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노사나불이나 비로자나불 모두 실체가 없는 빛과 같은 존재라서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처럼 실체가 있는 불상(佛相; 부처님 모습)의 법체(法體), 즉 이념적 본질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신라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義湘; 625∼702년)대사는 신라 화엄종의 주존불로 정토종(淨土宗)의 주존인 아미타불을 영입해 들였던 것이다. 아미타불은 당시 신라가 삼국통일전쟁을 치르면서 무수하게 죽어간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널리 신봉되던 부처님이었기 때문이다. 노사나불이나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불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아미타불로 나타날 수도 있는 법신불이라는 이해를 확실하게 한 결과였다.
그러나 신라 화엄종이 통일신라 왕국을 주도하는 이념으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화엄종지에 입각하여 화엄 불국사를 지상에 구현해내는 단계에 이르자, 신라 사람들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도 형상으로 표현해내려는 의욕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불국사를 조성하면서 비로전(毘盧殿)을 지어 화엄 불국사가 화엄종지에 따라 각종 불국세계를 원융무애하게 배치하였음을 과시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비로전의 주불은 마땅히 비로자나불이어야 하니, 그 동안 비로자나불이나 노사나불을 형상화하지 않았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도리없이 이를 형상화하여 비로전에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미 ‘구역화엄경’에서 말한 노사나불을 운강석굴에 조성하기 시작했다. 북위 초기 5대 황제의 초상 조각으로 주존불을 삼은 운강 5대 중심 석굴 중의 중심굴인 (도판 1)의 노사나불이 바로 그것이다. ‘구역화엄경’ 권 2 노사나불품에서 노사나불은 몸의 털구멍으로부터 화신운(化身雲; 조화로 만들어지는 분신불을 감싸고 있는 구름)을 뿜어낸다 했는데, 이 의 의복 표면에는 무수한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이 은 가장 강력한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태무제(太武帝; 408∼452년)의 초상 조각이라고 추정한다. 태무제는 폐불을 단행했던 장본인이다. 다시는 불상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폐불이 자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운강석굴을 파나갔던 것이므로, 폐불을 단행한 절대 군주인 태무제의 모습을 모든 부처님의 법신인 노사나불 형상으로 표현하여 그 위력을 과시하려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 다음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중국 황제의 절대권을 과시한 당 고종(高宗; 628∼683년)의 초상 조각을 용문석굴 봉선사동(奉先寺洞)의 주불로 이루어내면서 노사나불 형상을 빌려 왔다. 이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고종 상원(上元) 2년(675)에 조성한 것이라 하는데, 현재 (도판 2)이 그것이다. 불상의 높이가 17.4m나 된다.
그러나 과 은 모두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 계통의 손짓을 하고 있어 석가모니불의 입상이나 좌상과 다를 바 없는 손짓을 하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노사나불 형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고 여래명호품에서는 석가모니라고도 부른다 하였으므로 석가모니불상과 같은 형상으로 표현하되 위력을 과시하는 손짓이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사자국(獅子國; 스리랑카) 출신의 불공(不空; 705∼774년) 삼장이 16세(720)에 중국에 들어와 70세까지 살며 밀교 경전을 대대적으로 번역해내자, 여기서 비로자나불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내용도 전해졌다. 불공 삼장이 42세 때인 당 현종 천보(天寶) 5재(五載; 746) 이후부터 대종(代宗) 대력(大曆) 9년(774)에 돌아가기까지 그 사이 어느 때에 번역하였다고 생각되는 ‘금강정경일자정륜왕유가일체시처염송성불의궤(金剛頂經一字頂輪王瑜伽一切時處念誦成佛儀軌)’라는 긴 이름의 경전에 그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편조(遍照; 비로자나) 여래의 몸, 형상은 밝은 달과 같다. 일체의 잘생긴 모습, 법신(法身)을 장엄하였네. 금강보관(金剛寶冠)을 쓰고, 둥근 가발로 머리를 꾸몄다. 뭇 보배 장엄구로, 가지가지 몸을 꾸미고, 지권(智拳)의 큰 손짓을 지어, 사자좌의 둥근 백련대(白蓮臺)에 앉았다. 이른바 지권인이란 것은 크고 작은 여러 손가락으로 주먹을 쥐고, 두지(頭指; 食指라고도 하는 둘째손가락)는 등을 보이며 기둥 세운다. 이에 금강권(金剛拳)이 이루어지면,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두지를 잡네. (손가락) 한 마디 심장에 대면, 이를 지권인이라 하지(遍照如來身, 形服如素月. 以一切相好, 用莊嚴法身. 戴金剛寶冠, 輪爲首飾. 衆寶莊嚴具, 種種校飾身. 持智拳大印, 處於獅子座, 日輪白蓮臺. 所謂智拳印, 中小名握. 頭指柱大背, 乃成金剛拳. 右握左頭指, 一節面當心, 是名智拳印).”
