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호

‘러브 스토리’ 다시 보기,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김채희의 시네마 오디세이]

  • 김채희 영화평론가 lumiere@pusan.ac.kr

    입력2025-01-08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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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러브 스토리(Love Story)’의 제목 앞에는 어떤 형용사도 붙어 있지 않다. 이 담백한 작명은 “더 이상의 사랑 이야기는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 이야기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선언문처럼 들린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영화, 프랜시스 레이(Francis Lai)의 아름다운 음악 때문에 더욱 생각나는 영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러브 스토리’는 완벽한 전설이 됐다. 잠시 전설의 이면을 들여다보자.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눈밭 위 스킨십 장면. [IMDB]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눈밭 위 스킨십 장면. [IMDB]

    소설 ‘러브 스토리’와 동명의 영화 시나리오를 쓴 에릭 시걸(Erich Segal)만큼 인생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 있을까. 교육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저술가, 방송 해설자, 마라토너이자 편지 쓰기의 달인이었던 시걸은 193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랍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걸은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재능이 꽃핀 것은 고등학교 시절 재닛 수스만이라는 동급생을 보고 반한 이후였다. 시걸과 같은 유대인 이민자의 후예였던 수스만은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제니퍼처럼 피아노를 전공했고,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몇 곡의 클래식을 작곡한 촉망받는 인재였다. 시걸은 그녀에게 고등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편지를 썼다. 그런데 수스만은 제니퍼와 달리 대학을 졸업한 후 파리로 향했고, 시걸도 그녀를 따라 파리로 갔다. 우연히 수스만의 가족들과 만난 시걸은 다양한 삶의 궤적을 지닌 그녀의 가족들을 위해 아버지와는 러시아어로, 어머니와는 폴란드어로, 그리고 할머니와는 이디시어로 말하는 정성을 보였지만 그녀는 그다지 감동받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수스만은 1961년, 가까운 미래에 재계의 거물이 되는 또 다른 고등학교 동창과 결혼했다. 시걸은 신문에서 그녀의 결혼 소식을 접하고 쓰린 마음을 잠시 접어둔 채 축하 편지를 썼다. 그 이후로도 시걸은 간간이 그녀에게 편지로 소식을 전했다.

    에릭 시걸의 두 번의 사랑

    1970년 소설 ‘러브 스토리’를 출간한 미국 작가 에릭 시걸. [Gettyimage]

    1970년 소설 ‘러브 스토리’를 출간한 미국 작가 에릭 시걸. [Gettyimage]

    시걸은 편지 쓰느라 인생을 마냥 허비하진 않았다. 하버드에서 라틴 문학과 그리스비극을 전공해 학부를 우등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예일대학에 조교수로 부임했다. 시걸은 편지 쓰기와 전공 공부를 하는 틈틈이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했다. 고등학교 시절 카약 선수였던 그는 경기 중 심각한 부상을 당하자 코치가 재활 차원으로 권해준 달리기를 취미로 시작했다. 그는 어느새 아마추어를 벗어나 선수 수준에 이르렀다. 시걸은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스무 번이나 연속 참가했으며 2시간 후반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마라톤에 대한 그의 애정은 널리 알려져 1972년 뮌헨,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마라톤 중계방송의 정식 해설진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에릭 시걸이 소설 ‘러브 스토리’를 집필할 때 영감을 준 절친한 배우 토미 리 존스. 영화 ‘러브 스토리’가 그의 데뷔작이다. [IMDB]

    에릭 시걸이 소설 ‘러브 스토리’를 집필할 때 영감을 준 절친한 배우 토미 리 존스. 영화 ‘러브 스토리’가 그의 데뷔작이다. [IMDB]

