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돌아왔다. 박지원(朴智元) 청와대정책기획수석(59).
- 그의 복귀를 두고 말이 많다. 그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번 과시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선택을 두고도 해석이 분분하다. 어떤 논객은 “김대통령이 박지원씨에게 중독(中毒)이라도 된 듯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박수석에 대한 DJ의 애정은 깊다. 과연 박수석에게는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DJ는 왜 박지원의 공백을 못내 아쉬워했던 걸까. 그리고 김대통령의 ‘박지원 중독증’은 과연 임기 말기 국정운영에 어떤 변수가 될까.
‘또 박지원’은 비록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최근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한 한빛은행사건 연루 의혹을 받아온 당사자를 다시 청와대 요직에 기용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이다. 반면, ‘역시 박지원’은 숱한 구설수에도 불구, 변함없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는 박수석의 저력에 감탄하는 반응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박수석의 정책기획수석 기용은 향후 정국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 김중권 대표의 등장과 함께 민주당으로 잠시 쏠렸던 정치권의 눈과 귀가 다시 청와대로 향하기 시작했고 김대통령과 박수석이 엮어낼 집권 말기 정치프로그램에 온통 신경이 쏠리고 있다.
박수석은 이런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선 청와대로 다시 돌아온 직후 달라진 모습이 하나 둘 드러나고 있다. 먼저 말을 아끼고 있다. ‘말을 아끼는 게 무슨 화제냐’고 반문하겠지만, 과거 대변인 시절, 누구를 만나도 막힘 없이 대화를 나누던 그가 돌연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할말이 없다”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으니 그것부터가 신기하다는 것이다.
지난 4월 초 박수석은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 식사를 같이했고 며칠 뒤에는 정치부장들과도 식사를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박수석은 “나를 만나봤자 나올 얘기가 없으니 기자들을 내 방으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독대(獨對) 관행 부활
그러거나 말거나 박수석의 방을 찾은 기자들에게 그는 차(茶)도 한잔 내놓지 않는다고 한다. ‘함께 차 마실 의사가 없으니 빨리 나가달라’는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박수석은 “이 정권 끝날 때까지 ‘로키(low-key)’를 유지하겠다”고도 말했다. 비서실장에 버금가는 실세라는 뜻에서 ‘왕수석’이라고 부르자 “성을 바꾸지 마라. 나는 박(朴)가지 왕(王)씨가 아니다”는 말로 받아쳤다.
그런다고 박수석을 향한 관심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저렇지만 뭔가 대단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의혹은 더 커지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 사람들은 박수석을 향한 수상쩍은 눈초리를 좀처럼 거두려 하지 않는다. 차기대권과 관련,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정작 정책기획수석실 관계자는 “박수석이 청와대로 온 뒤에도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고 잘라 말하지만 김대통령과 박수석의 그간의 긴밀한 관계로 미루어 새로운 움직임이 청와대 내에 움트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굳어지고 있다. 당장 박수석이 아침 일찍 대통령의 집무실을 찾아가 독대(獨對)하는 관행이 부활했다고 한다.
박수석이 청와대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선보인 이벤트는 김대통령과 3·26개각 때 새로 입각한 장관들 사이의 ‘집무 인터뷰’. 지난 4월2일부터 4일 사이 김대통령은 신임 장관 10명을 차례로 청와대로 불러 1인당 20분 가량 인터뷰를 실시했는데 이 행사를 기획한 사람이 박수석이었다고 한다. 박수석은 “과거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보니 몇몇 장관을 제외하고는 장관이 대통령을 개별면담하기가 어려웠다”며 “대통령과 새 장관들이 개인적 교감을 할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집무인터뷰제도를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그 구상대로 대통령의 일정을 조정하고, 김대통령도 그런 박수석의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두 사람의 환상적인 호흡일치가 시작됐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를 ‘삼국지’의 유비와 제갈량에 비유하는 이도 있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정가에서는 지난해 초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 김대통령의 밀명을 받고 대북밀사로 중국을 다녀온 사실 자체가 두 사람 사이의 신뢰를 정확히 보여준다고 믿고 있다. 민주당의 한 재선의원은 “솔직히 말해 박지원 장관이 대북밀사를 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느냐. 문화관광부가 대북업무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말했다.