이로 보면 편조여래, 즉 비로자나불은 금강보관을 쓰고 둥근 가발로 머리를 장식하며 갖가지 보배 장신구로 몸을 꾸민 보살형이 틀림없다. 그런 보살형 여래가 지권인을 짓고 사자좌의 둥근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지권인이란 것은 양손을 주먹 쥐고 왼손 둘째손가락인 두지(식지)를 기둥처럼 곧추세운 다음 이를 오른손 주먹으로 잡고 심장 부근의 가슴에 대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의 주존인 편조여래, 즉 비로자나불의 모습이다. 그런데 밀교에서는 이를 ‘화엄경’에서 일컫는 노사나불이나 비로자나불과 구별하여 부르기 위해 같은 의미지만 다른 이름인 ‘대일(大日)여래’로 부른다. 비로자나가 태양을 상징하는 빛이라는 의미이니 비로자나나 노사나 및 대일은 모두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만다라(曼茶羅, mandala)라는 것은 단(壇)이나 도량(道場)이라 번역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원래는 인도에서 어떤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단을 쌓거나 구획을 나누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밀교가 일어나면서 이 단 위에 복잡 다양한 불국세계를 원융무애하게 배치하는 그림을 그려넣게 되자 이런 불보살 및 성중(聖衆) 상의 종합배치도를 만다라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만다라는 그 제작을 지시하는 교본에 따라 금강계만다라와 태장계(胎藏界)만다라로 나누어진다. 금강계만다라는 금강지(金剛智; 671∼741년)와 불공 등이 번역한 ‘금강정경(金剛頂經)’을 교본으로 삼아 그린 것이고, 태장계만다라는 선무외(善無畏; 637∼735년)가 주축이 되어 번역한 ‘대비로자나경(大毘盧遮那經)’을 교본으로 삼아 그린 것이다.
그래서 금강계만다라에서는 그 중심불인 비로자나불의 손짓이 지권인을 짓게 되고, 태장계만다라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법계정인(法界定印)이라는 선정인(禪定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을 발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 손바닥 위에 왼손 손바닥을 포개 대고 있는 손짓)을 짓는다.
그런데 태장계만다라의 중심불인 비로자나불의 법계정인은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이 모두 기왕에 지었던 손짓이다. 그러니 이런 손짓을 짓게 한다면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과 구별되지 않는다.
반면 금강계 비로자나불이 짓는 지권인은 이제까지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미륵불 등이 지어본 적이 없는 손짓이다. 그래서 이 지권인을 짓고 있다면 비로자나불이라는 확실한 증표가 되므로 신라에서는 불국사 비로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조성하면서 이 지권인을 짓게 하였던 모양이다. 현존한 (도판 3)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국보 26호인 은 앉은키가 177cm나 되는 거대한 불좌상으로 장륙상(丈六像)에 해당하는데, 거구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체구에 장대한 지체(肢體; 팔 다리)와 늘씬한 허리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면서 위풍(威風)을 과시한다. 두 어깨가 너무 사각(四角)지고 목의 삼도(三道; 목에 난 세 가닥 주름)가 지나치게 분명하여 용수철처럼 보이는 까닭에 상당히 경직된 느낌을 드러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런 흠 때문에 석굴암 주불이 조성되던 8세기 중반경보다 훨씬 뒤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렇게 당당한 불상을 조성할 수 있는 기백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해 내는 불국시대의 절정기가 아니고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이루어진 다음에 이를 모본으로 삼아 이 을 조성했으리라는 추측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 이유로 모본을 너무 의식한 결과 이와 같은 경직성이 더욱 강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선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를 드러냄)으로 옷 입는 법을 그대로 따랐고 네모 반듯한 얼굴과 분명한 삼도, 사각진 어깨와 과장된 가슴을 그대로 흉내냈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바짝 긴장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힘이 너무 들어가서 굳어진 것이다.
얼굴 표정도 너무 근엄하게 굳어 있고 자세도 그렇다. 마치 창을 쥐고 앉아 있는 호위무사와 같은 자세다. 을 성덕왕의 초상 조각으로 만들고 나서 불국사의 여러 불상을 경덕왕의 초상 조각으로 만들면서 이런 긴장된 표현을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절대권을 거침없이 행사하던 경덕왕의 위압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이런 무단적(武斷的) 상호를 타고났다면 능히 왕권을 위협하는 주변의 집권 가문들을 거침없이 제압하여 그 힘으로 찬란한 문화사업을 일으키는 과단성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함께 조성했다고 생각되는 국보 27호 (도판 4)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비로자나불임을 표시하는 지권인도 의 손모양을 의식한 듯, 왼손이 오른손보다 위로 가게 하기 위해 손 위치를 서로 바꿔놓았다. 왼손 두지(頭指)를 오른손 주먹으로 쥐라는 ‘금강정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오른손 둘째손가락을 곧추세워 왼손 주먹으로 쥐게 한 것이다.
