지향하면서 유럽합중국이 등장할 가능성이 보이면서, 일본은 이에 뒤질 세라 아시아 통합의 기반을 마련하는 구상 에 몰두하고 있다. 그 기초는 일단 국제통화기금(IMF)을 대신하는 아시아통화기금(AMF)으로, 일본 엔화가 이 지역의 기축 통화가 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견제하고 있으며 일본이 아시아 지역에서 통합의 구심점으로 부상하는 것을 미국의 패권전략에 기본적인 위협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과 미국의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일본은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는 일에 미국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어느 단계를 넘으면 미국이 최대의 장애요소가 되는 딜레마에 처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과 은밀하게 연대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점에서 동북아시아 패권구도의 복잡성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미국과 중국 모두가 자신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 필요하면서도, 장래에는 두 나라 모두와 근본적인 대립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현실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정세는 일본의 이러한 위상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 작용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략이 대칭적으로 맞닿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이런 점을 고려하여 한반도 정세의 전개과정에 자신의 몫을 일정 부분 확보하는 것을 중차대한 문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일본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회복함으로써 통일로 인해 강력해질 이웃을 견제할 수 있다. 또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적 위상을 강화하는 조건을 마련하는 작업에 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간의 세력 조율과정에 자신에게 유리한 입지를 조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은 그간 북한과 관계를 개선함에 여러 가지 조건을 달면서 협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취했지만, 남과 북이 긴장완화를 향해 진력하게 되는 상황에는 그런 전략이 더 이상 효용성을 상실해 다급한 처지에 있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한반도의 민족주의는 일본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역사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본은 한반도의 대화재개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조성하지 않도록 발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중국의 시각
중국으로서는 한반도가 미국과의 대치선에서 자신의 안전판 구실을 해줄 것을 요구하는 처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한반도 내의 정세변화가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 강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을 당연히 경계하고 있으며, 이 점과 관련하여 북한과 전통적 유대를 재확인하고 새롭게 다지는 작업을 중요시하게 된다.
북한으로서도 이러한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중국을, 미국과 일본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역량의 하나로 삼고 있다. 이들 두 나라가 북한과 대립하고 충돌하는 문제는 결국 중국과의 대립과 충돌을 의미하게 된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국제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 직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은 이런 대목과 관련해서 의미있게 짚어봐야 할 부분이다. 이로써 중국은 미국이 한·미·일 삼각동맹체제를 통해 중국에 대한 포위전략을 추진하고 북한도 이 포위권에 포함시키려는 데에 강하게 제동을 걸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중국이 북한의 체제안정과 한반도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독자적인 영향권을 형성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중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이 가지고 있던 패권적 위상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이러한 국제적인 역학 때문에 지금 일본과 대립적인 관계가 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다. 미국과의 대립구도에서 일본이 중립적이거나 중국에 우호적인 위치에 서지 않을 경우, 현재 중국의 역량상 이 두 나라와 맞선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겠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한반도가 이들 두 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을 일정 부분 퇴각시켜줄 것을 소망하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할 시점이다. 그래서 한반도 전체가 자신에게 우호적이 되는 분위기를 마련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대(對)중국 포위전선에 한반도가 합류하지 않도록 하는 장기전략을 관철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주변열강 가운데 기존질서를 타파할 반미(反美), 반일(反日) 민족주의가 한반도에서 힘을 얻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민족주의가 대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전개되는 것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우리의 민족주의가 현재의 패권구도를 타파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에 긍정적으로 주목하지만, 이를 기반으로 조선족 주거지역에 대한 영향권 확대를 비롯해서, 중국대륙에 대한 팽창주의적 접근의도까지 간과하지는 않는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의미
