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납토성 발굴은 그간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교과서를 다시 쓰게 할 정도로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한국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의 ‘트로이 목마’다. 풍납토성 유적 및 유물 발굴로 웃는 학자들도 있는 반면 ‘우는’ 학자도 적지 않다. 》
1980년에 작업을 시작한 이후 91년에 출판된 이 백과사전은 원고지 총 42만 매 분량에, 분류 항목은 6만5000개로 돼 있고, 동원된 자료는 4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전에는 최근 사학계와 고고학계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풍납토성’ 항목이 없다.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역사를 다시 쓰게 할 정도로 위력적인 역사 유적으로, 이른바 ‘한국판 폼페이 유적’에 비유되는데도 말이다. 현재 풍납토성은 ‘삼국사기’를 집필했던 고려의 김부식조차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다고 말했던, 한성백제(BC 18년∼AD 475년)의 도읍터이자 왕성인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또 토성 유적에서 유력한 증거들도 속출하고 있다.
백과사전 편찬 당시 전문가들이 풍납토성에 대해서는 수록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해서 일부러 뺐거나 아니면 실수로 빠뜨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부러 뺐다는 인상이 짙다. 왜냐하면 이 사전에서 풍납토성이란 항목은 없는 대신 여기서 출토된 대표적인 토기, 이른바 ‘풍납동식토기’는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풍납동식토기란 1964년 당시 풍납토성 일대를 시범 발굴한 김원룡교수(서울대 고고미술학·93년 작고)가 그 발굴보고서인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에서 이름붙인 것으로, 지금은 경질무문토기나 중도식토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경질무문토기란 글자 그대로 단단하면서도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뜻이며, 중도식토기란 이런 류의 토기가 1970년대에 전면 발굴된 강원도 춘천의 중도라는 지역에서 많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이 백과사전에는 항목마다 집필자를 꼭 밝히고 있는데, 풍납동식토기는 역시 이 이름을 붙인 김원룡 교수가 집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이 사전은 풍납토성에서 나온 유물은 표제항목에 실어놓으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토기가 출토된 풍납토성은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풍납토성은 그렇다 치자. 풍납토성과 함께 초기백제(한성 백제)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던 몽촌토성과 경기 하남 이성산성은 어떨까? 둘 다 어엿하게 사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몽촌토성 집필자는 백제 성곽 연구의 권위자로 당시 충남대에 재직하고 있던 성주탁 교수이고, 하남 이성산성 집필자는 1986년 이후 이곳 발굴을 도맡아온 한양대박물관장 김병모 교수(현 한국전통문화학교장)다. 그런데 몽촌토성에 대한 성주탁 교수의 설명에서 다음 구절이 주목을 끈다.
“특히 (몽촌토성과) 이웃하고 있는 풍납동 토성은 서기 1세기 경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양쪽 성(풍납과 몽촌)이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성을 축조할 당시 지표면에서 주로 회백색연질토기 등 삼국시대 전기(前期) 유물이 출토될 뿐 삼국시대 후기나 고려시대의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토성은 백제시대 초기의 건국지로 알려져 있는 위례성으로 추정되고 있어 주목되는 성지(城址)다.”
성교수는 몽촌토성을 얘기하면서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 김원룡 교수가 풍납동식토기를 집필한 것으로 보아, 이 백과사전이 편찬될 즈음에도 우리 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을 나름대로 주목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홍수가 발굴한 풍납토성
그런데도 풍납토성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게재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풍납토성이 세상에 어떻게 알려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풍납토성을 처음 발굴한 것은 사람이 아니다. 1925년 한반도 중부를 강타한 ‘을축년 대홍수’가 지나간 다음 풍납토성 남쪽 성벽 가까운 곳에서 한 항아리가 모양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청동초두 2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초두란 주전자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주로 제사 같은 신성한 의식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이다. 실제 요리에 사용됐을 수도 있겠으나 당시 상당한 고위층이 사용한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이곳에서는 청동초두 뿐만 아니라 과대금구와 유리구슬을 비롯한 중요 유물이 함께 확인되면서 아유카이(鮎貝房之進) 같은 일부 일본학자는 1934년에 이곳이 바로 ‘삼국사기’가 말한 하남위례성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어떻든 이곳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풍납토성은 1936년 고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풍납토성은 곧 잊혀졌다. 왜냐하면 1939년 역사학자 이병도(1989년 작고)가 ‘진단학보’에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는 아유카이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백제가 초기에 고구려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사성(蛇城)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이 이후 통설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풍납토성=사성’이라는 이병도 학설이 근거가 박약한 언어학적 지식을 기초로 했다는 점이다. 이병도는 하남 춘궁리 일대를 하남위례성 터로 비정하면서, 풍납(風納)의 경우 그 지명을 순 우리말로 풀면 ‘바람드리’가 되니 사성(蛇城)의 순 우리말인 배암드리와 비슷한 고로 풍납토성이 곧 사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첫째, 사성이 백제 당시에 배암드리라 불렸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고 둘째, 풍납 또한 백제 당시 지명이 풍납 혹은 바람드리였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며 셋째, 설사 그렇다 해도 배암드리와 바람드리가 같은 말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만족시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는 철저한 문헌고증과 비판을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웠던 이병도식의 실증주의가 얼마나 겉다르고 속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그런데도 풍납토성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성으로 굳어졌다.