“대북밀사란 김대통령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 김정일 위원장 쪽에서도 수긍할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정도로 김대통령의 뜻을 가감없이 전달하면서도 상대가 믿을 만한 김대통령의 측근 인물은 권노갑(權魯甲) 민주당 상임고문 정도일 겁니다. 그러나 권고문이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무겁지 않습니까? 박수석이 그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김대통령의 믿음을 확인해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수석 스스로도 대북밀사로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한몫 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문광부 장관을 물러난 뒤 좀처럼 기자들과 만나지 않았지만 간혹 자리가 생기면 어김없이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때의 비화를 공개하곤 했다. 지난해 8월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박수석은 국내 언론사 일본특파원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남북밀사 시절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남북정상회담도 사전조율
“북한을 가기 전에 대통령이 임동원 국정원장과 나를 부르더니 문건을 하나 주면서 나에게 읽게 하고 몇 번 수정을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카피(복사본)를 임동원 원장과 나에게 한 부씩 주더라구요. 나는 ‘아, 이걸 김정일 위원장에게 주려는구나’ 하고 필링으로, 경험상 받아들였습니다.”
박수석의 회고가 사실이라면 그는 지난해 방북 직전 임동원 국정원장(현 통일원장관)과 함께 김대통령의 방북 일정과 남북정상회담의 내용을 조율하는 핵심으로 활약했으며, 김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주려고 가져간 노란 봉투 속의 문건을 사전에 보아서 알고 있는 단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정책기획수석으로 복귀한 뒤인 지난 4월9일 박수석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모처럼 식사를 같이했다. 마침 지난 4월10일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 공동 발표 1주년 되는 날이었다. 박수석은 이날을 자축하며 기자들에게 북측 송호경(宋浩景) 아태평화위부위원장과의 베이징 협상 비화를 소개했다. 박수석은 “우여곡절 끝에 정상회담을 갖기로 2000년 4월8일 합의했지만 북측은 정상회담 합의문에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서명(수표) 문제를 두고 ‘합의문이 안 나올지도 모르는데 무슨 수표 얘기냐’며 확답을 하지 않아 끝까지 애를 태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6월13일 김 대통령의 평양 도착 때 김 위원장이 공항에서 영접한 것에 대해서도 “북측이 ‘공항 도착성명을 발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해 김 위원장의 공항 출영과 관계 있는 것 같다는 추측을 했지만 사전에 확실한 언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모든 일정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6월13일 평양 공항에 내려 김 위원장이 출영나온 것을 보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공항 출영으로 정상회담을 때우려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고도 말했다.
지난해 8월 일본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박수석은 이 밖에도 그가 어느 정도 깊숙이 김대통령의 정치행보에 조력하는지도 공개했다.
“김대통령은 야당 총재 때도 그렇고 대통령이 돼서도 마찬가지지만, 영수회담을 할 때는 굉장히 준비를 많이 합니다. 나도 여러 사람 얘기를 들어 메모해서 하고 싶은 말을 노트에 적고 A4용지 2∼3페이지로 서머라이즈(요약)해서 대통령께 ‘하고 싶은 말 여기에 정리돼 있다’고 드립니다. 이회창 총재와 영수회담 준비할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박수석은 그의 직위와 상관없이 김대통령의 청와대 관저를 수시로 드나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지난 98년 7월 김대통령이, 박수석과 직접 관계가 없는 노사정위원회의 협상결과를 묻기 위해 새벽 5시에 그를 호출했다는 얘기는 무슨 문제든 박수석과 상의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일화다.
그러면 도대체 김대통령은 왜 이렇게 박수석에게 집착하는 걸까. 어떻게 인연을 맺었기에 박수석은 김대통령과 함께 감옥생활을 하는 등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함께한 가신들보다 더 밀접한 위치에서 대통령을 보좌하게 된 것일까.
박수석이 김대중 대통령과 처음 만난 때는 지난 83년, 당시 김대통령은 사실상 ‘망명객’ 신분으로 워싱턴에 머물고 있을 무렵이었다. 박수석은 성공한 재미사업가이자 뉴욕한인회장 겸 미주총연합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81년에는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 전대통령의 교민환영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5공시절 청와대를 두 차례나 방문하기도 했고 전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박수석과 5공 정권을 이어준 사람은 전경환씨였다. 두 사람은 전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전경환씨가 선발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인회장 자격으로 만난 것이 계기가 됐는데, 그 후에도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박수석과 김대통령 사이에 가교 구실을 한 사람은 김경재 현 민주당 의원. 김의원과 박수석은 동갑내기 친구로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김의원은 ‘독립신문’이라는 반정부 성향의 교포신문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친구 사이로 지내던 김경재씨가 ‘선생님’을 만나볼 것을 권했다. 박수석은 5공정권과 가깝게 지낸 전력 탓에 몇 차례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의 집요한 설득에 못이겨 함께 당시 워싱턴DC에 살던 DJ를 찾아갔다.
