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40년 ‘지적 편력’의 종착역, 자립적 자본주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 입력2004-11-16 13: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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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 잔재 청산이나 통일도 중요하지만 한국이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게 현대사의 중심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제성장사를 역사 연구의 주축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나는 경제성장을 이룩하지 않으면 어떤 현대사적 과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기에 경제성장사를 연구의 핵심으로 파악한 것이다.
    내가 연구자가 되기로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는 1960년의 4월혁명이다. 그 이전까지는 고시에 응시해 공무원이 되거나 회사에 취직하려고 열심히 공부하던 가난하고 평범한 농촌 출신 학생에 불과했는데, 4월혁명이 나를 사회에 대하여 눈뜨게 했다. 다시 말하면 4월혁명을 계기로 소시민 생활을 지향하는 인간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정치적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인간이 소시민적 인간에서 정치적 인간으로 한순간에 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변화의 계기는 한순간에 주어질 수 있다 해도, 그 변화를 굳히는 데는 생활상의 변화를 동반해야 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전쟁 이후의 학생운동은 4월혁명이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나의 정치적 각성은 4월혁명으로 촉발되고 학생운동 속에서 성장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류인 학생운동은 1961년의 군사혁명으로 시작된 근대화운동보다 선행했다. 그럼에도 학생운동은 근대화운동이 주어짐으로써 그 방향을 잡을 수가 있었다. 학생운동은 그 자체로서는 제대로 된 ‘국가 건설의 비전’을 갖지 못하고, 기존 정권의 체제적 결함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운동의 주된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 학생운동의 성격은 조선 후기의 민중운동, 식민지하 독립운동의 기본 성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현채 선배와의 만남

    하여간 정치적 인간이 된 내가 쉽게 학생운동에 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니, 학생운동에 말려들었다기보다 오히려 앞장서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그 이전에는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공부밖에 모르던 학생이 4학년 내내 학생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냈다. 나는 모교의 교수가 된 이후에도 나이가 50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 운동에 관여해 왔다. 이른바 ‘민주화운동’이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서.



    그러나 나는 그다지 ‘정치적’이진 못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서 리더의 자리에 있어본 일이 없다. 좋게 말해 운동의 구성원이나 조언자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 운동에 대한 내 관심은 남다른 바가 있어서 항상 이 운동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사람이 운동에 참여하는 방법은 운동의 목표와 방향에 대한 지적 탐구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이 본래 관리나 회사원을 지망하던 나를 연구자로 변신케 했다.

    나는 1962년에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그 무렵은 마침 4월혁명과 군사혁명 직후여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데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4월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격랑 속에서 대학 교원 자리에 많은 공백이 생겼고, 군사정권이 근대화정책을 시작하면서 연구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던 것이다.

    내가 이러한 것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아니지만, 이때에 비로소 연구소라는 게 생기기 시작해서 대학원생에게도 밥벌이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던 해에 고려대학교 아시아문제연구소에 조수 자리를 얻어 3년간 근무했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나는 막연히 연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국의 장래에 대한 것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은 강렬했지만, 막상 어떤 분야를 전공해야 한다는 생각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던중 나는 우연히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의 조수 공모장에서 박현채(朴玄埰) 선배를 만났다. 박선배는 내 인생에 있어 결코 잊지 못할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를 통해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끔 나는 박선배가 나의 인생행로를 바꾸어놓았다고 착각하는 일이 많다. ‘착각’이라고 한 것은, 지금 회고해보면 내 인생행로는 스스로의 생활리듬에 따라 정해졌다는 것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영향으로 나의 학문적 진로를 결정했다면 나는 결코 한국근대사를 전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미친 영향은 나로 하여금 마르크스 경제학에 눈뜨게 하는 데 그친 게 아닌가 한다. 내가 대학원을 마치면서 한국 근대경제사 연구를 지향한 것은 결국 본래의 관심, 즉 한국의 장래에 대한 나의 관심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1965년 11월에 한국경제사 전공으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 한국경제사 전공자로서 발령받으려면 이 분야에 관한 연구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은 아시아문제연구소 조수로 있는 동안 했던 일제시대의 무역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대신했다.

    그후 이 방면에 관한 연구로서는 일제시대의 국제수지와 자본 유출입에 관한 연구가 있지만, 다시 읽어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글일 뿐이다. 국제수지나 자본에 관한 개념도 명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료의 수집과 정리도 너무나 조잡했다. 그래도 그것이 독자들의 주목을 조금이나마 끌 수 있었다면 거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판하는 강렬한 민족주의 의식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주의 연구로 外道