을축년 대홍수 후 풍납토성은 한동안 암흑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1964년 여름, 당시만 해도 민가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황무지 같은 풍납토성에 삽과 괭이를 걸머진 대학생들이 무리지어 나타났다. 학생들은 교수의 지시에 따라 풍납토성 안쪽 이곳저곳 몇 군데를 골라 땅을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3학년 재학생들이었고, 학생들을 지도한 선생은 김원룡 교수였다.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생긴 때가 1961년이고 국내 최초로 이 학과 창설을 주도한 이가 김교수인데, 그는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는 등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태두로 꼽히는 인물이다.
여하간 서울대 학생들이 풍납토성 발굴에 들어갔던 1964년은 고고인류학과 창설 4년째로 첫 번째 졸업생 배출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당시 이 학과 3학년 과목 중에 고고학 야외실습이란 게 있었다. 명색이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인데 발굴 한번 못해 보고 대학을 졸업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지 김교수는 이런 과목을 개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고학 야외 실습장소로 택한 곳이 바로 풍납토성이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풍납토성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재학생들의 실습 도구였던 셈이다.
그러니 당시 발굴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발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성인 몇 명이 들어가 설 수 있을 만한 구덩이 몇 개를 파고는 어떤 유물이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형편없는 발굴이었지만 이것을 토대로 한 김원룡 교수의 풍납토성에 대한 평가는 충격적이라 할 만했다. 이 시범발굴에 대한 보고서는 1967년 서울대박물관 학술총서 제3권으로 나왔는데, 김교수는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과 거의 동시인 기원후 1세기에 축조돼 한성백제가 멸망한 5세기쯤까지 사용된 성”이라는 견해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김교수는 이 보고서를 낸 같은 해에 “풍납토성 발굴로 보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는 요지가 담긴 기념비적인 논문인 ‘삼국시대의 개시에 관한 일고찰’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학맥이 없어 버림받아
그런데 김교수는 어찌된 셈인지 풍납토성 발굴 보고서에서 풍납토성이 사성이라는 이병도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상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김교수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믿을 만하고 풍납토성이 기원후 1세기경에 축조됐다고 판단했다면, 풍납토성은 결코 사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성’이라는 단어는 백제본기에서 딱 두 군데 등장한다. 그 첫째가 책계왕 원년, 즉 서기 286년에 “고구려 침입에 대비해 아차성과 사성을 쌓았다”는 대목이요, 둘째가 한성백제가 멸망하던 개로왕 21년(475) “사성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보아 사성은 286년에 처음 축조된 것이다.
김교수가 ‘삼국사기’ 기록을 신뢰하고 풍납토성이 기원후 1세기경에 축조됐다고 믿었다면 3세기 후반에야 축조된 사성이 풍납토성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게 이병도나 김원룡은 약속이나 한 듯이 그 근거를 잘못 들이대고 말았다.
그런데 참말로 어이가 없는 점은 풍납토성이 사성이라면서 북치고 장구친 이병도와 김원룡의 주장이, 명백한 결함이 있는데도 얼마전까지 우리 학계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통설이 되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십제(十濟)라는 이름으로 한성(漢城)에 도읍했던 시기의 왕궁인 하남위례성 후보지 중 하나로 꼽히는 풍납토성은 왜 이렇게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을까?
