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8일 산케이신문 도쿄본사에서 산케이의 논조를 이끌고 있는 스미다 나가요시(住田良能) 주필과 요시다 노부유키(吉田信行) 논설위원장을 만났다. 스미다 주필은 오사카본사 대표를 겸하고 있는 산케이의 실세고, 요시다 논설위원장은 80년대 서울특파원을 지낸 인물이다. 그리고 5월14일에는 서울에서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특파원을 만났다. 구로다 특파원은 구모리 전 베이징특파원(현재는 워싱턴특파원) 등과 더불어 정년 없이 근무하는 산케이의 ‘특별기자’다. 1980년 교토(共同)통신의 서울특파원을 하다가 88년 산케이로 옮겨온 그는, 한국을 소재로 18권의 책을 펴냈다.
―산케이는 중국을 반대하고 대만을 지지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산케이가 ‘친(親)대만 반(反)중국’ 노선을 걷는다고 말하고 싶어하는데, 그렇지 않다. 산케이는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하고 싶어할 뿐이다. 대만은 선거로 정부를 구성하는 자유민주 국가고 중국은 일당독재 국가니, 어디가 좋은지는 자명할 것 아닌가. 산케이는 중국과 친하게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지국 폐쇄를 조건으로 베이징지국 재개를 제의했을 때 산케이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언론 보도기관에 대해 다른 사람이나 기관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산케이의 의지다.”
―산케이가 다른 언론과 차별화 전략을 펼쳤음에도 판매 부수가 5위인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러나 산케이는 일본 국민에게 산케이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는 성공했다. 그 결과 오사카에서는 아사히를 이기고 2위로 부상했다. 일본 국민들에게 산케이의 존재를 심어준 점은 판매부수가 늘어나는 것보다 중요하다. 산케이는 일본 지식인을 움직여 왔다고 자부한다.”
―산케이는 북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반면 군사독재를 펼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좋게 평가하는 것 같다.
“북한에 비판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한국은 자유로이 갈 수 있는 나라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펼친 방법이 혐오감을 줄 수는 있어도 그는 한국에 발전을 가져왔다. 현재의 가치관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을 같은 위치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전두환 정부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전두환 정부의 탄생 배경과 광주사태 등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어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한반도의 안정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 (이어 요시다 논설위원장이 답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우리는 과연 일본의 안전이 보장될까 매우 불안해했다. 그래서 나카소네 총리 시절 45억 달러를 지원했는데 그것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 전두환 정부가 단임을 실천하고 올림픽을 유치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빚고 있는 센카쿠 제도에 대한 산케이의 의견은 무엇인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유권 분쟁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독도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질문에는 답하고 싶지 않다. 그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한·일 양국에 득이 되지 않는다. 다만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 한국 국민들이 보여주는 행동력만큼은 매우 부럽다.”
―산케이가 아사히 비판에 열심인 것은 무슨 이유인가. 1994년 TV아사히의 보도국장이 자민당을 지지하라고 지시한 것을 밝혀내 맹공을 퍼부은 것도 산케이였다.
“전후 언론자유와 인권이 신장된 데는 우리도 대찬성한다. 그러나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무조건 배격하는 데는 반대한다. 일본 고유의 가치관과 전후에 들어온 새로운 가치관을 균형 맞춰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
TV아사히의 국장 발언 건에 대한 산케이의 보도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신문은 읽고 싶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사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논조를 드러내도 되지만, 전파는 전국민이 공유하는 것이라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방송법 등은 규정하고 있다. TV아사히 국장은 이러한 원칙을 깼기 때문에 산케이가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부가 TV아사히에 대해 ‘그런 말(자민당을 지지하라)을 하지 말라’고 간섭했다면, 산케이는 정부를 비판했을 것이다. 방송 매체가 공정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집단자위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주 당연한 주장이다. 일본은 보통국가가 되어야 한다.”
―맥아더 군정 때 제정한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평화헌법, 평화헌법 하는데, 일본에는 평화헌법이라는 것은 없고 일본국 헌법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교전권을 부인한 헌법 9조만 거론하는데, 9조가 일본국 헌법의 전부는 아니다. 일본이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려면 헌법일지라도 고칠 것은 고치고 뺄 것은 빼야 한다. 9조가 국제사회에서 공헌하려는 일본을 제약한다면, 그리고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하다면 고쳐야 한다.”
―산케이 산하의 후소샤가 역사교과서 출판에 관여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후소샤는 후지-산케이 그룹사 중 하나지, 산케이 산하가 아니다. 그 문제는 후소샤에 물어보라. 우리는 현재의 일본 역사교과서에 잘못된 것이 있다는 데는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고만 말할 수 있다.
