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40년 간판쟁이’ 백춘태의 간판전쟁으로 지샌 날들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4-18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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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9월 흔적도 없이 사라질 단성사 건물과 함께 한평생 잡아온 붓을 놓겠다는 이 시대 마지막 ‘간판쟁이(극장간판미술가)’ 백춘태씨(60). 그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퇴계원 작업장으로 찾아가던 날은 해사한 봄 햇살이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양지바른 산 아래 비닐하우스 가건물로 들어서자 수십 개의 빈 페인트통과 영화포스터, 스틸사진이 바닥에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양쪽 벽면으로 어른 키 두세 배가 넘는, 수명을 다한 극장간판들이 하얀 덧칠과 함께 새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미처 구석까지 찾아들지 못한 채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거대한 비행기 격납고를 연상시키는 휑뎅그레한 작업장에서 막 붓질을 끝낸 백씨가 앞마당으로 의자 두 개를 내왔다. 희끗한 반백의 머리를 헝클며 지나가는 꽃샘바람에 아랑곳없이 습관처럼 먼 산을 휘둘러보던 그가 40여 년간 ‘간판쟁이’로 살아온 인생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

    산 가운데 들어앉은 옹색한 마을 소로를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나타나는 금주지(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저수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 낚싯줄이 수면에 닿아 파문을 일으키면 답답한 작업공간과 도심의 번잡함에 찌든 피로도 저만치 달아난다. 지난 겨울 송어를 낚아 올린 뒤로 좀처럼 짬을 낼 틈이 없었지만 휴식 삼아 즐기는 던질낚시는 고즈넉한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해준다.

    오랫동안 정을 붙인 낚시는 한꺼번에 두 마리 고기를 낚을 수 없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걸 모르던 사춘기 시절, 반쯤 미쳐 있던 ‘그림’과 ‘영화’ 둘 다 잡기 위해 극장간판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미대를 졸업하고 화가가 되려던 희망이 가난한 목수 아들에겐 ‘언감생심’의 꿈임을 깨달은 직후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미대를 가겠다고 말했다. “밥벌이도 못 하는 환쟁이가 되겠다고?” 펄쩍 뛰던 아버지는 기실 ‘환쟁이’나 ‘대학’에 대해 무지했다. 평생 대팻밥을 먹으며 고단한 삶을 살아온 월남 피란민 아버지에게 대학이나 미대는 의식 밖의 일이었다. 소학교 때 기억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반응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무작정 그림이 좋아 공책이며 책이며 빈 종이만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려대던 소학교 2학년 때던가. 무심히 공책을 뒤적이던 아버지가 노발대발했다. “동생이 넷씩이나 딸린 집안의 장남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벼락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책가방과 공책이 마당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몽둥이 찜질을 피해 아버지 손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어머니의 한숨소리



    해질 무렵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돼 찾아 나선 어머니는 추위를 피해 이웃집 굴뚝 옆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나는 어머니가 곁에 다가온 줄도 몰랐다. 그때 시름 깊던 어머니의 한숨소리는 ‘간판쟁이’가 된 후에도 오래도록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림에 이어 영화에 빠져든 건 인천 송도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극장은 엄격한 ‘학생 출입금지구역’이어서 수업을 ‘땡땡이’치고 몰래 드나들다 훈육주임이나 여순경한테 발각되면 정학이나 퇴학을 감수해야 했다. 살벌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밥먹듯 드나드는 ‘불량학생’에게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극장 근처에 단골 빵집을 정해두면 영화를 보는 동안 책가방과 모자를 맡길 수 있었고, 까까머리 학생 티를 내지 않게 털모자까지 빌려 쓸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훈육주임을 발견했지만 모자 덕분에 걸리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훈육주임의 눈길을 피해 출구를 나서다 문 앞을 지키고 섰던 여순경에게 발각됐다. ‘설마 남자화장실까지 쫓아오랴…’싶어 줄행랑쳤다. 곧이어 “학생, 거기 둘째 칸에 있는 것 알아, 냉큼 나와”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한 시간쯤 지난 뒤 화장실을 나서는데 그때까지 꼼짝 않고 문 앞을 지키던 여순경에게 결국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다음날로 일주일간 아침마다 빈 가방을 들고 인천자유공원으로 등교(?)했다. 부모님께는 차마 정학당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공원에서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다 학교가 파할 무렵에야 집에 들어갔다.