    나의 첫 연구가 그렇게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번도 한국경제사라는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스승 중에도 한국경제사 전공자는 없었다. 당시 한국경제사에 관한 교과서나 연구서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변변한 것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더 나아가 당시의 대학에는 전공을 무엇으로 정하며 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 일정한 관행이 정립되어 있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암중모색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학계의 형편이 그러한 가운데 나의 연구 관심은 일제시대의 무역과 국제수지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민족주의에 관한 연구로 전환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경제사 연구자의 어처구니없는 외도(外道)지만, 당시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한국의 장래에 대한 지적 욕구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단순한 비판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전공은 역사학에 두었지만 한국이 장래에 지향해야 할 국가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가 학문적 관심의 출발점이었다. 지금도 이러한 관심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학문과 현실을 너무 직접적으로 연결해 버렸다는 논리적 결함에 대해서는 변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단재 신채호(申采浩)의 민족주의에 관한 연구였다. 우리나라의 지도적 사상가에 관해 연구해 보면 민족이 나아가야 할 미래가 올바로 설정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해와 단재의 민족주의는, 그 내용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민중적 민족주의다. 그들의 민족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많이 다르지만,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로 크게 변색된 동아시아적 마르크스주의와는 상당한 친화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점이 오늘날 한국에서도 민족주의, 민중주의 및 마르크스주의가 뒤범벅이 되어 대중의 인기를 끄는 까닭이기도 하다. 당시에 펴낸 나의 저서 ‘3·1운동’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사실상 저항적 민족주의다. ‘근대국민국가’를 구상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한다는 성격을 갖는 데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왜 이러한 민족주의가 꾸준히 인기를 얻어왔던 것일까.

    내가 보기로는 식민지 상황에서는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현실을 극복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뤄질 수 없다는 사정이 아시아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그렇게 고정시킨 게 아닌가 한다.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자와 민중주의자들도 현실이 도저히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보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는 것만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는 민족주의자와 민중주의자들의 기대를 외면했다. 나는 1980년대 이래 사회주의 제국의 몰락과 북한이라는 ‘기괴(奇怪) 공화국’의 존재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비판 자체가 미래의 이상적 사회를 보장한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저항적 민족주의를 가진 세력들이 저항운동을 하는 한, 해방이니 민주니 평등이니를 주장함으로써 진보적 계급으로 보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아시아적 전제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우리의 현실인가.

    나는 1980년대 중반 이래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종래의 나의 생각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인식은 미래에 대한 꿈은 현실이 아무리 가혹해도 현실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실천되어야 그 장래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꿈은 공상이지 진정한 미래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관점은 역사학 연구를 하는데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의 역사과정에서 미래를 발견하는 것만이 미래의 현실적 실현을 위한 보장이 아니겠는가. 역사학은 미래의 싹을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과 관련해 한국 근대사 연구에서 크게 문제가 됐던 두 가지의 연구가설이 있다. 하나는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맹아론’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의 ‘민족자본론’이다. 두 가지 모두 매우 중요한 연구분야기는 하지만, 현재의 한국 근대사 연구에서는 동아시아적 민족주의라는 이념에 의해 윤색되어 그 논의가 매우 관념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만약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민족자본론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의 관련 아래 논의된다면 매우 논리정합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사 연구에서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판하는 매개항으로 이용되고 있는 데 불과하다.

    그런 논의의 논리적 결함으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자본과 민족이 아무런 매개 없이 직접 결합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자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어디까지나 자본이고, 민족은 어디까지나 민족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본축적의 조건이 반드시 민족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근대사에서 ‘예속자본’이나 ‘매판자본’ 개념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현상은 결국 학문의 자기파탄을 초래했다. ‘자본주의 맹아론→민족자본론→한국자본주의론’의 논리적 연쇄는 매우 순조로운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여기에 저항하는지 모르겠다.

    한국 근대사 연구는 민족주의라는 강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과거에도, 또 오늘날에도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 근대사 연구가 그렇게 된 데 대해서는 남을 탓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나 스스로 그러한 연구경향을 주도해온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스로의 연구태도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내 전망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이 현실의 역사과정 속에서 점점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새로운 史觀 정립

    나는 한국 자본주의가 외국자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1970년대 말경에는 외환위기로 붕괴되리라 전망했다. 1979년의 10·26사태는 한때 내 전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직후부터 한국 현대사에 대한 나의 전망이 빗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1980년대 초반, 광주학살과 폭압적인 군부독재체제를 겪던 당시에 한국경제의 기본적 취약점인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국제수지도 개선되었다. 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는 이제 더 이상 ‘한국경제의 전망은 없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즈음에는 한국경제가 자립적 자본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에 대하여 국내외적으로 긍정적인 연구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4년 일본 도쿄대 경제학부로부터 객원교수로서 한국경제사를 강의해 달라는 제의가 왔다. 그래서 이듬해부터 도쿄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1985년 말에 도쿄대 경제학부장에게 “올해에는 강의를 하느라고 일본에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가 없었다”고 했더니 1986년에는 도쿄대 정식교수로 발령했다. 그래서 1985년 3월부터 1987년 2월까지 꼬박 2년간 도쿄대 경제학부에서 한국경제사를 강의했는데, 그때의 당혹감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도쿄대에 머물렀을 때만큼 열심히 연구하고 열심히 강의 준비를 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시간에 단 한번도 자신있게 강의를 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일본어로 강의를 해야 했던 까닭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한국 근대경제사 강의 내용이 세계적 보편성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라면 역사 해석에서 다소 비논리적인 점이 있어도 민족주의적인 국민감정에 호소하면 그런대로 강의가 이뤄지지만, 외국인들에겐 그러한 비논리가 통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도쿄대에 있던 2년 동안 가르친 것보다는 배운 게 더 많다. 가장 크게 깨달았던 바는 민족주의를 갖고서는 보편적인 학문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의는 한국에서 준비해간 교재로 했기 때문에 강의에 있어서 나의 학문적 입장이 바뀐 것은 없었으나, 이미 그때부터 종래의 한국 근대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관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관을 전환하는 데 도움을 줬던 세계사적 동향은 한국경제의 자립적 자본주의로의 발전과 사회주의 제국의 경제적 정체였다.

