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는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당나라의 선문 조사(祖師; 선종의 한 문파를 일으키거나 이의 법통을 계승할 만한 자격을 갖춘 우두머리 선승)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와 선문 개설 자격을 갖춘 선사들을 후원하여 우선 자기 지방에 선문을 개설해 놓은 다음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내는 절차를 거쳤다.
가지산문의 경우도 장사(長沙; 장흥의 옛이름)현의 부수(副守; 부군수)이던 김언경(金彦卿)이 보조선사를 헌안왕에게 추천하여 헌안왕으로 하여금 왕사(王師; 국왕의 스승)로 초빙하게 했는데, 보조선사가 이를 사양하자 왕명으로 가지산에 주석(駐錫; 승려가 산에 들어가 머물러 사는 일)토록 하는 절차를 거쳤던 것이다. 물론 가지산에 터를 잡아 보조선사로 하여금 가지산문을 개설하도록 주선한 것은 이 지방의 실력자 김언경이었다. 이 사실은 (도판 1)의 비문 내용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로 전회의 ‘신라 선종과 비로자나불 출현’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보조선사가 이곳 가지산에서 20년 동안 주석하며 선지(禪旨)를 전파하다가 헌강왕 6년(880)에 77세로 열반에 들자 그 사리탑과 비석을 국가에서 세워주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헌강왕은 그 10년(884)에 보조선사 시호와 함께 창성탑(彰聖塔)이란 탑호를 왕명으로 내리고 묘탑인 부도(浮屠)와 탑비를 세우게 한다. 그리고 남종선의 시조인 6조대사 혜능(慧能, 638∼713년)이 남종선의 본산으로 짓고 살았던 보림사란 이름도 그대로 옮겨줌으로써 이곳이 우리나라 남종선의 총본산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다.
그런데 선종은 보통 양(梁)나라 때 보리달마(菩提達磨, ?∼528년)가 인도로부터 석가세존의 의발(衣; 가사와 발우를 말하며 정법의 법통을 이어가는 상수제자에게 전해주는 상징물임)을 전수받아 중국에 들어와 설립한 종파로 알려져 왔다. 그가 마하가섭 이래 28대조에 이르는 전법제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 선종의 시조가 되니, 중국 선종에서는 그가 가지고 들어온 의발이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에게까지 전수되었으므로 이들을 합쳐 33조사(祖師)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국 선종은 인도로부터 전해 왔다기보다 중국에서 중국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출현한 혁신 이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논리의 늪에 빠진 교종 불교를 건져내기 위해 초논리(超論理)의 방법으로 탈논리(脫論理; 논리를 벗어남)를 시도하여 개혁에 성공한 일종의 개신교(改新敎)인 셈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내세우지 않음)를 내세워 문자로 기록된 복잡한 경(經), 율(律), 논(論)의 논리체계에서 벗어나고 직지인심(直指人心; 곧장 마음으로 터득함)으로 깨달음을 직접 성취하자는 취지였다.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방법을 그대로 본받아 바로 실천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사실 1500여 년 동안 수많은 천재들에 의해 불교 논리가 전개되어 왔다면 그 이론체계가 아무리 극명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자체 논리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 늪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각질화한 껍데기를 생살과 함께 벗겨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 수반되므로 감히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라 대개는 그대로 함께 늙어 죽는 것으로 끝마치게 마련이다. 원시불교가 일어난 중인도나 대승불교가 일어난 서북인도에서 불교가 소멸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부도는 중국식 사당 성격의 건축물
그런데 중국문화권에서는 사계(四季)가 분명하여 아무리 무성한 산천(山川) 초목(草木)이라도 서리 한 번만 내리면 일시에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매해 경험하고 산다. 그래서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복잡한 논리체계라도 필요하다면 일시에 부정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사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중국적인 사고가 과감하게 불립문자, 직지인심을 내세워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사불란한 중앙집권적 절대권 유지라는 중국적 사회관이 만들어놓은 정통사상(正統思想; 올바른 계통만이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과 종법사상(宗法思想; 적장자가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불교에 영향을 끼쳐 의발전수(衣傳授; 가사와 발우를 전해줌)라는 비불교적이고 비인도(印度)적인 법통(法統) 계승법을 수용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선종의 이런 요소들이 선종을 중국화된 혁신 이념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반증으로 작용하게 된다.
종법 이념에 따라 대종(大宗; 큰집 종가), 소종(小宗; 작은집 종가)의 분파를 인정하게 되므로 정통제자와 무수한 방계제자를 인가할 수 있게 되니, 선종의 법맥 체계는 마치 중국의 제왕들이 자제를 분봉(分封)하는 것과 같은 질서를 가지면서 확장되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부터 그 묘제(墓制)도 중국식으로 바꿔 화장을 하지 않고 탑 안에 시신을 그대로 안치했던 것이니, 북송 진종(眞宗) 경덕(景德) 원년(1004)에 도원(道原)이 지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3 제28조 보리달마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단정하게 있다가 돌아가니 후위 효명제 태화 19년 병진(필자주; 무태 원년 무신, 528년의 잘못임) 10월5일이었다. 그해 12월28일 웅이산(熊耳山)에서 장사지내고 탑을 정림사(定林寺)에 세웠다. 3년 뒤에 송운(宋雲)이 서역으로 사신 갔다 돌아오다가 달마대사를 총령(蔥嶺, 파미르고원)에서 만났다. 손에 신발 한 짝을 들고 훨훨 날 듯 혼자 걸어가는 것을 보고 송운이 ‘대사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달마대사는 ‘서천으로 간다’ 하고 이어서 ‘네 임금은 이미 죽었다’ 한다.
송운이 듣고 정신없이 대사와 이별하고 동쪽으로 달려와 복명하니 명제는 이미 돌아가고 효장제가 즉위해 있었다. 송운이 그 일을 갖추어 아뢰자 황제가 묘광을 열어보게 했더니 오직 빈 관에 신발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온 조정이 놀라서 조칙을 받들어 남은 신발을 가져다 소림사(少林寺)에 두고 공양하였다.
당 개원(開元) 15년(727) 정묘에 이르러 신도(信都)라는 사람이 훔쳐다가 오대산 화엄사에 두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처음에 양무제가 대사를 만났으나 인연이 맞지 않았는데 위나라에 가서 교화를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스스로 대사의 비문을 지으려 했지만 겨를이 없더니 뒤에 송운의 일을 듣고 이에 이루어내었다. 대종이 원각(圓覺)대사라 시호를 내리고 탑은 공관(空觀)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시신을 그대로 탑 속의 관에 안치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풍습대로 황제가 직접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우고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있다. 탑호는 곧 묘호(廟號)와 같은 성격이니 탑, 즉 부도를 사당(廟)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조사의 전신사리(육신)나 화장해서 얻은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탑, 즉 부도는 당연히 사당의 성격을 갖는 건축물이어야 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불타의 사리를 봉안하는 솔탑파(率塔婆, stupa), 즉 불탑(佛塔)처럼 층탑 형태의 건축구조를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당 고종 총장(總章) 2년(669)에 세워진 (도판 2)에서 그 형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