박수석은 자신의 자서전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에서 김대통령과 자신의 첫만남을 ‘운명적 만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선생님(DJ)과 나는 서로의 시국관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냥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때로 내 생각과 다를 땐 반론도 펴고 하다보니 제법 열띤 토론이 되었다. …두 시간여의 토론 동안 나도 많은 생각을 얘기했지만, 결국 그때까지의 내 삶과 생각이 크게 잘못됐음을 선생님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주로 시국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해방 후부터 그때까지 우리 현대사의 문제점을 너무도 명확하게 지적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시기도 했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 김영삼씨와 협력하지 못하고 분열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군부세력에 빌미를 제공한 계기가 되었음을 인정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솔직하면서도 명철한 선생님의 얘기를 들을수록 내 가슴은 이상한 환희로 벅차 올랐다. 여태까지 잘못 살아왔다는 후회보다는 이제부터 정말 참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리고는 박수석은 DJ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98년 여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박수석은 사석에서 우연히 ‘DJ가 좋아하는 참모상’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박수석이 예로 든 인물은 박상천 법무부장관(현 민주당 의원)이었다.
“야당 시절 김대중 총재를 모시고 회의를 하면 전부 벌벌 떨었습니다. 평소 국회에서 싸움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어느 의원은 김총재 앞에서 보고를 할 때면 보고서를 들고 있는 손이 멀리서 봐도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습니다. 그런데 박상천 장관은 안 그랬어요. 자기 생각과 총재 생각이 다르면 그 자리에서 ‘총재님, 그건 아닙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총재가 이런저런 말로 설득을 해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회의 끝나고 다들 나가는데 박장관은 총재를 계속 따라갑니다. 그러면서 계속 자신의 주장을 설득합니다.
이런 박장관을 보고 다른 의원들이 수군거리는 겁니다. ‘저 양반 다음 공천은 다 받았다’고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공천을 못 받은 것도 아닙니다. 박의원은 15대까지 내리 3선 의원을 지냈고 원내총무도 하지 않았습니까? 새 정부 들어서자마자 첫 법무부장관으로 등용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총재는 박장관의 저돌적인 성격을 높이 산 겁니다. 박장관 정도 뱃심이 돼야 고집 센 법조 공무원들을 잡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겁니다.”
DJ는 씩씩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주눅들어 제 목소리를 못 내는 사람보다, 씩씩하게 자기 주장을 펼 줄 아는 사람을 중용한다는 것이 박수석이 생각하는 DJ의 용인철학이었다. 박수석 자신이 83년 미국에서 김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일방적으로 DJ의 얘기만 듣지 않고 때로는 자기 소신을 밝혔던 바로 그 점이 DJ의 눈에 들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DJ맨’이 된 뒤 박수석은 김대통령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먼저 김대통령의 미국 내 근거지인 ‘인권문제연구소’를 재정적으로 돕는 것이 박수석의 몫이었다. 김대통령이 미국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뒤로는 아예 인권문제연구소를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이 낯가림 없고 씩씩한 인물을 중용한다는 사실은 그 뒤에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드러난다. 김대통령은 아랫사람에게 자상하게 업무를 지시하는 성격이 아니다. 따지듯 몇 마디 묻고는 입을 닫아버리는 스타일인데, 바로 그 몇 마디에 담긴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일을 하는 사람을 중용하는 반면,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여권의 한 인사는 이런 김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집권 초기 수석비서관이 유난히 자주 바뀐 청와대 부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임자였던 A수석은 덩치가 크고 얼굴도 우락부락하게 생겼습니다만 성격은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통령이 한번 질책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겁을 먹고 대통령 집무실 근처에 가려고 하지를 않는 겁니다.
A수석의 후임으로 들어온 B수석은 그 반대였습니다. A수석에 비해 왜소한 체격에 인상도 순해보입니다만 이 양반은 대통령이 뭐라고 질책해도 좀처럼 기죽지 않는 겁니다. 한바탕 대통령한테 깨지고 나서도 조금 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또 대통령 집무실로 찾아갑니다. 당시 대통령의 신임이 B수석에게 더 가 있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김대통령은 씩씩하게 자기 주장을 펼 줄 아는 사람을 중용합니다.”