    ‌마라톤과 꼭 닮았던 그의 편지 쓰기는 1969년 반환점을 돌게 된다. 그해 어느 날, 시걸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수스만에게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130장짜리 러브 레터를 썼다면서 두툼한 원고를 보냈다. 실제 이야기와 친구들의 에피소드 그리고 자신의 판타지를 버무려 쓴 길고 긴 러브 레터가 바로 소설 ‘러브 스토리’였다. 처음부터 ‘러브 스토리’는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쓴 시나리오에서 출발했다. 파라마운트의 경영진은 이 눈물 나는 이야기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양동작전을 펼쳤다. 1970년 2월 3일 시걸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 촬영이 마무리됐다. 그리고 며칠 후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드디어 소설이 출간됐다. ‘러브 스토리’는 2100만 부가 팔려 당시까지 출간된 소설 중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경영진은 소설의 인기가 절정에 달한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에 영화를 개봉했다. 영화 역시 1970~1971년 박스 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소설과 영화가 동시에 성공하자 시걸은 수많은 인터뷰를 요청받았다. 여러 매체에서 ‘러브 스토리’의 에피소드를 말하면서 이야기의 비밀이 한 겹씩 벗겨졌다. 시걸은 하버드 동문 중, 나중에 조지 부시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한 영원한 부통령 엘 고어와 ‘러브 스토리’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한 토미 리 존스와 각별히 친하게 지냈다. 고어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올리버처럼 대학생 때 결혼했으며, 존스는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하버드 풋볼 팀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결혼’, 셀프 결혼식에서 낭송했던 ‘소네트’ ‘풋볼(극 중에서는 아이스하키)’을 매개로 남자 주인공은 그렇게 탄생했다. 시걸은 고어와 존스를 인용했다는 사실에는 말을 아꼈지만 수스만이 영감을 준 것은 순순히 인정했다. 시겔은 수스만이 어떤 식으로 영감을 끼쳤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위해 당신을 떠나든 아니면 죽든, 사랑하는 여자를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당신은 여전히 혼자입니다. 이 순간부터 저는 ‘러브 스토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책에서 제니퍼가 죽는다고 설정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녀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소설과 영화에서 시걸이 자신을 떠난 수스만에게 제니퍼라는 캐릭터를 덧씌워 죽음이라는 복수를 한 탓일까. 수스만은 1974년 이후 시걸에게서 더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로부터 5년 후 남편과 이혼하고 평생 혼자 살았다. 1974년 시걸은 20년 동안 한결같았던 편지 수신자를 드디어 바꾼다. 시걸은 그해, 캐런 제임스라는 아동 도서 편집자와 일 때문에 만나 사랑에 빠져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유부녀였던 그녀에게 자신의 진정한 ‘전공’으로 다가간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 새로운 제니퍼는 남편을 버리고 시걸과 이듬해 재혼했다. 시걸은 마침내 찾은 사랑으로 인해 행복했다. 이 행복에 도취된 끝에 그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1977년 ‘러브 스토리’ 후속작인 ‘올리버 스토리(Oliver's Story)’를 발표해 여전히 ‘러브 스토리’에 취해 있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이다. 이 작품의 태그라인은 시걸이 후속작을 쓴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It takes someone very special to help you forget someone very special (특별한 사람을 잊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러브 스토리’ 보실 분 있나요?

    영화 ‘러브 스토리’ 포스터. [IMDB]

    영화 ‘러브 스토리’ 포스터. [IMDB]

    ‘러브 스토리’는 유서 깊은 뉴잉글랜드 가문의 부유한 ‘와스프(WASP·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 출신이자 하키 선수로 활동 중인 하버드생 올리버와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며 가난한 제빵사의 딸인 제니퍼의 사랑을 담고 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은 그들이 명문대 학생이란 점이다. 지금은 하버드에 통합됐지만 제니퍼는 당시 최고 여대였던 레드클리프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입씨름하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급속히 가까워지고 결혼을 약속한다. 올리버가 극 중에서 아버지를 언제나 “서(sir)”라고 부를 정도로 부자 사이는 이미 소원해진 상태다.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협박에도 올리버는 제니퍼와 결혼을 감행한다.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면서 로스쿨 학비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제니퍼는 꿈을 포기하고 교사 자격증을 따 올리버를 뒷바라지한다. 갖은 고생 끝에 변호사가 되어 살림이 펴자, 둘은 미뤄왔던 아이를 갖기로 한다. 그러나 불임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들른 올리버에게 의사는 그녀가 죽어간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한다. 최선의 치료를 해주기 위해 큰돈이 필요한 올리버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절연했던 아버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갖은 노력에도 제니퍼는 죽고 아버지는 때늦은 병문안을 온다. 아들이 외도 때문에 돈을 융통한 것으로 오해한 아버지는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되고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올리버는 언젠가 제니퍼가 자신에게 했던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병원 밖으로 나와 둘만의 추억이 어린 센트럴 파크로 발걸음을 옮긴다.

    ‘러브 스토리’가 선보인 1970년은 영화사에서 매우 모호한 시기였다. 1960년대 후반은 할리우드의 고답성을 비판하는 뉴시네마 운동이 시작된 시기였고, 1970년대 중반이면 영화는 ‘죠스(Jaws)’(1975), ‘스타워즈(Star Wars)’(1977)로 각인된 블록버스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한편 이 시기는 1960년 후반을 휩쓴 히피와 반전운동으로 인해 사람들이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몰두하던 때였고, 반대급부로 지친 영혼을 위로받으려는 경향도 강한 시절이었다. 어쩌면 ‘러브 스토리’는 1970년 즈음이 아니면 살아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전설적 여성 앵커 바버라 월터스가 당시 가장 인기 있던 TV 프로그램인 ‘NBC Today’에서 “밤새도록 책을 읽는데도 내려놓을 수 없었고, 다 읽고 나서는 흐느끼며 울고 또 울었어요”라고 말한 것은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렇게 소설 ‘러브 스토리’는 순식간에 전설이 됐다.

