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산케이 한국보도 親韓인가 反韓인가

일본 우익의 선봉 산케이신문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5-04-12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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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산케이신문은 한국 여러 기관과 마찰을 빚었다. 뿐만 아니라 산케이는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을 주도하는가 하면, 평화헌법 개정,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자위대(自衛隊)의 군대화 등 일본을 보수화하는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다테마에(建前: 치면치레로 하는 말)를 버리고 과감히 혼네(本音)를 외치는 산케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은 왜 보수의 길로 일로매진하는가.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 ‘도망가지 않는 신문’ ‘확실히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는 모토를 내건 산케이 본사를 찾아가 취재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언론으로 꼽히는 산케이(産經)신문이 화제다. 산케이신문은 최근 한국 내 주요 기관과 마찰을 빚어왔다. 지난 4월20일자 산케이는 ‘정부계 또는 친정부계로 분류되는 KBS·MBC·한겨레신문·대한매일 등이 정부의 언론개혁 지지로 돌아, 이에 비판적인 조선·동아·중앙일보 등에 대해 프로그램과 지면에서 심하게 공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또 ‘(한국) 정부는 정부가 인사권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MBC 사장에 한겨레 사장 출신이며 진보파인 김중배씨를 기용했다. 김사장은 김대중 대통령과 동향인 전라도 출신으로, 김대중 정권이 정권 말기 대응책으로 언론 장악에 힘을 쓰고 있다’고 적고 있었다. 이에 대해 MBC측은 정정 보도를 요구하는 등 강하게 항의했으나, 산케이는 MBC측의 입장만 보도했을 뿐 정정 보도는 아직 내지 않았다.

    산케이는 합동참모본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지난 3월26일자에서 산케이는 ‘북한의 반잠수정이 한국 남서해안에 침범해 한국 해군 함정이 출동했으나 적극 대처하지는 않았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4월16일 합참은, 산케이에 정정 보도 요구 서한을 보내고 주일 한국무관과 청와대의 국방비서관 그리고 국정홍보처까지 동원해 도쿄에 있는 산케이 본사에 압박을 가했다. 이런 식으로 압력이 강화되자 산케이는 4월25일자에서 ‘북 반잠수정 침입보도, 새로 확인된 정보 없어’라는 제목으로, ‘현 단계에서는 당초의 본지 보도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없어 기사를 정정하겠다. 결과적으로 한국 군 당국에 폐를 끼친 점을 사과한다’는 정정 기사를 게재했다.

    “산케이 서울지국을 폐쇄하라”



    산케이와 일부 한국 기관 사이의 마찰은 대개 산케이 서울지국장 겸 특파원인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弘勝·59)씨의 기사로 인해 촉발된다. 때문에 구로다 특파원에 대한 반발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4월10일 민주당의 김경재(金景梓) 의원은 국회 질문에서 “산케이 서울지국을 폐쇄하라”고 주장했다.

    구로다 특파원은 올해 초부터 부산의 국제신문에 시론을 써왔다. 4월26일 부산언론운동시민연합은 ‘국제신문은 구로다씨를 시론 필진에서 제외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산케이를 화제의 중심으로 잡아끈 것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일 것이다. 산케이는 오래 전부터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개정하라는 시리즈를 게재해왔다. 문제가 된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교과서를 출판한 것도 산케이 신문이 포함된 ‘후지-산케이 그룹’ 산하의 후소샤(扶桑社)였다.

    그렇다고 해서 산케이가 한국에서 배척만 당하는 신문은 아닌 것 같다.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기자는 구로다씨에게 두 번 ‘물을 먹은[落種]’ 적이 있다. 기자는 모 인사가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북한 자료를 빼내기 위해 상당기간 노력해 왔는데, 구로다 특파원이 먼저 입수해 버린 것(그중 하나가 지난해 11월 산케이가 처음 공개해 파문을 일으켰던 황장엽씨 논문이다). 구로다 특파원이 한국 기자보다 먼저 한국의 핵심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은, 그와 한국 취재원 사이에 아주 단단한 신뢰 관계가 형성돼 있다는 뜻이리라.