이 점이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중국의 복잡한 심사다. 이런 측면은 향후 우리와 중국 간에 부담스러운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남한사회가 조선족 자치주와 접촉하고 교류하는 과정에 이미 이와 같은 팽창주의적 민족주의의 일단을 드러냈던 전례가 있다. 중국이 한반도 내부의 민족주의적 기류가 자신에게 어떤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구려 고토(故土) 회복을 민족주의 정서의 밑바탕에 은밀히 깔고 동북아시아의 중심국가로 부상하려는 극우 민족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중국을 자극하여 동북아시아 정세에 긴장을 조성한다는 점을 유의, 한반도 통일이 팽창주의적 민족주의로 가는 기초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부적으로 정리해낼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중국은 미국의 동북아시아 패권전략에 맞서서 이미 러시아와 연대를 강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동북아 전략은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또 하나의 변수로 작용한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급격히 퇴조한 현실에 대한 대응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의 형편상 과거와 같은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는 것은 일단 불가능하다. 러시아로서는 다만 자신이 빠진 상태에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패권구도가 재편될 경우, 이런 상황이 자신의 장래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러시아는 한반도를 세의 재편과정에 국제적인 발언권을 확보하는, 이른바 6자 회담(남·북·미·중·일·러) 형식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러시아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관여함에 중·러 연대를 기초로 한 ‘중국 지렛대’ 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지역 경제가 활력을 얻게 될 경우 여기에 참여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로서는 우선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남한의 강력한 진출의사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내세워 긴장이 완화된 한반도의 경제력과 결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이 성공할 경우 다른 열강에 못지 않은 기반을 이 지역에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일 수 없는 형편이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조만간 북한을 방문하는 것도 이런 각도에서 냉전체제 와해 이후 러시아의 동북아 전략이 본격화되는 시발점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한반도 주변 열강 가운데 현재 가장 국가적 역량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개입과 관여 정도가 낮을 수밖에 없으며 관건적인 구실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런 측면은 우리가 러시아와 더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놓을 수 있는 기반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러시아 홀대는 향후 러시아의 입지가 차츰 복구될 때 우리에게 외교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대처할 사안이다.
이렇게 주변 열강의 대(對)한반도 정책과 관련한 전략적 고려를 일별해 보면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한반도 통일이 우리 민족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라는 점. 둘째, 미국의 패권전략에 우리가 순응할 경우 장차 중국과 갈등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 셋째, 일본이 주도하는 신대동아 공영권의 출현에 대한 민족적 대비가 요구된다는 점. 넷째, 중국 러시아 등 대륙국가와 경제적 협력관계를 장기적으로 구상하고 이를 우리의 국제적 위상강화와 연결하는 민족전략이 필요하다는 점. 다섯째, 동북아시아 주변 열강의 군사적 패권주의가 이 지역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도록 집단안전보장체제를 만드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그런데 이런 점들과 함께 우리는 주변 열강의 패권적 관심과 우리의 민족적 관심이 충돌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우려할 만한 일은 하나둘이 아니다. 이는 향후 남북관계 개선과정에 어떤 돌발변수로 작용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로써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작업이 심각한 장애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돌발변수가 내부적으로 조성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한 반면에 국제적으로 압박해 들어올 경우 그 강도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적 개입의 정도로 볼 때 이 돌발변수의 진원지는 아무래도 미국이 될 개연성이 가장 높다. 미국은 한반도 관계개선과 통일논의가 자신의 통제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이 급격하게 완화해 자신이 장치해놓은 냉전체제의 기반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져 이 지역에서 갖고 있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군의 위상이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도 미국의 초조감을 더해주고 있는 요소다. 한국의 경우 매향리 문제 등을 비롯해서 미군의 지위와 위상에 대한 대중적 여론이 전격적으로 변하고 있는 점도 미국으로서는 위협적인 사태전개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미국의 동북아시아 패권은 엄청난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미국의 전략적 실체라 할 미군의 퇴각이 강력하게 요구되는 상황은 미국에 있어서 ‘악몽’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또 미국의 국제 무기시장이 위축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긴장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민족주의 정서가 강화되고, 남북간 당사자 대화와 해결의 원칙이 관철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공포에 가까운 현실이다. 민족주의적 정서에 대한 심정적 이해를 납득하기 어려운 다인종 사회인 미국은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로 한반도 전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준 민족주의에 내심 놀라고 있다.
남북 정상에 경악한 미국
이것은 미국으로서는 예상하기 어려웠던 점이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인간과 국가의 행동규범에 결정적인 기준이라고 여겨온 미국적 사고가 이로써 일대 타격을 받은 셈이다. 하여, 미국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 대하여 너무 기대를 갖지 말라는 식으로 민족주의적 기류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는 작업에 있어서 자신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출현해 대(對)한반도 전략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는 다시 말해서 군사적 압박정책을 최후의 카드로 쥐고 있던 미국이 이를 잘못 사용할 경우 남북 모두의 민족주의적 저항에 직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됐음을 의미한다.