    그 즈음 수업시간에도 머리 속에서 영화가 떠나지 않았다. 칠판이 스크린처럼 물결치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게리 쿠퍼가 등장했다. 홀로 여러 명의 악당과 대치한 채 최후의 결투를 눈앞에 둔 ‘하이눈’의 마지막 장면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백춘태, 다음 읽어봐.” 국어선생의 목소리는 게리 쿠퍼가 쏜 총성과 뒤섞여 아득한 환청처럼 들려왔다. 번번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수업시간마다 벌을 받기 수차례. 그래도 극장 출입을 포기할 수 없었고 두 번씩이나 정학 받은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쯤 다른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고 영화도 실컷 볼 수 있는 ‘간판쟁이’는 미대를 포기한 대신 기댈 수 있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그 동안 미술대회에서 탔던 상장과 메달을 챙겨들고 교복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무작정 찾아간 곳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인천 화수동에 있던 인천극장이었다. 간판을 그리는 작업장으로 미술부장을 찾아가 불쑥 상장과 메달을 내밀며 “극장간판을 그리고 싶습니다” 했다. 말이 취직이지 무보수 견습생으로 붓 근처에는 얼씬하지 못 하고 간판 달기나 청소 등 온갖 잡일을 도맡아야 했다. 그림이 뜻대로 그려지지 않아 미술부장의 심기가 불편한 날이면 문 밖으로 쫓겨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야, 오야지(미술부장) 성질 가라앉았다. 들어와라”는 선배의 말이 떨어진 뒤에야 겨우 작업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인천에서 극장간판을 그리던 시절 잊혀지지 않는 은사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고등학교 때 미술을 가르치신 황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인천극장으로 두어 번 나를 찾아왔다. “미대 갈 줄 알았더니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간판쟁이 되려고 그래?” 책값이 없으면 박봉을 쪼개 책을 사줄 만큼 애정을 보이던 선생님이 미국으로 이민 가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가슴이 아팠다. 또 다른 은사는 키네마극장 미술부장을 지낸 분이다.

    극장간판은 이론서나 기술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어서 오로지 혼자 기술을 터득해야 했다. “다 어깨 너머로 배우는 거야”라는 선배들 말이 유일한 정보이자 가르침이던 시절, 극장간판은 그리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수준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잘 그린 간판을 보고 다니는 것은 살아 있는 공부였다. 욕심이 앞서 서울까지 드나들었지만 그때마다 “내 그림은 턱도 없다”고 수없이 좌절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는 대학에서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한 사람이 간판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고, 외국 기법이나 기술이 들어와 지방 간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세련됐다. 그나마 인천에서 간판 그림이 괜찮았던 키네마극장 미술부장을 무작정 찾아갔다.

    환쟁이 아들을 인정해주신 아버지

    “무보수로 일해도 좋습니다. 수련생으로 있게 해주십시오.”

    “이름이 뭐냐?”

    “백춘탭니다.”

    “백가? 나도 백가다. 한집안 사람이니 어디 한번 일해봐라.”

    키네마극장으로 출근한 지 며칠 뒤, 내 손으로 생전 처음 최은희, 김진규 주연의 ‘돌아온 사나이’ 간판을 그렸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붓질을 끝냈지만 그림을 본 선생님(미술부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기가 꺾여 있는 내게 선배가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원래 우리 오야지는 잘했다는 말 절대 안 해. 잘못한 것만 말해. 아무 말 없으면 잘한 거야.”