이 인사는 “박지원 수석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가장 큰 이유 역시 당당함이다. 대통령이 아니라 누구 앞이라도 자기 생각을 또렷하게 밝히는 자신만만한 태도가 일단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었고 김대통령도 그 점을 높이 산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함께 있는 박수석을 본 사람들은 이런 해석에 동의한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대통령 앞에서서도 박수석은 다른 사람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자유로웠다고 말했다.
“박수석이 공보수석이었을 때인데 연예인 몇몇이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만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의례적으로 먼저 자리를 잡은 연예인들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뒤 김대통령이 박수석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더군요. 그런데 대통령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박수석이 큰 소리로 연예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잘 지냈느냐’며 인사를 하는 겁니다.
그런 박수석의 행동에 김대통령은 그냥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주인은 대통령인데 그 주인보다 목소리를 높이고도 ‘무사한’ 사람은 아마 역대 정권에서 박수석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당당한 태도가 박수석이 김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대통령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수석보다 더 오랜 세월 대통령을 보좌해온 동교동계 사람들마저 인정을 하는 대목이다. 다음은 동교동계 한 중진의원의 얘기.
“대통령이 박수석을 찾는 이유는 편하기 때문일 겁니다. 대통령도 꼭 정치 현안을 논의할 상대로 박수석을 찾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대통령의 집안문제 등 일상사나 개인적 고민거리, 이런 것을 터놓고 논의할 상대가 필요했고 박수석은 그런 문제를 잘 해결해줬던 것으로 압니다. 특히 신문보도와 관련해서는 무조건 박수석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박수석이 언론계 사정에 정통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상식 아닙니까. 더구나 박수석은 부지런함이 몸에 밴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부르면 어디에 있다가도 달려올 준비가 돼 있으니 예뻐하지 않을 수 없죠.”
실제 70년대 ‘40대 기수론’ 이후 김대통령의 제2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최근 10년간의 정치사에서 박수석은 언제나 김대통령을 중심으로 한몸처럼 움직이며 보좌해왔다. 박수석은 흔히 DJ 가신단의 별칭인 ‘동교동 사단’과도 거리가 있다. 권노갑 한화갑 등 장형그룹의 리더십이 통하는 동교동 가신들과 달리 박수석은 김대통령과 직접 통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들로는 박수석 외에 97년 대선을 전후해 김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김한길 문화관광부장관, 임동원 통일원장관 등을 꼽을 수 있다.
박수석이 김대통령과 한몸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때는 92년 대선 무렵이다. 당시 그의 당직은 수석부대변인. 역할은 상대 후보인 김영삼 민자당후보에 대한 공격수였다. 대변인은 홍사덕 의원이었다.
대선 기간 내내 박수석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6시10분이면 동교동 DJ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14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92년 4월부터 12월까지 아홉 달 동안, 박수석은 술을 너무 마셔 ‘퍼진’ 이틀을 제외하곤 매일 아침 동교동을 찾았다. 본격적인 대선전이 시작되면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유세장에도 그림자처럼 DJ를 따라다녔다. 박수석은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세상에서 어떤 목표에 몰입해 빠져드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다. 그래서 신이 나고 재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주파수’ 일치해
박수석은 김대통령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할 때 옆자리를 지킬 줄 아는, 본능에 가까운 능력도 갖추고 있다. 얘기를 다시 92년 대선 당시로 돌려보자.
박수석의 경험이 아니라도 선거를 치러본 사람은 누구나 그 재미(?)에 흠뻑 취한다. 아무리 불리한 여건에서 치르는 선거라도 당사자의 눈에는 ‘희망’만 보인다. 중독성 강한 약물에 취하기라도 한 듯, 판단력이 사라지고 사태를 낙관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후보도 참모도 예외가 없다. 이런 증상은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심각해져서 도무지 패배할 것 같지 않은 환상에 사로잡힌다. 92년 대통령선거 당시 박수석이 그랬다.
운명의 선거일. 박수석은 하루종일 기분이 참 좋았다고 회고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다. 이제 모든 게 끝난 상황이었고 속도 시원했다.”