남북 정상회담은 한반도 내에 남과 북이 공동운명체라는 인식을 인상적으로 각인시켰으며, 남북 모두 주변 열강의 패권적 의도에 대하여 절대 무지하지 않다는 점을 확인시켰다. 따라서 미국은 기존 정책과 전략으로는 이런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압박해 들어갈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하여 미국의 반응이 대체로 의례적이고 사무적이었다는 점은 미국이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차가운가를 입증해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미국 언론의 보도 또한, 한반도의 민족적 화해와 유대감 형성이라는 점에는 주목하지 않고, 이른바 ‘국제사회의 기준(사실은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는 변화를 북한이 보일 것을 강조하는 쪽으로 논조를 전개한 것도 미국의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단적인 예다.
바로 그래서 이제 향후 미국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주목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미국 내 보수세력은 아직도 대북(對北)강경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은 남북관계 개선 과정을 남한이 북한의 술수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하여, 북한이 무장을 해제하지 않는 한 동북아시아 정세의 불안 요인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지속적인 핵과 미사일 문제의 제기는 미국의 이런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대(對) 쿠바 정책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의식구조다. 더군다나 그동안 북·미 회담 등을 통해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한다고 생각하던 미국의 위상이 당사자 대화의 획기적인 진전을 통해 타격을 받았다고 여길 경우, 반격이 예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특히 정상회담 이후 대중들의 대북(對北)정서가 변하고 국가보안법의 존재 의의가 사라지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남한 내 일부 보수 강경세력과 미국의 연계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써 남북 정상회담의 긍정적 결실을 뒤집는 돌발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남북 정상들
가령,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때 신변안전에 각별한 주의가 기울여졌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답방할 경우 그의 신변 안전보장이 의외로 훨씬 더 어려운 과제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사태의 미묘하고 복잡한 측면이 드러난다. 우선 남한은 북한에 비해 거의 완전하게 외부로 노출된 사회이다. 내외의 공작적 움직임이 가능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체제다. 따라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선(動線)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작업은 엄청난 긴장과 사전준비, 그리고 치밀한 현장 작업이 요구된다.
남북 정상회담의 진전과 그 민족주의적 의의가 실체화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내외의 세력이 돌발적인 상황을 만드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한반도 전체를 어려운 지경에 몰아넣고, 정상회담의 성과를 졸지에 뒤집을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어떤 빌미로 한반도의 평화기조를 허무는 사태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남북 정상회담은 ‘매우 위험한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남북 양측 지도자가 사실상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이 회담에 나서고 있음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미국은 이미 여러 차례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미군이 주둔한다고 선언했으며, 정상회담 때 미국의 군사적 관심을 반영하기를 강력하게 요청한 바 있다. 이는 정상회담과 남북관계의 개선 과정이 이런 미국의 의도와 전략을 담아내지 못할 경우 그 결과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한·미간에 외교적 갈등과 마찰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이에 대하여 어떤 정책과 기조를 가지고 있어야 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즉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 우리의 민족적 입지에 문제가 생기고 우리의 민족적 이해를 우선적인 선결과제로 내세우면 한·미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이에 중간지대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선택은 실로 민족적 용기와 의지, 그리고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미국의 패권전략적 의도에 또 다시 끌려가며 남과 북이 공동으로 합의하고 실천에 옮기기로 한 내용도 스스로 뒤집거나 좌절할 수 있다. 앞으로 남북대화가 진전되면서 군축이 논의될 경우에도 미국은 이 문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군축 대상인 무기 대부분이 미국제라는 점에서도 미국은 한반도 군축논의가 국가적 이해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향후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얼마나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주변 정세에 대처하면서, 민족 내부의 응집력이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어렵게 조성됐던 남북간 화해 분위기가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일거에 공격적인 대북공세로 전환됐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지금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움과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북 화해와 연대의 기조는 이제 근본적인 반전은 어렵겠지만 위기를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실로 민족 내부의 단결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돼야 한다. 어떤 돌발사태에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이 요구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봐도 무수한 상호 무력대결과 돌발적인 유혈사태가 벌어져도 흔들림 없이 대화 기조를 유지하면서 중동평화에 진력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모델이 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서로 무수한 희생을 겪었어도 이를 보복 차원에서 대응하지 않고 평화를 ‘양보할 수 없는 원칙’으로 삼아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만일 이 원칙이 무너졌다면 중동평화는 깨지고 무수한 전쟁과 살육의 역사가 되풀이됐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직면하게 되는 과제다. 