그리고 왼손 엄지 끝을 그 끝에 살짝 댄 것이 아니라 왼손 식지로 힘주어 이를 누르고 있다. 강력한 힘을 과시한 표현이다. 비로자나의 절대권을 타고난 태양왕으로서의 경덕왕 모습을 상징하는 의도적인 기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불국사의 이 두 금동불좌상은 화엄불국사 조영의 마무리 작업으로 이루어낸 빛나는 예술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 권 2 경덕왕조에서는 경덕왕의 옥경(玉莖; 성기) 길이가 8촌(寸)이라 하였으니 20~24cm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성기의 보유자라면 그 체구가 과 같이 건장하고 위풍당당했으리라고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경덕왕의 초상 조각이라고 생각되는 불국사의 두 금동불상말고도, 이와 같은 양식기법을 보이는 불상이 또 하나 있으니 국보 제28호인 (도판 5)이 그것이다.
이 역시 경덕왕의 초상조각이라 생각된다. 백률사 초입에 땅으로부터 솟아난 사방불인 (도판 6)이 있고 이것이 경덕왕의 백률사 참배와 상관 있던 일을 생각하면, 어째서 백률사에 이와 같은 경덕왕의 초상조각이 약사여래 모습으로 만들어져 봉안됐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된다.
그런데 이 은 편단우견으로 옷 입는 법을 따르지 않았다. 승가리(僧伽梨)라는 겉옷(大衣) 아래에 울다라승(鬱多羅僧, uttarasanga)이라는 윗옷(上衣)을 끼워 입는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 이중으로 옷을 끼워 입는 법)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편단우견을 하였으면서도 오른쪽 어깨는 또 한 벌의 윗옷으로 가리는 효과를 나타내어 양쪽 팔뚝에 소매를 끼워 입은 듯한 의복 표현을 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소매 단 옷을 입는 신라 사람들로서는 편단우견상이 초상 조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이미 초당시기부터 유행하던 이런 이중착의 양식의 불의 표현법(도판 7)을 시도하였던 모양이다. 이는 이미 의 중심불인 아미타불입상에서부터 시험한 의복표현법이기도 하였다.
청암사 수도암의 비로자나불좌상
이런 이중착의법 양식의 불상은 당연히 신라 사람들이 크게 선호하게 되었으니 곧바로 의 편단우견 항마촉지인 형식을 이중착의 항마촉지인 형식으로 바꾸어 조각하는 변형이 일어났다. 경주시 배반동의 동남산 미륵곡 보리사지에 남아 있는 보물 제136호 (도판 8)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은 석굴암과 불국사 조영이 마무리된 직후, 즉 이 조성된 직후에 조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여러가지 양식적 특색을 보이고 있어서 혜공왕(765∼780년)대를 넘기지 않는 시기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추측되는데, 이중착의법이라는 옷 입는 법을 제외하고는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이중착의법 역시 편단우견법의 변형이라고 생각한다면 양식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두툼하며 네모 반듯한 얼굴, 삼도가 분명한 목, 사각진 어깨, 항마촉지인을 지은 두 손, 팔각 중대석에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운 연화대좌 등이 양식과 같다. 머리가 몸에 비해 큰 것도 같다.
어떻든 이렇게 과 에서 이중착의법 형식이 정착하자, 이런 형식은 이후 편단우견 형식과 함께 양대 주류를 이루는 불의(佛衣) 표현 양식으로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이후에 짓는 화엄종 사찰에서는 도량의 주존불로 비로자나불상을 모시면서 이런 이중착의법 양식을 수용해 갔던 듯하다.
경상북도 금릉군 증산면 불령산(佛靈山) 청암사(靑岩寺) 산내암자인 수도암(修道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보물 제307호로 지정된 (도판 9)과 보물 제296호인 (도판 10)이 그것이다.
은 양식을 바로 뒤잇는 듯 얼굴도 네모 반듯하고 두 어깨도 사각져 있으며 가슴도 넓다. 그러나 삼도의 표현이 두 줄로 생략되어 목이 짧아졌고 허리 길이도 단축되었으며 이중착의법으로 편단우견상을 보이지 않는다. 또 지권인을 지은 두 손의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어 왼손 두지를 오른손 주먹이 쥐었으며 오른손 엄지손가락 끝을 왼손 두지 끝에 대었다. ‘금강정경’에서 설한 대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양식이 상당히 진전한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이 은 혜공왕이 시해되어 불국시대가 종말을 고한 직후인 원성왕(元聖王; 785∼799년)대나 애장왕(哀莊王; 800∼808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해인사(海印寺) 창건이 애장왕 3년(802)의 일이라 하니 가야산과 맞닿아 있는 수도산(修道山; 불령산의 옛 이름)에도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화엄종 대찰을 건립하면서 이런 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수도암이라고 부르는 이 절이 ‘동국여지승람’ 권 31 거창(居昌)군 불우(佛宇)조에 보이는 보광사(普光寺)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보광사라는 이름이 빛을 널리 비춰주는 절이란 뜻으로 태양광(太陽光), 즉 햇빛을 의미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절이라는 것을 표방하기에 합당한 이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위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 애제(哀帝) 천복(天復) 4년, 즉 신라 효공왕 8년(904)에 지은 ‘대당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大唐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에서 해동(海東) 화엄대학지소(華嚴大學之所; 화엄을 크게 배울 수 있는 곳) 십산(十山)을 꼽으면서 강주(康州) 가야산(伽倻山) 해인사와 보광사를 한꺼번에 거명하고 있는데 가야산 안에는 보광사가 없다. 그러니 수도산을 당시에는 가야산과 같은 산으로 생각하여 가야산 보광사라 했다고밖에 달리 볼 수 없다.