    이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직전 비로소 ‘환쟁이’ 아들을 인정해주었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타고난 끼니까 열심히 해봐라.” 마지막 가는 길에 내내 못마땅해하던 당신 마음이 걸렸던 걸까. 어쨌든 날개를 단 기분이었다. 무거운 마음도 미련도 없이 가족과 인천을 떠나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은 때 나는 갓 스무살이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맨처음 찾아간 곳이 중앙극장이다. “보수를 안 받아도 좋다. 쫓아내지만 말고 일하게 해달라.” 사정 끝에 또다시 ‘무보수 수련생’ 딱지를 달고 고달픈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새벽같이 작업장에 나와 청소를 마치고 선배들이 그 날 쓸 페인트와 붓을 챙겨놓으면 어느새 출근시간이 됐다. 남들이 일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도 작업화로 갈아 신으며 벗어놓은 양말을 거둬 빨고, 선배 집으로 달려가 도시락을 받아들고 오는 생활이 매일같이 반복됐지만 ‘언젠가는 나도…’라는 희망 하나로 버텨낼 수 있었다.

    맨몸으로 상경한 처지라 잠잘 곳도 없었고 반은 굶고 반은 먹는 배고픈 날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잠은 극장 문이 닫힌 후 휴게실 낡은 소파에서 잘 수 있었다. 추위를 가릴 담요는커녕 스프링이 퉁겨 나와 등이 배겼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됐다. 새우잠을 자다 수위에게 들켜 매맞고 쫓겨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소파 등받이를 씌운 홑겹 커버를 벗겨내 이불 대신 덮고 자다 들켜 발길질을 당한 적도 있다.

    온갖 어려움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인천 집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성공하기 전엔 인천 땅을 밟지 않겠다는 오기도 있었지만 기차삯 250환을 마련할 길이 없어 내려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어렵사리 서울생활 2년이 지날 무렵, 마침내 ‘등극’의 기회가 왔다. 미술부 책임자인 ‘오야지’가 되는 것을 ‘등극’이라 부르는데 휘경동에 있는 대영극장에서 일해달라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스물두 살 나이에 극장간판을 그리는, 동년배 중에 가장 빨리 책임자가 된 것이다. 한 프로를 그리고 받는 돈은 3만원. 당시 교수의 한 달 월급이 3000원이었는데 그보다 10배가 많았다.

    그러나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 월급 주고 캔버스로 사용할 합판과 페인트 등 재료를 사고 나면 손에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들 어떠랴. 여전히 춥고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남들보다 앞서 간다는 자부심에 고생을 낙으로 알았다.

    60년대 ‘벤허’ 등 외국영화가 물밀듯 들어오면서 극장마다 ‘간판전쟁’이 시작됐다. 신문광고를 제외하고는 영화 홍보 수단이 간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극장간판이 지금처럼 대형화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거대한 간판 밑에 서면 중압감에 압도당했다. 말하자면 관객과 극장간판의 기(氣)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나 크게, 얼마나 멋진 장면과 선전문구로 사람들 호기심을 자극하느냐가 관객을 끄는 수단이었다. 이 때문에 흥행에 성공하면 ‘영화가 좋은 탓’이지만 실패하면 덤터기는 ‘간판쟁이’가 몽땅 뒤집어써야 했다.

    스타급 배우들도 극장간판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자신의 얼굴이 크게, 앞쪽에 나오게 미술부장한테 담뱃값이나 대폿값을 찔러주며 ‘와이로’를 쓰기도 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배우가 김추련이다. 단성사에서 ‘겨울여자’ 개봉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극장 뒤 작업장으로 어느 날 털이 텁수룩한, 생전 처음 보는 청년이 찾아왔다.

    “저~ 김추련입니다.” 영화계에 겨우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배우라 김추련이 누군지도 몰랐다. “이 영화로 떠야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간판에나마 제 얼굴 좀 크게 그려주십시오.” 남녀 주인공이자 당대를 주름잡던 신성일과 장미희를 두고 무명에 가까운 배우가 자기 얼굴을 크게 그려달라니, 아무리 극장간판에 문외한이라도 이보다 더 황당한 청은 없었다. ‘뭐 이런 희한한 놈이 다 있나’ 싶어 딱 잘라 거절했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김추련은 밤이든 새벽이든 작업장 문 앞을 지키고 섰다 근처 포장마차로 소매를 잡아끌었다. 끈질긴 정성에 감동해 김추련의 얼굴을 맨 앞에 가장 크게 그려주었다. 그 다음 여주인공 장미희, 맨 마지막에 자그마한 크기로 신성일 얼굴을 그려넣었다.