기자는 몽촌토성이나 이성산성의 경우와는 달리 풍납토성은 이곳 발굴을 독식하거나 주도한 특정 학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몽촌토성의 경우 이곳을 일찌감치 백제왕성으로 지목한 김원룡 교수로 대표되는 서울대라는 든든한 백이 있었고, 이성산성도 한양대박물관이 10여년 째 발굴을 전담하고 있는 데다 이곳을 관할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대단한 애정을 쏟고 있는 터였다.
이에 반해 하남위례성의 후보지로 가장 말석에 자리잡고 있던 풍납토성은 처음부터 버려진 땅이었다. 몽촌토성 왕성론을 주장하는 김원룡 교수가 이곳을 팠지만 야외실습 대상일 뿐이었고 애초부터 ‘사성’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풍납토성이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리지 못했다 해서 항의하는 학자도 단체도 없었다. 학맥이 없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풍납토성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버림당한 풍납토성에는 이후 수많은 건물과 사람들이 들어찼던 것이다.
풍납토성 최대의 비극이 이곳 발굴을 독점한 특정 학맥이 없었다는 것이라면, 그 두 번째 비극은 한국고대사학계 태두(이병도)와 한국고고학계 대부(김원룡)라는 두 사람의 ‘풍납토성=사성’이라는 주장이 학설을 뛰어넘어 어느 누구도 감히 부정을 하지 못할 만큼 권력화했던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권력화의 단적인 보기는 몽촌토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몽촌토성이 문화유적으로 등장한 것은 1916년에 이뤄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보고에 의해서였다. 그 후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80년대 초 88올림픽대회 개최지로 서울이 확정되고 이곳을 포함한 주변 일대를 올림픽공원으로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몽촌토성이 백제왕성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는 이성산성이 기대했던 백제의 흔적 대신 신라 유물을 대거 쏟아내면서 하남위례성 후보군에서 탈락해버리자 백제왕성 제1후보로 몽촌토성의 콧대가 더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몽촌토성은 83년 이후 87년까지 서울대박물관이 주도한 6차례의 연차 발굴과 이에 따른 정비 복원이 이뤄진 뒤부터 97년 풍납토성이 발굴되기까지 10년 넘게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기 힘들만큼 유일한 백제 왕성 후보였다.
여기에 김원룡 교수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의혹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김교수는 이미 67년에 몽촌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는 주장을 편 바 있고, 몽촌토성 발굴 작업에도 주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촌토성은 유례가 없는 대규모 발굴 작업에도 불구하고 백제왕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쏟아내지 못했다. 더구나 출토된 목탄과 목재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로도 3세기 이전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 관련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이런 결과는 설사 이곳이 하남위례성이라고 해도 3세기 이후에나 그런 구실을 했을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88올림픽개최 를 즈음해 너도 나도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아이러니컬한 대목은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한 학자들도 하나같이 그렇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점이다. 89년에 나온 몽촌토성 마지막 보고서 서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간의 조사성과에 의하여 몽촌토성의 역사적 성격의 일단이 드러나면서 이 성을 한성시대의 중심적인 거성(居城) 또는 도성(都城)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궁궐지나 관청지 등의 내부 시설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어 몽촌토성의 성격 규명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몽촌토성=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 보고서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몽촌이 왕성이라는 고고학적 증거는 그 때까지 단 한군데도 없었다. 정황으로 보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몽촌토성의 성격규명에 장애가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몽촌이 꼭 백제왕성이어야 한다는 발굴단의 의지를 내보임과 동시에 이곳이 그렇다는 선입견 혹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하튼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이 낳은 걸출한 스타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몽촌토성 제친 풍납토성
다시 풍납토성 얘기로 돌아가보자.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서북쪽 성벽이 한강과 맞닿았던 서울 송파구 풍납1, 2동의 풍납토성은 애초 성벽 둘레만 3.5㎞에 넓이 22만6000평이나 되는 국내 최대 규모 성곽이다.
이런 풍납토성이 몽촌토성 대신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최근 2~3년 사이의 일이다. 풍납토성이 유력한 하남위례성 후보지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1년 간격으로 개최한 특별전 두 군데서 확연히 감지된다.
98년 10월20일 국립중앙박물관은 ‘고고유물로 본 한국고대국가의 형성’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특별전은 부산시립박물관과 국립전주박물관으로 옮겨가며 다음해 3월21일까지 계속됐다.