    산케이를 싫어하고 좋아하고는 독자 개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문제는 싫어하고 좋아하고가 아니라, 산케이가 어떤 신문인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 앉아서 한국에 관련된 기사만 보고 산케이를 판단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김경재 의원처럼 산케이가 반한(反韓)적이라고 판단해 서울지국을 폐쇄한다면, 한국은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산케이 지국을 폐쇄한다고 한들 일본 언론인 산케이가 한국을 무서워할 이유도 없다.

    산케이는 도대체 어떤 언론인가. 기자는 구로다 특파원을 통해 도쿄(東京)의 산케이 본사에 취재하고 싶다는 뜻을 보냈는데, 뜻밖에도 “산케이의 모습을 정확히 전달해준다면 응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자는 즉각 도쿄로 날아갔다.

    산케이(産經)는 ‘산업경제’를 줄인 말이다. 과거에는 경제지인 ‘산업경제신문’이어서 산케이로 약칭됐는데, 종합지로 전환하면서 아예 산케이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문 이름은 바뀌었지만, 회사 이름은 여전히 ‘산업경제신문사’다.

    203만 부를 발행하는 산케이는 일본에서 다섯 번째로 부수가 많다. 일본의 신문 발행 부수 서열은 요미우리(讀賣·약 1000만부) 아사히(朝日·839만부)-마이니치(每日·약 400만부)-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약 250만부)-산케이 순이다. 경제지인 니혼게이자이가 서열 4위인 것이 이채롭다.

    산케이가 보수 우익지라는 사실은 이 신문이 광고 카피로 선택한 ‘무레나이 신분(群れない 新聞)’과 ‘니게나이 신분(逃げない 新聞)’ 그리고 ‘모노오 이우 신분(モノを いう 新聞)’이란 문구에서 강렬히 드러난다. 우리말로는 ‘무리를 짓지 않는 신문’ ‘도망가지 않는 신문’ ‘할 말을 하는 신문’이 되는 이 카피에는, 보수 우익 노선을 걷겠다는 산케이의 의지가 절절히 배어 있다.

    일본인의 특성을 거론할 때마다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란 일본어가 자주 거론된다. 혼네는 ‘본마음”이고, 다테마에는 본심을 감춘 ‘체면치레’ 정도가 된다. 일본인들은 여간해선 혼네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아리가토-(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공손히 인사하는 것은 다테마에지, 혼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일본 언론에도 반영된다. 일본의 주류 언론은 과거 일본이 침략했던 나라의 과거사를 다룰 때는 ‘다테마에’적으로 표현해 왔다. 예외가 산케이다. 산케이는 예민한 주제에 대해서도 과감히 혼네를 드러내 왔는데, 산케이는 이를 ‘무리를 짓지 않는 신문’ ‘도망가지 않는 신문’ ‘할 말을 하는 신문’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산케이는 여러 가지를 말하고 싶어하는데, 그중 하나가 ‘반공(反共)’이다. 산케이 소개 팸플릿에는 기요하라 다케히고(淸原武彦) 사장이 쓴 ‘21세기를 담당할 당신에게’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었는데, 일부를 요약하면 이렇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 혁명의 세기였다고도 한다.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할 때까지 국내(일본) 좌익 저널리즘은 폭을 넓혀 왔다. 그러나 산케이는 소련과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있는 중국에 대해서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보도했다.’

    기요하라 사장이 ‘산케이는 소련과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있는 중국에 대해서 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1991년 고르바초프가 이끄는 소련은 ‘공산주의 포기’를 선언했는데, 이것을 세계 최초로 알린 매체가 산케이였다. ‘반공 신문’이 공산주의의 심장부에서 공산주의 붕괴를 가장 먼저 알렸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산케이의 모스크바 특파원은 사이토(齊藤)씨였다. 산케이의 스미다 나가요시(住田良能) 주필은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시각과 공산주의 붕괴를 최초로 보도하는 것은 상관 관계가 없다. 하지만 반공이든 친공이든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려고 하다보면 특종이 나올 수도 있다. 사이토 특파원은 부친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그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이로인해 사이토는 공산주의의 가혹함에 대해 투쟁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관심을 갖고 공산주의 심장부를 파고들었는데, 그것이 역사적인 대특종으로 이어졌다.”