드디어 개표가 시작됐다. 그런데 시작이 좋지 않았다. 서울에서 DJ는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시가 되어가자 상황은 점차 명백해졌다. 대세가 판가름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반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 당사를 지키던 권노갑 한광옥 조승형 의원 등 동교동계 선배 정치인들마저 황망한 얼굴로 동교동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총재 내외는 이미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세 사람은 거실에서 몇 시간 정도 기다리다 DJ를 만나지도 못하고 다시 당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박수석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만 들더라는 것이다. 기자들이 “개표가 한참 진행중인데 대변인이 자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지만 그는 기자실 소파에 기대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 5시 반, 습관적으로 잠에서 깬 박수석은 곧바로 동교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동교동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니까 박수석은 선거패배가 분명해진 뒤 동교동을 찾은 첫 방문자였던 셈이다. 방에 들어서니 DJ는 은퇴성명을 쓰고 있었다. DJ가 부르면 이희호 여사가 받아쓰는 식이었다. 그 적막감 속의 비장한 정경. 아마 김대통령 생애에 가장 비장한 하루로 기록됐을 92년 12월19일, 박수석은 새벽부터 김대통령 부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정치인 박지원을 있게 해준 결정적 이력은 당 대변인이다. 92년부터 97년 대선 직전까지 박수석은 야당 대변인으로 맹활약을 했다. DJ와 밀접한 인간관계를 형성한 계기도 대변인 시절이었다. 30∼40년을 지근 거리에서 DJ를 모셔온 동교동 가신들보다 더 정확히 DJ의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은 그의 남다른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4년 이상 DJ주변을 벗어나지 않으며 항상 DJ와 ‘정치적 주파수’를 일치시키려고 애쓴 박수석의 노력에 기인하는 바 크다.
개별 사안에 대해 윗사람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의 지시가 없어도 이심전심(以心傳心) 그의 마음을 읽어내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이런 경지를 정치적 주파수가 일치하는 단계라 할 때, 박수석은 DJ의 속내를 누구보다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을 갖췄다는 평을 듣고 있다. 박수석은 대변인 시절, 자신과 DJ의 주파수를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DJ를 만나는 것은 신앙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읽어내는 박수석을 보면서 DJ도 언제부턴가 가감없이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전서구(傳書鳩)’로 박수석을 활용했다. 지난해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밀사로 남북관계와는 전혀 무관한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이 나선 것도 사실은 DJ와 박수석의 정치적 주파수가 같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면 왜 그토록 DJ가 박수석을 신뢰하는지를 알 수 있다. 대변인 시절 그는 아침 일찍 DJ를 만나는 것을 일종의 ‘신앙’처럼 생각했다. 박수석은 기자가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원과 밀착해야 하듯, 대변인도 당과 총재의 방침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총재와 일거수 일투족을 같이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안이 터질 때마다 당의 논평을 일일이 총재와 의논할 수 없다. 그럴 시간도 없다. 대변인이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결국 순발력 있는 대응이 생명이다. 대변인은 항상 총재의 생각을 읽고 있어야 한다.”
박수석이 말하는 대변인 자질론이다. 대변인 시절 박수석의 일과를 보면 그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침 6시10분에는 DJ의 집에 도착해야 하므로 박수석의 기상시간은 대략 새벽 5시. DJ의 집에 도착하면 전날 보았던 조간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보고하고, 총재의 코멘트와 그날 있을 당무를 사전 체크한다. 그래야 당사에 나와 기자들에게 그날의 주요사항을 정확히 브리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당의 한 인사는 97년 대선 무렵에 본 박수석을 이렇게 기억했다.
“대선을 앞두고 일산 김총재의 집에는 아침식사 모임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DJ의 최측근 몇 명이 모여 그날의 정치현안에 대해 얘기하고 일정을 조율하는 모임이었는데 모임은 보통 아침식사를 겸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정동채 정동영씨 등 다른 참석자들이 총재와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박수석은 밥은 먹지 않고 부지런히 총재에게 이것저것 보고하고 지시사항을 받아 적고는 했습니다. 주위사람들이 ‘왜 식사를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먹고 왔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을 겁니다.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오는 사람이 무슨 정신에 아침을 먹고 나왔겠습니까. 아마 박수석은 모임이 끝나면 어딘가에서 식사를 했을 겁니다. 아무튼 김총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총재의 의견을 묻고 이를 받아적는 것이 박수석의 습관이었습니다.”
주위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김총재와 박수석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박수석 자신은 이렇게 설명한다.