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경우 남북관계는 언제 어떤 회오리바람에 휘말리게 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 작업은 실로 깊은 인내와 민족 공동의 신뢰와 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7·4 남북 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자주’의 원칙과 함께, ‘평화’와 ‘민족대단결’이 얼마나 귀중한 출발점인지, 또 지속적으로 유지돼야 할 남북관계의 기초인지 알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외세는 바로 이 3원칙 위에서 전개되는 남북관계, 민족주의의 성장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역사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선택할 길은 분명하다. 그것은 민족공동의 국제전략을 수립하여 한반도 주변 정세에 전방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기존 대외관계의 중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민족적 입지가 열강의 패권구도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차원의 전략이라 하겠다. 이러한 기본적 자세전환이 없고서는 우리의 민족적 위상은 열강의 보조세력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열강들의 진영짜기’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는 발상이다. 한반도의 정상회담을 전후로 해서 일단 외견상 한·미·일과 북·중·러라는 양대 축이 대칭을 이루는 신냉전적 진영이 형성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남과 북이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미·일과 중·러의 잠재적 진영 대립에 남과 북이 가세하지 않는 한 이는 열강들간의 패권대결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른바 한·미·일 3각 공조체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며, 북한은 북·중·러의 관계가 이 3각 공조체제의 대칭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해야 할 것이다.
냉전체제가 미국과 소련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바로 이런 역사를 한반도에서 폭발적으로, 그리고 대리전으로 치른 것이 6·25전쟁의 여러 가지 성격 가운데 일면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또 다시 열강들의 진영 대립에 끼어들어 우리 민족의 운명을 제물삼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대외관계상 친선교린(親善交隣)의 원칙은 유지하지만, 진영짜기의 논리는 수용하지 않는 ‘영세중립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열강의 진영 대결이라는 패권주의에 우리 민족이 빨려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국제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둘러 동북아시아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결성해야 한다. 이것은 열강간의 패권전략을 견제하는 효과를 가져옴과 동시에 우리의 중립적 위상에 대한 국제적 보장으로 이어지는 작업이다.
이와 함께 이 지역의 군축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낀 중립국가 같은, 자칫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한 처지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축논의에 가장 중요한 대목은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새로운 군사무기 개발과 도입을 강력하게 억지하는 상호감시체제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 체제가 존재하지 않는 한 군축 논의에 실질적인 성과는 기대할 수 없다.
또한, 남과 북의 대외관계를 공동으로 논의하고 추진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것은 연방제적 기구가 될 수도 있고 연합국가적 기능을 만드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남과 북이 한반도 주변 정세를 함께 풀어나가면서 공동대응의 기초를 축적해나간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서 서로를 압박했던 기존 대외관계에서 자유로워지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는 남과 북이 대외적으로 맺고 있는 상호방위조약 등을 재검토해서 남과 북이 서로 적대적인 상황에 내몰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남과 북을 겨냥한 열강의 군사전략이나 조약 등을 폐기 내지는 수정하라고 공동으로 요구하는 내용도 빠질 수 없다.
이는 결국 일차적으로 주한미군의 지위 변경 내지는 철수 등의 문제를 내부적으로 논의하는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사안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문제는 그동안 공백지대로 존재했던 일부 주권 영역을 회복하는 일인 동시에 남북 공동의 국제전략을 세우는 과정에 중대한 장애요소를 해결하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도 미군이 철수하게 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어떤 동북아 전략을 세울것인지 벌써부터 숙의에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우리도 장기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과 같은 기류가 계속 흐르게 될 경우 미군철수는 거의 필연적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그간의 사회적 금기를 풀고 전면적이고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검토해야 한다. 그것이 향후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확고하게 하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중립적인 진영불가담의 논리를 구체화할 수 있는 기초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경제부문의 공동기구만이 아니라 군사·외교문제에 대한 공동기구를 발전시켜나가는 노력이 좀더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와 작업을 진행해나가는 과정에 내부적인 장애는 역시 국가보안법이다. 북을 주적(主敵)으로 상정한 법체제를 그대로 놓아두고 남과 북의 공동전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작업 자체가 현실에서는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상위체계인 민족전략의 구상과 모순된다. 이 법적·제도적 장애와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국가보안법의 전면적인 철폐와 민족 내부의 협력을 촉진하는 장치를 새롭게 마련하는 것이다.