그런데 수도암에는 지권인을 지은 금강계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높이 251cm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금까지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약광전에는 보관을 쓰고 법계정인을 지은 태장계 비로자나불좌상이 역시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모셔져 있다. 그 규모도 만만치 않아 좌상 높이만 154cm에 이른다. 이처럼 보관을 쓰고 법계정인을 지은 비로자나불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밝혀진 예는 이것밖에 없다.
이 태장계 비로자나불좌상의 조성 연대를 보통 고려 초인 10세기경으로 잡고 있으나 최고운이 ‘법장화상전’을 쓰던 904년 이전에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설한 연화장 세계의 주불인 금강계 비로자나불좌상과 태장계 비로자나불좌상을 함께 모셔 가장 화엄종 사찰다웠기에 최고운이 화엄십찰의 하나로 열거했을 것이다. 지금은 청암사의 산내 암자로 격하되어 수도암이라고 부르는 이 절이 신라 때는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꼽히던 보광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후 화엄종 사찰에서 얼마나 비로자나불상을 더 만들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현존 유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9세기 중반경에 이르면 갑자기 지권인을 지은 비로자나불좌상이 많이 만들어지며 한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 양식으로 떠오른다. 남종선(南宗禪)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선문(禪門)을 개설하면서부터 일어난 현상이었다.
성덕왕의 외손자로 상대등 지위에 있던 김양상(金良相; ?∼785년)이 혜공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신라통일 이후 태종 무열왕(654∼660년)의 장자인 문무왕(文武王; 660∼680년)의 직계 혈손만 왕이 될 수 있다는 원칙을 깨뜨린 것이었다. 뒤이어 이찬 김경신(金敬信; ?∼779년)이 왕위를 가로챈 것은 진흥왕(540∼575년)의 직계 혈손인 진골(眞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더 근본적인 원칙을 깨뜨린 것이었다.
이로써 사실 진흥왕으로부터 비롯되는 진골왕통이 8대 245년 만에 막을 내리고 12대 전에 갈라져서 일가라고도 할 수 없는 비진골계 인물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었다. 새로운 왕조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혈연으로는 무관한 관계였던 것이다. 그래서 원성왕이란 시호와 열조(烈祖)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던 것이니 새 왕조의 시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崔致遠이 지은 崇福寺碑文 참조)
이로써 통일신라 시대에 황금기를 맞은 불교 문화는 그 절정기에 갑자기 곤두박질치는 불행을 맞았으니, 경덕왕이 지나치게 절대권을 행사하여 무리하게 불국시대 문화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던 과보(果報)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경덕왕이 불과 38세경에 돌아가자 경덕왕의 위세에 눌려 숨죽이고 있던 집권 가문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혜공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 만월(滿月)부인이 섭정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도전과 반발을 제압할 길은 없었다. 더구나 경덕왕 때 왕실 측근 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여 울타리가 없어진 형편이었으니 진골 왕통이 비진골계의 공략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진골계 김씨로서 왕위 찬탈에 가담하였다가 하늘의 도움으로 왕위를 가로챌 수 있었던 원성왕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새로운 통치이념을 준비한 것도 아니었고 혁신적인 지지기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진골 절대왕권을 무너뜨리는 일에 뜻을 같이한 비진골계 집권층들의 지지를 얻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정통성도 없고 지지기반도 허술하기 그지없는 그의 왕권이 얼마나 미약했겠는가 하는 것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그런 위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큰아들 인겸(仁謙; ?∼791년)과 둘째 아들 의영(義英; ?∼794년)이 차례로 일찍 죽어 장손인 준옹(俊邕; ?∼800년)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마저 즉위한 지 1년 반 남짓 만에 돌아가니, 이후부터는 숙질들 사이에 왕위 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하여 왕들이 거의 제 명에 죽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후 신라가 멸망하기까지 150년 동안에 20명에 가까운 왕들이 교체되는 비운을 맞는다. 준비 없이 가로챈 왕위가 얼마나 큰 재앙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가를 보여준 좋은 본보기였다.