“김총재는 매사에 설명을 해주는 편이다. 마치 동생을 앉혀놓고 가르치듯 그렇게 자상하게 설명을 하신다. 어떤 때는 내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도 해주신다. 그런 얘기를 할 때면 아무리 안방이라 해도 말이 아닌 글로 써 보여주신다. 오랜 기간 정보기관의 탄압을 받아온 결과다. 때문에 나는 총재의 비공식적 행사도 모두 꿰뚫고 있다. 언제 누구를 무슨 일 때문에 만났고,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도 훤히 알고 있다. 만일 뒤에 그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나는 바로 기자들에게 상황설명을 정확히 해줄 수 있다. 이게 대변인의 몫이다.”
정책기획수석으로 정치일선에 복귀한 요즘, 박수석은 다시 아침 일찍 김대통령을 찾고 있다. 독대를 통해 그날의 현안을 보고하고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있다. 과거의 김총재와 박대변인 시절처럼 하루 일과를 함께 시작하는 관행이 부활한 것이다.
흔히 사람 세상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깊숙이 이해하고 아껴주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김대통령과 박수석도 겉으로는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호흡은 환상적이다. 왜일까? 이에 대해 박수석 주변에서는 박수석이 절묘하게도 김대통령이 갖지 못한 점을 장점으로 갖추고 있음을 꼽는다. 한마디로 박수석은 김대통령의 ‘보완재(補完材)’라는 설명이다.
박수석은 부지런하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움직이고 밤마다 술자리가 이어져도 지치지 않는다.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김대통령을 대신해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김대통령의 심부름을 하는 박수석은 김대통령에게 여간 요긴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박수석은 미성(美聲)의 소유자다. 대변인 시절,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그의 미끈한 목소리를 아직도 호감을 갖고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반면 김대통령은 사투리가 심하고 탁성이다. 김대통령의 약점을 박수석의 강점으로 보완하는 셈이다. 어쩌면 이런 보완관계 때문에 김대통령은 박수석을 가까이 두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정도로 DJ가 박수석을 그토록 오랫동안 중용하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미흡하다. 박수석과 김대통령 사이를 오랫동안 지켜 보아온 전직 의원 Y씨는 “박수석은 그 누구보다 요점정리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똑같은 얘기라도 박수석이 하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맑고 투명한 미성으로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데야 김대통령 아니라 누구라도 반할 만하죠.”
이런 박수석의 능력은 김대통령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전직기자 출신의 L씨는 “박수석이 대변인이던 시절, 야당출입 기자들은 그 어느 대변인 시절보다 편했다”고 회고했다.
“아침에 박수석을 만나면 그날 하루 쓸 기사거리가 모두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헤매고 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박대변인을 아침에 만나는 것이 그날 야당 취재의 시작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L씨는 “박수석이 대변인으로 있을 때는 그의 역할을 깨닫지 못했는데, 박수석이 대변인을 그만둔 뒤에야 박수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최선을 다해 기자들을 상대하던 박수석을 아직도 인상 깊게 기억하는 기자가 적지 않다.
그렇다고 박수석이 언론을 늘 저자세로 대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평소의 박수석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돌출행동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 대표적 사건이 98년의 중앙일보사 방문사건이다.
중앙일보와의 다툼
정치인들 사이에 불문율이 있다면 ‘정치인으로 성공하고 싶으면 언론과 불편한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이다. 또 하나 있다면 ‘돈과 여자 문제만 아니라면 가급적 언론에 자주 얼굴을 내밀라’는 ‘격언’을 꼽을 수 있다. 박수석은 동교동 가신 누구보다 언론을 잘 아는 사람이다. 언론계 종사자들뿐 아니라 언론사 사주들과도 일상적으로 술자리를 같이하는 등 격의 없이 지내곤 한다. 이 때문에 때로는 인사 발령 내용을 당사자보다 먼저 알고 축하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박수석이 DJ를 위해서는 언론과 일전도 불사한 경우가 있다. 99년 10월, 청와대와 ‘중앙일보’는 한바탕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중앙일보 사주이자 보광그룹 회장인 홍석현씨가 보광계열사의 세금포탈 혐의로 전격 구속됐는데,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김대중 정권의 언론탄압”이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반면, 정부는 “통상적인 세무조사와 세금횡령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중앙일보는 15대 대선 직후 여권의 한 핵심인사가 중앙일보를 찾아와 ‘행패’를 부린 사건을 이례적으로 신문에 공개했다. 그 핵심인사가 바로 박지원 당시 공보수석이었다. 박수석이 중앙일보사를 찾아간 시간은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98년 3월9일이었다고 한다. 다음은 당시 중앙일보가 폭로한 박수석의 취중언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