특별전을 개최할 경우 행사 주최자는 반드시 전시 물품에 대한 풍부한 원색 사진자료를 담은 도록이라는 것을 발간하게 된다. 철기문명 시작과 이를 통한 고대국가 형성을 탐구한다는 뜻에서 마련된 이 특별전 또한 도록이 나왔다.
이 도록은 제3장 3절에서 ‘백제의 형성’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도록에서는 “(백제) 토성으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는데 풍납토성의 경우는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시기 및 성격이 분명하지 않다”면서 “몽촌토성은 1983년에서 1989년에 걸쳐 연차적인 전면조사가 실시되어 한성기의 도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보아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풍납토성보다는 몽촌토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 특별전에 출품된 백제 유물 중 몽촌토성 출토품이 풍납토성 것보다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꼭 1년 뒤인 99년 9월20일 국립중앙박물관을 시작으로 2000년 2월6일까지 국립부여박물관과 국립대구박물관을 옮겨가며 치른 특별전 ‘백제’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제작한 특별전 도록은 풍납토성 출토 유물로 가득차 있다. 흙을 구워 만든 십각형 초석을 비롯해 풍납토성 주거지 발굴 전경, 무늬없는 전돌, 아궁이틀, 일종의 상·하수도관인 도관, 돌절구, 어망추, 숫돌을 비롯해 풍납토성 출토 유물들이 도록을 온통 도배하다시피 했다. 몽촌토성은 풍납토성에 밀려 바로 뒤에 나온다. 말하자면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의 자리를 꿰차기에 이른 것이다.
두 도록을 비교해 보면 불과 1년 전만 해도 여전히 백제 왕성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몽촌토성을 밀어내고, 풍납토성이 드디어 백제의 가장 중요한 성곽으로 올라섰음을 잘 알 수 있다. 두 도록 발간 사이의 그 1년 동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풍납토성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주인공은 역사고고학자인 이형구 교수(선문대)였다. 70년대에 대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80년대 초부터 96년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가락동 고분군을 비롯한 한강유역 일대 초기백제 유적 보존운동을 벌여 왔다. 이런 활동 중 하나가 1996∼1997년에 있었던 풍납토성 실측조사 사업이었다.
이미 94년에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임이 확실하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이교수는 97년 1월1일 신년 연휴에 풍납토성에서 실측조사 작업을 벌이던 중 토성 안쪽 현대아파트 공사장에서 백제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채 나뒹구는 것을 목격하고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신고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아파트 공사는 즉각 중단되고 공사장 2300여 평에 대한 문화재연구소의 본격 발굴이 이 해 11월까지 계속되게 됐다. 이것이 풍납토성에 대한 첫 본격 발굴이었다. 뜻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실시되는 이런 발굴을 구제, 혹은 긴급발굴이라 한다.
실평수 25평형 고급 주택
그런데 이곳에서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성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기를 비롯한 수많은 초기백제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단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나왔다.
유적과 유물 중 특히 관심을 모았던 게 20평이 넘는 대규모 건물터와 기와, 전돌(일종의 보도블록), 주춧돌이었다.
총 19기의 건물터 중 상당수는 일반 민가로 보기 힘들었다. 규모가 가장 큰 건물터는 실평수가 25평에 달했고 기와와 전돌, 주춧돌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일반 민가가 아닌 관공서 같은 공공건물이 분명했다. 어떤 건물터는 기둥과 서까래, 보같은 목조건물이 고스란히 불타 내려앉은 상태로 발견됐다.
더구나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분석 결과는 물론 출토된 목탄 및 목재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 대부분 축조 시기가 기원 전후로 나왔다. 한반도에서 기원 전후 시기에 목조 기와 건물이 있었다는 것은 풍납토성을 곧 왕성이 아닌 다른 건물로 생각하기 힘들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됐음에도, 더구나 그것들이 곧 왕성임을 증명해줄지도 모르는 중요성을 지닌 것들이었음에도 이곳은 보존되지 못하고 곧 아파트가 들어서고 말았다.
일부 학술단체와 언론이 보존 문제를 거론하기는 했으나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다만 풍납토성이 아주 중요한 백제 초기 성터라는 학술적 성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이 발굴은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됐다.
그런데 이 발굴이 있은 지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인 1999년 6∼9월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성벽 발굴이었다. 풍납토성 보존정비 계획의 하나로 서울시가 의뢰한 성벽 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맡았다.