    “간판 그린 ××가 누구야?” 신성일의 분노

    개봉 직전 간판이 올라가던 날, 극장 앞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만 해도 간판을 올리는 날은 출연배우와 극장관계자가 모두 나와 지켜보는 게 관례였다. 톱스타인 신성일도 일찍 극장으로 나왔다.

    “간판 그린 ××가 누구야? 당장 잡아와!”

    불그락푸르락 서슬 퍼런 그를 피해 재빨리 도망쳤고, 그림에 손도 대지 않은 후배들까지 덩달아 줄행랑을 놓았다.

    얼마 뒤 더욱 기막힌 소동을 겪었다. 60년대는 극장에서 영화상영뿐만 아니라 가수나 배우, 희극인들이 공연하는 ‘극장쇼’가 활발하던 때다. 한번은 여성 톱 가수 두 명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공연이 있었다. 간판 하나에 두 스타 얼굴을 나란히 그리면 입체감이 살지 않기 때문에 두 명 중 한 명의 얼굴은 뒤쪽에 작게 배치해야 했다. 공연 직전 극장에 먼저 도착한 가수가 간판을 보고 “내 얼굴이 왜 쟤 밑에 깔렸냐”고 파르르 떨더니 공연을 펑크낸 채 극장 입구에서 되돌아갔다.

    간판에 출연배우 이름을 쓸 때 반드시 ‘~군’, ‘~양’ 등의 호칭을 붙여야 하던 때가 있었다. 배우 이름만으로 남녀 구분이 안 가는 경우가 간혹 있어 남자가 ‘~양’으로, 여자가 ‘~군’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미 극장 입구에 내걸린 간판에 붓을 들고 매달려 부랴부랴 호칭을 고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60년대는 극장 전면에 내거는 간판 외에 글씨 위주의 실내간판이 지금의 선전지 구실을 했다. 당시 외국영화는 거의 대부분 일본을 통해 수입됐기 때문에 영어에서 일본어로,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영화제목이나 선전문구를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 단어가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실내간판에 쓸 문구라며 선전부장이 건네준 종이에 ‘비끄이 밴드’라는 말이 있었다. 요즘이야 당장 ‘빅 이벤트’로 고쳐 쓰겠지만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모른 채 선전부장이 써준 대로 간판에 옮겨 적었다. 그런데 영화를 본 관객이 “아무리 봐도 영화에 밴드가 나오지 않던데 도대체 이 영화와 ‘비끄이 밴드’가 무슨 연관이 있느냐”며 물어와 곤혹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밤새 태풍으로 극장간판이 날아간 날은 하루만에 간판을 새로 그려 달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맥빠지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단성사에서 개봉 예정이던 ‘금발의 나타샤’를 그릴 때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겨울이라 밤이면 영하 13도로 내려가던 날이었다. 간판 올리는 날이 내일로 다가와 밤샘 작업에 매달렸다. 난로는 꿈도 못 꾸던 시절이라 바람만 간신히 가린 벽으로 스며드는 냉기를 견디며 작업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붓질을 하면 합판에 묻기는커녕 얼어서 종잇장처럼 떨어지는 페인트와 씨름하며 새벽녘에야 겨우 작업을 마쳤는데 개봉이 불발돼 밤새 그린 간판은 빛도 보지 못했다.

    중앙극장에서 오드리 헵번 주연의 ‘마이 페어 레이디’ 간판을 막 끝냈을 땐 과로로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갔다. 높이 6m, 길이가 30m나 되는 간판은 웬만한 건물 한 면 전체를 붓질하는 수고와 맞먹는 작업이다. 작업대를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며 3박 4일 동안 쉴 틈 없이 그려댔으니 몸에 무리가 생긴 것은 당연했다.

    똑같은 수고를 들이지만 길게는 6개월, 짧게는 단 며칠 만에 내려지기도 하는 극장간판. 베테랑 간판미술가들은 간판 그림만으로 흥행작일지 실패작일지 단번에 알아맞힌다. 사장 이하 극장 간부들이 흥행 여부에 따라 걸핏하면 ‘간판탓’을 하는 것도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은 셈이다.