    어느 언론사든 그 언론의 명성과 색깔을 끌고 나가는 것은 몇몇 ‘스타기자’ 혹은 ‘근성 있는 기자’다. 독자들은 사실을 빨리 보도하는 것이 유능한 기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스타기자는 속보보다는 논란이 일어나는 문제작을 던지는 기자다. ‘산케이의 색깔’ ‘산케이의 맛’을 만드는 기자들도 아주 까다로운 주제를 골라 문제작을 던지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모택동의 중국과 대립

    일본은 중국을 침략한 적이 있어서인지 중국 문제를 다룰 때는 조심하는 버릇이 있다(요즘은 많이 약화됐지만, 한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조심성은 다테마에를 내세우며 공손히 처신하는 일본인의 습성과 결부돼 중국 정부에 대한 일본의 저자세로 표출되기도 한다.

    특히 중국에 파견되는 일본 외교관과 특파원은 베이징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일본 내 은어가 ‘차이나 스쿨(china school)’이다. 차이나 스쿨 멤버들은 대부분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한다.

    1960년대 일본 언론계에는 막연히 진보주의를 추수(追隨)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묵시적으로 동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런 와중에 중국이 문화대혁명에 들어가자 주류 언론들은 ‘인간 개조 실험이다’ ‘균등한 사회를 만들고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이다’는 식으로 문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산케이의 시바다 미노루(柴田穗) 베이징특파원만은 ‘문혁은 문화파괴이며 인류에 대한 죄악이다. 문혁은 모택동의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때문에 그는 추방당하고, 산케이 지국도 폐쇄되었다. 이후 중국 정부는 다른 일본 언론사 지국도 차례로 폐쇄했다.

    ‘새로운 소식을 판매하는 기업’인 언론사가 세계 중심무대 중의 하나인 베이징에 기자를 두지 못한다는 것은 허점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일본과 중국이 국교를 맺는 1972년을 전후해 일본 언론은 베이징지국 재개를 모색하는데, 이때 중국은 ‘대만에 설치한 지국을 폐쇄한 언론사만 베이징에 지국을 개설할 수 있다’고 치고 나왔다.

    대부분의 일본 언론은 이 조건을 수락하고 차이나 스쿨 멤버를 특파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산케이만은 “그런 조건을 내걸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베이징지국 개설을 허가해 달라”고 맞섰다.

    이렇게 맞선 것이 무려 30여 년. 1998년 마침내 산케이는 대만지국을 유지한 채로 베이징지국을 개설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산케이의 승리 덕분에 거꾸로 다른 언론사들이 대만에 지국을 개설할 수 있게 되었다.

    허가를 받은 즉시 산케이는 워싱턴 특파원 고모리 요시히사(古森義久)씨를 베이징 특파원에 임명했다. 고모리 특파원은 부인이 미국인일 정도로 유명한 미국통이다. 산케이는 마이니치 출신인 그를 정년없이 일할 수 ‘특별기자’(한국식으로 말하면 정년이 없는 ‘전문기자’가 되겠다)로 영입했다. 중국과는 이렇다 할 인연이 없는 사람을 베이징 특파원에 임명했으니 본인조차도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모리씨는 “나는 중국어도 모른다. 그런 나를 베이징에 보내도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산케이 경영진은 “괜찮다. 당신이 보고 들은 사실을 그대로 써라”고 주문했다.

    기자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외국 취재를 하는 데 있어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요체는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이다.