발굴단은 원래는 3.5㎞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중 일부가 남아 있는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m 간격으로 골라 잘라 보았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성벽은 높이 5m가 될까 말까 했고, 너비는 맨 아래쪽이 기껏해야 20m 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성벽을 잘라가던 발굴단은 끝간데 없이 펼쳐지는 규모에 놀랐다. 형편없어 보이던 성벽이 잘라보니 맨 아래쪽 폭이 무려 40m, 높이만 9m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의 성벽이 백제 당시보다 많이 깎였을 터이고 또한 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이자 연못인 해자까지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백제 당시 성벽은 대단한 규모였음이 드러났다.
더구나 절개한 성벽 단면을 살펴보니 단순히 흙만 쏟아부은 게 아니라 아래층에는 두꺼운 뻘층을 깐 다음 10㎝ 정도 간격으로 흙을 다져 한켠 한켠 쌓아올린 판축토성임이 밝혀졌다. 비록 두 군데 밖에 잘라보지 않았지만 풍납토성이 한강과 바로 맞닿은, 구릉 하나 없는 평야지대임을 감안할 때 둘레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을 같은 수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처럼 거대한 성벽을 치밀하게 쌓았다면 그것을 왕성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풍납토성 발굴성과에 대한 설명회는 그 해 9월13일에 있었다. 언론과 관련 학자들에게 돌린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도자료에는 “이로써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보도자료를 손질하는 과정에 이 구절은 빠졌다. 하남위례성이라는 단어를 뺀 주인공은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그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굵직굵직한 국가 주도 발굴 작업은 거의 모두 지켜본 문화재연구소의 산증인과 같은 사람이다.
성벽발굴 의미를 모를 리 없던 그가 보도자료를 손질하던 마지막 순간에 하남위례성이라는 문구를 뺀 이유에 대해 스스로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하남위례성이라고 발표해버리면 자칫 이것이 국가의 공식 의견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도 성벽발굴로 볼 때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 될 개연성이 가장 큰 곳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러 가지 영향을 우려해 말을 극도로 아낄 뿐이었다.
어떻든 발굴단은 풍납토성의 성벽이 여기서 출토되는 경질무문토기 같은 유물들로 보아 이르면 기원 전후에 축조에 들어가 늦어도 기원후 200년 쯤에 끝났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록 보도자료에 하남위례성이라는 말이 빠졌지만 풍납토성 축조시기에 대한 이런 발표는 폭탄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건 아닌건 상관없이, 이 성을 쌓은 주인공인 백제는 늦춰 잡아도 200년쯤에는 이미 확실한 고대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후 200년 경에 폭 40m, 높이가 적어도 9m 이상 되는 토성을 3.5㎞나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또 이런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발굴단의 이런 발표는 지금까지 한국고대사 연구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한국고대사학자 대다수는 백제가 풍납토성 같은 거대한 성을 쌓을 수 있는 고대국가가 된 것은 3세기 중·후반 고이왕대 이후라고 보고, 그 이전 시기는 ‘원삼국’이라는 이상한 용어로 백제와는 구별되는 다른 사회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굴단 발표는 아울러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제가 기원전을 18년 만주지방에서 내려온 부여족 갈래인 온조집단에 의해 건국됐고, 이미 기원을 전후한 즈음에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장악한 절대왕권국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늦어도 서기 200년 쯤에 풍납토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이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9월13일 개최한 성벽발굴 현장설명회에서 조유전 문화재연구소장이 하남위례성이라는 문구를 빼는 대신에 한국고대사학계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신봉론자로 꼽히는 이종욱 교수(서강대)를 초청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교수는 ‘삼국사기’를 초기 기록까지 대폭 연구 자료로 수용해, 백제는 고이왕대 훨씬 이전에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날 현장 설명회에는 몇몇 원로 사학자와 원로 고고학자도 참가했다. 기자가 파악한 대로라면 이들 원로학자들은 고이왕 이전의 백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있었다 해도 한강 유역에서 조그마한 땅덩어리를 차지한 동네 국가였다고 보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성벽 발굴 현장을 둘러보면서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삼국사기’를 믿을 수밖에 없겠는데…”라고 하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물론 박순발 교수(충남대 고고학과)처럼 풍납토성이 늦어도 서기 200년쯤에 축조가 끝났을 것이라는 발표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면서, 축조시기는 일러야 3세기 초·중반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주장한 이도 있었다.