사분오열된 집권층들이 왕자 왕손들과 결탁하여 원칙 없는 왕위 쟁탈전을 부추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끝내 이들은 중앙 세력만으로 해결이 안 되자 지방 호족(豪族)세력까지 끌어들인다. 그 결과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으로 절대화되었던 진골 왕족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따라서 이를 뒷받침해 주던 화엄사상도 이제 더 이상 주도 이념의 구실을 감당해 나갈 수 없는 형편에 이른다. 이에 새 사회를 이루어 낼 새로운 이념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그런데 이때 당(唐)나라에서는 ‘문자(文字)를 내세우지 않고 곧바로 마음을 깨우친다(不立文字 直指人心)’는 종지(宗旨)를 내건 달마(達摩)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였다. 선종의 제5조인 홍인(弘忍; 602∼675년)대사 문하에서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북종선(北宗禪)의 초조(初祖) 신수(神秀; ?∼706년)대사와 돈오(頓悟)를 주장하는 남종선(南宗禪)의 초조이자 육조(六祖)로 인가를 받은 혜능(慧能; 638∼713년)대사가 출현하여 선종을 크게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남북종선으로 분파된 뒤에 북종선은 제실(帝室)의 비호를 받으며 동도(東都) 낙양을 중심으로 한 북방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그에 반하여 남종선은 육조대사가 주석하던 광동성(廣東省) 소주(韶州)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남중국 전역까지 전파해 나가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에 신라에서는 신분상 최고 집권층으로의 진출을 제약받던 육두품(六頭品) 이하의 하층 귀족계급 출신 승려들이 대거 당나라로 건너가서 이 신사상을 체득하고 돌아온다. 그중에서도 특히 돈오(頓悟)를 주장하는 혁신 계열인 남종선에 매료되어 그 인가(印可)를 받아오는 이들이 허다하였다. 진골귀족들의 추악한 왕위 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새 사회 건설을 꿈꾸던 이들은 선종 이념이 그런 혁신적인 주도 이념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내세워 중심으로 삼는 경전(所依經典)을 두지 않았으므로 선사의 자격을 인정하는 방법은 오직 스승이 자신의 견성오도(見性悟道)를 마음으로 인정해주는 길밖에 없다. 이를 인가(印可)라 하는데 이렇게 인가를 받은 선사(禪師)는 일문(一門)을 개설하여 조사(祖師)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9세기 전반부터 개설되기 시작하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이렇게 우리나라 선사(禪師)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당의 선문조사(禪門祖師)들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와 설립한 것이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남종선의 심인(心印)을 획득하고 돌아와 일문(一門)을 개창한 분이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초조(初祖)인 도의(道儀)선사다. 현존 최고(最古)의 선종사(禪宗史)인 ‘조당집(祖堂集; 952년 편찬)’ 권 17 설악산 진전사원적선사(雪岳山陳田寺元寂禪師)조에 기록된 도의선사 전기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도의선사는 속성이 왕씨(王氏)이고 북한군(北漢郡), 즉 지금 서울 부근 출신인데 어려서 출가하여 법명(法名)을 명적(明寂)이라 하였다. 건중(建中) 5년, 즉 선덕왕 원년(784)에 사신 김양공(金讓恭)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서 오대산(五臺山)에 참배하고 보단사(寶壇寺)로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로 가서 육조영당을 배례한다. 그리고 강서(江西)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육조의 법증손(法曾孫)인 서당(西堂) 지장(智藏; 735∼814년)에게 나아가 남종선지를 획득하고 인가를 받는다.
여기서 도의(道儀)라는 이름을 새로 얻고 다시 사숙(師叔)인 백장(百丈) 회해(懷海; 720∼814년)선사에게서도 인가를 얻는다. 그때 백장선사는 그 스승인 강서(江西) 도일(道一; 709∼788년)선사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승려에게로 가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한다.
이후 장경(長慶) 원년, 즉 헌덕왕 원년(821)에 귀국하여 선지(禪旨)를 전파하려 하였으나 아직 경교(經敎), 즉 교종에 익숙한 신라 사회에서 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양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 40년 동안 선정(禪定)을 닦으며 제자를 기르다가 염거(廉居)화상에게 법을 전해주고 열반에 든다. 도의선사의 법통을 이은 염거화상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며 선지를 펴지만 아직 선문(禪門)을 개설할 만한 실력을 갖추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염거화상의 문하에서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이 출현한다. 그는 장차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으로 터를 옮겨 보림사(寶林寺)를 짓고 일문(一門)을 개설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효시가 되는 가지산문(迦智山門)이었다.
이제 그 구체적인 사실을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에 기술된 내용에서 간추려 보겠다. 선사는 정원(貞元) 20년, 즉 애장왕 5년(804)에 웅진(熊津), 즉 지금 공주 관내(管內; 관할 구역 안)에서 출생했는데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金氏)로 지방의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아마 진골(眞骨)에서 밀려나 육두품(六頭品)으로 강등된 몰락 왕족의 후예였던 모양이다.