이는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과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국과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한 것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다만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메이지 이후의 일본 역사를 어둡게 기술해 왔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은 나쁘고 외국은 다 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 환경과 내부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역사에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이러한 것을 균형 있게 기술해서 후손에게 넘겨주자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45년 8월 초(구체적으로 소련의 對일전 참전 등이 거론된 포츠담 선언이 있은 후)를 살펴보자. 이때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전쟁은 국익과 국익이 맞부딪친 전쟁이었다. 반면 중국과의 전쟁은 침략전쟁이었기에 우리는 잘못됐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의 전쟁은 우리가 침략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침략해서 일어난 전쟁이다. 당시 일본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는데, 소련은 이를 깨고 일본을 공격했다(그 결과 구나시리 등 북방 4개 섬까지 불법으로 가져갔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이 있으니 이를 균형 있고 객관적으로 기술해 후세에게 전달하자는 것이다.”
요시다 노부유키(吉田信行) 논설위원장
―김정일 정권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북한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권력을 세습했다. 김정일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아웅산 사건과 김현희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주도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한국은 과연 이러한 인물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신동아에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월간조선의 조갑제 편집장과 같은 입장이다(조갑제 편집장은 산케이의 ‘正論’이라는 칼럼란에 글을 쓰고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일보를 뺀 거의 모든 언론이 햇볕정책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은 불법입국한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을 추방했다.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납북자 문제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이 협력해서 풀어갔으면 정말 좋겠다. 이러한 협조를 이끌어내지 않는 한국의 햇볕정책이 심히 유감스럽다. 일각에서는 불법입국한 김정남과 납북된 일본인을 교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불법입국자를 구금할 수 있는 기간은 최장 60일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위조여권으로 걸려 추방된 것만으로도 북한은 불명예스러울 것이다. 일본 정부가 김정남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김정남으로 보이는 인물이라고 해서 돌려보낸 것은 북한에 빚을 안겨준 것이다. 일본 정부의 선택이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산케이에는 북한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팀이 있는가.
“외신부 안에 한반도 정세를 담당하는 팀이 있다. 의문이 많은 나라는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게 기자의 속성이다. 그런데 서울에 ‘막강한’ 구로다 특파원이 있어 가지 못하는 기자 10여 명이 있다. 이들을 묶어서 태스크 포스를 만들었다. 이들은 노동신문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후지TV와 석간 후지로 돈을 벌고, 산케이와 월간지 세이론(正論)으로 논지를 펼치는 것이 후지-산케이 그룹의 대전략인가.
“후지TV의 매출액은 전체 그룹 매출액의 3분의 1에 이른다. 방송으로는 돈을 벌고 신문과 잡지로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석간 후지와 산케이스포츠는 상업성이 너무 강한 것 같다. 점잖은 논조의 산케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산케이는 한국에서 내리 비판만 받고 있는데 뭐가 점잖은가(웃음). 시카나이 노부다카 사장 때 영국 언론계를 조사해보니 정론지보다 연예오락지 판매부수가 많았다. 그래서 스포츠와 오락 기사가 많은 석간 후지를 창간했다. 집에서는 산케이를 보고 전철 안에서는 석간 후지를 보도록 차별화한 것이다. 산케이 스포츠는 도쿄 올림픽 전 스포츠 시대가 열리는 것에 대비해 창간했다. 부수는 산케이가 많지만 이익은 석간 후지와 산케이스포츠에서 더 많이 내고 있다.”
―한국 언론과 지식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과거 한국 언론은 북한에 대해서는 편하게 비판했으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판이 어려워졌다. 일본 문제에 대해서도 그와 유사한 변화를 일으켰으면 좋겠다. 지난 50년간 일본은 침략을 한 적이 없는데도, 한국 언론은 1945년에 고정된 시각에서 너무 편하게 일본을 비판해왔다.
지난 10년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ODA 자금을 제공한 나라다. 한국 언론은 다채로운 각도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을 보도해 달라. 이런 말을 하면 한국인들에게 야단맞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의 역사교과서를 읽고 있으나, 한국에 수정을 요구한 적은 없다. 한국 지식인들도 이제는 그들이 갖고 있는 일본관을 용기를 갖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서울특파원
―산케이 보도에 대한 한국 MBC의 항의에 대해 정정 보도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 기사는 MBC 사장 인사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주도하는 언론 개혁을 소재로 한 기사다. 김대중 정부가 정권 말기에 언론 개혁을 하는 데는 정치적 상황이 깔려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언론 개혁은 언론이 스스로 해야지 정부가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처럼 언론 개혁에 찬성하는 세력에 비판적이 될 수밖에 없다. 김중배 사장은 시민운동을 한 분이고 MBC는 언론 개혁에 적극적이었으니, 기사에 그렇다고 쓴 것이다.