    1980년대 중반이면 누구도 아직 사회주의 제국의 붕괴를 확실하게 전망할 수 없었다. 다행히 나는 한국의 장래에 대한 강렬한 관심 때문에 도쿄에서 사회주의 제국의 지식인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현실을 직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사회주의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이론적 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만남에서 얻은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도 사회주의 제국의 곤경을 통찰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한국의 장래에 대한 내 전망은 결국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한국경제의 자립적 자본주의로의 발전 전망 또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내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전까지는, 한국경제가 제국주의체제에서는 자립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정부의 근대화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도쿄에서 2년간 수집한 현대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여러 정보에 따르면 세계 자본주의체제에서도 저개발국이 자립적 자본주의로 발전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더구나 한국경제는 그러한 세계사적 동향의 중심에 서있었다.

    그같은 인식전환은 진실로 나를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단순한 관념의 전환으로 끝나는 거라면 큰 문제가 될 게 없지만, 만약 내 생활 전반의 전환을 요구하는 거라면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념의 전환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체계와 나의 인간관계의 재정립을 필연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근대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많은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 한국은 선진 자본주의 제국과는 그 발전의 길이 다르다고 하면서도 선진 자본주의가 발전해온 길을 유일한 발전의 모델인 양 가르친다든지,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운운하면서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전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하는 바가 없고, 한국에서는 자립적 자본주의가 현실화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강조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근현대사의 체계를 다시 세우려면 두 가지 인식이 필요했다. 첫째는 한국처럼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저개발국으로서 포섭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오히려 고도성장과 같은, 세계사에서 일찍이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립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길이 선진 자본주의에서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사의 이점

    현대 세계사를 제국주의 시대처럼 이해해서는 안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법 질서는 전혀 새로운 세계질서로서 아무리 약소국가라 해도 선진국이 그 주권을 간단히 유린할 수가 없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비록 경제적으로 저개발국가라 하더라도 경제개발의 내적 능력을 가진 국민이라면 자립적 자본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신흥공업국(NICs)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은 이를 단적으로 실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제국은 기본적으로 자생적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겪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의 19세기 후진 자본주의는 영국 등 선진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발전하기는 했지만, 자국 내에서도 자생적 자본주의가 발전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NICs의 경제 발전은 선진 자본주의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 선진 자본주의를 따라잡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양자는 그 발전의 길이 전혀 다르다. 사람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식민지나 저개발국에서 어떻게 경제 발전이 가능하냐고 반박한다. 경제 발전이라고 하면 으레 자생적인 것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정년퇴임을 앞두고 한국 근대경제사 연구를 위해 다음의 두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는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경제성장사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경제성장사는 우선 통계자료의 정리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배제하면서 한국 근현대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일제시대, 해방 이후를 그 정치·경제 체제 여하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연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갖는 한국 근현대사를 정립할 수 있다.

    둘째는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이론은 전통적인 자본주의 발달사가 아니라 후발성이론 혹은 경제 발전의 안항(雁行)형태론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발전이 선진 자본주의를 따라잡으려는 과정이라면 이같은 연구 방향은 그 타당성이 누구에게나 명백할 것이다.

    강단을 떠나면서 남기는 글이라면 신변잡기류가 제격이라고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나 글이 의외로 무겁게 되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평생을 바쳐온 한국 근현대사 연구 방향이 학계에서 아직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면 고맙겠다.

    한국 근현대사의 연구 방향은 연구자가 현대 한국의 역사적 과제를 무엇으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 가장 큰 역사적 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 연구의 중심을 일제 침략에 대한 비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민족통일이 지상(至上)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통일운동사를 연구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 잔재의 청산이나 민족통일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은 부차적인 문제고, 한국이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게 현대사의 중심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제성장사를 역사 연구의 중심축에 놓으려 할 것이다. 나는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현대사적 과제는 경제성장이 이룩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달성할 수 없다고 믿기에 경제성장사를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핵심으로 파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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