되살아나는 ‘삼국사기’
풍납토성 축조 연대는 사실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국사교과서나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을 통해 배운 백제는 서기 270∼280년쯤 제8대 고이왕대에 들어서서야 국가다운 국가, 이병도식 표현을 빌리자면 고대국가에 들어섰다.
이렇게 고이왕 이전 백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고대사학이나 고고학의 분위기는 일제 식민사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건국했고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장악한 왕권국가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가짜라고 몰아붙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식민사학은 서기 300~400년까지 한반도 중부 및 남부지방은 변변한 국가가 없는 원시미개사회로 설정했다. 왜가 4세기 이후 6세기 즈음까지 한반도 남부 어디엔가에 임나일본부라는 조선총독부 비슷한 기관을 만들어 놓고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 나오게 된 것도 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이 말이 되기 위해서는 고대 한반도에는 신라나 백제 같은 강력한 국가가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신라와 백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고대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식민사학자들은 서기 300년 이전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득실대던 이른바 삼한 78개 국가 중 사로국(斯盧國)과 백제국(伯濟國)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국 역사기록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을 신주단지 모시듯했다.
이렇게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는 태도는 국내학자들에게도 이어졌던 것이다.
물론 풍납토성이 서기 200년쯤에 축조됐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정확하다는 증거로 연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로 풍납토성이 이 때쯤 축조 완료된 것이라면 ‘삼국사기’말고 이런 백제의 힘을 설명할 만한 자료가 달리 없다는 점이다.
기자는, 풍납토성을 취재하는 동안 우리 학자들이 보여준 행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단행본이건 논문이건 우리 학자들이 쓴 머리말에서 가장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표현법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동학(同學)들의 지도편달(혹은 질정)을 바란다”는 것이요, 둘째가 “이번 논고(論考)에서 다루지 못한 이 문제는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요, 셋째가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다른 학문 분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고고학계나 역사학계에서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편달, 즉 채찍질을 바란다고 해놓고선 자신의 학설이나 주장을 비판하는 ‘동학’에게는 발끈하다 못해 사이가 틀어지기 일쑤다. 그리고 필자가 약속한 ‘별도의 논고’는 당사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율배반의 학계
이 두 가지와는 좀 색다르게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은 그동안 자신이 주장하던 학설이나 주장이 틀렸다는 유력한 증거가 나왔을 때 즐겨 쓰곤 한다. 풍납토성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지금까지 우리 고고학자나 고대사학자 대다수는 한성백제 시기(BC 18∼AD 475년) 왕궁이 있던 왕성으로 몽촌토성이나 이성산성, 혹은 하남 춘궁리 일대를 지목했다. 특히 몽촌토성은 아주 유력했다. 그러다 97년 이후 풍납토성 일대를 발굴한 결과 이곳이 백제왕성일 수도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튀어나옴으로써 몽촌토성을 백제왕성으로 보던 학자들 중 일부는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기존 학설을 수정하고 있다.
반면 몽촌토성을 백제왕성으로 주장하는 학설을 못내 포기하기 힘든 몇몇 학자는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런 반응과 함께 몽촌=백제왕성 학설파 중 나머지 일부는 “백제왕성이 풍납토성이라는 주장은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학자들이 불리할 때 흔히 쓴다고 보기로 든 그 표현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거나 “결정적인 증거” 운운하는 학자들이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몽촌=백제왕성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한 학자는 최근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풍납토성에 대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최근 새로 발굴조사중에 있는 풍납동 토성(풍납토성)은 백제의 왕성이 틀림없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풍납동 토성이 백제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신라 어떤 도성지(都城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를 하고 있어 축성의 주체 세력 및 시기와 관련하여 그 성격에 관한 판단에서 신중을 요한다.”
한마디로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 자신이 수십년간 내세운 몽촌=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은 신중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제도성에 대해 이 학자가 1987년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몽촌이 백제왕성이라고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이 눈길을 끈다.