    밤샘작업에 몸이 지칠 대로 지쳐도 개봉 첫날 극장 입구가 인산인해를 이루면 간판쟁이들은 좀이 쑤셔 작업장에 가만히 있지 못했다. 손님이 들지 않아 극장 입구가 한산하면 간판을 내리는 날까지 극장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최근 극장들이 대형화하면서 그림 간판 대신 컴퓨터실사를 내거는 곳이 많아졌고 덩달아 ‘극장간판미술가’라는 직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50~70년대만 해도 ‘간판쟁이’들은 극장 직원들 중 최고 인기였다. 텔레비전도 구경하기 어렵던 시절이고, 일년에 두어 번 명절 때가 아니면 영화도 마음놓고 볼 수 없던 터라 극장에서 일한다는 것만으로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시기였다.

    60년대 초 중앙극장에 몸담고 있을 때 아내(김병복·55)를 만났다. 젊은이들 사이에 ‘멋쟁이 패션’으로 인기를 끌던 미제 구제품 청바지와 청재킷을 빼입고 한껏 폼 잡던 20대 초반, 더구나 인기 많던 간판쟁이 눈엔 웬만한 여성은 성에 차지 않았다. 어느 날 극장 근처 빵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아내와 마주쳤고 첫눈에 반했다. 아내는 학교를 졸업하고 근처에서 갓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다.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는 여자를 한 달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구애한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손에 남은 작품 하나도 없어

    어렵사리 결혼한 아내와 두 아이(성열·성아)를 두고 뒤늦게 군에 입대했다. 다행히 간판을 그린 덕에 군 생활 2년을 강원도 원주극장에서 수월하게 보냈다. 당시 원주극장은 민간인 상대로 영화를 틀어주기 위해 군부대에서 지어 운영하던 곳이다. 말이 군인이지 평상복을 입고 머리를 기른 채 입대 전과 똑같이 생활했던 것이다. 군 제대 후 얼마 뒤 ‘태성기획’이라는 극장간판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일감이 밀릴 때는 개봉을 앞둔 서울 시내 6~7개 극장 간판을 한꺼번에 마감하는 경우도 있었다.

    단성사를 비롯해 대한극장, 국도극장 세 군데 책임자로 일하던 시절, 대한극장 전무(국수정)와 매일 밤 충무로 단골 맥주집을 드나들며 술잔을 앞에 놓고 입씨름을 벌였다. 각각 골프와 낚시에 푹 빠져 있던 두 사람은 “천연잔디구장 하나 없는 나라에서 골프는 무슨…” “지긋한 나이에 골프를 칠 줄 알아야지, 고리타분하게 낚시가 웬말이냐”며 신경전을 벌였다. 덕분에 술집 주인아주머니는 가게세를 우리 두 사람 주머니에서 충당했다. 경기도 퇴계원으로 작업장을 옮긴 뒤 충무로 술친구와 술 마실 기회를 많이 잃었지만 조용하고 여유 있는 시골생활에 불만은 없다.

    ‘간판쟁이’로 살아온 42년 동안 수천 개가 넘는 그림을 그렸지만 손에 남아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영화 개봉과 함께 간판이 올라가고 종영 후 내려진 간판은 다음 개봉작을 위해 하얀 페인트로 지워진다. 젊은 시절 밤새 그린 간판에 내 손으로 흰 페인트칠을 할 때면 자식을 지우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때부터 카메라로 찍기 시작한 간판그림이 다섯 권 앨범으로 남았다. 나이 들면서 그나마 ‘인생사도 그러한데 하물며 간판임에랴…’ 싶어 무덤덤해졌다.

    30년 넘게 줄곧 간판을 그려온 단성사가 허물어지면 ‘간판쟁이’ 인생도 그쯤에서 ‘간판’을 내릴 생각이다. 대신 어린 시절 꿈꾸던 ‘환쟁이’가 되어 여전히 붓을 쥐고 살아갈 것이다. 새로운 개봉을 위해 어느덧 내 인생 간판도 하얗게 덧칠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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