어려서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에게 출가한 후 태화(太和) 원년, 즉 흥덕왕 2년(827)에 24세의 나이로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 즉 현재 서산 마애불이 있는 가야산 보원사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곧바로 억성사로 염거화상을 찾아가 선지를 전수받는다. 만 10년 공부를 끝낸 다음 개성(開成) 2년, 즉 희강왕 2년(837)에 34세의 나이로 동지인 정육(貞育), 허회(虛會) 등과 더불어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 조사(祖師)인 도의선사와 같이 중국 선종의 인가를 받아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나라 여러 곳을 다니며 선지식(善知識)들을 역방한 후 체징선사는 고국에서 도의선사의 선지를 받은 것과 하등 다름이 없는 것을 깨닫고 만 3년만에 귀국한다. 37세 나던 개성(開成) 5년, 즉 문성왕 2년(840)의 일이었다. 평로사(平盧使)를 따라 귀국하였다 하니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 세력의 인도로 전라도 남쪽 해안을 따라 영암 구림이나 나주 회진을 거쳐 돌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 후 20여 년간은 스승 염거화상이 주석하는 설악산 억성사와 조사(祖師) 도의선사의 묘탑이 있는 진전사 및 출가 본사와 수계 본사가 있는 고향 태안반도 일대를 전전하며 선지를 현양하였던 모양이다. 청양(靑陽) 장곡사(長谷寺)가 선사의 개창이라 하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55세 때인 대중(大中) 12년, 즉 헌안왕 2년(858)에는 무주(武州), 즉 지금 광주(光州)의 황학난야(黃壑蘭若)로 거처를 옮긴다. 혁신사상인 남종선지(南宗禪旨)를 광포(廣布; 널리 펼침)하기에는 진취적이고 다혈적인 기질을 가진 남방 풍토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때는 청해진대사 장보고가 신무왕(神武王; 839년 4∼7월)의 등극을 돕기 위해 중앙으로 진출하였다가(839) 그 딸을 문성왕(文聖王; 839∼857년)의 둘째 왕비로 들여보내는 일에 실패하고(845)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킨 다음 무주인(武州人) 염장(閻長)의 계교에 말려 살해된 지(846) 얼마 안 되는 시기였다. 청해진 반란의 여파로 무주 일대의 민심은 더욱 신라 조정에서 멀어졌을 것이고 선사들이 바다 건너 중국을 내왕하면서 장보고 세력과 깊은 인연을 맺었을 것이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보조선사가 어째서 무주 쪽으로 주석처를 옮겨갔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 조정에서는 헌안왕이 이해(858) 6월에 장사현(長沙縣; 지금 전북 고창군에 속해 있는 장사현이 아니라 천관산 아래에 읍치가 있던 장흥의 옛 이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을 보내 선사를 왕경(王京)으로 초빙하려 한다. 선사가 이를 정중히 거절하자 국왕은 뒤이어 10월에 영암군(靈岩郡) 승정(僧正) 연훈(連訓)법사와 봉신(奉宸)인 풍선(馮瑄) 등을 보내 윤지(綸旨)를 내리고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이석(移錫)할 것을 청한다.
이 가지산사는 원표(元表) 대덕(大德)이 살던 곳으로 일찍이 법력(法力)으로 정사(政事)에 공을 세웠으므로 건원(乾元) 2년, 즉 경덕왕 18년(759)에 왕명(王命)으로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워 그 구역을 확정해준 곳이었다.
보조선사가 이곳 가지산사로 이주해 가자 곧바로 그 다음해인 선제(宣帝) 14년, 즉 헌안왕 4년(860) 봄에는 선사의 제자인 장사현 부수 김언경이 녹봉을 떼내고 사재를 털어 무쇠(鐵)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일구를 주성하여 선사가 거주하는 사찰을 장엄하려 한다. 그는 왕경으로 선사를 초빙해 오라는 왕명을 받들고 왔던 사람이었다.
이에 국왕은 망수리(望水里) 남등택(南等宅)에 교지를 내려 금(金) 160분(分)을 공출(共出)하게 하고 조(租) 2000곡(斛)을 내려 이를 돕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함통(咸通) 신사(辛巳), 즉 경문왕 원년(861)에는 시방(十方; 온 세상)의 시주로 선우(禪宇; 절)를 넓히는 불사까지 일으켜 이를 원만히 회향한다. 즉 가지산문 종찰(宗刹)로서의 면모를 구비해 놓은 것이다.
보조선사는 이렇게 선문종찰(禪門宗刹)의 규모를 완비한 다음 20년을 이곳에 주석하며 초조(初祖) 도의선사와 이조(二祖) 염거화상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자가(自家; 자기 집안) 선문종지(禪門宗旨)를 만방에 과시하며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기치를 뚜렷이 세워놓는다.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효시가 되는 가지산문의 개창 전말이다.