“백제초기 하남위례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몽촌토성의 발굴조사에서도 성 안에서는 왕궁지로 추정될 만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특수용도의 유적만 확인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역시 성 남쪽 기슭에 왕궁을 중심으로 한 시설물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말로 보아 이 학자 또한 몽촌=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을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추정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명백한 자기모순이다.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판단을 내리기에는 신중해야 한다면서도 정작 자신의 지론인 몽촌=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은 신중치 못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에 대한 이런 반응과는 별도로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 속에 담긴 모순 또한 따로 짚어 보아야 한다.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말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내가 바로 하남위례성이오” 하는 따위의 금석문 출현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어떻든 이런 논리대로라면 경주나 부여, 공주도 신라와 백제의 수도가 결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주나 부여, 공주 또한 그렇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단 한 군데도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경주나 부여, 공주가 신라와 백제의 수도였음을 부인하는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는 적어도 강단에서는 단 한 명도 없다.
한편 문화재연구소의 성벽 발굴이 끝날 즈음 풍납토성 한 가운데쯤 되는 경당연립재건축아파트 건축 예정지에 한신대박물관이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9∼19층짜리 고층아파트 221세대가 들어설 이 부지는 공사면적이 2300평 가량 되지만 이 중 1000평 가량만 발굴됐다.
한국의 폼페이와 트로이
사실 풍납토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게 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굴 성과 만큼이나 탈도 많았다. 오죽했으면 보존을 우려한 재건축아파트 조합원들이 굴삭기를 동원해 발굴현장을 밀어버렸을까?
고고학자들에게 1000평이라는 면적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풍납토성은 달랐다. 97년 문화재연구소의 현대아파트 건축예정지 발굴에서 밝혀졌듯이, 이곳 또한 유물의 지뢰밭이라 할 만큼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묻혀 있었다.
이곳은 또한 풍납토성이 한국의 폼페이 유적이니, 한국의 트로이니 하는 유명한 말을 낳기도 했다. 폼페이는 한신대발굴단 일원인 권오영 교수가 풍납토성을 비유한 말이고, 트로이는 배기동 교수(한양대 고고인류학과)가 풍납토성 보존을 촉구하는 한 신문 기고문을 통해 밝힌 말이다. 풍납토성을 비유하는 폼페이니 트로이니 하는 말들이 풍납토성 보존에 큰 몫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곳은 우여곡절 끝에 일단 사적지정이 예고돼 보존키로 결정된 지역이지만 아직 발굴이 완료되지는 않고 있다. 어떻든 발굴 결과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200여 기의 유적이 확인되고 450상자 분량의 각종 초기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이중 특히 관심을 끈 것은 동서쪽으로 16m가 드러나고 남북쪽으로 현재까지 14m가 확인된 대형 건물터와 최대 길이 9m, 깊이 2.5m 가량이나 되는 대형 구덩이 유적이다.
커다란 돌을 초석 비슷하게 깔아놓은 이 대형 건물터는 규모가 엄청나거니와 구조로 보아 제사 터 같은 공공건물 시설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으며, 구덩이 유적은 쓰레기장이었던 듯 토기 같은 각종 생활용품이 쏟아져 나왔다.
구덩이 출토 유물 중에는 ‘대부(大夫)’ 및 ‘정(井)’이라는 글자가 적힌 토기가 있었고, 아래턱만 남은 말뼈 14마리 분이 확인됐다. 이런 유물들이 풍납토성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칠 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출토 유물이나 유적으로 보아 풍납토성이 백제 당시에 대단한 인구 밀집지역이었고 대단히 중요한 성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경당연립재건축아파트 예정지는 비록 재건축조합원들에 의해 일부가 파괴되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통해 풍납토성이 보존되는 길을 열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하겠다.
지난 5월13일 오전에 발생한 문화유적 훼손이라는 사건은 3일 만인 5월16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풍납토성이 정말로 하남위례성이라면 돈은 얼마가 들든지 이를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게 만들었고, 그 후속조치로 문화재위원회가 5월26일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한다는 결정까지 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풍납토성이 왕성이냐 아니냐, 혹은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축조되었느냐 하는 것보다 더욱 시급한 것이 보존이라 할 수 있다. 풍납토성은 학계에서 팽개치는 바람에 지금은 22만6000평이나 되는 토성 안쪽에 아파트 41개동을 비롯해 각종 고층빌딩이 들어서 있으며 이곳 거주 인구만도 4만명을 헤아린다.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경당연립아파트 건축예정지가 촉발한 풍납토성 보존운동에서 꼭 지적할 것은 이것을 주도한 세력이 학계가 아니라 언론과 시민단체였다는 점이다. 이 운동에 당연히 앞장섰어야 할 학계는 빠져 있다시피 했다. 이는 우리 학계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