의미 사라진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은 이번 정상회담의 영향으로 인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결정적으로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은 한국의 기득권 세력, 또는 보수반공세력의 기반이 베를린의 장벽처럼 허물어진 것과 같은 경험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찬양고무죄에 걸리는 상황은 이미 종식되고 만 것이다. 대중의 대북(對北)인식은 혁명적일 정도로 급속한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민족 내부의 응집력에 매우 중대한 힘이 되고 있다. 이에 역행하는 국가보안법은 그 존립 근거를 잃었다.
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족쇄가 완전하게 풀려야만 우리 민족 공동의 전략과 합의체제는 원활하게 가동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보안법은 민족공동의 잠재적 역량 결합을 억눌러온 구시대적 악법이며, 하루라도 빨리 폐기돼야 할 법이다. 국가보안법 폐기는 우리 사회에 남은 냉전유산을 완전히 청산하는 작업이자, 그로써 우리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자유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역사의 전환을 가져온 것처럼 우리 민족사의 굴레를 벗기는 놀라운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 분열과 적대관계를 법적으로 보장 내지 강요해온 국가보안법이 철폐되는 조건 위에서 세워지는 민족 공동의 생존전략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새롭게 소생한 민족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이다. 또 우리 민족의 국제적인 행동반경을 놀랍게 확대해나갈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내부의 역량을 새롭게 발견하고 깨닫게 할 것이며 자신감에 찬 민족발전의 길을 걷게 할 것이다.
이제 우리 정치권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지가 숙제로 제기된다. 그간 여야간에 졸렬한 정쟁을 해오면서 유치하고 야비하게 싸우던 정치권이 민족의 절실한 요구를 감당하는 수준으로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정치가 이른바 대(對)노동당 정치의 개막을 알린다는 점에서 ‘대정치(大政治)의 발상’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정파간 이전투구 속에서 대권을 향한 주도권을 중심으로 정치를 보는 한 민족의 이해를 수용하지 못할 것이며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정치는 이런 점에서 대오각성하여 민족적 과제에 충실한 방향으로 자신의 몫을 규정하고 민족 공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 “우리 체제의 정체성을 흔드는 작업 운운’ 으로 기존 관성과 냉전체제의 잔재를 그대로 움켜쥐려 하는 것은 민족 공동의 이해와 대립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전환의 시대에 충실하자
오늘날 우리의 질서는 어디까지나 냉전체제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는 것은 정체성의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을 창출하는 역사적 과업인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존 질서와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세력과 정치지도자는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폐기되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 과정에서 남북의 현실과 민족주의적 자세를 가다듬은 우리 대중들은 이미 역사의 물결을 주도하고 있다. 이에 거스르는 세력과 지도자는 더 이상 역사적 정통성과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남북간 화해와 통일,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이산가족 상봉, 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의 교류로 민족 운명을 한걸음 앞당기려는 노력이 정상회담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 전환의 역사에 충실한 마음과 자세가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오랜 세월, 대립과 적대, 민족적 에너지의 낭비와 대외종속, 그리고 분단의 족쇄에 묶여 있던 반국적(反國的) 발전의 한계를 모두 청산하고, 남북이 하나 되어 굳게 손을 잡고 나가는 길에 하늘이 축복할 것이다.
이 역사의 은총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않고 귀중한 민족 자산으로 전환하는 책임은 누가 뭐래도 우리 민족에게 있다. 이 역사적 성업을 감당하는 일에 우리 민족 전체가 나서서 자유롭게 만나고, 논의하고, 뜻을 합해 가는 과정이 펼쳐지면 세계는 놀랄 것이며, 주변 그 어느 열강도 이를 교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얼마나 우수한 역량을 가진 공동체이며 세계문명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입증해낼 것이다. 역사의 신(神)은 이제 우리 민족에게 미소짓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