    미국의 합리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고모리 특파원의 눈에는, ‘인치(人治)’가 성행하는 중국이 모순덩어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산케이 경영진이 기대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은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정부 개발 원조)’로 명명된, 저개발국가에 대한 원조금을 가장 많이 지불하는 나라다. 일본은 침략에 사과하는 뜻으로 그 동안 적잖은 ODA 자금을 중국에 제공해 왔다. 그러나 차이나 스쿨 멤버들은 중국이 ODA 자금을 어디에 쓰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고모리 특파원은 달랐다. 그는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ODA 자금을 주로 투입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심층 기사를 연속적으로 써 내려갔다. 이 기사는 일본에서 적잖은 반향을 일으켜, 마침내 일본 정부는 용처가 어디인지 따져본 후 중국에 ODA 자금을 제공하게 되었다. 기요하라 사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베이징 지국장에 임명된 고모리 기자는 출발을 앞두고 “저는 기자로서 사실을 왜곡해서 보도할 수 없습니다.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추방을 당해도 좋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하자마 시게아키(羽佐間) 회장과 나는 “그것이 산케이의 존재의의다. 쓰고 싶은 대로 써라”고 대답해 주었다. 고모리 기자는 중국 당국의 압력을 물리치고 중국이 위조(僞造)와 모조(模造)의 대국이라는 사실과 일본이 제공한 ODA 자금으로 베이징의 인프라를 정비해, 군사력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 등을 보도했다. 이것은 다른 매체가 전혀 보도하지 않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까다로운 상대인 중국과 구 소련 정부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겠다’는 신문이 산케이니, ‘공산주의의 악동’ 북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욱 많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구로다 특파원이 선봉장이다.

    산케이는 일본을 때릴 수 있는 북한의 미사일 문제, 북한이 납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실종자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정부가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해 왔다. 산케이의 이러한 논조는 일본을 햇볕정책에 참여시키려는 김대중 정부의 의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지만 여기서 산케이는 한국의 우익인사들과는 의기가 투합한다. 산케이가 한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구로다 특파원이 한국 기자를 제치고 특종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구로다 특파원은 황장엽씨 논문을 먼저 입수하게 된 경위를 예로 들어 이렇게 말했다.

    “북한 귀순자들은 목숨을 걸고 찾아온 한국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니, 그들은 하소연을 들어줄 상대로 외국 언론을 찾는 것이다. 옛날에는 한국의 민주운동가들이 그러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대통령도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말하기 힘들면 외국 언론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180도로 사정이 바뀌어, 우파 사람들이 외국 언론을 찾고 있다. 한국의 우익들이 산케이를 찾는 것은 산케이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못하는 한국 언론의 문제다.”

    “군국주의와 우경화는 다르다”

    ‘할 말은 하겠다’는 산케이가 두 번째로 주장하는 것이 ‘일본판 역사 바로 세우기’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과 중국에서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일본의 우경화’ 등으로 보도되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 언론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 식민지배 시절 적잖은 한국의 젊은이들은 군인이나 정신대 등으로 전쟁에 끌려나가, ‘개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상당수 일본인들도 도조 히테기(東條英機)를 비롯한 군국주의자들의 강압과 선동에 말려, 그들의 젊은이들도 ‘헛된 죽음’을 맞았다고 본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은 도조 히테기를 포함한 일본 전체를 가해자로 보는 데 반해, 일본 국민들은 가해자는 도조 히테기를 비롯한 군국주의자들이고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이다.

    군국주의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은 전쟁과 군국주의를 혐오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때문에 맥아더 원수가 일본은 ‘외국과 교전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헌법(평화헌법)을 만들 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유사 군사 조직인 자위대를 만들 때는 군국주의의 부활을 초래한다며 반대한 식자층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일본인의 의식을 대변하는 신문이 아사히와 마이니치고 잡지로는 ‘세가이(世界)’다.

    반면 전전(戰前)에 가졌던 일본의 가치관이 전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언론이 있으니 산케이가 그 대표다. 월간지 ‘분게이순슈(文藝春秋)’도 때때로 산케이와 같은 견해를 취했다. 구로다 특파원의 말이다.

    “한국에서는 산케이가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산케이는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일본이 지녀온 가치관 중에서 옳은 것은 그대로 지키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일본의 좌익 학생조직인 전공투(全共鬪)가 전면에 나서 투쟁을 벌일 때의 일이다. 일본의 주류 언론은 학생들 편에 서서, 대학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산케이는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학생운동 세력을 비판했다.

