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이 아이답게, 인간답게 자라날 수 있도록 육아와 보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의미있는 변화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야 한다.
근대 사회는 육아와 보육 문화를 생명체로서의 아이에 대한 이해보다는 생명 감수성을 결여한 남성중심적 논리와 경제성 논리에 입각해 구축했다. 그것이 바로 핵가족 육아와 시설보육의 두 형태이다. 아이는 어머니가 직접 기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가정 중심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핵가족 육아는 모든 공동체적 유대를 상실한 근대 핵가족 안에 아이와 어머니 모두가 고립되는 소외된 육아와 보육이었다.
21세기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를 기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기존의 경제중심적·남성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아동과 여성(어머니)의 관점에서 육아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보육 정책의 경제적 논리는 교사 1인이 돌보아야 하는 법정 아동 수, 두 달의 산전산후 휴가 등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보육시설에 적용되는 법정 아동수 지침과 아동중심적인 민간 공동육아의 지침은 1.5∼2배의 차이가 난다. 아동학계에서 제시하는 적정 비율은 만 나이의 3배다. 이에 비추어 보면 보육시설은 36개월까지는 적정 선을 유지하고 있으나 공동육아의 비율은 지나치게 낮다.
공동육아 보육의 특징은 하루 2시간 정도의 나들이이다. 공동육아는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하루 2시간의 나들이는 필수적이라고 본다. 위에서 언급한 지침은 폐쇄 공간에서 아이들을 교사 주도적이거나 통제적인 프로그램으로 이끌 때나 가능한 비율이다. 아이들의 성장생리학적 요구와 창의적인 아이 기르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공동육아의 지침이 적합하다. 법정 지침은 단가를 최대한 낮추어 물건을 생산하고자 하는 경제적 관점에서 결정되고 있다.
열악한 보육시설
21세기에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보육 정책으로 차등보육료 제도와 아동중심적 지원 체계 등을 들 수 있다. 아이의 성장에서 생후 최초의 발달 과제는 세상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 발달 과제는 안정적인 육아와 보육환경, 부모와 보육관련자들의 충분한 사랑으로 성취된다. 사회는 부모나 보호자의 빈곤에서 비롯되는 불안정성의 충격으로부터 아이를 최대한 보호할 수 있는 틀을 갖춰야 하며 이것이 차등보육료제와 아동중심적 지원 체계이다.
우리 사회는 생활보호대상자 자녀에 한정해 차등보육료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이것은 차등 의료보험제처럼 사회 전체적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의료보험제의 부실에서 보듯이, 차등보육료 체제는 전국 단위가 아니라 자치단체 단위에서 실시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한편 많은 보육 종사자들이 열악한 보육 환경 속에서 성심껏 보육사업을 하고 있지만 보육시설의 비리와 부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건복지부, 서울시, 1997년 관악구의회의 보육시설 특별 감사에서 인건비, 보육 아동 수 속임, 장부 조작 기재, 식비나 교재교구비 부정, 부당 잡부금 징수 등 운영 전반에 걸친 재정비리가 드러났다. 감사 관련 실무인력이 절대 부족, 회계 장부만 형식에 맞게 잘 쓰면, 재정 비리는 민원이 없는 한 무리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것.
이같은 지원비를 둘러싼 재정 비리는 시설 보육의 질적 하락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이에 대한 대안은 바로 국공립 시설중심 지원체계를 스웨덴 등 북유럽 나라들이 실시하고 있는 아동중심 지원체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차등보육료제를 기반으로 아동 한 명당 보육료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이는 다양한 형태의 시설이 공과금 혜택이나 시설 보수 지원과 같은 기본적인 공공 지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운영비를 보육료에 의존하는 형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보육료 지침은 최고 상한선을 제시하는 선에서 현실화하고 서로 다른 유형의 보육 시설 중에서 부모가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모가 보육료를 지원받고 보육시설을 택할 수 있으며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 운영비리의 여지는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아동중심 지원체계의 수립은 양질의 보육현장이 보육시설 전반으로 확산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여기에 보육시설의 재정 공개, 부모들의 감사나 부모회의의 정례화, 운영의 투명화 장치가 이루어지면 질적으로 개선될 것이다. 이같은 부모참여는 사회적으로는 부모들의 노동시간 단축 등 경제적 변화를 요구한다.
한편 이러한 보육료의 아동중심 지원은 일하는 여성 지원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동복지적 차원에서 전업모나 초기 유아기 동안 휴직을 택하는 여성의 아동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면 21세기적인 양질의 보육이면서 소득이 없거나 적은 전업모나 파트타임 주부들의 경제 실정에도 맞는, 전업모들의 품앗이 공동육아와 같은 자생적인 양질의 민간보육 현장이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북유럽에서는 이와 유사한 가정보육도 지원받고있다.
둘째로 행정편의적·관료중심적인 보육 정책이 아동중심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수억, 수십억을 들여 지은 보육시설이 주차장은 있으나 모래놀이터가 없고 소음이 심한 대로변에 있는가 하면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공간인 공원이나 그린벨트에 보육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 놀이터가 없고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 상가 빌딩 사무실이 관에서 보는 놀이방이나 유치원의 최적소라는 사실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에 대한 이해를 전적으로 결여한 관료중심 보육행정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셋째로 21세기가 요구하는 창의적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현재의 파행적인 조기교육을 벗어나 아동의 성장생리학적 필요에 부응하는 생활과 놀이·교육이 통합되고 자연친화적이며 사회성 함양에 역점을 두는 생명중심적 보육으로 변해야 한다. 이는 앞에서 제시한 보육 정책들의 변화와 아울러 교사에 대한 투자,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현재 보육교사는 대표적인 여성 저임 직종이다.
정보화시대에 평생 직장의 개념은 사라져 가고 있지만, 육아·보육은 상품 생산과 같이 거듭되는 기술 혁신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보편적인 성장생리를 체득하고 아이 한 명 한 명의 개별성을 감지하여 통합적 성장을 도와주는 성숙한 ‘보육 장인(匠人)’으로서의 어른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보육교사가 혼인과 더불어 그만두는 열악한 직종에 머무는 한, 우리 아이들은 언제나 어설픈 아마추어 보육교사의 적응을 위한 대상이 될 뿐이다.
이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육 교사직을 단순노무직에서 전문적 장인으로 보는 인식의 변화와 아울러 이에 상응하는 급여 인상, 교사 재교육 프로그램 활성화 등 교사에 대한 투자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교사의 재투자 정책 속에서 창의적인 보육프로그램이 각 어린이집에 정착되어야 한다.
여성이 일을 그만 두게 되는 중요한 요인은 단순히 보육시설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양질의 보육시설’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여성이 사회노동을 육아 때문에 그만 두는 근대 가부장적 관습이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아이답게, 인간답게 자라날 수 있도록 육아와 보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의미있는 변화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