보조선사는 광명(廣明) 원년, 즉 헌강왕 6년(880) 6월13일에 세수 77세 승랍 52세로 이곳에서 열반에 드는데 제자는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00여 명이었다. 이후 3년 뒤인 헌강왕 9년(883)에 제자 의초(義草) 등이 행장(行狀)을 지어 올리며 건비수탑(建碑樹塔; 비를 건립하고 탑을 세움)을 조정에 청하니 국왕은 시호를 보조선사(普照禪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창성탑(彰聖塔)이라 하며 사호(寺號)를 보림사(寶林寺)라 내려주어 이곳이 동국(東國) 선종(禪宗)의 총본산(總本山)임을 인정해준다. 육조대사 혜능이 주석하던 소주(韶州)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가 중국 선종의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현재 보림사 대적광전 안에는 선문종찰을 상징하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국보 제117호인 (도판 11)은 바로 보조선사 당시에 조성 봉안된 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보조선사 창성탑비문에서는 장사부수(長沙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선제(宣帝) 14년, 즉 헌안왕 4년(860) 중춘(仲春)에 녹봉을 떼내고 사재를 털어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주성하여 선사가 거주하던 범우(梵宇)를 장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대적광전 안에 봉안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왼쪽 위 팔뚝 뒤에 새겨진 양각(陽刻) 조상(造像) 명문(銘文)에 따르면 그보다 2년 전인 대중(大中) 12년, 즉 헌안왕 즉위 3년 무인(戊寅; 858) 7월17일에 무주(武州) 장사부관(長沙副官) 김수종(金遂宗)이 정왕(情王), 즉 헌안왕 의정(誼靖)에게 주청하여 왕명(王命)으로 이를 주조하였다고 한다. 거의 동시대에 새겨진 두 기록이 어째서 이런 차이를 보이는지 알 수 없다.
보조선사의 보림사 이주 전말을 차례로 기록하며 이주한 다음해인 대중 14년 중춘(仲春)에 선사를 위해 철을 사들여 노사나불을 주성하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데서야 창성탑 비문 기록을 아니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후일 조작이 불가능한 양각명문(陽刻銘文)으로 대중 12년 7월17일에 장사부관 김수종이 정왕(情王), 즉 헌안왕 의정(誼靖)에게 주청하여 왕명으로 이를 주조하였음을 밝히는 기록 역시 아니 믿을 수 없다.
비문의 문맥으로 보아 별개의 철조비로자나불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이는 전임 장사부수 김수종이 헌안왕 2년에 발원하여 이 철불 주조 불사를 시작한 것을 후임 장사부수인 김언경이 헌안왕 4년에 마무리지으면서 김언경이 자기 공덕을 과시하기 위해 고의로 그 내용을 삭제하였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도금술로 이 양각 명문이 숨겨져 당시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김언경은 이런 명문이 새겨진 줄 모르고 자신이 공덕을 독차지하려 개작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분명 2년 먼저 만들어져서 그 팔뚝에 불상이 만들어진 전말을 새겨놓았는데 이를 무시하고 그보다 2년 뒤에 자신이 만들었다는 기록을 비문에 새길 수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추리가 가능한 것은 보조선사 창성탑비의 전반부 6행(行)은 곤미현(昆湄縣)(지금 영암군에 속해 있었다)의 현령(縣令) 김원(金)이 구양순체로 쓰고 제 7행 중간 이후부터는 바로 그 장사부수였던 김언경이 저수량체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현존 비석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비문을 이렇게 두 사람이 나누어 쓴 예는 세상에 거의 없거늘, 이런 구차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이 비석의 입비 과정에 분명 어떤 문제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구나 철조비로자나불의 주조 사실 기록 부분이 김언경의 글씨로 쓰여 있음에랴! 그러니 이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제조 연대와 조성자는 불상의 팔뚝 명문을 따라야 옳다고 하겠다. 즉 헌안왕 2년(858)에 장사부수 김수종이 발원하여 헌안왕 명으로 주성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일찍이 일본인 금석학자 갈성말치(葛城末治)도 이 사실을 발견하고 ‘보림사 비로자나불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이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김수종과 김언경은 동일 인물로 김언경이 고친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고친 이유는 당나라 황제의 이름을 피휘(避諱; 임금이나 조상 이름자를 피하여 쓰지 않음)하기 위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 시기의 당나라 황제 이름에 수종이란 이름자는 없다. 굳이 피휘하기 위해 이름을 고쳤다는 사실을 고집하고 싶다면 신라 흥덕왕(826∼836년)의 이름이 수종(秀宗)이었으니 이와 연관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김수종의 이름을 지을 당시에 흥덕왕은 이미 재위하고 있었을 터인데 하필 그보다 5대나 지난 헌안왕(857∼861년) 당시에 와서 피휘를 위해 개명한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다. 따라서 의 조성자가 김수종이냐 김언경이냐 하는 문제를 동일 인물의 개명설로 간단하게 처리해서는 안 될 듯하다.
불상은 앉은키 251cm의 거대한 규모인데 어깨선이 부드러운 것에 반해 허리가 길고 무릎폭이 넓어 전체적으로 정삼각형에 가까운 이등변삼각형 구도의 안정된 비례를 보인다. 얼굴은 조금 긴 편에 윤곽이 분명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시원한 인상이라 활달한 무장의 기풍이 엿보인다.