    학생운동 세력이 적군파(赤軍派)로 발전해 총격전까지 벌이고 난 다음에야 일본의 주류 언론은 폭력은 안 된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러한 투쟁의 연장선에서 산케이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문제가 있다’ ‘일본의 교육제도와 행정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일본의 정체성을 부정한 전후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을 연속적으로 보도했다. 산케이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과거 일본인들은 귀기울이지 않았으나, 80년대를 분수령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산케이의 주장은 ‘보통국가론’에 수렴된다. 보통국가란 군대를 보유하고 외국과 자유로이 동맹을 맺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다. 그러나 평화헌법은 이러한 행동을 금지하는데, 일본인은 이러한 제약을 받는 일본을 전범(戰犯)국가로 부르고 있다(그러나 보통국가와 전범국가는 어디에 명시돼 있는 것이 아니고 일본에서 통상 이렇게 구분할 뿐이다). 보통국가론은 자위대를 군대로 재편해 외국과 동맹을 맺고 PKO 활동 등을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일본 총리대신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주장, 독도와 센카쿠(尖閣)제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 미일 안보조약을 강화하는 쪽으로의 개정 찬성 등은 헌법 개정을 돕거나 보통국가론과 맥을 같이하는 일련의 운동들이다.

    보통국가론을 주장하는 산케이는 어떤 회사인가. 이 신문은 언제부터 우익노선을 걷게 되었을까. 산케이는 1932년 6월 오사카(大阪)에서 ‘일간공업신문’으로 창간되었다. 오사카는 한국에 빗댄다면 부산에 해당하는 도시다. 한국의 중앙지는 대부분 서울에서 창간됐으나, 일본의 주요 일간지들은 오사카에서 창간되었다. 일본의 3대 일간지 중에 요미우리만 도쿄에서 창간했고, 아사히(朝日)와 마이니치(每日)는 오사카에서 창간됐다.

    오사카는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京都)에 가까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1923년 9월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14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본에서는 수도를 도쿄에서 오사카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오사카 천도론 덕분에 오사카는 많은 언론의 창간지가 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언론 통합을 단행했듯이, 군국주의 시절인 1942년 11월 일본 정부는 ‘신문통합령’을 발동했다. 이때 일간공업신문을 포함해 아이치(愛知)현 서쪽에서 발행된 산업경제지들이 통합해 ‘산업경제신문’이 되었다. 반면 아이치현 동쪽 그러니까 도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발행되던 경제지들은 지금의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로 통합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인 1950년 3월부터 산업경제신문은 도쿄에서도 인쇄를 시작했다. 1955년 2월에는 도쿄 본사를 설립함과 동시에 인기를 끌고 있던 프로야구 독자를 흡수하기 위해 자매지 ‘산케이스포츠’를 창간했다.

    한국의 중앙지들은 서울에 본사를 두고, 부산에는 지사만 두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중앙지들은 도쿄와 오사카에 각각 본사를 두고 있다. 도쿄본사와 오사카본사 중에 물론 도쿄본사의 비중이 크다. 하지만 오사카본사도 그 크기가 만만치 않다. 매체력이 큰 아사히는 도쿄·오사카 외에도 나고야(名古屋)와 세이부(西部)에도 본사를 두고 있다.

    1967년 12월 이 회사는 후지 TV·닛폰방송·분카방송 등과 합쳐지면서 ‘후지-산케이 그룹’이 되었다. 산케이 계열사인 후지 TV는, 그룹 내에서는 돈을 벌어주는 그야말로 효자 기업이다(일본의 중앙지들은 TV 방송을 갖고 있다. 요미우리는 김정남의 불법입국을 특종 보도한 ‘니혼TV’, 아사히는 ‘아사히 TV’, 마이니치는 ‘TBS’에 지분 참여를 했고, 니혼게이자이는 ‘테레비 도쿄’를 갖고 있다. 일본에는 이러한 5대 민방 외에 공영방송인 NHK가 있다).