    그러나 ‘러브 스토리’는 인물과 인물 사이의 관계 설정뿐만 아니라 상대 계급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관습적이며 클리셰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워싱턴 포스트의 게리 아널드는 “‘러브 스토리’는 이야기 안에 진실에 부합하는 캐릭터나 상황, 관대하고 정직한 감정을 표현한 대사가 거의 없다.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완벽하게 저항할 수 없는 감상적인(sentimental) 영화”라고 비꼬기도 했다. 특히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라는 제니퍼/올리버의 대사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005년에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영화사 100년을 빛낸 명대사 100선에서 13위에 오른 이 대사는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의문투성이다. 사랑하면서 왜 사과가 필요 없다고 할까.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에게 사과를 하지 않으면 과연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많은 사람이 이 대사의 진짜 의미와 의도를 궁금해했다.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도 여기에 동참했다. 그녀는 영화 촬영을 마칠 때까지 이 대사의 진짜 의미를 몰랐다면서,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대해 감독 아서 힐러는 다음과 같이 방어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대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완벽하지 않은 모든 사소한 행동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 정신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사과에 관한 변증법이 불러온 파장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음 해에 개봉한 영국 코미디 영화 ‘혐오스러운 닥터 피브스(The Abominable Dr. Phibes)’(1971)의 제작자는 예고편을 내보내면서 원작 ‘러브 스토리’의 대사를 패러디해 “사랑은 못생겼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ugly)”라는 태그라인을 달았다. 이후로도 많은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이 대사는 상황에 맞게 변형되면서 사람들 뇌리에 각인됐다. 2015년에 방영한 TV 시리즈 ‘아이좀비(iZombie)’ 시즌2에서도 “대규모 좀비 발생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A massive zombie outbreak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넣으면서 이 희대의 대사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러브 스토리’는 하버드대에서 최초로 촬영을 허가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기성세대가 ‘러브 스토리’에 열광한 것과 달리, 히피와 반전운동에 경도된 당시 젊은 세대는 이 작품을 퇴행적으로 여겼다. 하버드 학생들은 두 명의 동문(시걸, 토미 리 존스)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 영화를 1970년대 후반부터 신입생 환영회에서 상영하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 그들은 컬트영화 ‘록키 호러 픽쳐 쇼(The Rocky Horror Picture Show·1975)’를 관람하는 방식을 접목해 행사를 다음과 같이 진행한다.

    올리버: 스물다섯이란 나이에 죽은 그녀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아름답고 똑똑했으며 모차르트, 바하, 비틀스 그리고 나를 사랑했습니다.
    신입생 일동 : 그녀가 못생겼다고 말하면 되죠!

    올리버: (로스쿨 장학금을 거부당한 올리버는 학장에게 비꼬듯이 말한다) 학장님, 시간을 매우 아낌없이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입생 일동: 하지만 지갑은 아니에요.

    올리버: (병원 밖을 나서며 아버지를 향해)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
    신입생 일동: 표절자! (올리버는 제니퍼가 앞서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반복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이야기

    영화 ‘러브 스토리’ 명장면. 배우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가 남녀 주인공으로 열연을 펼쳤다. [IMDB]

    영화 ‘러브 스토리’ 명장면. 배우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가 남녀 주인공으로 열연을 펼쳤다. [IMDB]

    세대 간의 시각차를 극명하게 보여준 ‘러브 스토리’는 시걸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줬지만 명예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러브 스토리’는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에 후보로 지명되지만 심사 위원들이 전원 사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결국 후보 지명이 철회됐다. 수석 심사 위원이던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은 “문학작품으로 분류할 수 없는 진부한 책일 뿐만 아니라 후보에 지명된 것만으로도 다른 모든 소설을 모욕했다”라고 공개석상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시걸이 조교수로 근무 중이던 예일대학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이 정년을 보장해 주지 않아 그는 이듬해 학교를 떠나야 했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영화 속에서 제니퍼의 병명이 등장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면서 “도대체 여주인공은 왜 죽은 거지? 매일매일 좀 더 아름다워지는 병에 걸려서 죽은 건가?”라고 꼬집었지만, 작품 평가에서 별 4개 만점을 줬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어떤 관객은 “가장 참을 수 없는 점은 이 이야기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을 철철 흘리는 나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러브 스토리’는 진부한 플롯과 파토스 넘치는 대사 때문에 비평가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장점도 많은 작품이다. 대비와 반전 그리고 아이러니의 묘미가 살아 있는 리드미컬한 몽타주는 편집의 교본으로 쓰여도 전혀 모자람이 없으며, 스크루볼 코미디보다 더 뇌리를 파고드는 제니퍼의 촌철살인의 대사는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세련되게 다가온다.

    제니퍼: 내가 사귀는 사람이 올리버 베렛이라고 하니 아빠는 안 믿으셨어. 그러면서 11번째 계명을 알려주셨지.
    올리버: 11번째 계명? 그게 뭔데?
    제니퍼: 네 아비를 속이지 마라! (Do not bull shit thy father!)


    이 영화는 분명 우리를 속인다. 보스턴의 낭만적인 가을, 뉴욕의 멋진 겨울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배우, 맛깔스러운 대사, 무엇보다 가슴을 울리는 프랜시스 레이의 음악까지 판타지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제목마저 군더더기가 없어 더욱 범접하기 힘든 이 영화를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센트럴 파크의 눈싸움(snow frolic)을 보고 있자면 공간 이동의 마법을 부리고 싶고, 앤디 윌리엄스가 가사를 붙인 테마곡(Where Do I Begin)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것을….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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