정수리에는 심인(心印)의 상징인 계주(珠) 표현이 뚜렷하여 선문종찰(禪門宗刹)의 주불(主佛)임을 표방하였으며 불의(佛衣)는 승가리와 울타라승 두 벌을 겹쳐 입은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으로 양쪽 어깨를 모두 덮어 입은 통견착의법(通肩着衣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앞섶을 양쪽 다 풀어헤친 듯 굴곡을 보여 호방(豪放)한 기세를 과시하였고 치마를 젖가슴까지 끌어올려 간편하게 죄어 맸다. 이런 표현은 모두 무장다운 옷매무새를 은연중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어깨선이 부드러운 만큼 지권인(智拳印)을 지은 양손도 체구에 비해 앙징스러울 정도로 작고 예쁘다. 발 크기에 비하면 비례가 맞지 않는 듯하지만 바로 이런 표현이 이 불상을 신비한 불격(佛格)으로 승화시키는 요체가 아닌가 한다.
지용(智勇; 지혜와 용기)과 자위(慈威; 자비와 위엄)를 겸전한 이상적인 쾌남상(快男像)이라 할 수 있으니 혹시 당시 바다의 영웅으로 떠받들던 장보고의 모습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장보고는 무주인(武州人)들의 영원한 우상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보조선사가 동국선문의 총본산인 보림사에 노사나불을 주불로 모시면서부터 이후 구산선문에서는 다투어 지권인을 지은 철조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게 된 듯하다. 마치 의상대사가 화엄종 총본산인 부석사를 지으면서 무량수전에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자 이후 화엄종 사찰들이 앞다투어 그 제도를 따르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구산선문에서는 대적광전에 철조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는 것이 불문율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보수 이념의 대표격인 화엄종의 주불이며 밀교 만다라의 중심불로 등장했던 비로자나불을 혁신이념인 선종, 그중에서도 첨단을 달리는 남종선문에서 선찰(禪刹)의 주불로 맞아들였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선종에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바로 마음을 깨우친다’는 종지를 내세운 것은 직관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의지의 표방이었다. 그러니 깨달음의 목표는 불성(佛性; 불타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의 본질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불성의 본질을 온전하게 지닌 불격(佛格)이 바로 노사나불이자 비로자나불이니 혁신이념을 상징하는 새로운 형식의 불상으로 제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지권인이라는 새로운 손짓을 지어 종래 교종 시대에 조성된 허다한 불상 양식과 뚜렷이 구별됨에랴!
또 그 지권인이 중생계(왼손)와 불계(오른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음을 상징하고 미혹과 깨달음, 선정과 지혜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표방하여 선종에서 추구하는 이상을 한꺼번에 표현해 주고 있으니, 이보다 더 적당한 불격은 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조선사의 불상관(佛像觀; 불상에 대한 생각)이었을 것이고 이후 선사들의 공통된 불상관이었기에 선문(禪門) 종찰(宗刹)에서 이 지권인을 지은 비로자나불상을 주불로 모시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불상의 재질로 무쇠를 택한 것은 강철 같은 의지가 없이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그런데 남종선문이 차차 지방 호족세력과 연계되면서 그들이 쇠의 보유량 및 제철기술 등을 자랑하려는 호전적 세력 과시 욕구를 철불 주조에 이용하려 하면서 구산선문에서는 철조비로자나불상 조성이 더욱 일반화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반드시 무쇠로만 비로자나불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가장 흔하게 썼던 화강암으로도 비로자나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는 도 확인할 수 있으니 현재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사에 모셔져 있는 (도판 12)이 그것이다.
갸름한 얼굴과 짧은 목, 둥근 어깨, 앞가슴을 풀어헤친 듯한 이중착의법의 옷매무새, 잔주름 쳐진 옷주름,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 두지를 잡고 있는 정식 지권인과 작은 손 표현 등이 모두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은 이 만들어지는 858년이나 860년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이 불상은 1930년대(1947년이라고도 함)에 해발 900m 높이의 지리산 바위 봉우리에 있던 보선암 터라고 전해지는 절터에서 삼장면 석남리(石南里)에 사는 이성호 형제가 자기 집으로 불신만 옮겨왔다가 1959년경에 내원사로 이안해 모신 것이라 한다.
그런데 1981년에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이 불상의 대좌 속에서 발견했다고 하는 명문이 새겨진 사리호를 구입하면서, 이 불상이 그 명문에 새겨진 대로 영태(永泰) 2년(766)에 조성됐으리라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학술적인 해체 조사작업이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출토물의 명문 내용이 상 양식과 맞지 않으면 의심을 가지고 다각도로 연구 검토해야 하는 것이 정도다. 그런데 파괴된 지 30년 내지 50년이 지난 불상의 대좌에서 사리호가 출토되었다는 비상식적인 사실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성급한 일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