    1969년 산케이는 ‘석간(夕刊) 후지’를 창간했다. 산케이가 조·석간(朝夕間) 체제로 발행되는 정론지라면, 석간 후지는 석간으로만 발행되는 대중지다. 타블로이드판인 이 신문은 정치·경제 등 일반 뉴스도 싣지만, 스포츠와 경마·오락·연예 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1973년에는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던 ‘분게이순슈(文藝春秋)’를 벤치마킹해 월간지 ‘세이론(正論)’을 창간했다. 한국에는 신동아·월간조선이 월간지 시장을 리드하나, 일본에서는 분게이순슈를 최선두로, 추오고론(中央公論)·쇼군(諸君)·세카이(世界)·호세키(寶石) 등 여러 매체가 나름대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돈을 버는 후지TV, 주장 펴는 산케이

    세이론은 한마디로 월간지계의 산케이다. 일본의 월간지들은 대체로 점잖은 논조를 유지하나, 세이론은 ‘할 말을 하는 잡지’를 표방하며 아사히신문을 정면으로 공격한다. 일본 헌법 개정 문제를 거론하며, 역사교과서의 기술 내용을 바꿔야 한다는 등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산케이와 세이론은 보수 우익 주장을 펼치는 매체로 활용되고, 후지TV와 석간후지·산케이스포츠는 이윤 창출을 노리는 매체로 자리잡게 되었다(이외에도 산케이는 일본공업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현재 후지-산케이 그룹은 산케이신문(20개사)·산케이빌딩(9개사)·분카방송(4개사)·공익법인(3개사, 5개 법인, 3개 회관)·후지TV(31개사)·닛폰방송(5개사)·포니카니온(음반 제작사-4개사)·리빙(9개사) 등 여덟 개 소그룹의 93개 사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이 그룹에는 절대 지분을 차지한 오너가 없다. 맥아더 군정 시절 미국은 ‘재벌 해체령’을 내려 창업자가 독점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해오던 일본식 경영방법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산케이가 보수 색채를 띠게 된 데는 일본 재계(財界)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 1960년대 일본은 1980년대의 한국과 비슷했다. 전공투(全共鬪)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대학생들은 연일 시위를 벌였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월남전쟁이 진행중이었고, 한반도에서는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울진·삼척사건(1968년)이 연이어 일어나는 등 냉전이 치열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경제계는, 그들이 원하는 ‘자유민주체제를 지켜줄 언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미즈노(水野成夫)씨를 비롯한 당시의 일본 경제계 실력자들은 재정이 나빠 허덕이던 경제지 ‘산업경제신문’을 주목했다. 그래서 주주들을 설득해 시카나이 노부다카(鹿內信隆)씨를 이 신문 사장으로 추대했다.

    시카나이 사장은 긴축 경영으로 산업경제신문을 살려내면서 신문 이름을 ‘산케이’로 바꿔 “자유민주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우파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했다. ‘확실히 할 말을 하는 신문(はっきりモノをいう新聞)’이라는 산케이의 특성은 이때부터 고착된 것이다.

    산케이 친구인가, 적인가

    산케이의 스미다(住田) 주필은 “이러한 산케이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수습기자를 뽑을 때 나름의 방법으로 이념을 검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앞으로도 산케이는 우익을 대변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산케이 논조에 대해 고이즈미 순이치(小泉純一郞) 총리를 비롯한 일본 여당의 실력자들은 확실히 동조하는 추세다.

    이러한 산케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요미우리다. 일본 최대 신문인 요미우리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산케이의 주장을 수용해 전 일본으로 확산하고 있다. 산케이-요미우리로 이어진 보수파 언론의 발행부수와 아사히-마이니치로 대표되는 진보 언론의 발행부수는 엇비슷하다(대략 1200만 부 정도).

    하지만 산케이에도 약점이 있다. 부수가 크게 늘지 않는 것이다. 산케이는 판매망이 도쿄와 오사카에만 집중돼 있어, 규슈와 홋카이도 쪽까지 장악하고 있는 요미우리와 아사히 등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여기 산케이의 고민이 숨어 있다.

    이러한 산케이를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산케이는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적인가 동지인가? 이제는 독자들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선택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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