내 기사에 대해 MBC는 ‘김사장 취임은 정부와 무관하다. MBC는 정부의 언론 개혁에 간여하지 않았다’며 정정 보도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나는 ‘표현에 지나친 부분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는 견해차이다’라고 말하고, MBC의 입장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 하기에 나는 ‘김사장께서 저와의 인터뷰를 통해 소신을 밝혀주시면 좋겠다. 내 기사에 오보가 있다면 인터뷰를 통해서 사과하고 정정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MBC는 서면 인터뷰로 하자는데, 나는 서면 인터뷰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반잠수정 건으로는 합참에 사과했는데.
“제보자는 반잠수정이 출현한 시각(2월12일 오후 4시30분)을 밝히는 등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물론 기사를 작성하기 전에 합참이나 국방부에 확인하는 절차를 밟을 수 있었지만, 부정적인 답변이 나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일단 기사를 쓴 후 반응을 보려고 한 것인데, 합참은 구체적인 상황까지 설명하며 북한의 반잠수정이 한국 남서해안에 침투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그래서 한국군의 대북 경계체계에는 변함없다는 합참의 주장이 포함된 기사를 반론으로 소개했는데, 부족하다며 정정 보도를 요구했다. 내가 쓴 기사를 뒷받침할 확실한 정보를 추가로 확보할 수 없었기에 정정과 사과 보도를 내보내게 되었다.”
―국제신문에 쓴 글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발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요즘은 ‘산케이 배팅(산케이 때리기)’이 유행이니까…(웃음) 내가 역사 왜곡을 한 신문사 소속이라서 그러나?(웃음) 내 글의 게재 여부는 국제신문이 결정할 일이다. 문제를 제기한 분들은 한겨레를 열심히 읽는 모양이다. 한겨레의 ‘여론 나침반’에 같은 내용이 나왔었으니까. 문제가 된 칼럼은 부산에서 철거하기로 한 ‘영도다리’를 소재로 한 것이다.
6·25전쟁 때 피란민들은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기로 하고 흩어져 월남했다. 또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에도 영도다리가 나오니, 철거한 후에 기념비라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썼다. 그런데 이 칼럼을 쓰기 전에 한 주간지를 봤는데, 주간지 제목이 ‘6·25전쟁의 비극과 일제 학정을 지켜본 다리’였다.
그래서 국제신문 칼럼에 ‘영도다리를 6·25 비극의 상징으로 볼 수는 있어도, 일제 학정과 연결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영도다리는 시민들의 관광명소였다는 기록도 있으니 일제하의 학정보다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봐야 한다’고 썼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여당의원이 산케이지국을 폐쇄하라는 말까지 했다. 1980년 광주사태 때 산케이를 비롯한 일부 일본 언론의 서울지국이 폐쇄됐는데, 20년 만에 같은 소리가 나온 것이다. 군사독재 시대에 나오던 이야기가 왜 이 시대에도 나오는지 모르겠다.”
―일부 한국인은 구로다 특파원을 가리켜 일본의 대륙 낭인(浪人)이라고 한다.
“낭인이 될 배짱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일개 기자다. 정치에까지 개입할 능력은 없다.”
―항의가 들어오거나 정정 보도를 한 후의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가.
“한반도라고 하는 ‘내 책상’에는 ‘서랍’이 여러 개 있다. 한국의 역사·정치·경제·문화·생활 등 주제가 다른 서랍이 많은 것이다. 한두 개 서랍에서 불쾌한 일이 일어나면 이를 확산시키지 않고, 다른 서랍을 열어 거기에 집중한다. 구로다와 산케이를 비난하고 협박하는 전화도 걸려오지만, 반대로 격려하는 분도 있기 때문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한국에서 기자 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가.
“세계 여러 나라에 일본 언론의 특파원이 나가 있지만, 나는 서울 특파원이 가장 보람 있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보니 한국 정부와 정치인, 국민들은 일본 기자들을 비교적 잘 대접해 준다. 우리는 가끔 한국 대통령과 악수할 기회를 갖는데, 워싱턴이나 베이징·모스크바에 나가 있는 일본 기자들은 그런 기회를 갖기 어렵다. 그러나 반대로 기사에 대한 반응이 크고 빠른 곳도 서울이다. 책임이 크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이지만, 부담보다는 보람을 느끼고 지낸다.”
―한국 언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 언론은 ‘산케이는 극우이고 일본은 우경화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우니 좌니 하는 것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산케이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산케이를 가리켜 극우라고 하는 것은, 한국 언론이 좌경화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런 내용의 칼럼을 썼더니 한국 국정홍보처에서 표현이 지나치다고 항의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